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자체적인 문자를 가진 시기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한글은 1400년 무렵에 창제되었으나 1900년대까지 범용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197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모두가 한글을 기본적으로 읽고 사용하게 되었다고 본다. 한글을 사용하지 못한 역사적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중국은 기원전 800년경에 이미 제자백가가 나왔는데 반해, 한국에서는 자체적인 학문이 생성되질 못했다. 신라시대 독서삼품과를 봐도 책 5권만 읽으면 벼슬을 준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문자자체가 쉬었다면 과연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한국은 자체적인 학문을 생성하질 못하다보니 늘상 중국의 학문에 빌붙으며 세월아 내월아 보냈던 건 사실이다. 그렇게 수백년 이상 보내다가 놀라운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초강대국이라 여겨졌던 중국이 서양에 유린당하게 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은 일본에 의해 굴욕을 얻게 되다 보니 기존 중국에 빌붙어 오던 태도에 반성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아는 것이 힘이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방법이 학문에 있다고 봄으로 인해 1900년대 초반 서양학문을 본격적으로 유입하기 시작한다. 1970년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은 놀라운 발전을 하게 된다. 문맹률이 70%였던 참담함은 사라지고 이제 대다수의 국민은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새로운 학문은 대부분 외국에서 빌려야 하는 형편인지라 고급지식을 얻기 위해선 영어능력은 필요하다. 그런데 과연 한국어로 번역된 책들은 다 읽고 이런 소리를 지껄이는 것일까? 그야말로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라고 본다. 지금 우리시대 때 영어가 대두된 건 과거와 같은 어떤 합리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영어교육이 언제부터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을까? 빠르게 보면 1980년, 늦게 보면 1990년대 경에 발생한 일로 생각한다. 88올림픽 이후 국제화시대 대비 영어교육을 강조하다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로 생각된다. 어순이 다르다는 건 사고구조와도 전혀 다르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어는 사고의 도구인데 사고구조부터가 차이가 나니 영어를 배우는 건 자연히 어려운 일일 수 밖에 없다. 일본은 한국과 어순이 굉장히 흡사하기에 영어학습에 일본과 한국이 비슷한 난관에 봉착했다는 점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어야 한다.'아 영어는 동아시아인이 쉽게 배우기 힘든 일이구나'라는. 그런데 이에 대한 일본과 한국의 차이는 매우 현격하다. 일본의 경우는 영어가 배우기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번역작업에 굉장히 적극적이다. 그 반면 한국은 번역은 물론 되지도 않는 영어 짝사랑에 몇 년, 몇 십년을 허비하고 있다. 도대체 어느 나라가 현명한 건가?

실제로 영어영문학과 학생이 영어논문 번역을 한 장도 해내지 못한 사건이 있다. 이유는 사용하는 의미가 일반적인 의미하고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이었다. 분명 영어영문학과 학생은 영어실력이 뛰어난데 왜 한 장도 번역하지 못했을까? 간단하게 생각하면 한국인이 한국말을 할 줄 안다 해도 한글로 된 모든 학문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다. 철학과 학생은 철학책을 읽고 이해할 수 있어도 전자회로책을 이해하긴 어렵다. 전자과 학생은 전자회로책을 이해할 순 있어도 철학을 이해하긴 어렵다. 즉 영어자체가 필요한 게 아니라 각 전문분야에 맞는 영어는 각기 다르게 필요하는 것이다.

