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엘 비키, 폴 스몰리 저, 마르투스 출판부 역(마르투스, 2018
고경태 목사(기독교진리수호연구협회)
2021년 11월 22일, 기독교진리수호연구협회(대표 림헌원 목사)에서는 회심준비론에 관해서 찬반토론회를 공개적으로 개최하였습니다. 찬성토론자와 반대토론자로 토론을 수행하였지만 양측의 입장만 확인할 뿐 명료한 명제를 만들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공통 접점에서 시작하지 않고 자기 견해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조엘 비키와 폴 스몰리의 <은혜로 말미암은 준비>를 놓고 토론했다면 좀 더 빠른 이해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토론과 별개로 <은혜로 말미암은 준비>(약칭 은준론)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제언하여, 회심준비론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은준론>에 대해서 독서한 후기를 보고하여 회심준비론과 <은혜로 말미암은 준비>를 이해하는 것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준비론의 모든 내용이 <은준론>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준비론을 주장하는 분들의 기본도서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책의 내용보다 포괄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을 시도합니다. 그것은 조엘 비키와 폴 스몰리가 인용한 1차 문헌에 대한 면밀한 검토까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키와 스몰리의 연구 능력은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특수성이 있다는 것을 밝히면서 내용을 개괄적으로 이해할 것을 제언합니다.
첫째, 조엘 비키는 미국 CRC 교단 사역자이고 폴 스몰리는 Grace Immanuel Reformed Baptist Church의 목사이고 비키의 조교이며 침례교 목사입니다. 그들이 CRC 교회를 위해서 이 책을 저술했는지, 퓨리탄리폼드(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의 단순 연구 저작인지, 미국 교회 전반에 대한 것인지, 미국 사회의 개혁을 위한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필자는 <은준론>은 미국 사회와 미국 교회의 문제에 대한 한 해결방안을 연구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장로교회(서부와 동부 웨민)도 조엘 비키와 유사한 관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CRC(개혁파)와 장로파가 미국 초기 교회인 회중파에 대해서 우호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첫도시는 제임스타운(Jamestown, 1607년 건설),은 영국국교회적 성향이고, 둘째 플리머스(Plymouth)에 도착한 청교도(1620년)가 회중파입니다. 후발 주자로 아메리카에 들어온 장로파는 먼저 도착한 청교도의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필라델피아에서 프랜시스 멕케미(Francis Makemie, 1658-1708) 목사를 중심으로 1706년에 장로파 독노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멕케미 목사는 1683년 스코틀랜드에서 식민지 메릴랜드(Maryland)에 도착하여 Rehoboth 지역에서 여러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저는 비키와 스몰리가 미국 교회와 미국 사회의 회복, 탈기독교 사회에서 기독교 사회로 회복을 위해서 이 저술이 기획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의도가 선함이 반드시 선한 목적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근거와 과정도 합당해야 합니다. 신학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신학함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것을 싫어할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합당한 방법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을 것입니다. 비키와 스몰리는 미국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이 추구했던 준비”를 다시 제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연구에서 한국 사회나 한국 교회에 대한 배려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연구자들은 미국 사회를 향하여 외치는 미국 사역자의 연구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입니다. 미국 사회에서 청교도는 근원적 정신 가치로 거의 절대적인 가치를 갖고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플리머스 청교도는 종교의 자유를 찾는 헌신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즉 대한민국 사회의 국가 가치를 뉴잉글랜드 퓨리턴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또한 대한민국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서 미국 청교도의 사례를 직접 대입시키는 것은 부당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교회에도 문제가 있는데, 문제 원인을 명확하게 진단하고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준론> 저자들은 자기 역사의 기원 정신을 회복하여 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은준론>을 보면서 미국 교회사에 대한 이해가 정확하지 않다면 파악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 교회사와 미국 장로교회사는 갖지 않습니다. <은준론>에서는 수 많은 청교도 신학자(뉴잉글랜드 신학자)들이 등장합니다. 회중파 교회의 사역자들입니다. 그들에게 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잉글랜드 캠브리지 대학교 출신들이 90%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잉글랜드가 대륙은 아니지만, 잉글랜드에서 뉴잉글랜드로 온 신학자들은 캠브리지 출신이 절대다수였고, 그들이 세운 학교가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예일 대학교를 졸업하여, 잉글랜드 퓨리턴이 아닌 캠브리지 출신의 뉴잉글랜드 퓨리턴의 후예가 되었습니다. 장로파 사역자 멕케미 목사는 글래스고 대학 출신입니다.
