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새해

나처럼 하루를 헤프게 써버리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니 주일이 어제다 싶어 오늘이 월요일이라 생각했는데, 글쎄 오늘이 토요일 이란다.   바퀴도 날개도 없는 것이 참 빠르기도 하다. 날씨가 추워서 아직 겨울이려니 했더니, 아니 벌써 눈이 녹아 빗물이 되는 우수(雨水)란다. 땅끝 해남에서는 매화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단다.  오늘 봄 바람을 타고 타지에서 벗이 온다는데, "그럼 무엇으로 대접을 할까?" 같이 늙어가는 벗들과 만나, 입으로 먹고 입으로 정담(鼎談)을 나누는 즐거움을 아시는가? 나는 그 벗이 무엇을 좋아 하는가를 조금 안다.  물론 우리 요양원 음식도 훌륭하다. 왜냐하면 최상의 식재료로, 그리고 전문 조리사의 손으로, 정성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생 말년을 요양원에서 보내고 있는 노인들의 낙이 무엇이겠는가? 입에 맞는 음식이 최상의 섬김이다.  조선 최고의 대학자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은, 대 학자답게 검소하게 사셨단다. 그는 한 평생 반찬을 세 가지 이상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들면 무말랭이와 가지무침 그리고 산나물정도가 전부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혹여 손님이 오면, 간 고등어를 내 놓았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난 그 경지에 이르려면 아직도 멀었지만, 지금은 노환으로 내 얼굴도 잊어버린 나의 벗 황순철이 있다. 그는 언젠가 경상도 봉화에서 홀로 살 때에도, 텃 밭을 일구어 채소를 심고, 쌀과 보리등 잡곡 한 말로 두 달을 사는데, 한달 생활비는 고작 2만원 정도가 전부였다. 평생을 이렇게 자린고비로 살면서, 말년에 초등학교 문지기로 받은 월급 75만원 중, 50만원은 대학후배 두사람 생활비로 주고,남은 돈으로 늙은 부모를 섬기고 살다가, 지금은 병상에서 보내고 있지만, 나는 그 얼굴만 떠 올리면 가슴이 먹먹해 진다. 내가 젊은 날 어느 신사(山寺)를 갔더니, 스님 한분은 하루 세때 쌀, 보리, 콩, 솔잎으로 만든 곡차로 생활하는 것을 보았다. 고려 말 '여려병(呂麗秉)이란 학자는, 콩을 삶아 방벽에 바른 후, 책을 읽다가 허기가 지면, 벽에 바른 메주 콩을 떼어 먹었단다. 음식을 건강 지킴이로 본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생존수단으로만 본 것이다.

그럼 우리나라 재벌 회장들은 기름진 좋은 음식만 먹고 살까?  한국 최초의 재벌인 삼양사의 김연수 회장은, 한 끼의 반찬은 세 가지를 넘지 못하고, 반찬이 남아서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일이 전혀 없었단다.그의 아버지도 조선의 최고 부자이면서도, 땅에 떨어진 밥 알을 주워 먹었다.  "천 길 땅을 파 보아라! 쌀 한톨이 나오나." 그 집안의 며느리가 들려준 얘기는, ​“재벌 집이라고 시집을 왔는데, 새벽에 일어 나면 꼭 한복을 입어야 했고, 반찬을 남기지 않으려고 양을 줄이다 보면, 서열상 집안 꼴찌인 며느리는 배고플 때가 참 많았단다." 퇴계 이황선생이 가난해서 소박하게 드셨을까? 세상에서 사람을 살리는 음식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모름지기 선비로서의 삶이 그랬어야 했기에, 만인의 귀감이 되게하고자 그랬을 것이다.충분히 호의 호식할수 있었음에도, 선비로서의 검소한 삶을 보여 주는 것, '설중 매'처럼 '선비의 상'이 참으로 고고하지 아니한가!

