이번의 이광우 목사의 글의 제목은 “개혁주의 신앙과 여성 안수”입니다.

저는 여성안수에 대한 토론에 참가하는 것을 삼갔습니다. 그것은 정말하고 싶은 논의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광우 목사님의 글을 보면서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그것은 이광우 목사의 위력이 매우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뜻 밖에 토론에 깊이가 있게 진행되어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번 뉴스앤조이에 올라온 이광우 목사의 글은 전문적 글쓰기와 에세이를 첨가시킨 흥미로운 글이라 생각합니다. 전문적 글쓰기에서는 자기 사상을 드러내게 되어 있는데, 독단을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글쓰기에서 자기 독단을 감추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독단이 없이 글쓰기를 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일 것입니다. 이광우 목사의 글에도 이광우의 독단이 상당히 많습니다. 반틸 박사(Cornelius Van Til, 1895–1987)는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라는 규정으로 칼 바르트 사상에 대항했다고 봅니다. 결국 이광우의 전제와 고경태의 전제가 같지 않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칼 바르트의 전제와도 같지 않습니다. 이광우 목사는 칼 바르트의 전제에 대한 자세가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먼저 이광우 목사의 글에 있는 전제에 대해서 먼저 제시하겠습니다.

1. “여성안수는 '여성 차별'로 인한 '여성 인권유린' 문제와 깊이 관련돼 있다.”

2. “얼마 전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이 극심한 미국”이다.

3.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담긴 생명·구원·사랑·정의·평화를 땅끝까지 전파하는 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여종'과 '남종'이 함께 손을 맞잡고 힘차게 전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 글이, 늦게나마 예수님의 거룩한 몸인 교회 내 '여성 안수' 문제를 포함하여 '여성 차별'로 인한 '여성 인권유린' 문제 해결의 신선하고 정직한 출발점이 된다면 참 좋겠다” - 이광우 목사의 개인 개념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문장이다. 이광우 목사가 정의한 복음에서는 “죄사함과 영생”에 대한 개념은 밝히지 않았다.

4. “이번 글에서는 '여성 안수'가 '개혁주의 신앙'의 본질과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여성안수는 무엇이고, 개혁신학은 무엇일까? 이광우 목사가 정의하는 개혁신학은 여성안수를 시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여성안수를 시행하지 않았던 개혁교회 시대는 여성인권 유린시대가 될 것인데....

5. “아무튼, 18세기 케케묵은 봉건시대도 아닌데, 전 세계적으로 각 전문 분야에서 탁월한 여성들의 활약이 눈부신 이 광명한 시대에, 세상의 빛이 되어 세상을 선도해야 할 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인 교회 안에서 시대의 흐름에 한참 뒤처지는 이런 글이나 쓰고 앉아 있는 내 처지도 참 한심하고 딱하기 그지없다.”

개론에서 이광우 목사의 전제가 크게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이광우 목사에게 있는 적지 않은 문제적 전제 의식은 “여성 인권유린이 교회, 합동 교단에 있다”입니다. “인권유린”은 사회적 그리고 교회적 위법 사항입니다. 그런데 이광우 목사는 합동 교단이 여성 인권유린을 하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합동 교단이 여성 인권유린은 한 것을 떠나서, 종교개혁교회, 중세, 고대 교회에서 여성 인권을 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뒤에서 나오겠지만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일어난 폐단으로 평가할 수 있겠지만, 교회는 여성 인권을 유린하지 않았습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났다고 착각할 수는 있습니다. 착각에 대한 책임은 당사자에게 있습니다. 꾸준하게 반복하지만 합동 교단이나 고대 교회, 중세 교회, 종교개혁교회는 여성 인권을 유린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사소한 의식이지만 최근 미국에 인종차별이 ‘극심’하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정차별주의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지역차별 등 여러 차별이 존재합니다. 우리나라 정권에서 지역 안배라는 어휘가 나오는 것은 지역차별에 대한 의식이 있음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지역차별의 실제는 증명할 수 없습니다. 진리(眞理)와 정무(政務)는 같지 않습니다. 외교의 미학에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에 있습니다.

