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산다는 것.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 가운데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는 말이 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부모는 부모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말이다.  군왕에서 부터 민초에 이르기 까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 하여 지팡이로 땅을 치며 격양가(擊壤歌: 악기 대신 지팡이로 땅을 치며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것)를 부른다면 이를 우리는 태평성대라 부를 것이다.  인류사에서 이런 태평성대가 있었던가? 토마스 모어 가 쓴 '유토피아'의 책속에서나 나올법 할 뿐이다.  중국사에서 '요순(堯舜)시대'를 흔히 태평성대라 일컫는다. '擊壤歌'란 말도 이 때 나온 말이다. 이제 군왕의 시대가 지나가고 자유와 평등 양축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 민주주의를 구가하는 시대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1948년 대한민국이 탄생한지 칠십여성상이 흐른 지금 우리는 어느 만큼 자유와 평등을 노래하고 있을까?  오늘의 대한민국만을 보고 판단하려 하지말고 바로 38선 너머의 북한을 보라!  대명천지 현대문명을 최대치로 누리고 있는 자유 대한민국과 달리 김일성일가의 일당 전제국에서 신음하고 있는 북한 인민들은 인간의 기본적 인권을 천부의 권리로 누리며 현대문명을 유감없이 누리고있는 대한민국과 달리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자유 문명이 철저하게 차단된 '인의 장막'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곳엔 사회평등을 말하고 있으나 지금 김일성 일가(一 家)는 지존한 가문으로 현 김정은이 '민족의 존엄자'가 되어 있고 북한 인민들을 기막힌 술수와 갈라치기로 신개념의 신분사회인 항일운동의 후예, 조선시대의 최 하층민, 그리고 소위 지주계열과 일제 앞잡이 후예, 남한에서 월북한 자등으로  구별하여 신분사회를 만들었다고 들린다. 북한의 김일성일가와 그의 추종자들은 인민의 평등을 말하면서 조선 왕조 전제국으로 회귀하여 김일성 일가에 맞는 신개념의 신분사회를 만들었다. 그러고도 '조선인민 사회 민주주의 공화국'이라 공포하고 있으니 소가 웃을 일이다. 헌법으로 신분사회를 타파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비록 법과 제도적으로는 신분제도가 없다 할지라도 토양적으로 자생적으로 가진자들의 갑질이 기승을 부릴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진자들에 의한 신개념의 신분제의 갑질은 엄존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며칠 전 여당 국민의힘 당대표를 선출하는 자리에서 여당 제일당원인 윤석열 대통령의 당원들을 향한 그의 장문의 연설은 그 어느때보다 힘이 있고 당당해 보였다. 한치 앞을 알수없는 안개속 같은 정국에서 국힘당 당원들을 향한 그의 멧세지에는 흡사 북한 김정은에 버금가는 도그마가 물씬 서려있었다. 어찌보면 그는 지금 사면초가 "(四面楚歌 :중국 楚나라의 항우가 漢나라 유방군사들에게 포위당한 채 밤이 깊어지자 사면(四面)을 에워싸고 있던 한나라 군사 진영에서 애곡간장을 태우는 '초나라의 구슬픈 노래 가 들려오므로 이 노래를 들은 楚나라 군사들은 자기나라가 漢나라 軍에 항복한 줄로 알고 모두 전의를 잃어버리자 이를 본 항우와 그의 부인 우미인은 자결하였다)는 고사(古史)가 있지만, 그 날 내가 본 그의 당당함은 사면초가가 아닌 마치 "역발산기개세' 처럼 보였다. 허공을 치듯 하는 허장성세가 넘쳐 보였다. '역발산 기개세' 즉 풀을 뽑듯 산을 뽑아 던질만한 기개를 가졌던 불세출의 영웅 항우가 야산에서 서식하는 댕댕이 넘쿨에 비유되는 한낱 비적 출신 유방에게 걸려 넘어졌다. 산을 뽑아 올릴만한 기개도 좋고 군웅이 할거하던 혼탁한 로마에서 일세를 풍미한 대 풍운아 안토니우스의 기상처럼 호방한 것도 좋으나, 기왕 검찰에서 몸을 일으켜 일국을 일신할 웅지로 몸을 일으켰다면 혼탁했던 로마를 평정하고 '팍스대로마나' 를 세운 '옥타바아누스'가 될 대정치가가 되려는 비젼을 지니시라! 비록 호랑이는 못 그려도 일반 서민들의 애환을 들을 줄 아는 섬김의 지도자가 이제라도 되어 보시라!  당신은 언감생심 꿈도 못꾸었던 무소불위의 자리를 차라리 재야에서 서민 변호사로 있었더면 참 좋았을 문재인에게 발탁되어 대통령까지 되시지 않았는가! 부디 소아를 버리고 두번다시 없는 주어진 날 동안 국리민복을위해 유종의 미를 거두시라! 부디 순한 귀를 가져 주시라!

