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다리 위의 인생

나에게는 인격 형성기인 추억의 고교 시절이 없다.  그래서 이 때문에 고교시절 얘기만 나오면 나는 맨봉상태가 된다. 그런데 며칠전  이어령선생이 경기 고등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던 때에 그의 문하생 이었던 분이 금세기 우리나라 최고의 석학이라 할 '이어령 선생'에 대해 담담히 써 내려간 글을 보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의 국어 선생님이 이어령 교수였단다. 아직 이십대의 천재 선생이 칠판에 두보의 시 (杜甫 詩)를 써 놓고 해설을 할 때면 마치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단다. 경기고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그는 대학으로 옮겨 교수가 되고, 그리고 대한민국의 지성의 아이콘이 되었고, 그리고 2022년 2월에 오셨던 곳으로 귀의하셨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 붙였다.  “그 분은 조선 선조의 암울했던 때의 "이 황"과 "이 이"에 비견 될 만큼 오늘의 대한민국의 정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대한민국의 진정한 석학이셨다." 라고,  나라마다 또는 시대 마다 민족의 나침반이 되어 한 시대를 선도하는 스승들이 있어 왔다. 

일본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개화 무렵 일본의 방향을 서구화와 민족주의로 잡고 국민 교육에 온 힘을 쏟았다. '우찌무라 간조'는 일본인의 정신적 성장을 추구하고 많은 훌륭한 인재들을 양성했다. 나는 이어령 교수를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TV를 통해서 그의 강연이나 시대를 읽는 담론을 종종들은 적은 있었다. 이어령 교수가 대학에서 정년퇴직을 할 때  짧은 소감을 담은 시사잡지를 본 기억이 있다. “나뭇 잎새들이 낙엽이 되면 빨리 줄기에서 떨어져야 하듯이, 사람도 때가 되면 서둘러 물러 나야 한다. 특히 대통령은 헌법으로 주어진 임기를 채우고 나면 미련없이 권좌에서 본래의 자리로 물러나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나아 가고 물러 남의 때를 알라."는 얘기다. 이것이 순리(順理)다. 그래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했다.

벌써 오늘이 9월 초 하루다. 누렇게 익은 들녘의 벼가 알알이 영글어 가고 있다. 나뭇 잎새들도 이제 떨어질 채비를 하는 계절이다. 이 순리를 어기고 홀로 더  남아 있으려는 건 자연의 섭리를 거스리는 과욕인 것이다. 잎새도 돋아 날 때가 있고 져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질 때가 훌쩍 지났는 데도 지지 않고 나목에 누렇게 말라 있는 잎새와 땅에 떨어져 대지를 덮고 있는 잎새들을 보면서 당신은 지금 인생의 어느 계절에 서 있는가? 나도 이제 많이 늙었다. 그래서 종종 나는 아직 내 몸에 윤끼가 있을 때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리기 전에 삭풍타고 곱게 물든 단풍 잎새처럼 세상 풍진을 훌훌 털고 그렇게 가고 싶다. 내가 몸담고 있는 요양원에 오신 분들은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내 옆집에 사는 정노인은 해마다 들깨 농사를 지어 햇볓에 바짝 말린 들 깨 알갱이에 섞인 쭉정이를 골라 낼 때, 선풍기 바람으로 쭉정이를 날려 버리고, 알 곡만 자루에 담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떠나는 이치도 이와 다를게 없으리라! 

나는 이어령 교수를 TV화면을 통해 그것도 일년에 한번 정도 보아왔던게 전부다. 그러나 옛 선현도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듯 학문으로 보는 데는 오늘과 옛이 다를 바 없다. 어느 날 TV에서 본 이어령 교수의 골 깊은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병색이 완연하게 보였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현자(賢子)들은 마지막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을까?  옛날 중국 춘추시대 때 노자(老子)의 스승이 임종에 이르자, 노자가 고종명으로 와서 "스승님 가시기 전에 저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소서" 그러자 스승이 갑자기 입을 쩍 벌리며 "뭐가 보이느냐?" 노자가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그러자 다시 입을 쩍 벌려 혀를 내밀며 "이제 뭐가 보이느냐?"  "예 혀가 보입니다."  "이제 깨달았느냐?"  "예." 노자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강한 이빨은 모두 다 빠지고 없지만 부드러운 혀는 남아 있다."는 가르침이다.