셋째, 여성안수 도입을 추진하는 분이 자기 의견과 반대되는 사람을 “케케묵은 봉건시대의 의식 세계”라고 규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대해서 글을 쓰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고 딱하다고까지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글을 쓰지 않아야 했겠죠. 구차한 감정을 표현하면서 에세이도 아닌 전문적 글쓰기를 진행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광우 목사님이 언제부터 여성안수에 대한 현재 의견을 갖고 있었는지가 궁금해 졌습니다. 합동 교단은 1996년에 교단과 총신대학교가 대대적으로 여성안수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이광우 목사는 그 때는 여성안수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갖고 있었을까요? 그 때는 아니었는데, 언제 바뀌었을까요? 아니면 그 때도 지금과 같은 생각이었을까요?

넷째, 이광우 목사의 복음의 요소를 제시할 때에 “죄사함과 영생” 개념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기본이기 때문에 제시하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 고치지 말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또한 이광우 목사가 제시한 복음에 있다는 “생명·구원·사랑·정의·평화”는 구체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포괄적 개념으로 어떤 것을 규정하려는 것은 흑묘백묘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신학계에서 “생명·구원·사랑·정의·평화”에 대한 개념은 너무나 다양합니다. 단순하게 판단해 볼 때에 “성과 속을 구분하지 않겠다”는 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이광우 목사의 성경해석

성경해석은 결코 쉽지 않은 분야입니다. 이광우 목사의 현란한 성경 본문 핸들링도 이광우의 원칙에 근거한 것이며 결코 그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원칙은 “남자와 여자의 동등성”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광우 목사의 긴 성경 해석 제시가 효력이 없는 것은, 이광우 목사도 전제가 다른 해석을 용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 이광우 목사는 “"하나님의 형상 = 사람 = 남자와 여자(한 몸: 공동체성)"”으로 제시하며, 나용화 교수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합동 교단에서 나용화 교수의 글을 인용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광우 목사가 인용한 사상은 칼 바르트의 창조 이해를 답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형상을 남자와 여자의 파트너십으로 전개했습니다.

2. 이것은 상당히 세밀한 이야기가 될 것인데, 아담과 여자가 언제 한 몸이 되었을까요? “남녀 한 몸이자 자신의 형상인 아담 부부를 보시며 삼위 하나님께서 심히 좋아하셨던 것”으로 제시한 문장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광우 목사는 여자 부부라고 말하지는 않는 것도 특이한 현상입니다. 남녀가 동등하다면 남녀를 동등하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남녀’와 ‘녀남’의 사용빈도를 50%로 나눌 수 있을까요? 절대로 나누지 못합니다. 그것은 첫 번째 어휘가 남녀, 녀남의 우선순위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3. 이광우 목사는 창 3:16을 히브리어 평행법으로 연구하면서 “교차 생략된 어휘”가 있다고 추정합니다. 즉 ‘추정’에 근거해서 자기 의사를 결정했다는 증거입니다. 개인의 추정을 받아드려야 할까요? 공적인증해석을 받아야 할까요? 공적인증해석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습니다. 창 3:16에 대한 공적인증 해설은 없습니다. 18세기에 창 3:16을 오석해서 남자가 여자를 차별했고, 천국 시민의 삶이 아니었다고 이광우는 분석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석도 추정일 뿐입니다. 다수 견해이기 때문에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4.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인성人性을 입으시고 '우리 곁에 오심(임마누엘)'으로 모든 것이 변했다. 사탄이 하늘에서 쫓겨났고, 세상의 썩은 질서가 회복됐다. 그분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새 창조' 질서가 세워졌다. 모든 장벽이 무너졌다. 심지어 성전의 휘장도 위에서 아래로 갈라져 남녀 구분 없이 모든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마 27:51, 히 4:16).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여성을 존중하시고 여성들의 굴레를 벗겨 주신 것이다(요 4:1-42 참조).” 이광우 목사의 "대속에 대한 이해"입니다. ‘여성존중’의 전제에서 재배열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광우 목사가 하나님의 성육신에 대한 불명확하게 진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쫗겨났다”는 개념은 상당히 독특하지만, “세상의 썩은 질서가 회복”되었다는 주장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구속은 세상의 썩은 질서를 회복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주께서 택하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여 함께하려는 은혜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이광우 목사는 18세기 교회에서 남녀차별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새창조의 질서는 1세기 사건입니다. 그럼 이광우 목사는 1세기에서 18세기 그리고 지금까지 교회에서 여성의 인권을 유린했다고 주장하는 꼴이 됩니다.