​나는 어려서 잘 먹고 싶어도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엄마가 매일 무우 밥을 해 주는데, 무우를 얼마나 굵게 써는지, 밥 알갱이는 무우 채에 묻혀서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간혹 엄마에게, "엄마? 무우밥 한 그릇 주지 말고 쌀밥만 반 그릇 주면 안돼?" 이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엄마 입에서 따발총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문에 그날 내겐 점심 밥은 날아갔다. 우리 집엔 언제나 대 식구여서 남아 난게 없었다. 무엇이고 항상 부족 했다.   그런 모진 세월을 우리 엄만 어떻게 지내셨을까?  이렇틋 5~60년대를 거쳐 70년대까지, 이 것이 우리 주변의 일상적인 모습들이었다. 

1960년대가 되자, 박정희 소장이 군사 구테타로 정권을 잡은 후, 대 국민 메세지가 있었다.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당시 박정희 소장이 구국의 결단으로 들어선 군사 정권에 의해, 그동안 우리 사회가 태고 때부터 세습되어 온 절대적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음식 쓰레기, 옷 쓰레기, 일회용품 쓰레기, 전국 아파트마다 재활용품 수거함속엔 아직 입을수 있는 옷들이 가득 가득 쌓여 있다.  나는 젊은 날 열 아홉 평 아파트에서 1년간 살아 본 것이 전부지만, 지금은 아파트는 고사하고 밤 낮없이 어르신들과 함께 한 둥지에서 살고 있다.  1980년대에 앞으로 머잖아, 마이카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더니, 정말 마이카 시대가 왔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우리는 여상히 가난하다.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양극화와, 부의 편중에 의한, 구조적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양극의 구조에서 벗어 나는 길은, 물질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문제다. 이를 알라! "소나무는 진달래를 내려다 보되 무시하지 않고, 진달래는 도토리나무를 올려다 봐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이 땅위에 같이 살고 있는 철새인 제비들은, 강남에서 오자마자 둥지부터 짓는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기보다 잘 살고 있는 남들과 비교하다가, 사는 집이 투기의 수단이 되어, 집 없는 가난과 불행을 구조적으로 만들며 살아 가고 있다. 행복해지고 싶거든, 부자가 되고 싶거든, 남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부자로 살아도 밥 한 그릇, 가난하게 살아도 밥 한 그릇이다.(高大廣室 夜臥八尺, 良田萬耕 一食二升)  옛날 사라센 제국을 제패한 알렉산더가, 그리이스의 견유(犬儒)학파 디오게네스를 만났다. 그는 큰 통나무를 절구통처럼 파서, 그 안에서 명상하고 쉼을 얻고 살았다. 그의 입소문을 들은 알렉산더 대왕이, 마침 아침 태양과 동반해서, 디오게네스를 찾아와  물었다. "그대의 소원이 무엇인가?  그대가 나의 스승이 되어 달라," 이 절대절명의 순간에 디오게네스는 "대왕이여! 당신이 내게 비취는 따스한 아침 햇살을 가리고 있으니 몸을 좀 비켜 주시오." 이것은 아무나 흉내 낼수 없는 무욕의 삶이다.

알렉산더는 20세에 즉위하여, 그리스와, 페르시아와, 시리아 에집트를 정복하고, 인도를 제압하여 사라센제국을 세워, 명실공히 세계를 제패하고 바빌론에 입성했지만, 자신의 생명은 늘리지 못하고, 33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주전 356~323). 그는 임종 때 부하들에게 "자기가 죽으면 두 손을 관밖으로 내어, 모든 이로 빈 손임을 볼수 있게 하라."고 했다.  위를 보되 언제나 자신을 낮추며 살자! 나보다 못한 사람, 힘들었던 과거를 되 돌아 보며 살자!   인생이란 타고 난 자기 그릇에, 주어진 자기 몫을 채우는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먹는 음식이 말없이 몸에 흡수되는 것처럼, 우리도 모든이를 위해 사랑의 종이 되어야 한다.        종그니가     

【종그니칼럼】새해

2021년이 나와 한몸처럼 지지고 복고 살았더니, 12월 그믐 날이 한 뼘만큼 남았다가, 이내 영겁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직 해를 넘기기 전 섣달 그믐 날, 팔십 고령의 전영춘목사님의 외 아들(목사.59세.)이 코로나로 소천했다는 부음을 듣고, 인생무상을 느낀다. 이처럼 우리의 삶속에 녹아 흐르는 세월과 함께, 유한한 이 땅에 사는 우리는, 나이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인생의 끝자락에 서 있다. 내가 먹고 마시고 내 하고픈대로 할수있다해서 내 몸둥이인가? 정작 내가 내 몸둥이에 대하여 아는 것이 무엇인가? 내게 속한 내 몸둥이조차 아무 것도 모르고 산다. 그래서 하루동안에도 예측불허의 사고로, 수많은 생명들이 유명을 달리한다. 어찌보면 지난 한 해동안 무탈하게 새 해를 맞이했다 는 것만으로도 행운아다.