우연히 tv에서 이어령 교수 부인의 이어령 선생에 대한 간증의 말이 흘러 나왔다.  “남편은 항암치료를 거부했어요.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되는데 항암치료를 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거였어요.  남편은 남은 시간을 자기 맘대로 쓰고 싶다고 했어요.  다른 노인들은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을 죽이며 사는데 남편은 마지막 순간까지 할 일이 너무 많았어요. 남편은 컴퓨터로 글을 썼는데 몽테뉴의 '수상록'처럼 날마다 일지를 썼어요.  그날 그날 생각 나는 걸 가장 자유로운 양식으로 쓰셨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부터 손가락에 힘이 빠져 '더블 클릭'이 안되는 거예요. 그러자 남편은 다섯 손가락으로 펜을 쥐고 글을 썼어요.  처음에는 글 사이에 그림도 그려 넣고 그랬는데 점점 손에 힘이 빠지게 되자 종내는 그림도 없어지고 날이 갈수록 글씨도 삐뚤 빼뚤 해졌어요. 점점 몸이 상전이 되더니 결국 건강이 언덕배기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겁니다.” 그는 무너져 내리는 몸을 보고 어떻게 했을까? “남편은 걸으려고 애를 썼어요. 겨우 일어 났다가 몸 갈피를 못잡고 맥없이 주저 앉아 버리곤 했지요.  걸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듯 눈물을 펑펑 쏟더라고요. 나도 같이 눈물을 쏟았지요. 팔고 살수 없는게 나이가 아니 던가! 

이건 이어령 교수 얘기가 아니고 바로 내 얘기다. "그 기억력 좋던 남편이 정신이 깜빡 깜빡하기 시작하자 남편은 치매가 오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또 펑펑 울더라고요. 그리고는 세 발 또는 네 발이 아닌 두 발로 걷는 인간으로 살다 가고 싶다고 했어요.” 그는 학문에만 천재적 자질이 있었던게 아니고 젊은 날 그의 몸은 건강미가 넘치는 쾌남아 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정점의 한 순간에 불과하여 흐르는 세월과 함께 녹이 슬고 부서지는가!  가을 찬 바람에 어느 날 잎새가 붉게 물들어 떨어지듯 그 다음에 오는 죽음을 그는 어떻게 맞이 했을까?  그는 죽음을 이렇게 갈파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 고 그리고 다시 탄생의 그 자리 즉 내가 태어난 태초의 자리 은하계로 돌아 간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의식으로 죽음을 말해왔다며, 진짜 죽음은 슬픔조차 인식할 수 없기에 슬픈 거라며, "​여러분과 함께 별을 보며 즐거웠어요."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선하다. 이제 나는 그 마음을 나누어 가지려고 여러분과 작별한다." 그리고  이어령 교수는 병원 중환자실로 가지 않고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집에서 가족과 함께 했다고 한다.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보통사람 보다 월등한 예술가였지만 죽음 앞에 강인하지 못했고 고통과 죽음을 너무 민감하게 느꼈고 너무 외롭고 두려운 심정을 자신의 글에 그대로 표현했지요. 그리고 남편은 노트에 "내게 남아 있는 마지막 말은 무엇일까?" 라고 썼어요. 그 노트를 다 쓰고 ‘눈물 한 방울’ 이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책을 내려고 했죠. 그런데 원고 스무장을 남기고 하늘 나라로 갔어요.” 

이 세상을 이별하는 고종명 자리에서 마지막 유언을 당신은 뭐라 하시려는가? 일제시대 때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형사부 판사'로 있다가 살인 사건에서 심증만 가지고 피의자를 살인범으로 단정하고 사형을 집행한 후에야 진범이 따로 있음을 알고 후회 막급했지만 그러나 어쩌랴! 그는 결국 이 돌이킬수 없는 실수로 판사직을 벗어 버리고 엿장수가 되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한 이"에 대한 자책을 달랠 길 없어 조선 8도를 떠 돌아 다니며 고행(苦行)을 했지만, 그러나 살생의 번뇌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마침내 그는 중이 되어 금강산으로 들어가 수십년 동안 암자에서 면벽기도를 했지만 이 또한 살인자의 죄업에서 끝내 자유롭지 못했다. '죄로부터의 자유'를 얻지 못한 그는 입적 직전에 이르러 '무(無)'라고 외쳤다. 무슨 뜻인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가 바로 '효봉스님'이다.  '無'자 앞에 '허(虛)' 자를 더하면 '허무(虛 無)'가 되고,  無자 뒤에 '常'자를 더하면 '무상(無常)'이 된다. 