5. 사사 드보라에 대한 해석. 사사 개인에 대한 해석이 아닌 사사 시대에 대한 이해

이광우 목사는 여러 성경해석자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사사 드보라를 긍정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두 번째 모세”라는 표현까지 합니다. 웃고 싶은 표현인데요, “두 번째 모세는 율법의 완성자, 예수님”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사사 드보라에서 드보라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아니라, 사사 시대의 무질서와 무능력을 보아야 합니다. 여성 사역자가 등장한 모티브는 왼손잡이 사사 에훗, 입다, 기드온, 삼손까지 사사의 행적이 기록된 모든 분들은 약점이 큰 분들입니다. 그것은 사사에 대한 긍정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사 시대의 불순종에 대한 책망으로 보는 것이 사사기 후반부의 맥락과 더 어울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즉 사사 드보라가 월등하고 유능하고 위대한 지도자를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야할지를 질문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구하지 않고 왕을 구한 것이 사사기의 결말입니다.

6. “더 가관인 것은 "삼위 하나님 사이에도 '질서'가 있지 않으냐? 성자께서 성부에게 복종(?)하지 않으셨냐?"고 강변하는 한심한 자들도 있다는 점이다.” 이광우 목사는 비평적 글쓰기를 하면서 비판하는 사람 혹은 진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심한 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밝혀야 비판하는 주장에 정당성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 글은 포괄적 글쓰기여서, “관심법”에 해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주장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지칭한다면 전문적 글쓰기가 아닌 이데올로기적 편가르기 수준이 됩니다. 이데올로기적 글쓰기에는 예리한 칼이 아닌 도끼가 필요합니다. 

이광우 목사는 “'삼위일체론'의 핵심은, 성부께서 성자를 이 땅에 '파송'하셔서 성자가 대속 사역을 완성하게 하셨다는 것”으로 제시했는데, "이광우 목사에게 교리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광우 목사의 견해라면 더더욱 이해가 없는 것이며, 어떤 학자의 글인지 사상의 근거를 밝혀야 한데, 교리에 대한 매우 부당한 내용입니다. 저는 "교리 문서에 ‘삼위일체’라는 어휘가 없다"고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참가한 교수님께서 조용하게 저에게 주의를 주셨습니다. - 제 말이 틀려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 제가 그렇게 표현한 것은 ‘삼위일체’라는 어휘를 난발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독특한 삼위일체 개념을 세우고 자기가 규정한 삼위일체로 마음대로 타인과 교회를 재단합니다. 예배도 그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고, 남녀관계도 그렇습니다. 여성도에게 곱게 한복 입힘, 차 심부름, 주방 설거지.. 이해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왜 이광우 목사에게 그러한 현상이 많이 보였는지, 저에게는 그런 현상이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교회에 방문하면 일반식당이나 찻집에서 교제를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합동의 어떤 노회에서는 여전도회의 꽃다발 증정 순서를 폐지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개혁된 모습이 부각되어 영향력을 발휘해야 긍정적 현상입니다. 참고로 꽃다발 증정은 여성인권의 문제보다 교회절서의 문제이며 화의의 효율성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7. “열 두 사도 중에 여자가 없다”에서 “예수님의 임시 선교 전략”이다는 주장은 추정이며 부당한 주장입니다. 12사도에서 남자와 여자를 주장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12는 요한계시록의 24장로와 연결된 신학적 사안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도를 남자와 여자로 연결하는 것은 자기주장을 위한 근거로 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거부에 정당성, 찬성에 정당성... 

이광우는 박영호가 노예제도와 여자 사도의 임시적 성격을 연결한 것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광우 목사의 주장대로 남성 사도 세움이 임시적 선교 전략이었다면, “임시의 기간”은 언제까지라는 것일까요? 그 명시적 기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둘째, 이광우 목사는 예수께서 선교를 위해서 임시적으로 여성 인권을 유린하는 것을 허용했다고 인정하는 것일까요? 임시적으로 불법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예수님께서?? 셋째,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을까요? 노예란 제도에 있지 않습니다. 영혼 문제입니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은 강도(剛度)에서 차이가 있을 뿐 조직 유지에 기본입니다. 노예적 복종을 한다면, 노예제도가 폐지되어도 노예 의식이 있게 됩니다. 노예가 아닌데 노예인 상태가 됩니다. 반대로 노예제도가 있어도 영혼의 자유가 있는 사람은 노예이면서 노예가 아닙니다. 남남간은 평등할까요? 여여간은 평등할까요? 남남, 여여간의 불평등은 문제없고, 남녀 간의 불평등만 시정해야 될 사안일까요?

