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와 삶을 연결하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교리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교리의 목적은 교회를 세우는 것과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교리로 교회를 세우며, 교회에 문제가 발생할 때에 교리로 일치를 이룹니다. 그리스도의 삶에 교리가 어떻게 작용될까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특이한 점이 많은데, 그 중에 혼인을 신앙고백서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24장에서 “혼인과 이혼”에 관해서 고백합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작성하던 시기에 왜 혼인과 이혼의 규범을 공적문서에 포함시켰을까요? 이해가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고백서를 우리 상황에 적용하면, WCF에 의하면 동성애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부당하게 됩니다(WCF 24:1). WCF는 한 남자가 한 아내를, 한 여자가 한 남편을 취하도록 고백합니다(WCF 24:1). 신앙고백서에서 혼인에 대한 이해는 혼인 성립에 대한 고백이며, 혼인의 파괴, 이혼에 대한 고백이며, 혼인의 진행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고백이 없습니다. 즉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리와 삶이 어떻게 연결될까요? 저는 교리는 삶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설교도 적용을 배려하는 부분이 있지만, 설교는 삶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를 바라보고, 그 분만을 의지하도록 권면하고 촉구하며 격려하는 내용이 복음적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의 내용이 성도의 삶을 구체적으로 핸들링하는 것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할 시간에 삶을 성찰하는 이상한 구도가 발생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로교 원리에 의하면 성도의 삶은 장로가 돕는 것으로 질서를 세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심방을 통해서 장로가 성도의 삶을 성찰하며, 복음과 삶의 관계를 관찰하며 함께하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장로교에서는 교회가 성도의 삶의 깊은 곳까지 성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장로는 성도의 영혼 상태를, 집사는 성도의 재정 상태를 돌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목사가 복음 설교 시간에 성도의 삶에 대해서 터치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입니다.

우리는 언어 행위에서 병렬로 놓는 것에 대해서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지만, 언어가 인간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교리와 삶”,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칼 바르트는 “성경과 신문”을 병렬로 놓았습니다. 저는 두 가치가 성격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병렬로 놓은 것이 부당하다고 제언했습니다. 성경은 특별계시 영역이고, 신문은 일반계시 영역입니다. 두 계시 신학 개념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그 병렬 배치에 대해서 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신학화가 명확하게 형성되지 않으면 신학 개념이 의식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교리와 삶”도 유사한 패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리는 특별계시 영역입니다. 삶은 일반계시 영역입니다. 그리스도인(특별한 은혜를 받은)이 일반 은혜의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관계를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으면 칼 바르트가 형성시킨 “한 계시 체계”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칼 바르트의 글에는 삶이 매우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삶 속에서 계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강단에서 복음이 선포되는 구조입니다. 바르트도 선포된 말씀이라고 해서 설교를 강조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때도 바르트는 삼중성을 말하는데,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선포된 말씀의 삼중성으로, 계시, 성경, 설교를 병렬로 놓고 있습니다. 우리 사역자는 누구도 설교와 성경을 같은 권위나 유사한 성격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르트는 동일한 성격(삼중성)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른 성격이라면 삼중성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리는 삶과 병렬 관계가 아닙니다. 교리는 교리이고, 삶은 삶입니다. 교리에 잘 훈련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가치를 이루면 복된 것입니다. 우리는 교리에 잘 훈련된 그리스도인이 삶에서 부당한 가치를 이루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WCF에서는 매우 심각한 고백을 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눈에 보이기에는”라는 고백을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음으로 신학의 기본은 ‘겸손’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최종적 판단의 자리를 주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게되면 사람은 그 최선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완전한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직임으로 인해서 그 판단을 수행해야 합니다.

교리로 교회 세우는 일에 전력해야 합니다. 삶을 거룩하게 세우는 일은 주의 말씀을 듣고 지킴으로 이룹니다. 성도의 거룩한 삶 이룸에 돕는 조력자가 치리장로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일을 이루지 않고, 언제나 사람과 협력하여 일을 이룹니다. 누구도 스스로 거룩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삶은 관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사람의 관계성 형성을 지향하지 않고 주 예수를 믿으며 의존하며 의뢰하는 삶을 삽니다. 그 믿음의 삶에서 이웃과 화평과 평안의 삶을 이루어 갑니다.

일반 영역에서 이론과 실재(theory and reality)를 구분합니다. 교리와 삶은 이론과 실재와 질적으로 성격이 다릅니다. 교리를 연마함은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것을 목표합니다. 교리 연마가 거룩한 삶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훈련은 한 방향이지만 두 방향의 결과를 산출시킵니다. 육적 훈련은 한 방향에서 한 방향의 결과를 도출시킵니다. 육적 훈련에서 영적 유익을 산출할 수 없지만, 영적 훈련에서는 육적 유익을 산출할 수 있습니다. 그 육적 유익은 선한 행실을 수행하는 것입니다(마 5:16).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형람서원)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형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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