그대는 일생을 살면서 무엇을 얻었고 또 무엇을 깨달았는가? 이어령 선생은 이러한 인생의 근본문제를 이렇게 말했다. "죽은 후의 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죽어봐야 알 것 같다"고 했다. 허기사 옛 날 춘추시대 때 공자(孔子)의 제자 자로(子路)가 孔子에게 묻기를 "사람이 죽은 후에는 어찌 되느냐?"고 묻자 孔子의 대답이  "내가 이러한 인생의 근본문제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朝聞道 夕死可矣)."라 했다. 이어령 교수가 이 땅에서 2022년 2월의 초하루, 겨울 깊숙이 이른 봄 기운의 햇살이 비쳐 들어 온 어느 날, 이어령 선생은 천천히 기우는 석양의 온기를 즐기다가 2022년 2월 26일 정오경, 따뜻한 이른 봄 가족들에게 둘러 싸인 채, 죽음과 따뜻하게 포옹하셨다. 늙음과 병 그리고 죽음 앞에선 누구나 다 언제나 정직해질수 밖에 없다. 이때 나는 문득 함명춘 시인의 '종(鐘) 소리'가 떠 올랐다.  "그의 몸은 '종루'였고 마음은 '종루에 걸린 종'이 되었다. 종은 날마다 종소리로 울려 퍼졌다. 허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종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한 없이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해 흘린 땀 방울과 눈물이 바로 종소리 였기 때문이다  그는 임종 직전까지 자신 을 낮추고 남을 위해 땀 방울과 눈물을 흘렸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주일에 한 번씩 그가 몸소 행했던 그 길을 따라가 보았다. 날이 갈수록 종소리는 점점 더 크게 더 멀리 울려 퍼져 나갔다. 그러나 사실인즉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종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이를 '사랑의 종소리' 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다. '사랑의 종소리'는 매일 매시간 우리의 일생을 통해 우리의 심령속으로 계속 울려 퍼지지만 영적인 귀가 닫힌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듣지 못하거나, 보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하거나 육신의 소욕에 귀가 사나워 지면 들을수 없다.  孔子는 그의 나이 육십에 이르러 서야 "비로소 이순 (耳順)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명나라 시인 진계유(陳繼儒: 중국 明代의 학자) 는 “뒤에야 알았네 (後悔)”라는 詩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너무 경박했음을 알았네
이렇게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 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일을 돌아본 뒤에야 세월을 무의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네. 문을 닫아 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네. 욕심인 줄을 안 뒤에야 이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네. 마음을 쏟은 뒤에야 평소에 마음 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네.” 이처럼 시인은 ‘후회’의 감회를 이렇게  담담하게 전하고 있다.  

흘러간 유행가에 이런 가사가 있다. "돌이킬수 없는 일 저질러 놓고 후회하면서 울어도 때는 늦으리." 후회는 선택한 뒤에 따르는 경험과 연륜에 따른 진솔한  반성, 돌이킬 수 없는 애잔한 마음의 표현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육신의 소욕에서 자유롭지 못한 생각을 하며 사는 우리네들의 삶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대는 지금 연세가 얼마이신가?   

내가 몸담고 있는 요양원엔  지금은 소천하셨지만 이금석 권사님 생전에 어린 외증손녀가 왔었다. 그 증손녀가 할머니 의 연세가 99세임을 알고 이렇게 물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나이가 맛있어?" 지금도 많은 기독인들은 조용한 곳을 찾아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한다. 왜 하나님을 만나려는 걸까? 하나님을 만나야 현재의 나를 알수 있기때문이리라. 만약 누가 "왜 사느냐 고 묻거든 그대의 대답은 무엇인가?" 왜 사는가?  왜 사는지를 알고 나 살고 있는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조용한 곳을 찾아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한다. 그래선지 경기도 가평 적목리 물 좋은 계곡에 가면 서울 지구촌 교회에서 지은 '필그림 하우스'가 있다.  지구촌 교회 설립자가 자신의 노후를 위해 지었다고 소문나 있다. 그리고 근자에 청평호 호수를 아래로 내려다 볼수 있는 물 좋은 곳에 어마무시하게 단장된 현대하우스가 있다. 서울 우리교회 이찬수 목사가 지었단다. 