8. “사도 바울이 말하는 여성상, 그 핵심에도 예수님이 설파하신 '새 창조 질서'의 원칙이 녹아 있고, '남녀 동등성', '상호 의존성'이 바탕에 깔려 있음을, 성경을 정말 정직한 눈으로 깊이 들여다본 이들이라면 함부로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광우 목사의 글을 보면 모욕적 표현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정말 정직한 눈으로 들여다본 이”라고 해서, 자기 주장과 반대되는 사람은 부정직한 사람으로 규정했습니다. 결정도 나기 전에 상대방을 비정직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양심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최소한 무죄추정의 원칙은 준수해야 되지 않을까? 둘째, “남녀동등성”, “남녀의존성”이 바탕에 있다. 전자는 인정할 수 없지만, 후자는 인정합니다. 앞에서 제시했듯이 남녀는 동등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순서가 있게 됩니다. 김씨과 박씨가 혼인해서, 자녀에게 두 성을 하나로 묶어도 ‘김박’씨든지, ‘박김’씨든지 해야 합니다. 그래서 동등, 평등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광우는 박영호의 글을 전적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박영호 사상의 축약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저는 박영호를 1세기에 관련한 좋은 연구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연구자는 제언자이지 확정자가 아닙니다. 학자의 제언을 확정형으로 수납하는 것은 적지 않은 문제가 됩니다. 박영호는 김세윤 교수가 문화적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그런 표현을 했다고 말하는데, 정확하게는 김세윤은 “성경 본문 후대편집”을 주장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김세윤의 핵심을 외면하고 우회적으로 김세윤의 사상을 변호하며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광우 목사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가 여성 안수 반대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광우 목사는 “여자가 주관하다”를 “여자가 독재자처럼 지배하는 자세”로 번역했습니다. 이광우 목사는 성경 원어가 사어(死語)라고 규정했습니다. 사어의 의미를 현대인이 탐색해서 규정할 수 있을까? 사어라는 의미를 모르는 것일까? 사어는 말 그 자체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언어에서 살려낸 의미에서 어떤 정당성을 찾을까? 결국 반틸 박사의 자기 전제에 근거한 해석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앞의 글에서 “반대도 성경적”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그 때는 반대하는 진영도 존중한다는 식으로 이해했는데, 이번 글에서는 ‘비정직’ 등 비인격적 어휘를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9. 이광우는 “여성 안수 반대론자”라고 규정하는데, 합동 교단에는 “여성 안수 반대론자”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반대’라는 것은 어떤 사안을 놓고 논의하는 것입니다. 현재 합동 교단에 없는 여성 안수에서 어떻게 반대가 나올까요? 정확하게 여성 안수 추진하는 진영으로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질서 유지를 고수하는 진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프레임으로 설정하는 것은 현재 질서를 개정하려는 진영에서 합당한 주장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광우는 자기 생각에 반대되는 진영에 대해서 불손한 태도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결정되지 않은 상태인데 이미 결정된 것처럼 자기 양심의 불편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든지 자기절제와 온유와 겸손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상대에 대한 정확한 표현을 해야 하며, 자기에 대한 정확한 인지가 필요합니다. 이광우 목사는 현재 합동 교단의 질서 체계를 전환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그 의도가 언제부터였는가?가 저는 궁금합니다. 억압받은 여성들이 있는데 침묵하는 것이 배려였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복음은 1초의 인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즉각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즉각적이고 진지하게(promptly and sincerely)”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광우 목사가 개혁주의를 주장하려면 최소한 “불의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에 대해서 인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성 안수를 시행하려면 합당한 주장을 피력해서 형제를 설득해야 합니다. 형제를 바리새인, 정직하지 않음 등으로 단죄하는 것은 자기모순에 빠져 “자기의 기만성”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회에는 바리새인은 포함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회의 주동자가 되려는 것은 결국 바리새인의 회의 주동자가 되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10. 이광우 목사는 동성애까지 허용에 대해서 기우라고 평가합니다. 동성애 관행에 대한 성경적 거부가 획일성(일관성)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미 퀴어 신학(Queer theology) 저술이 신학계에 유포되는 속도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한 것일까요? 그런데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여성안수 불허가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외치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광우 목사가 동성애 불가는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외치는 것은 정당할까요? 차이가 없습니다. 여성안수를 허용한 구미 교회들은 동성애 세례 허용에서 동성애 사역자 안수까지 허용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면서 그 지점에 가지 않는다고 확증하는 것은 동굴 속의 탐구자일 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킨다면 전혀 다른 사회로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그 여파에 교회가  미칠 것은 자명합니다.  