요즘 경제가 "코로나 때 보다도 더 힘들다!"고 들 말한다.  대통령이란 직함이 말하듯 나라살림 전반을 살피는 참 막중한 자리다.  지난 세기 박정희 대통령은 그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나라살림을 아주 용의주도하게 이끌어 오늘의 경제대국 '팍스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이 중국처럼 땅덩이가 커서 대국이 된 것이 아니라 당시 박대통령은 나라의 방향성을 꿰뚫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백절불굴의 정신을 국민들의 심지에 불을 지폈다.  그래서 오늘의 경제대국을 만들었는데 지금 윤정권은 국민들의 창의성을 열어 이를 뒷 받침할 나라의 혈맥인 言路를 官治하려는 참 치졸한 월권을 획책하고 있다. 言路가 살아야 나라가 바른 길(正道)를 가는 법이다. 통수권자는 그 어떤 말도 듣고 소화 할수 있는 귀 '耳順' 을 가져야 한다. 나라의 장래와 현재의 정책을 펴는 통수권자의 바른 길과 잘못을 지적하면 이를 거울로 삼아야지 바른 말하는 言路를 통제하겠다니 참 어이가 없다.  나라를 잘 이끌어 가는 비결은 언로를 활짝열어 두는데 있다. 어진 대통령이 되시려면 항상 시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라.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핵은 바로 언론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조선 숙종 때의 거유 우암 송시열은 임금과 신하가 나랏 일을 말함에 있어 바른 말을 서슴치 않아야 한다고 했다. 송시열은 그의 나이 팔십 일세 때 "임금이 발라야 나라가 나라가 바로 된다"는 직언, 즉 "여든 한살 된 늙은이가 임금에게 한 말 한마디가 죄가 되어 만경창파가 일렁이는 이곳까지 왔다. (八十一歲翁 一言爲 大罪 蒼波萬里.)라는 글이 전남 노화島란 섬에 가면 이 글을 새긴 '글쓴 바위'가 있다.

언로(言路)는 나라의 혈맥이다.  내가 수년 전 정맥에 피떡이 생겨 길바닥위로 쓰러질뻔 했는데 병원에서 가까스로 살아 났었다. 이처럼 나라의 동맥인 言路가 막히면 나라가 병든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였던가? 민노총의 불법적 파업이나 물류 대란을 과단성 있게 척결한 것에 대하여 나는 그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 적이 있었다.   과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전 문재인 정권이 촛불집회로 정권을 창출한 배경이 민노총이었고 그 민노총이 그 댓가로 나라 권력의 지분을 요구했다고 들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참 소가 웃을 일이다. 나라를 이끌어 가는 것을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여야가 대한민국을 헌법의 틀에 맞게 순리를 따라 나라의 현안을 열어가는 것이다. 크게는 나라를 그리고 당장은 내가 몸담고 있는 일터와 단란한 가정을 위하여 마치 다정한 부부가 가정을 꾸려 가듯 나라 살림을 이끌어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가정의 바탕은 사랑과 믿음으로 서로가 하나가 되어 가정을 꾸려가는데 국정은 여야 위정자들이 국익을 위한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여야가 최대치의 국가 이념을 창출해 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서로 이해가 층돌된다면 삼권분립(三 權分立) 에서 보듯 서로 견제와 균형으로 나라 살림을 이끌어 가야하는 것이 정당정치에 의한  법치이자 삼권분립의 핵심이다. 촛불 집회로 소위 보수정당의 박근혜 정부를 타도하고 민노총의 지지를 받아 들어선 문재인 정권은 혁신적 개혁을 전면에 내세웠으나 문재인의 무능으로 빚갈 좋은 개살구처럼 구호에 그치고 그 댓가로 보수정권에게 패하고 말았다. 원래 문재인은 대통령으로서의 역량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그릇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집권하자마자 헌법개정초안을 공포했는데 그 헌법초안이 마치 북한 인민공화화국 헌법을 보는듯 했다. 그 헌법에는 히나같이 자유(自由)라는 용어가 빠져 있었다.

