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유럽의 강대국들은 로마 교황청의 영향력을 벗어나 서로 연합하였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정교회) 등이 연합했고, 교황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곳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스페인 정도였다. 동 로마제국에서 발현한 그리스 정교는 발칸반도에서 번성했고, 슬라브 민족을 기반으로 한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는 교황청과 오스트리아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던 중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의 황태자 프랑소아 패르디난트(Francois-Ferdinand)가 사라예보에서 마케도니아의 학생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 일은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랑소와 조셉에게 충분한 전쟁 명분을 제공했다. 로마 교황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일을 이용하여 유럽을 정복함으로써 유럽에서의 옛 권력을 회복하려 했다. 교황청은 프랑스를 멸망시키기 위해 독일 연합 군대를 동원했으나 패배했고, 이로 인해 교황청의 위신은 크게 추락하였다. 따라서 1919년 6월 연합국이 베르사이유 조약을 조인할 때 1차 대전을 조장한 바티칸은 협상 테이블에서 배제되었다.
b) 예수회의 파시즘과 나치즘 지원
1차 대전의 실패로 친 로마적 합스부르크 왕가는 무너졌고, 러시아는 공산화되어 무신론자가 되었으며, 독일은 완전히 파멸했다. 예수회는 권세를 회복하기 위해 각 국에서 활동을 재개하였는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서는 샤를 황제를 지지하였고,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를 후원하여 정권을 잡게 하였다. 무솔리니는 전체주의자로 1차대전 제대군인들을 모아 파시스트당을 창립하였고, 1922년 10월 로마진군이라는 쿠테타로 정권을 잡고 정치, 문화, 경제를 개혁해 독재정부를 수립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로부터 자극을 받았으며 나치즘은 파시즘의 전체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그 전체주의적 나치즘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회복하자 바티칸은 또 다시 독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치즘은 반 민주주의, 우생학적 인종 우월주의, 독일민족 지상주의, 전체주의, 군국주의, 반공주의 등을 바탕으로 한 독재적 정치이념이다.
1차 대전 이 후 예수회는 오스트리아, 체코, 보헤미아, 폴란드, 헝가리, 크로아티아, 바이에른(독일 남부) 등을 포함하는 중부와 동부 유럽의 카톨릭 국가 연맹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 새로운 중앙 제국은 두 개의 전선을 형성하는데 동부는 공산주의로 무장한 소련이고, 서부로는 개신교 국가인 영국과 혁명사상으로 뭉친 공화국 프랑스이다.
바이에른(독일 남부)은 카톨릭 국가이고 히틀러는 카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교황청은 나치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히틀러는 중대사안에 대해 교황청과 상의하거나 인가를 받았다. 1924년 교황청과 바이에른은 협정을 맺었고, 베를린 주재 교황 대사인 파셀리는 1932년 7월 20일 반정부 시위를 주동하고 군의 개입을 막음으로써 바이마르 공화국(당시 독일의 중심)을 붕괴시켰다.
예수회는 주로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였고, 1933년 풀다(Fulda) 회합에서 독일 주교들은 히틀러가 발표한 선언(독일 사회주의 운동은 신성한 카톨릭 교리에 의거하고, 교회의 사명과 권리를 보장)을 받아들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카톨릭 정당을 이끄는 스투르조가 무솔리니에게 권력을 이양하였고, 독일에서는 카톨릭 중앙당(Zentrum)의 대표인 폰 파펜의 지원으로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정권을 장악했다.
교황청의 외무대신 파셀리 추기경은 히틀러에게 반 카톨릭 종파를 척결하도록 건의했다. 히틀러는 1933년에 유대인과 자유주의자 4만명을 45개 수용소에 분산 수감하였다. 한편 교황청은 무솔리니의 이디오피아 침공을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전쟁지지 발언을 하였다. 파시스트는 1939년 알바니아도 침공했는데 이는 카톨릭 세력을 넓히려는 교황청의 계획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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