물론 교회 헌금가지고 지었으리라. 그곳에 빠지면 정말 죽기 싫을 것 같다. 청평 삼회리에 가면 '강남 금식기도원'이 있다. 그런데 기도원장 김성광 목사가 몇해 전 코로나에 감염되어 죽었다. 그래서 기도원에 원장이 없으니 썰렁하다. 왜 그렇게 갑자기 죽음을 맞이 하게 되었을까?  삶이 너무 힘들어서 기도원을 찾아 온 성도들에게 그렇게도 헌금을 강요하던 그는 죽어 어디로 갔을까? 그 기도원 못잊어 어떻게 죽었을까? 이 땅위에서 하나님은 물 좋고 때 깔 좋은 곳에 계시는게 아니라, 하나님은 조용한 곳에 계시는게 아니라 저자거리처럼 민초들의 희노애락이 복작거리는 삶의 현장에 계실 것이다. 하늘에서 오는 지혜는 하늘의 영광과 이 땅의 곤고함 등 이 모든 것에 눈을 뜨게 한다. 

【종그니칼럼】다리 위의 인생

강가에 가면 헤일수 없이 많은 굵고 작은 모래에서 부터,  크고 작은 돌들이 널부러져 있다. 깊은 산속에 박혀있던 바윗 덩이가, 장구한 세월동안 바바람 등 풍화작용에 의해 갈라져 나와, 풍화가 아닌 거센 물살에 서로 부딛혀, 둥글게 둥글게 된 것이다.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지구의 나이를 줄 잡아 24억년 이상으로 보고 있다.   그럼 우주의 나이는 얼마나 될까? 이처럼 우주의 생성과 우주의 이치를 들여다 보는 것은, 피조물 중에 오직 인간 뿐이다. 수명도 백세를 못 넘기고, 체구도 다른 동물들에 비해 직립보행 하는 것 말고는 딱히 나을 것도 없다. 그러나 우주를 가슴에 담고, 우주를 정복하려는 야심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독보적 존재다.

​내가 살고 있는 춘천 서면 박사 마을은, 우선 풍광이 유려하다. 마을 전체가 남향인데다, 앞엔 의암호수가 있고, 뒤엔 나즈막한 야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인구 28만의 지방도시 춘천에는, 땜이 무려 세개나 있다.  그중 소양강 물을 담고 있는 소양댐은, 담수능력이 29억톤으로  동양에서 두번째로 크다.   다음 춘천 땜은, 북한강 물을 담고 있어, 그 길이가 화천 깊은 계곡까지 닿아 있다. 맨 아랫쪽에 있는 의암 댐은, 가히 춘천의 미래라 할만큼 풍광이 뛰어 나다. 그래서 춘천을 '호반의 도시'라 일컷는다. 지금 유럽은 일천년만의 가뭄이라 할만큼 비가 오지 않아, 유럽의 모든 강들이 바닥을 들어내고 있단다. 지구 곳곳에 자연 발화된 산불이, 온 산야를 삼키고, 사막 곳곳에는 물 폭탄이 떨어지고, 이처럼 지구가 병들어 천재지변이 곳곳에서 소출하고 있다. 이같이 대 자연이 숨돌릴 틈없이, 몽니를 드러내니 사는게 숨차고 버겁다.

요즘 비구름이 오르락 내리락하며, 연일 곳곳에 물 폭탄이 떨어지고 있다.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 전역과, 강원도 영서, 그리고 충청도와 호남지역까지, 날마다 혹은 하루 걸러 물 폭탄이 떨어져, 곳곳에 산사태와 물난리가 나서 집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실종되고, 나라전체가 흙탕물에 잠겨 있다.  너 나 없이 수년째 코로나에 지쳐 있는 몸들이, 이번엔 연일 쏟아지는 물폭탄으로 얼이 빠져 있다.  터밭에 심어 놓은 농작물들도, 날마다 쏟아지는 폭우에, 다 녹아 버리고, 참외도 수박도 익기도 전에 썩어 버렸다. 아로니아도 미처 딸 겨를도 없이, 땅 바닥에 새까맣게 떨어지고 있다. 이런 장마속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은, 오직 잡초들 뿐이다. 뽑고 나서 돌아서면 다시 돋는다. 참 대단한 생존력이다.