영어를 잘해야 국가경쟁력이 상승한다는 건 그야말로 헛소리다. 국가경쟁력은 영어를 잘할 때 생기는 게 아니라 우리 학문이 타국에서도 배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 경쟁력이 생긴다고 본다. 막말로 영어를 배워도 한국말보다 잘할 수 없는 노릇이다. 쓸 수 있는 한글을 영어로 번역할 수 있을 뿐이고, 결국 모국어는 1차언어, 외국어는 2차언어다. 그리고 순수 1차언어의 역량을 늘려주는 건 영어공부가 아닌 각 전문분야에 맞는 심도 있는 공부라는 것이다. 스타크래프트(게임)에 세계보편적 단어로 gosu라는 단어가 있다. 이 말은 한국에서 태생되어 외국에 퍼진 사례다. 한국이 지닌 스타크래프트 실력이 세계최강이니 자연스레 단어가 퍼진 경우지, 한글의 과학성, 우수성과도 아무런 상관도 없고, 영어능력은 더욱더 상관없다. 즉 무엇이 되었든 전문분야를 개척하고 극도로 발전시켜야 그 나라 언어가 널리 퍼진다는 것이지 영어에 몰입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한발 늦어 뒤늦게 따라갈 채비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과 다름없다.

어찌보면 지금 우리시대는 4000년 역사상 가장 비합리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거 수백년 전 한문의 필요성에는 중국의 학문을 익히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1900년대 영어학습의 이유는 한국에 전무했던 새로운 학문을 배우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목적과 이유 없이 영어를 배우면 경쟁력이 생기겠거니라는 발상으로 영어가 강요되고 있다. 암기교육의 문제점을 해결해야 한다? 영어교육이야 말로 암기교육의 극치일 수 밖에 없고, 언어의 형식이 자의적인 기호와 기표의 맺음인 이상 언어교육은 필연적으로 암기위주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500년전엔 한글이라는 문자가 없어서 개고생했는데, 그보다 500년이 흐른 지금 이미 보유하고 있는 문자뿐만이 아니라 말까지 버리려 국가가 나서니 참으로 바보같이 않을 수 없다. 영어몰입교육이 지금처럼 비판받는 이유는 목적 자체를 전혀 잘못 잡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이고 효율성 없는 영어광풍병을 앓고 있다가 최근에야 영어가 과연 왜 필요한지에 대해 미약하게나마 서서히 반성해가고 있던 현실이다. 이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한 대안들을 간략히 올려보도록 하겠다.

첫째 : 지금 상황에서 최우선적으로 시급한 것

그것은 영어가 아니라 학문에 대한 태도개선이 최우선 과제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교육은 1900년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보기 때문이다. 교육의 중요성보단 일제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아이들을 교육시켜 장래에 부강한 국가가 되어 독립하자는 취지에서 교육이 출발되지 않았던가. 결국 나라를 되찾을 임무를 스스로 못할 것 같으니 애들에게 떠맡기는 일종의 지저분한 취지의 결과물이 공교육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로 인해 한국교육은 학생들이 스스로 원하는 분야가 아닌, 타자의 필요에 의한 교육이 일반화되기에 이르렀고, 학문은 즐거운 것이 아닌 고욕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고욕스러운 학문을 외부의 필요로 주도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교육은 주입식교육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첫 단추를 잘못 끼웠으니 지금 현실이 이 모양 이 꼴인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나라가 발전하려면 사회인들이 중고딩 때 배운 지식을 토대로 여러가지 책을 읽어내고, 책을 쓸 수 있을 때 학문이 발전되고 나라가 발전될 수 있다. 공부의 책임을 학생들에게 잔뜩 짊어지우게 해놓고 정작 국가주역들의 독서량은 심각할 정도로 한심한 이 꼬라지속에서 무슨 발전이 있고 경쟁력이 생길수 있는가? 30~50대에 해당되는 국가주역들이 먼저 공부할 생각은 않고 20대 이하 애들에게 학문의 책임을 떠넘겨버렸다. 또한 학문을 고욕으로 만들어 어거지로 주입하는 이상 국가의 발전이 있을리 없고, 경쟁력은 물론, 발전될 학문이 있을리 만무하다. 즉 지금 최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발적으로 학문에 몰입할 수 있도록 즐거운 교육문화가 조성되어야 하고, 나아가 성인들 스스로 독서가 생활이 된 문화가 생성되는 게 최우선 과제다. 오죽하면 20대 중반만 넘어가도 머리가 굳어서 공부하기 어렵다는 소리가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겠는가?

