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題 二, 중국은 우리에게 어떤 이웃인가?

우리가 어느 한 시대의 인간(人間)으로  살아가면서, 인간의 굴레와 도리(道理) 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있을까? 인간(人間)이란 단어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함을 말하고 있듯이 말이다.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노인에 대한 도리(道理) 나 부모에 대한 孝 의식이 아주 희박하다. 어떤 젊은이는 자신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자신의 의사(意思) 와는 전혀 관계없이 오로지 부모의 사랑의 부산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는 孝의 문제가 아니라 결과에 대한 책임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관념의 틀에서는 부모나 노인 공경에 대한 의식이 설 자리가 없다. 

요즘 나는 젊은이들 중에 이러한 나홀로의 개인주의 내지 이기주의적 관념에 물씬 감염되어버린 젊은 영혼들을 종종 보게 된다.   나는 백명에 가까운 어르신들과 또 이 분들을 써빙하는 칠십명에 가까운 직원들과 요양원을 운영하다 보면 이 사회의 모든 병리현상들을 다 보게 된다. 우선 젊은들은 어른들의 병 수발을 싫어한다. 그래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젊은이를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요양원에서 종사하는 대부분의 연령층은 요양원에 입소한이들과 대부분 앞서거니 뒤서거니다. 오히려 종사자가 입소자보다 나이가 더 많은이들도 있다. 우리나라에 젊은이들이 금감하고 있는 것은 안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사람사는 사회에는 늙은이와 젊은이들이 어우러져서 사람사는 온정이 진동하여야 한다. 인간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그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그 곳에 내가 있어야 그게 사람사는 사회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그분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것에 아주 인색하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더불어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다. 인(人)이란 글자가 그렇고 '人間'이란 의미도 사람과 사람사이 즉 사회 공동체를 전제로 하고 있다.  대부분이 현재의 삶의 문제가 너무 무거워 미구에 다가 오는 노후대책이 전혀 없는 서민들의 노후 문제에 국가 안전망이 아주 빈약했던 1980년대엔 내겐 더욱 초미의 관심으로 다가왔었다.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때 나의 어머니는 시골에서 홀로 계실 때 남 동생은 성남에서 술 도매상을 하면서 술독에 빠져 부모로부터 받은 재산을 모두 날렸다. 

그래서 동생이 귀농을 했는데 시골에서도 동생은 술이 너무 과해서 팔십 노모가 오히려 동생을 모시고 사는 처지가 되자, 어머니를  내가 서울로 모셔와서 같이 지내고 있었는데 그것 또한 어머님이 서울 도시생활에 적응을 못하시고 힘들어 하시든 차에 마침 경상도 하동 악양교회에서 시무하던 목사가 생활이 어려워 목회를 그만 두고 개소주를 내리는 사업을 한다고 교회를 떠나버려 무려 1년이 넘도록 목자없는 교회로 비어 있다해서 그곳에서 어머니를 모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섬광처럼 떠올라, 나는 즉시 옷가지등 필수품 몇가지를 주섬주섬 챙겨서 그 다음 날 어머니를 모시고 곧 바로 그곳 하동으로 내려 왔다. 그곳이 바로 작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하동 '악양' 땅이다. 나는 그곳을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노인들의 천국으로 만들겠다는 맘으로 내려갔었다. 그때가 바로 1988년 3월 6일 이었다. 