* "Nonconformists"(국교회거부자)는 포괄적으로 청교도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좀 더 좁게는 잉글랜드 장로파로 분류할 수 있겠습니다. 반대파(Dissenters) 비키와 스몰리는 밝히지 않지만, 뉴잉글랜드 퓨리턴은 분리파 청교도(separating puritans)입니다. 그들은 "Separatists"(분리파),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 1550-1633, 캠브리지 출신)을 따랐기 때문에 브라운파(Browinsts or Barrowists, Henry Barrowe (c.1550–1593))로 불리기도 합니다. 청교도는 수 많은 분파를 갖고 있지만 크게 분리파와 비분리파로 구분하여, 잉글랜드에 잔류한 청교도를 비분리파로, 뉴잉글랜드 이주한 청교도를 분리파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잉글랜드 청교도(독립파)는 1662년 챨스 2세로 왕정이 복고되면서 국교회의 저교회(low church)로 편재되었습니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는 1648년 캠브리지 선언을 하면서 회중파로 형성되었고, 새빛파(New Light)와 구빛파(Old Light)로 분리되었고, 유니테리언을 수용하면서 유니테리언 교회로 전향한 세력도 있습니다. 뉴잉글랜드는 독립하여(1776년 7월 4일) 아메리카 연방을 형성하였고, 1861년 남북전쟁을 통해서 대변혁을 이루었습니다.
초창기 뉴잉글랜드 신학자들은 후천년기적 종말론 체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뉴잉글랜드에 나갔던 장로교 신학자들에게서도 후천년기적 종말론과 상식철학적 학문 체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후천년기 종말론의 문제점은 사회에 대해서 낭만적 사고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1648년 분리파 청교도들은 회중파 정치 원리에 입각한 교회를 설립할 것을 천명한 “캠브리지 플랫폼(Cambridge Platform)”을 선언하였는데, 선언서 내용에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대한 불편한 감정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회중정치(Congregationalism)를 명확하게 선언하였습니다. 반면에 1658년에 작성된 잉글랜드 퓨리턴(독립파)의 사보이 선언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수정하는 항목이 있습니다.
분리파 청교도는 1620년에 플리머스에서 출발하지 정착한 곳을 플리머스라고 하였고(뉴잉글랜드 청교도), 장로파는 스코틀랜드 지역 사역자들이 이주하여 1706년에 독노회를 설립하였습니다. 1646년에 WCF가 적성되었고, 1648년 잉글랜드 의회가 채택했고, 1648년 뉴잉글랜드 회중파는 캠브리지 플랫폼(Cambridge Platform)을 선언하였습니다.
셋째, 비키와 스몰리는 로마 카톨릭 혹은 알미니안의 준비주의(preparationism)와 청교도의 준비(preparation)는 전혀 같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준비주의은 인간에 의한 준비이고, 준비론은 "성령에 의한 준비"라고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키와 스몰리는 성령의 “일반적 은혜” 사역으로 연결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중생 전 자연인"을 준비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준비 사역을 교회의 강단에서 진행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 강단에서 선포된 메시지의 성격에 대해서 확인해야 할 부분입니다. 교회 사역자가 강단에서 선포하는 것이 중생되지 않은 불신자에게 하는 것인가? 중생한 신자에게 하는 것인가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천주교나 알미니안은 전 과정을 구원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구도이며, 준비론에서 구원 과정을 어떻게 보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와 알미니안은 전 과정을 구원으로 보기 때문에 성도의 견인 교리(구원의 확실성)가 없습니다. 준비론에서는 준비 과정을 통해서 중생된 신자에게 견인 교리가 있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은준론>에서는 중생 전에 준비에 대한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 준비 이해는 두 종류가 있는데, 첫째 중생 전 준비이고, 둘째 중생 후 종말의 심판을 준비하는 구도입니다. 비키와 스몰리는 중생 전 준비이고, 로마 카톨릭이나 알미니안도 중생 전 준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식교에서는 중생 후 종말을 준비하는 도식을 갖고 있습니다. ‘준비’라는 어휘는 기독교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어휘인데, 비키와 스몰리는 성령의 일반 사역으로 분류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넷째, “성령이 준비케하는 사역을 율법으로 진행한다는 것”이 비키와 스몰리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율법, 몽학선생(노예교사)의 기능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도 한 특징입니다. 분명하게 갈라디아서에서 몽학선생 기능이 중지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비키와 스몰리는 율법의 기능, 몽학선생의 기능을 주장할까요? 그것은 "성령의 일반 사역"으로 율법을 말하기 때문에 일반적 기능으로 몽학선생의 기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law), 법(law), 국가법(law)에 대한 개념이 서양에서는 상대적으로 느슨합니다. 기독교 사회에서 국가법은 성경의 법체계와 간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뉴잉글랜드에서 법은 성경의 법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기독교 사회에서는 일반법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되도록 인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8세기 정교분리 사회에서 일반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것은 부당하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 원숭이 재판 이후에 미국은 탈기독교 현상이 현격하게 발생하였고, 1960년대 케네디의 정교 분리 정책으로 학교에서 십계명 조형물이 제거되었습니다.