둘째 : 학문에 대한 태도 개선의 위력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이 명언은 반드시 그 진의를 알아야만 하는 학습의 본질이 담긴 말이라고 생각한다. 학습이 뭔가? 뇌의 통신과정이다. 그리고 학습의 왕도는 반복이고, 학습의 왕도가 반복인 까닭은 뇌의 정보에 대한 불완전한 기억이라는 본질적 특성에서 올 수 밖에 없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기억력은 불완전할 수 밖에 없고, 그걸 보완해주는 게 반복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반복하는 게 장땡인가? 그렇지 않은 게 즐기는 대상은 보다 적은 반복으로도 자동적으로 집중될 수 있기에 머리 속에 쉽게 넣을 수 있다는 점이다. 비교하자면 노이즈 잔뜩낀 전화기들고 서로 통신하는 것보단, 노이즈 전혀 없는 깨끗한 통신이 정보전달에 보다 효율적인 것과 비슷하다. 고로 흥미여부로 인해 깨끗한 통신인지 아닌지가 갈리는 것처럼, 자발적 흥미로 읽은 정보와 읽기 싫은데 의무감에서 읽은 정보는 한번 반복으로 머리 속에 남는 양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즐기는 대상의 진정한 위력은 자동적으로 공상을 통한 반복을 행하게 됨으로써 자동반복기능까지 갖추고 있기에 효과는 더욱 배가된다. 즉, 즐거운 것은 빠르게 익힐 수 있고, 스스로 학습하게 만드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교과서를 보라. 과연 재미있다고 할 수 있나? 나름 책읽기를 즐기는 사람도 교과서는 왠만하면 읽기 싫은 게 사실이다. 심심할 때도 읽을 수 있도록 교과서가 재미있지 않는 한 학습의 가장 최선의 길을 일딴 제쳐두고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셋째 : 성적 위주의 기형적 문화 도래

교육대상자들의 자발적인 흥미와 관심이 주가 아닌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삽입시켜주는 교육이다 보니 인내심으로 버텨내야 할 과정이 되어버렸다. 그러다보니 수단에 지나지 않는 시험이 목적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시험이라함은 잘못된 지식을 바로잡는 것에 본질적 목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과정이 이만큼 견디기 힘든 인내와 고통의 동의어가 되어감에 따라 시험은 더 이상 잘못된 지식의 교정수단이 아닌, 교육과정에 대해 얼만큼 순응했는지를 평가하는 결과의 지표가 되어버렸다. 즉, 시험을 망친 학생의 상황을 가정하면 지난 시험을 통해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의 교정에 힘쓰는 게 아닌, 앞으로 닥칠 시험을 잘 볼 방법을 모색하는게 일반화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반드시 알아야할 지식은 이미 시험성적이 발표 난 지나간 범위가 아닌 장래에 있을 시험 범위 내의 문제로 나올만한 내용이다. 가령 2024년 4월 12일에 시험 볼 중간고사 관련 지식은 당일 알지 못하면 아무 쓸모도 없고, 만회할 방법은 오로지 다음 시험에서 보다 좋은 점수를 받는 것 밖에 없는 문화가 조성되어버리기에 이르렀다.

넷째 : 학력위조가 주는 교훈적 의미.

학력위조라는게 종이쪼가리의 진위여부로만 갈린다면 그것 자체가 굉장히 잘못된 현실이다. 직책에서 아무런 이상이 없다면, 결국 그 직책이 요구하는 학력과 실질적으로 필요한 학력이 불일치하니 불필요한 학력을 요구한것 자체가 잘못이다. 또한, 학력을 위조했다 한들 학력증명서에 의존하지 않고 외부적으로 눈치챌 수 없으면, 그 학력이란 것이 아무런 가치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석할 수 있다. 가령 서울대생이 대접받는다면 졸업증명서에 걸맞는 내용이 뒷받침되어야 응당 타당하다는 것이다.