그는 평범한 변호사로 머물렀어야 했다. 자신의 역량과 국민들의 열망에 부응할 국가관의 정립도 없는 그를 민노총은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문재인을 선택했고 문재인은 이에 등떠밀려 윤석열 현 대통령처럼 무소불위의 자리에 앉게되었다는 것이 내 소견이다. 이는 나라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불행이다. 현 윤정권에서 민노총은 그 때의 향수에 젖을 때가 많을 것이다. 윤정권 초기 민노총에 의한 물류대란 때 윤대통령의 쾌도난마처럼 강제해산의 용단은 답답했던 내 가슴을 뻥 뚤어 주었다. 언제부터 민노총이 경제가 아닌 정치에 집착해 왔었을까? 서구 문명의 역사로 돌아가 보면 자본주의내지 사회주의란 용어가 있으면서 부터다. 과문(寡聞)인지는 모르겠으나 들리는 말에 의하면 민노총에서 간부가 되면 곧 바로 '좌식계급'이 된다고 한다. 그 간부는 민노총 노른자 위에 앉게되면 즉 勞使를 아우르는 간부가 되는 순간 그자리가 철밥통이 되고 그리고 대물림을 할수있다고 한다. 이를 아시라 송충이는 솔 잎을 먹어야 한다. 옛날 고려시대 때 망이 망소가 "왕후 장상의 씨가 때로 있느냐?"며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고려시대는 조선 사대부 시대와 달리 신분사회가 아니었지만  그러나 문인들이 나라의 정치를 독점하였는데 무인들은 대부분 평민출신으로 문맹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좌식계급이된 문신들의 횡포가 나날이 더해지자 참다못한 무인 '정중부'가 난을 일으켜 마침내 '무인시대'를 열었다. 정중부는 나랏 일을 독점하여 점차 초심을 잃고 이권 챙기기에 급급하다가 결국 멸문지화 를 당하고 말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정권을 탐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 그래서 영국의 '액톤 경'은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며 절대적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역설 했다. 이처럼 인간들은 인간의 분수나 도리를 멀리하고 세상 권세나 물욕을 탐하다가 결국은 비참한 최후를 맞을 때가 참 많다. 그 와중에도 자기변명은 왜 그리도 많은지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듯 인간의 근본을 잃어버리는 순간 모든 것을 다 잃게 된다. 민노총의 간부는 결국 회사 중역회의에도 참여하여 좌식 계급이 되었다. 이는 노동운동의 배경이나 취지의 근본과 얼마나 거리가 먼 얘기인가? 특히 민노총의 간부들은 노동자로서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회사의 중역 운영권에 더 관심이 높다고 한다. 그래서 노동의 현장에서 땀 흘리는 쁘롤레따리아보다 좌식 계급들의 자리를 더욱 탐 내어 결국 철밥통이 된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땀에 기대어 신성한 노동운동을 흐려 놓음으로 노동운동의 근본을 훼손하는 좀벌레들이 되기 싶상인 것이다.  검 판사든 노동자든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나 대통령이 되었다고해서 섬김의 본분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이다. '人間'이라는 단어가 人間의 숙명을 말해주듯 인간의 본분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이다. 사회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 누구에게 있을까? 가정에는 부모에게 있듯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는 데는 국가권력의 중심에 있기에 나라의 흥망성쇠가 대통령에게 있고 가진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가진 것이 없으면 모든 것에서 자유롭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바램일 뿐이다.  

