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Severance)
미국에서 은행에 다니던 청년이 있었다. 그는 1859년 세계 최초로 석유갱이 발견되자 친구 Rockefeller와 함께 석유회사를 세웠다. 사업은 기대 이상으로 성공했고 그는 벼락부자가 되었다. 고향 '클리블랜드'로 돌아온 그는 새로운 사업을 벌였다. 도시 곳곳에 건물을 세우기 시작 하였는데, 누구나 갈 수 있는 학교, 병원, 교회를 지었다. 그리고 완공된 건물을 시에 기증했다. 그의 이름은 Severance(세브란스). 그는 빈민과 고아를 돌보았던 부모님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평생 자선 활동에 헌신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1900년의 어느날 그는 뉴욕 '카네기 홀' 에서 연설을 듣게 되었는데 연사는 당시 조선(대한민국)에서 의료봉사 활동 중이던 의사 Avison(에비슨)선교사 였다. 에비슨 선교사는 이렇게 간절히 호소했다.
"조선에 있는 병원들은 병원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빈약합니다. 간호사도 없이 한 명의 의사가 모든 것을 운영합니다."
이 연설을 들은 세브란스는 당시 돈으로 1만5천불을 흔쾌히 기부했고 4년 후 경성(서울)에 조선 최초의 종합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이 세워졌다. 현재 서울 신촌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의 모체이며 당시 기부한 금액은 현재 가치로 약 5,000억원 상당이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는 이 비용으로 당시 한국 정부로부터 인수받아 운영하던 남대문 밖 복숭아 골(현 서울역 건너편)에 있던 제중원을 재건축하였다. 1902년 시작된 병원 공사는 1904년 9월 3일 완공되었고, 기증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 병원'이라 불렸다.
1907년 세브란스는 주치의 러들로우(A.I. Ludlow)를 동반하고 내한하여 다시 3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이 비용은 세브란스 병원 운영과 의학교 교사(校舍) 건립에 사용되었다. 1913년 6월 세브란스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자녀들은 계속해서 세브란스 병원을 후원하였고, 이 일은 1939년 일제에 의해 선교사 입국 금지령이 내려지기까지 지속되었다
세브란스 자신의 주치의 였던 lrving Ludlow(어빙 러들로우)는 26년 동안 외과 전문의로 활동하며 낙후된 조선의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어빙러들로'가 미국 본국에 입국한 이듬해, 세브란스는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낡은 수첩에는 기부금을 약속한 여러 곳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약속이 지켜질 수 있도록 기금까지 마련해 두었으나, 정작 자신 명의의 집은 한 채도 없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기부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받는 당신보다 주는 내가 더 행복합니다."
최창근 장로
최창근 장로는 한경직 목사와 함께 영락교회의 '개척자'로 지난 2014년 소천했다. 평북 의주 출신인 최창근 장로는 영락교회 설립자인 고 한경직 목사의 든든한 재정 조력자로 평생을 함께 했다. 1947년부터 50년 넘게 한경직 목사를 보좌해 오면서 중,고,대학교 설립을 통한 학원선교와 군선교 활동에 힘써 왔다.
한경직 목사는 98세 되던 해에 유언을 통해 "내 수제자는 최창근 장로는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야"라는 말을 남겼고,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의 바나바, 이시대의 '욥'과 같은 인물로 존경을 받아왔다. 그는 한 목사가 돈이 들어 갈 구상을 갖고 오면 이를 실현한 조력자였다고 한다.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인 고인은 1960년대 섬유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고인은 수백억원대에 달하는 재력을 바탕으로 한 목사가 제안한 교육사업에 매진해 영락학원 이사장, 보성학원 이사 등을 지냈고 2008년부터는 보성학원 명예 이사장을 역임했다.
국제기드온협회 한국지부 창립(1963년), 한국기독공보사 이사장 및 사장(1968~69년), 아시아연합신학대 이사(1982년),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회장(1985년), 실로암 안과병원 이사장(1985년), 한국YMCA 부이사장(1987년), 숭의학원 이사장(1995~1999년), 사랑의쌀나누기 위원회 위원장(1997년) 등 선교활동과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며 각 기관의 지원에도 힘을 쏟았다.
영락교회 교인들에게 최창근 장로는 가장 존경받는 어른으로 추억된다. 당시 이철신목사는 "최 장로님은 '안됩니다. 어렵습니다'라는 말씀 대신 '됩니다. 한번 해봅시다'는 말씀을 하시는 긍정적인 분이셨다"며 "열심히 일하셔서 모은 많은 재물을 하나님의 일에 쓰신 '존경받는 부자'였다"고 밝힌 바 있다.
김경래 장로(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기독교 선교 127년의 역사 가운데 가장 헌신적으로 일해 온 장로 중의 장로이다"며 "한국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이때에 귀감이 될 평신도"라고 추모했다.
고인은 평소 "세상에서 우리의 소유가 있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요. 우리는 자기 소유로 뭘 가지려 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돌려드림으로써 얻는 기쁨과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유산 안남기기 운동'을 실천했다. 고 보도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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