11. 이광우 목사의 복음 개념,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 그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에 따라 남성, 여성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차별, 무엇보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종교적·문화적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광우 목사는 복음을 “차별없는 사회”로 규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차별없는 사회로 규정합니다. 그것이 “새하늘과 새땅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새하늘과 새땅”은 미래에 있는 것입니다. 이광우 목사가 미래에 지향점을 두고 있는 것은 정치 신학적 성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새하늘과 새땅"은 현재의 시간과 공간과 다른 영적 개념으로 보아야 합니다. 

12. 이광우 목사는 공수특전단 장교였고, 독도법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좌표는 동일하지만, 좌표를 해석하는 방법은 다릅니다. 현재좌표에서 목표좌표까지 가는 방법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책임장교의 지도 해석과 부사관의 지도 해석이 다를 때 장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교는 당연히 자기 책임으로 부대를 인솔해야 합니다. 무능한 장교의 부당한 지도 해석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광우 목사는 교단의 장교입니다(총신대학교 법인이사). 유능한 장교는 부사관의 의견을 무시해할까요? 장교는 실수하지 않을 확률이 100%일까요? 그는 독도법에서 “신학적 역행군”과 “신학적 순행군”으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전자를 바리새인,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자기는 새하늘과 새땅으로 인도하는 선지자로 평가합니다. 합동 교단에 바리새인과 선지자가 동거하는 것으로 인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무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군대에서 최종 판결자가 장교이지만, 교회에서 최종 판결자는 총회입니다. 그리고 총회는 다수 의견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적 역사적 정당성이 중요한 판단 근거입니다. 이광우 목사가 제기한 다수의 전제는 정통신학에 부합하지 않으며, 현대신학자들의 견해에 부합한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13. “여성 인권 존중. 하나님이 불러 쓰시는 여성 사역자(여종)들이 헌신할 기회를 뺏는다.” 이광우 목사의 표현입니다. 이광우 목사는 인권을 탄압하는 교단에 언제부터 있었을까요?(반복되는 질문). 저는 합동 교단은 여성 인권을 탄안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1세기 교회나 18세기 장로 교회에서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광우 목사는 성경 66권이 가부장적 사회에서 파격적인 평등과 해방을 지향하는 문서라고 박영호의 주장을 반복했습니다. 성경이 사회의 평등과 해방을 지향하는 문서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교회와 사회의 관계... 교회의 역할. 교회가 사회 선도적인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사회를 따르지도 못하고 있으니 마음이 아플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회를 결코 선도하지 못합니다. 지금 사회는 세속화가 선도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 세속화의 뒤를 따른 사회를 따르기에 급급합니다. 그래서 동성애를 수용할 것이라고 예측한 것입니다. 현재 시대정신에서 어떻게 남남의 사랑을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파격적인 평등과 해방을 지향하는 성경 원리에 근거하면 시대정신에 부합하려고 우왕좌왕만 할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성경 원리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룩을 이루며 그의 이름을 전함”으로 생각합니다.