김건희 여사를 보시라. 주식투기 사건과 명품백 사건등 의혹에 대한 조사를 '법 앞의 평등'에 맞지않게 영부인이라는 이유로 길게 끌어 오다가 서울지검으로 가지 않고 김건희여사가 원하는 제3의 장소에서 조사를 받은 것에 대해 검찰로서 평생동안 법평등 실현을위해 살아온 삶에  흠결을 내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이처럼 김건희 여사에 대한 윤대통령의 배려는 참 대단하다, 검찰총장을 패싱 즉 따돌리고 검찰청이 아닌 제 3의 장소에서 김건희 혐의에 대해 조사한 이창수 서울 중앙 지검장의 누누한 해명에도 검찰 내부에서 조차 비판이 일고 있다. 대통령실은 입이 열이라도 할 말이 없을 법한데  검찰총장의 "김여사 조사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발언에 대해  대통령실은 "검찰 내부의 문제"라 했고, 유승민의원은 "尹은 사람게는 충성하지 않지만 김건희에겐 충성하는 희대의 잘못된 사랑꾼"이라고 꼬집었다. '김건희여사 명품백’ 수사팀의 담당 검사가 사표서를 냈다고 한다. 검찰총장 '패싱' 조사 뒤 해명에 나선 이창수 서울 지검장에 대하여 검찰 내부서도 비판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원칙이 없다"는 발언에 대해 '부글부글' 끓는다며 김여사 조사 장소는 '경호처 교육원으로 김여사 측에서 정해 놓고 검찰에 알려왔다고 했다.  

우리민족은 5000년 동안 일천번 이상의 침범을 당하고도 들풀처럼 오늘에 이르렀다며 민초와 같은 자영업자들에게 25만원이라도 주자는 주장에 대통령은 "왜 25만원이냐!  차라리 일억원씩 주지!" 라고 비아냥 했다고 한다. 참으로 정치의 무지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민중들과 대면할 때면 경호원들을 뒤로 물리고 민초들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 가 그들의 생생한 소리를 들었다.  지금의 윤석열 대통령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모기는 산을 짊어질수 없고 작대기는 큰 집을 버틸수 없다" 이 황.

【종그니칼럼】산다는 것.

날마다 요양원에서 버려지는 음식 쓰레기가 너무 많아서, 그것을 모두 퇴비로 만들기는 어렵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절반 정도는, 음식 쓰레기로 버려진다. 퇴비는 모든 식물들의 자양분이다.  모든 동식물들이 죽으면 왔던 곳으로 돌아 간다. 이것이 대자연의 원리다.  그래서 나는 음식 쓰레기를, 일년내내 삭히고 썩혀서 만든 거름으로, 고추, 상추, 수박,  참외, 토마토, 도라지, 무우, 배추, 그리고 아로니아를 가꾼다.  춘하추동으로 순환하는, 자연의 섭리를 따른 농사는,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먹거리를 만들어 준다. 농작물은 비단 거름만 먹고 자라는게 아니다. 농부의 땀과 정성을 먹고 자란다. 먹거리를 따는 즐거움은, 말할수 없이 크다. 여름 상치를 심기 위해, 일년 동안 잘 썩힌 거름을 넉넉히 뿌리고, 이랑을 만들어 비닐을 씌워 두면,  더위에 땅이 푹 삭혀져서, 기름진 땅이 된다.  이 때 상추 등 푸성귀를 심으면,  싱싱하게 자란다.

여름엔 덥다지만, 근년들어 더워도 너무 덥다.  40도에 이르는 한낮의 더위를, 연초록 연약한 잎새들이 용케도 버텨내는 비결이 뭘까? 불꽃처럼 따가운 한낮의 태양 열을, 온 몸으로 받고도 타지 않고,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대자연이 신비롭기만 하다. 삼복 더위 한낮의 열기는, 그늘 아래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흐른다. 그러나 상치처럼 연하고 얇은 잎새가, 한 여름 그 모진 불 볓을 견뎌내며 자란다. 풋 고추로 먹는 아삭이 고추 역시, 타는 듯한 태양열에 그 싱싱함을 잃지 않고 자란다. 이처럼 대자연의 생성의 원리가 실로 경이롭기만 하다. 농작물은 한 더위에도 사람의 손을 타야 잘 자란다더니, 엇그제는 수박을 무려 열 세통을 땄는데,  보고만 있어도 흐뭇하다. 우리 요양원엔 입이 많아서 참 좋다.   이른 아침 새벽 예배를 마치고 밭으로 나가, 백 오십 여명의 요양원 식구들의 먹거리인, 상추와 풋고추 그리고 참외를 따는 즐거움이, 아주 쏠쏠하다.