나이가 들면 미래보다 과거로 회귀 하는가? 내가 어렸을 때 온 마을들은 그야말로 큰 가족 공동체였다. 가난했던 그 시절엔 가진 것이라곤 대물림한 가난 뿐이었지만 마을 공동체로서의 끈끈한 정으로 살았다. 그러던 우리가 먹고 살만해 지면서 이웃이나 집안보다 재물이 먼저가 되기 시작하자, 인생의 가치관이 인간관계에서 물질관계로 한 순간에 전도(顚倒)되고  말았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넉넉해지게 되면 여유의 시야가 넓어져서, 인간미가 넘치는 사회가 되리라 믿었었는데,  예전 우리가 아주 가난했을 때의 끈끈했던 가족과 이웃과의 인간관계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물질만능의 위력 앞에서 여지없이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먹을 것 마실 물이 없어서 기근과 기갈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게 주신 '서로 사랑의 심장' 을 인간들이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당시에는  의지할곳 없는 노인들에대한 생활보호제도가 나라에서도 전무했을 때여서 나는 목회현장에서 이를 나의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일반목회에서 노인복지를 위한 특수목회로 방향을 바꾸어 오갈 곳 없는 노인들을 위한 무의탁 양로원을 설립하기로 계획하던 중, 하동으로 내려 온지 만 3년이 되던 어느 날 부산 영도교회로 오라는 통지를 받게 되었다. 내 생애 중 이때 처럼 난감할 때가 없었다. 그때 나의 모친은 시골 생활에 재미를 붙여 아주 건강해 지셨다. 나는 이곳에 뿌리를 내려 무의탁 양로원을 짓고 여생을 여기서 계획한 대로 살것인가 아니면 부산으로가서 일반목회로 끝마칠 것인가의 두 길이 앞에 서게 된 것이다. 부산에서 그런 제의가 있고부터 부산 영도교회에서 거의 매주마다 찾아왔다. 이렇게해서 전혀 본의 아니게 모든 상황이 그렇게 역어져 갔다.  그리고 나의 옷자락을 부여잡는 할머니들의 손을 눈물로 뿌리치고 코뚜레에 꿰인 소처럼 그렇게 부산으로 붙들려 갔다  

내 꿈을 접고 다시 일반 목회를 하려니 우선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사동에서의 3년의 세월은 내게 허송의 세월이었던가? 부산에서의 그때의 나는 일반목회자로서의 생활이 아니라 천금같은 세월을 죽이는 나날이었다. 그래서 겨우 3년을 버티고 부산을 빠져 나올수 있었다. 그리고 곧 장 수년동안 묻어 두었던 무의탁노인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부동산 업무였다. 아주 생소했지만 나는 부동산을 익히는데 4~5개월을 투자했다. 그리고 법원 경매과를 부지런히 쫒아다녔다. 그러면서 땅을 보는 안목을 길렀다. 남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내게 오게하기 위해서는 이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약 6개월여동안 현장실습을 마친 나는 그때 비로소 부동산 사무실을 가평군 설악면에 차렸다. 그리고 약 1년 6개월 정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뛰었다. 무일푼이었던 나는 마침내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삼회리에 1200평의 땅을 경매로 매입하게 되었다. 다만 땅의 위치는 무의탁양로원 자리로는 아주 좋은데 약 800m정도 길이 없는 맹지였다. 맹지였던 이 땅을 마침내 길이 열리게 되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내가 몸 담았던 교단에서 훌훌 털고 나왔을 때 그때 내 수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겨우 가평군 설악면에 일년동안 살수 있는 월세 집을 얻어 소위 부동산에 손을 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얼마나 무모했던가. 가진 것이라고 쥐뿔 아무 것도 없으면서 갈 곳없는 노인들의 안식처를 꿈꾸었으니 누가보아도 똘아이 짓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러나 나에게는 남이 없는 꿈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비록 지금은 길 없는 맹지(孟地)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길이 열리면 그때 꿈은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렇게 무의탁 양로원을 지을 터를 놓고 눈물로 기도한 것이 마침내 3년 후 폭 4m의 길이 쫘악 뚫리게 되었다. 그 세월이 3년이 걸렸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요양원 터 토목공사를 모두 마쳤다. 처음 시작할 때는 손에 아무 것도 없었지만 지금 내겐 무의탁 양로원을 지을 여유가 있게 되었다. 1999년에 청정지역인 가평군 청평면 삼회리 500번지의 대지 1200평 위에 하나님의 은혜로 240평의 '무의탁 양로원' 건물을 지을수 있었다. 그때 우리 내외의 기쁨은 이루 형언할수 없을만큼 컸다. 