다섯째 : 영어몰입교육과 토론식 수업의 대립성.

암기식 교육의 문제점이 대두되고 토론식 수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토론식 수업이 필요한 이유자체도 체감적으로 알아서가 아니라 피상적으로 남들이 그러니 그냥 그러겠구나하며 내세우는 것으로 보인다. 안그럼 토론식 교육과 영어몰입교육이 양자사이에 있는 엄청난 대립성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토론을 처음 익힐 땐 권리와 자유, 그리고 평등에 대한 기본적 감각을 익히는 게 첫단추다. 이유인 즉, 일상생활 속에서 토론이 발생하는 이유 자체가 어느 한쪽이 어느 한쪽에게 불합리한 간섭과 개입을 행해서 일어나는 것이 일상다반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단어들의 정확한 정의들을 차차 깨닫게 되면서 정확한 말을 할 수 있고, 옳지 않은 말은 지적할 수 있고, 옳고 그름의 기준점이 명확하게 형성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말들도 알고 보면 정의를 명확히 내릴 수 없는 말들이 많기 때문이다. 아마 대부분은 정의란 말을 사용할 수 있다한들 정의의 정의부터 내려보라면 헛다리 짚는 이들이 태반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즉, 보다 합리적인 의사소통에 기여를 하는게 토론이라는 것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면서 사실은 명확히 모르는 단어들의 정의를 가다듬는 것에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렌지를 orange로 표기하고 말할 수 있는 영어교육이 아닌, 오렌지의 특성과 범위를 명확히 정의하는 국어교육, 아니 언어교육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런 맥락들로 봤을 때 지금 우리사회에 교육에 있어 필요한 건 영어가 아닌 다른 것들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 없는 명확한 사실이다. 최우선적으로 학문을 대하는 태도가 즐거울수 있도록 바꿔야 하며, 학문이 중요시되는 계층이 바뀌어야 한다. 또한 시험성적이 아닌 앎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현실로 바뀌어야 하며, 토론식교육으로 인한 각 단어들의 정확한 정의가 개개인에게 탑재되어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자연스레 발생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여야 한다. 허나 이런 교육의 본질적인 문제를 전혀 알지도 못한 채 기존의 문제점을 더 심화시켜 반대방향으로 퇴화하는 지금의 교육상황을 보면 이렇게 개탄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최근에 이런 기사를 본적이 있다. 일본은 지금 어린 학생들이 문자와 점차 멀어지는 현상이 발생하며, 학습능력의 저하에 지극히 많은 염려를 하고 있다는 걱정섞인 내용의 기사다.

그에 반해 한국은 애나 어른이건 문자와 멀어져가는 현상이 이미 99년경부터 발생해서 지금은 되돌이킬 수도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본문글 10줄만 넘어가도 길어서 읽기 어렵다고 투정부리는게 일반화되고, 유튜브 쇼츠 아니면 도무지 관심을 안가지는게 일상다반사이다. 이러니 몇백 페이지에 이르는 책은 어떻게 읽어나갈 수 있고, 몇백 페이지에 이르는 이론과 책은 어떻게 써내려갈 수 있단 말인가? 토론을 통해 논술능력을 배양하고, 간편한 논술이 쌓여 한권의 책으로 이어지고, 그 책들이 기존의 이론을 옳바르게 반박할 수 있을 때, 학문의 결실이 있고 배움의 결실이 있다고 본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심각한 상황속에서 오렌지를 오뤤지라고 혀를 굴릴 수 있는게 급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일까? 답없는 교육자들이 어이없게 가르치려 들고 왔으니 그 결과물은 당연한 귀결이다. 교육의 첫 단추부터 완전히 뜯어고치지 않는 한 교육의 의의는 더욱 퇴색되고, 15짜리도 못 읽어내는 바보들이 활개치는 시대로 퇴행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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