지금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가 어떻게 보이는가? 미래는 오늘을 살아 온 삶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3살 된 어린 딸을 둔 어느  엄마가, 어린 딸이 '어린이 집'에서, 장래 희망에 대해 들었는지, 엄마에게 “엄마! 엄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라고 묻길래, “글쎄, 난 엄마가 될 거야.”라고 대답하자, 아이는 곧 바로 항의하듯, “엄마는 이미 엄마 잖아요? 진짜 뭐가 되고 싶냐고요?.”라고 다시 다그쳐 묻길래, “그럼 선생님이 될 거야.”라고 말했더니, 아이는 “이것도 안 돼요. 엄마는 벌써 선생님이잖아요."라는 말을 듣고서야,  엄마는 비로소, 자신이 내일이 없이, 현재만 바라보며 살고 있을 뿐, 꿈이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자기 삶의 현 주소를, 세살배기 어린 아이를 통해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엄마, 아내, 선생님 외에는, 정신없이 살아왔던 것이다.

몸에 밴 생활 습관이 익숙해져서, 어제 일을 판박이처럼 되풀이하며 살다 보면, 삶의 의미나 가치를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이게 바로 현대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요양원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노인들 역시, 삶 전체가 타성적이고 의존적이다.  그래서 이분들은 날짜의 개념이 거의 없다. 눈 동자에 생기도 없고, 얼굴엔 삶의 희노애락도 지워져 있다.  언제부턴가 서서히, 홀로서기를 잃어버리고 바보가 되어 간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드물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도 있고, 이치에 맞는 얘기를 하는 자아를 잃지 않는 이도 있다. 요양원에서 길들여져 살아 온 의존적인 삶이, 필경은 개념없는 삶이 된 것이다.  현대인들의 삶도 자세히 살펴보면, 이와 별반 다를게 없다. 개미 쳇바퀴 돌듯, 판박이처럼 반복되는 삶이, 지루함을 만들어, 삶의 희열과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요양원 노인들이 생기를 잃은 것은, 가족 곁을 떠나 대부분 실내의 틀에 갇혀 생활이 단조롭기  때문이기도 하다. 같이 지내고 있는 이들 대부분이 중병이거나, 의사 소통이 힘든 치매환자여서,  생기가 있을리 없다. 물론 간혹 지각을 잃지 않은 이도 있다.  그래서 몸은 원내에 있지만, 맘은 옛날 활동하던 곳에 머물러 있는 이도 있다. 그런분은 대개 원내 적응이 어려워, 끊임없이 크고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자녀들도 감당이 안되어서, 이곳에 와 있는데, 미래에 대한 무슨 희망이 있겠으며, 무슨 내일이 있겠는가? 이것이 인생 끝자락에 서 있는 현대인의 말로(末老)의 단면이다.

어떤 사람이 아파트 열쇠를 잃었다며, 가로등 아래에서 열쇠를 찾고 있자, 지나가는 사람도 열쇠 찾는 일에 동참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열쇠 잃어버린 것 맞아요?” 라고 물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이 엉뚱하다.  정작 잃어버린 곳은 이곳이 아니라며 대답하기를, “가로등 밑이 밝아서 찾기가 제일 좋잖아요?” "편하고 쉬운 것," 바로 현대문명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의 자화상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한 환경에서도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며,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러기에 어떠한 환경이나 여건에 구애받지 않는, 슬기를 잃지 않는 삶이 곧 '신앙'인 것이다.  

옛말에 여자의 일생을 삼종지도(三從之道)라고 했다. "어려서는 부모를 따라 살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따라 살고, 늙어서는 자식을 따라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은? 그래서 성경은, "나를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자의 뜻을 따라 살다가, 그분에게 로 가는 삶이, 곧 하늘 나라다." 그럼 그 삶이 무엇일까? "높이 되려거나 첫째가 되고 싶거든, 먼저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하늘 나라는 높고 낮음을 따지는 곳이 아니다. 높고 낮음을 따지는 곳은 이 세상이기에, 이 세상에서는 모든 불의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하늘 나라는, 자신을 가장 낮추며, 이땅에 오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나라다.  그래서  교만과 욕심으로 가득한 사람들은, 결코 갈 수 없는 나라다. 그 나라를 지향하는 우리는 과연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 힘겨운 상황에 부딛치고, 모든 게 장애물로 느껴질 때, 단 1분도 견딜 수 없다고 느껴질 때, 그때야 말로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라! 바로 그런 절대절명의 기로에서, 상황은 바뀌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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