국민일보에 '행복이 가득한 무의탁 양로원'을 소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어르신들을 모신다는 기사를 냈다. 당시의 여건은 IMF직후여서 안팍으로 매우 어려운 때였다. 크고 작은 회사들이 낙엽처럼 도산되는 그 엄혹한 때에 눈물의 기도가 상달되어 염원했던 "행복이 가득한 무의탁 양로원"이 마침내 눈 앞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을 시작하는데 마귀 사탄의 방해가 없었겠는가! 가평군에서는 우리의 무의탁 양로원에 대해서 제동을 걸었다. "가평에는 이미 가토릭교단에서 운영하고 있는 '꽃동네'라는 무의탁 시설이 있어서 우리 내외의 무의탁 시설 설립을 도울수 없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건축하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무의탁양로원 설립 허가도 해 줄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내외는 이러한 불리한 여건을 각오하고 노유자시설이 아닌 일반 숙박시설로 허가를 받았다. '행복이 가득한 집 무의탁 양로원'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 내외가 자원하여 걸어온 길이 결코 평탄치 않았던 길이었음을 나는 안다. 

그때 나는 자비량으로 오갈데 없는 노인들을 섬길 때 정말 피를 말리는 순간들이 수없이 엄습해 올 때도 우리 내외는 이를 내게 맡겨진 사명으로 알았다. 그래서 내가  '행복이 가득한 무의탁 양로원' 이라는 수레를 내가 이끌면 이 수레를 밀어 줄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많을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내외의 착각이었다. 갑자기 불어닥친 IMF와 가평군의 외면으로 최악의 여건이었지만, 우리는 예순 다섯분의 어르신들을 혼신을 다하여 10여년동안 모시면서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온갖 우여곡절을 격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한달 두달 그리고 한해 두해 어려움을 온 몸으로 극복하면서 "태양은 내일도 또 다시 떠오른다"는 믿음으로 어르신들을 섬기는 것을 사명으로 알았기에 은행 빚때문에 무의탁양로원이 경매처분이 되는 어려운 위기의 순간에도 우리는 의지할곳 없는 노인들을 섬기려는 초심을 잃지 않았다. 

이처럼 우리는 순간 순간이 기적의 연속이었다. 요즘의 요양원처럼 나라에서 생활비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양로원 운영비를 자비량으로 해결해야 할 때 정말 피를 말리는 순간들이 수없이 밀려올 때도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으로 알았다.  그땐 정말 몸이 열이라도 모자랄 지경이었지만 이러한 악조건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태양은 여상히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곁엔 잠시 뿐, 나는 잠시후면 떠나실 어머니 곁을 오래 머물 처지가 못 되었다. "지 엄니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면서 무슨 무의탁 양로원을 한다."고, 이것이 내 심령을 후벼 파는 자책이었다. 

이때 또 하나 안타까운 것은 나의 동기간들이 나몰래 양로원으로 와서 지 엄니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면서 라는 항의로 어머니를 나 몰래 모시고 성남으로 갔다.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나는 이처럼 형제간으로 부터도 인정을 못받았다. 그런 저런 우여곡절을 격으며 우리내외는 무의탁 양로원을 만들어 놓으면, 이땅엔 우리와 뜻을 같이한 사람들이 많으리라 생각했었다. 우리의 이같은 기대와는 달리 IMF 직후여서 세상은 대단히 엄혹하고 야박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우리에게 목사 장로라는 이름으로 사기꾼들이 수없이 다가왔다. 한달에 생활비와 인건비까지 최소한 2천만원 이상이 들었기때문에 은행 빚은 조금씩 자꾸 늘어만 갔다. 