14. 이광우 목사는 교회 질서에 대해서도 부당한 판단에 근거한 독단을 행합니다. 여성 사역자들, 구역인도자, 교사, 전도사 등의 교육 등을 견줍니다. 여성 사역자들의 헌신이 한국 교회에 크고, 지금도 큽니다. 저의 모 교회 설립도 여성 전도사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복음을 위한 헌신이었고, 직분에 대한 요구는 없었습니다. 이광우 목사는 여성 사역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셨다고 단정합니다. 저는 단정할 수 없다고 제언했습니다. 이광우 목사는 어떤 근거로 은사가 있다고 단정할까요? 저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단정할 수 없다고 제언합니다. 알 수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성이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여성 안수를 허용하는 교단이 많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겠습니다. 여성인권을 탄압하는 교단에 속해 있는 것 자체가 모순이지 않을까요? 혹 교단의 질서를 다수의 의결로 바꿔 안수 제도 도입할 때, 그에 반대하는 사역자는 최대 49%가 될 것입니다. 그 바리새인, 비양심적이고, 비정직한 사람과 교단을 함께하는 것이 성경적인 자세일까요?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 두 번 경고하고 떠나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패턴은 나타나지 않고, 그 안에서 투표로 제도를 바꾸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바꾸니 여성인권이 향상되었을까요? 여전히 총대 숫자가 불평등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50%의 총대 지분을 달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교회담임의 50%를 달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여성안수를 통과시키니 평등이 실현되었기 때문일까요? 말씀드렸듯이 시간과 공간에서 평등은 실현될 수 없습니다. 평등은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심에 있습니다. 이광우 목사가 평등을 실현시키는 사람이 된다고 해도 평등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존경이라는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15. 교회는 합리성이나 시대정신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집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복음에 의해서 움직이는 집단입니다. 교회는 1세기 교회, 4-5세기 교회, 중세교회, 종교개혁교회의 역사적 일관성과 연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이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유구한 역사 의식이 있어야 거룩한 공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이상향은 미래에 있지 않고, 과거에서 다시 오실 주님을 현재에서 믿고 기다리며 증언합니다. 남녀동등성, 가부장제도의 남성우월주의는 학문적이고 사회적 가치이며 절대진리 가치가 아닙니다. 남녀동등성을 실현시킬 수 없으며, 가부장제도를 파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가치를 실현시킬 방법으로 적요한 것은 ‘퀴어’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퀴어도 세속화의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적인 새하늘과 새땅이 아닌 더더욱 놀랄 미래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남녀동등성은 실현되지 않으며, 일반 남자는 아이를 낳지 못할 것입니다. 그릇된 원리에 의해서 주장되는 가치의 문제점을 밝히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제도를 수정하려는 측이 합당한 이유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 중에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인권을 탄압했느냐?의 관점입니다. 이광우는 거리낌없이 탄압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교회는 인권을 탄압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합동 교단은 주께서 인정하는 교회(교단)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성인권을 탄압한 교회나 선배 사역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광우 목사는 여성인권을 탄압하는 교단에서 여성인권이 실현되는 남녀동등성의 교단으로 개혁하려는 것입니다. 두 전제의 차이는 이광우는 “합동 교단은 현재 여성인권을 탄압하고 있다 혹은 18세기 교회는 여성을 억압했다”이고, 고경태는 “합동 교단이나 1세기부터 교회는 여성인권을 탄압하지 않고 있다”입니다.

※ 여자 문맹률에 대해서 가부장제의 폐해라고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난 여성도님들이 아버지가 자기에게 글자를 가르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힘들 때 편지하지 말고 잘 살라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힘들어도 혼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라는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힘든 혼인 생활을 어렵게 견뎠다고 합니다. 이것이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라고 볼 수 있지만, 여성의 권익이 높아졌다는 현재 사회는 이혼과 미혼이 급증해서 사회 존립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우리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초고령화사회가 도래할 것입니다.

※ “사랑하는 예장합동 교단의 목사 장로님들이여”으로 이광우 목사는 자기 의견에 반대되는 사람에게 “여성 안수를 끝끝내 반대하는 이들이여”라고 갈라치기를 합니다. 상당히 비신사적 표현입니다. 그리고 반쪽 진영에 심판을 외치는 매우 부당한 표현까지 합니다. 합동 교단은 양쪽이 있겠지만 한 형제로 한 교단입니다. 자기 견해에 반대하는 진영을 “꼰대적 생각”으로 규정합니다. 여성의 잠재력을 발휘할 것을 왜 막습니까? 그러나 신학적 분야에서는 신학적 소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며, 교회의 일치성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합의이혼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부부가 일치되지 않아 이혼을 결정할 것인데, 이혼이라는 테마에서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뜻에서 일치하면 이혼할 수 없습니다. 일치하지 않으면 이혼할 수 있는데, 이혼이라는 테마에서 일치함을 거쳐 이혼이 되는 구조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사회에는 합의이혼이 있습니다. 30년전 교회는 이혼한 성도에 대해서 권징하며 직분을 주지 않았으며, 정직시켰습니다. 여성안수도 매우 미묘한 신학적 함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학적 전제가 다르면 다른 해석이 나오는 것이며, 교회의 부당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거룩성을 훼손할 수 없습니다. 그 묘수를 여성안수를 주장하시는 분들이 밝혀주시길 바랍니다. 자기주장에 반대된다고 단죄하지 마시고, 교단이 여성을 억압하다고 단정하지 말고, 교회에 대한 존중과 형제의 도리를 따라서 자기 주장을 합당하게 밝혀주시면 좋겠습니다.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참고] 이광우 목사의 글 "개혁주의 신앙과 여성 안수"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4636

<저작권자 © 리폼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리폼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