야고보서는 4장13절~14절에서, "들으라! 너희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보리라 하는 자들아! 너희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니라!" 여러분은 지난 1년 무엇을 얻기위해 사셨나요? 보람된 한 해였나요? 혹여 회한에 찬 해는 아니었나요? 지난 한 해동안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요?

이런 말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죽으면 다 잃을 것을 쫓다가 죽은 사람이고,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남을 섬기며 사는 사람이다." 새해에는 정녕 무엇을 얻기 위하여 살아야 겠는가? 금년엔 대통령선거가 있어, 서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도토리 키재듯 백가쟁명으 로 온 나라가 요란하지만, 진실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사는 목적과, 사는 방향이, 세상 사람들과 확연히 다를수 밖에 없다. 세상 사람은, 세상이 주는 밥(돈, 권력, 명예, 육신의 소욕.)을 좇아 살지만, 진실로 예수를 만난 사람은,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요한복음 1장1절에 "태초에 말씀이계시니라." 하신 이 말씀이, 비천한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유한한 인간의 옷을 입으시고,가장 낮은 자리인 말구유에 오셔서, 오직 보이는 것만을 따라 사는 인생들을 위하여, 바보처럼 당신의 생명까지 희생의 제단에 바치신 주님은, 세상과는 꺼꾸로 군림이 아닌 섬김으로, 밥이 아닌 말씀으로, 채움이 아니라 비우고, 내어주고, 낮아지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희생함으로 승리하는, 역설의 진리를 몸소 보여주셨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중에 누구든지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되고." (but whoever wants to become great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너희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되어야 하리라.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must be slave of all)",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섬기러왔고, 또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For even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um for many)".

세상에서 얻는 권위(authority)가 있다. 군림하는 자의 권위는 대단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권위는 '희생적 권위'이다. 어머니의 권위는 '섬김의 권위'요 '희생의 권위'이기에 자식이 비록 군왕일지라도, 어머니의 희생적 권위앞에 무릅을 꿇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지닌, 희생적 사랑의 권위이다. 이 최고의 축복을 누가 받느냐? 당연히 섬기는 자가 받는다. 오고 오는 모든 세대가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앞에 무릅을 꿇고 주님으로 추앙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비어 '섬기는자'로, 온 인류를 위한 희생의 제물로 오셨기 때문이다.

하박국 선지자가, 합 1장 13절에서, 하나님께 묻는 물음에, 하나님이 합 2장 4절에서 응답하시기를, "보라 바빌로니아(세상)는 교만하여 정직하지 못하나,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한마디 말씀으로 하박국선지는, 영안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이처럼 믿음으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은, 세상사람과 사는 목적, 가는 길, 사는 방법이 확연히 다르다.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즐거움은 무엇인가? 무화과 나무와 포도 나무, 그리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넉넉하고, 추수한 작물이 곳간에, 그리고 양 떼와 소 떼가, 우리에 가득하면 행복할까? 그러나 그도 아닐 것이, 동기간에 다툼은 가난해서가 아니라,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우애를 잃어서이다.

바벨론이, 애굽이, 이스라엘을 짓밟아도, 이스라엘은, 시온산 저 새 하늘 새 땅에 입성할 것이다. 믿음의 우주선을 타고 창공높이 올라 내려다 보면, 먹장구름도, 험산준령도, 세상권세도, 모두 다 눈 아래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이땅의 기독교는, 살아 있는 믿음의 근본을 잃어가고 있다. 주의 종들조차 강단의 멧세지를 구체적인 삶속에서 증거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를 각성하고, 본연의 자리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종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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