우리는 몸도 맘도 바빠 정신없이 뛰어 다니며 지인들을 만나 도움을 요청도 해보지만, 그러나 내가 맡겨놓은 돈을 찾는 것도 아니어서 빈손으로 돌아올 때가 다반사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 내외가 자원하여 걸어 온 결코 평탄치 않았던 이 섬김의 길이, 우리의 의지를 따라 걸어온 길이 아니었음을 안다. 자비량으로 오갈데 없는 어르신들을 섬길 때 정말 피를 말리는 순간들이 수없이 밀려올 때도 나는 이를 내게 맡겨진 사명으로 알았다. 이때 우리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빚을 졌다. 이 빚 즉 "무의탁 양로원 때 진 빚을 꼭 갚아야 하느냐"의 반문도 있었지만 1억 5천이 훌쩍 넘는 빚을 지금까지 갚고 있다.

이 우주시대에 오늘의 젊은이들이 찾는 직장은 젊은 날의 야망과 웅지의 날개를 저 광활한 우주에까지 펼칠 직장을 희구하겠지만 찌린내 나고 꺼져가는 심지처럼 죽음을 앞둔 병든 노인들의 병수발에서는 젊은이의 웅비란 없다. 인생의 쓴 맛 아린 맛 매운 맛의 만고풍상을 격으며 나에게 다가 온 큰 울림은 대 우주를 정복하는데 인류의 행복이 있는게 아니고 욕망을 내려놓고 대 우주 안에 있는 섬김의 나를 발견하는데 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진정한 삶은 무엇인가?"를 수없이 질문하면서 나는 종 된 길을 뚜벅뚜벅 걸으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렇게 오갈곳 없는 이들을 모실수 있게 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나와 뜻을 같이한 사람들의 후원금으로 무의탁 양로원을 운영하려 했던 나의 순박한 계획은 점차 현실의 벽앞에 자꾸 쫄아 들기만 했다.  의욕만 가지고 어렵게 무의탁 양로원을 운영한지 만 칠년만에 우리는 요양원을 경매처분을 당해야 했다. 이때 만난 이가 바로 고향 후배 '김진의' 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고향 후배가 경매처분된 무의탁양로원 모든 부동산을 1억을 얹어 주고 다시 인수 받은 후, 내가 무의탁 양로원을 계속할수 있도록 배려를 해 준 것이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땅과 건물은 비록 내 명의로 바뀌었지만, 그러나 건물과 땅은 종전대로 선배님이 마음 놓고 사용 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는 내게 2000만원을 후원금으로 내놓았다. 나는 이러한 고향 후배의 배려로 무의탁양로원을 그곳에서 만 3년 이상 더 계속할수 있었고, 그리고 마침내 우리 대한민국에 요양원 제도가 도입'되어, 십여년 동안 가교 역할을 해왔던 우리 내외에게는 더할수 없는 보람이었고 축복이었다. 자기 몸 관리도 어려운 무의탁노인들을 위한 양로원도 빈손으로 운영해왔는데 나라에서 재정지원을 해주는 요양원에서 그동안 섬겨온 어르신들에게 쏟았던 그 사명으로 일생을 바치고자 우리 내외는 2009년 9월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박사로 785번지 오늘의 자리에 91베드의 '행복이 가득한집 요양시설'로 우리가 섬기던 어르신들 예순 다섯분을 모시고 이사를 올수 있게 되었다.  빈 손이 되어버린 나에게 하나님이 내려주신 은총이었다.

【종그니칼럼】題 二, 중국은 우리에게 어떤 이웃인가?

중국 호령하던 중원(中原)의 맹주 주(周)가 힘을 잃자, 진, 초, 연, 제, 한, 위, 조, 소위 칠웅(七雄)들이 중원(中原)을 두고, 무려 4백여년에 걸친, 춘추전국의 대혼란의 난세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 최초 미승유의 천하를 통일한 진(秦)의 시황제는,  만리장성과 분서갱유(焚書坑儒)등, 그의 끝없는 정복욕으로 결국 이세(二世)에 망하고, 유방 고조(高祖)가 세운 한 (漢, B.C.206~A.D.220) 제국 이후, 실로 2천 년이 훌쩍 넘는 세월에 걸쳐, 비로소 명실상부한 “경(經)의 세계”를 세웠다. 