어린 시절엔 온 종일 뛰고 달려도 지칠줄 몰랐다. 그땐 눈에 뵈는게 다 호기심이었다. 그래서 하라는 것은 안하고 하지말라는 것은 다하며, 청개구리로 자라면서, 얼른 어른이 되면 싶었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 늙어 가면서,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것은 왤까? 그러나 이제 젊은 시절도, 장년의 때도 다 지나가고 나니, 때론 산다는게 고역이다. ​지난 날 종부리듯 하던 몸둥이가 언제부턴가 상전으로 다가와, 갑자기 움직이는게 고역이 되고 있다. 그러니 요양원에서, 움직여 주지 않는 불편한 몸으로 사는, 입소한 노인들의 심사를 이제야 알것다.    어린시절의 호기심도, 젊은 날의 호연지기도, 이젠 다 사라진지 오래다. 늙어 가는 몸둥이가 다시 봄이 올리 없어, 이제 내 본향 길 갈 채비를 하고 있다.

돈이란, 가치수단, 교환수단, 저장수단이 돈의 생리다. 그래서 돈은, 이 호주머니에서 저 호주머니로, 돌고  돈다고 해서 돈이다. 사람들은 이 돈을 붙잡으려고, 눈만 벌어지면 지칠줄 모르고 돈을 쫒아 다닌다. 연애를 해 보셨는가? 연애는, 내가 안달이 나서 쫓아다닌다고 성사 되는게 아니다. 상대가 내게 오게 만들어야 하듯이, 돈도 이와 똑 같다. 이 호주머니에서 저 호주머니로 돌고 도는게 돈이다. 돈의 생리가 이러한데, 무지한 인생들은 이를 모른채, 돈을 벌기  위해 돈을 찾아 헤맨다. 어리석은 자여! 이를 알라! 돈과 여자는 쫓아 다닌다고 잡을수 있는게 아니니, 스스로 내게 오도록 만들라!

돈을 벌려고 돈을 쫓아 다니느라 건강을  잃은 다음,  잃어버린 건강을  다시 되찾으려고, 번 돈을 병원(病院)에다 몽땅 다 갖다 바친다. 이것이 인생이다. 내일의 노년을 염려하다가  오늘을 놓쳐 버리고는,  결국 미래도 현재도 둘 다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평생  "내일은 행복한 날이 떠오를 거야" 하는 미련에 속아서 사는게 인생이다.  절대 죽지 않을 것처럼  살지만, 기껏 90살도 못 살다 갈 것을  알면서도, 욕심때문에 또 속고 사는게 인생이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부자는아주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진 것이 적어도 그것으로 족(足)하며, 현재 있는 것으로 이웃과 나누며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부자인 것을 꼭 기억 해 두어야 한다. 한 겨울 커피를 마시며, 첨엔 뜨거워서 못  마시겠더니만, 마실만하니 금방 식어버린다.  이 것이 인생이다.  열정이 있을 때가 좋을 때이고, 열정이 식어지면, 삶의 의욕도 쫄아든다. 겨울 커피는 따뜻할 때 마시는 것이 좋듯, 인생은 지금 이 순간을  즐겁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다.  우리는 친구를 서로 의지 할 때쯤, 친구를 잃을 때가 많고, 부모의 참 사랑을 알때 쯤,  부모는 곁에 계시지 않는다.  나를 알지 못하고 세상에 묻혀 살다가, 인생을 알때 쯤엔, 이미 모든 걸 잃고난 후 일때가 많다. 흐르는 강물처럼, 시위 떠난 화살처럼, 가는 세월을 붙 잡을 수는 없다. 이제 인생 여정의  남은 날이 많지 않음을 알자! 어차피 지나가야 할 '다리위의 인생'이라면, 이 다리위를 지나게 되면,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살아야 하지않겠는가?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대중교통처럼 이용하지만, 대부분은 저그들이 갈 길을 찾아 갈 때에만 탄다. 어리석은 자여!  이제 그만 별세를 준비하자!

 

<저작권자 © 리폼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리폼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