통칭 사서오경(四書五經)중 (四書; 論語, 孟子, 中庸,大學.) (五經; 詩經, 書經, 周易, 禮記, 春秋.) 라 일컷는 중국의 경학(經學)은, 서양 고대(古代) 그리이스와는 사상의 교류가 전혀 없었음에도, 당시 찬란하게 꽃 피었던, 그리이스의 인본주의와 맞 닿아 있었다는 사실은 실로 흥미롭다. 중국의 이러한 인본주의적 보편 이념이 전 아시아의 사상계를 지배하였다. 중국을 에워싸고 있는 주변국 지식인들은, 사서오경(四書五經)의 보편적 이념사상에 빠져, 저절로 "중화(中華)사상"에 흠뻑 빠져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經(경)을 통해서, 중화사상에 빠진 변방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중국 역사속에서, 권모술수가 난무한 실상에 대하여는, 짐짓 눈을 감아버렸다. 일제치하에서 일본군에 팔려간 위안부가 있었듯이, 수수천년동안 중국 조공으로 끌려간, 수많은 공녀(환향녀)들이 있었다.

남송대 성리학(性理學)의 비조(鼻祖)라 일컷는  주희(朱熹,1130-1200)는, 어린 학생들에겐 역사서를 읽히지 말라 했다. 역사책 안에는 온갖 권모술수를 비롯한, 인간내면의 온갖 불의와 비행들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는 것이 그 이유였고, 중국역사를 읽기 전에, 먼저 성현(聖賢)의 모범(模範)을 본 받아, 실천하며 도덕적 의지를 계발하라는  묵시때문이었다. 주희(朱熹)의 충실한 제자들이었던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중국의 '역사서'에 대해선, 거의 눈을 감고 입을 닫았다. 단적인 예로,조선 성리학의 거두인, 퇴계 이황(李滉, 1502-1571)은 해동 공자라 일컬을 만큼, 대단한 성리학자였으나, 그러나 단 한 권의 역사서도 남기지 않았다. 율곡 이이(李珥, 1537-1584)또한 성리학의 거두였으나, 소중화(小中華)의 이념 아래,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강조한, 기자실기(箕子實記)를 남겼을 뿐이다. 퇴계와 율곡은 모두 후대의 역사서를 통해, 인간사의 궤적을 직접 경험적으로 탐구하기보다는, 유가경전에 제시된, 중국의 고대 성왕(聖王)들의 이념을 존숭했던, "관념의 철인(哲人)"들이었을 뿐이다.

'관념의 철인'들에게 인간의 현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고려 사신들에게 '역사서를 주지 말라'외쳤던 소동파의 의도대로, 고려와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 실학의 역사서에만큼은 아예 눈을 감았다. 그들은 중국의 경학에 함몰되어 있었을 뿐, 냉철하게 중국 역사의 이면을 다 들여다보는 것을
혹여 불경이라 여겼을까? 통절한 지피지기(知彼知己)가 없었다. 수천년동안 중국역사의 흥망성쇠에 불가분의 함수관계아래 있어 왔으면서도, 조선 위정자들에게는  “중국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없었다. 중국 경세가들의 통치행위를 통해, 중국통치술의 이면을 들여다 보기보다는, 오로지 경전의 세계에 함몰되어, 이상화된 중화정치를, 짝사랑하듯 존숭했을 뿐이다. 

그럼 지금은 어떠한가? 예전 그대로 타성에 흠뻑 젖어 있다.  그래서 중국내 정변이 있을때 마다, 우리는 수수천년동안 속수무책으로, 모진 환란을 그대로 격어야 했으면서도, 자고새처럼 잊어버리고, 중국의 변화무쌍한 권모술수를 통하여, 중국의 현실을 탐구하기 보다는, 오로지 경전의 세계에 함몰되어, 이상화 된 중화(中華)의 세계를 존숭(尊崇)했을 뿐이다. 어이 타! 지난 수천년의 세월동안, 한반도의 사대부와 유림들은, 마치 아편 중독자들처럼, 유교 경전에 흠뻑 매몰되어, 저들 강자의 논리에 치우쳐, “역사”의 현실을 외면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 "관념의 이기론"에 매몰된 타성때문에, 최근 한국의 중국관련 책이나, 특집기획 방송을 보면, 스스로를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새우정도로 비하 하고 있지는 않는 건지, 중국의 겉 모습과 규모에 매몰되어, 찬사를 쏟아붓는 친중주의 기조가 여실하다. 혹여 경(經)에 빠져 역사의 진실을 외면한, "변방지식인들"의 뿌리 깊은 "친중사대"와, "소중화"의 틀에 아직도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를 알라! 이제 땅덩이만 크다고, 인구만 많다고, 대국이 아니라는 것을! 中華의 눈꺼풀을 벗고 현실을 직시하자! 중화중심질서(sino-centric order)는, 지난 세기 아편전쟁 이후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지난 수천년간 중국의 언저리에 맴돌던 대한민국은, 이제 명실공히 경제대국이 되어, 더 이상 지정학적 변방이 아니라, 지구 전역에 촘촘한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전세계를 아우르고 있는, 오늘에 있어서의 대한민국은, 비록 국토는 녹두 알갱이처럼 작을지라도, 의연하고 당당한 경제대국인 것이다.  
나는 2019년 5월, 첨으로 8박 10일간, 유럽 몇 나라를,(독일,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로마,) 비록 주마간산 격이지만, 여행을 다녀 온적이 있었다. 그 9일 동안 내가 본 유럽은, 물론 유럽 그 이면을 볼 줄아는, 안목의 부족이야 있었겠지만, 허지만 나의 좁은 소견으로 보았을 때, 내 조국 대한민국 보다, 더 나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식당에서 식수도 별도로 사야 되고, 화장실도 이용료를 지불해야 했다. 곳곳에 도적들도 많았다. 인천공항! 단연 압권이었다.

중국내에는 그 거대한 그늘에 갇혀, 신음하는 사람들이 헤일수 없이 많다.  2017년 11월 18일 저녁 6시경, 북경 남쪽 대흥구(大興區)의 한 2층 건물에서 치솟은 불길이, 19명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 갔다. 북경의 번화한 도심에서, 불과 18킬로 정도 떨어진 사고현장은, 가건물, 아파트, 봉제가게, 의류공장들이 어지럽게 섞여 있는 교외의 빈촌이었다. 그곳에 살고 있는 17만5천명 중에서, 약 15만 명(85.7%)이, 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 온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2011년에도 화재가 발생했던 장소라, 이미 화재위험지구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17만5천 명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모여사는 보금자리로서의, 최소 기능은 하고 있었다. 2011년에 이어 다시 화재가 재발하자, 중국 중앙정부는 일주일만에, 군사작전 치르듯 철거를 결정하곤, 그 지역을 몽땅 갈아 엎어 버렸다. 그중 대부분은 철거 불과 몇 시간 전에야 급작스럽게 '축출 통보'를 받은 주민들도 다수 있었다. 중앙정부당국의 인민의 인권을 살피는 아량은 애시당초 털끝만큼도 없이, 아주 무자비하게 17만5천명의 노동자들은, 엄동설한의 차디찬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공산사회주의가 완성되면 나라는 고사(枯死)되어 버린다던 공산주의의 산실 소비에트는, 역사의 무대뒤로 사라지고, 가난한 노동자들의 천국을 만들겠다던 중국 또한, 공산주의 이념은 간곳 없고, 학정과 진시황을 뺨치는 일인독재만, 용트림을 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 중국의 현 주소다.

 

<저작권자 © 리폼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리폼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