2000년대 미국 사회에서 국가 기원이었던 뉴잉글랜드 신학에 대한 반추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회는 비기독교 사회이며, 불교적이고 유교적인 사회입니다. 사회는 성경의 법과 전혀 접점이 없는 공간입니다. 그 공간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교회는 항상 문제가 있습니다. 위선자, 연약한 자, 갈등 등 다양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교회는 유대 사회에서 기독교가 형성되었고, 유럽은 기독교 사회인 로마 제국의 연속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전혀 생소한 문화 위에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늦게 기독교를 접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는 일반 교육이나 사회 체계에서 기독교인을 세우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 사회에서는 교육 체계 등을 통해서 기독교인을 세우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은준론>은 기독교 사회에서 비롯된 매우 이상적인 체계에 대한 상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에 대한 해결로 <은준론>을 도입하려할 때에 설교하는 대상에 대한 명확한 설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다섯째, <은준론>에 등장하는 많은 위인들은 잉글랜드 캠브리지에서 수학한 인재이며, 뉴잉글랜드에서 사역한 회중파의 사역자들입니다. 그런데 반복되는 내용은 “회심을 경험하였다는 보고”입니다. 회심 경험은 주관적이며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주관적 주장을 객관적으로 수용할 때는 엄격한 구도가 필요합니다. 회심하였다고 주장하는 주장을 타당하게 수용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회심에 대해서 주장하는 이유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회심 경험이 있기 때문에, 너도 회심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회심에 대한 주장하기 보다, 자기가 믿는 믿음의 주를 고백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여섯째, 비키와 스몰리는 준비론과 율법폐기론을 대립하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율법폐기론의 대표자로 앤 허친슨(Ann Hutchinson, 1591-1643)을 제시하는데, 앤 허친슨의 판단에 대한 역사적 사실만을 언급할 뿐 명확한 판단을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앤 허친슨은 뉴잉글랜드의 그릇된 판단의 한 유형이고, <주홍글씨>의 이야기 소재이기도 합니다. 비키는 허친슨을 율법폐기론자로 규정하면서도 당시 상황을 담담하게 진술할 뿐입니다. 율법폐기론을 비판하면서도, 허친슨에 대한 비판은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습니다. 회중파의 새빛파에서 극단적 신령주의와 율법폐기론을 비판했는데, 비판은 정당하지만, 실제 그 주장을 하는 사역자에 대한 평가는 별개 문제일 것입니다.
또한 율법폐기론(antinomianism)으로 상대를 논박하면 상대방에서는 신율법주의(neonomianism)로 논박하게 되는 구도가 됩니다. nomism(신율주의), 1970년대 언약적-신율주의(covenantal nomism)가 등장하였습니다. 율법주의는 legalism이라고 합니다. 신율법주의로 평가된 신학자는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입니다. 백스터는 제한속죄에 대해서 긍정적이지 않았습니다. TULIP에서 제한속죄를 부정하는 경향과, 견인 교리(구원의 확실성)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경향을 가지면서 개혁주의라고 주장하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또한 WCF에 대해서 수정을 가하면서도 개혁주의라고 하기도 합니다. WCF를 표준문서로 채택하는 교파는 장로파입니다. 장로파는 개혁신학의 핵심 교파입니다. 회중파는 최소한 WCF의 교회 규정을 채용하지 않습니다.
<은준론>에서 제시하지 않지만, 18세기 스코틀랜드에서 발생한 매로우 논쟁(Marrow Controversy)도 신율법주의와 율법폐기론 논쟁의 일환입니다. 스코틀랜드 총회는 토마스 보스톤 등 매로우파를 율법폐기론적으로 정죄하였습니다. 총회와 매로우파의 논쟁 그리고 직분자 추천권 문제(patronage)로 자유교회(free church)가 형성되었습니다.
17세기 잉글랜드 존 오웬은 리차드 백스터를 신율법주의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은준론>에서 잉글랜드 퓨리턴의 황태자 존 오웬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특징일 것입니다. 청교도에서 존 오웬이 등장하지 않으며, 윌리엄 퍼킨스는 기원격으로 세우고 있습니다.
일곱째, 저는 비키와 스몰리의 연구에 우려를 표현합니다. 그들은 준비론이 미국 교회에 매우 시급한 과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미국 교회와 사회를 좀 더 개혁하기 위한 좋은 의도입니다. 그리고 뉴잉글랜드 신학자를 총합시킨 작품이기도 합니다. 비키와 스몰리는 청교도의 세부적 방법까지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44쪽). 그리고 준비론이 남용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합니다(43쪽). 매우 객관적이고 겸손한 자세처럼 보일 수 있지만, 교회의 가르침에서 취하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형법에서도 열 사람의 죄인을 놓치는 것을 허용하면서도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정죄하지 않도록 하는 매뉴얼을 작성하고 진행합니다. 그런데 종교의 가르침을 규정하면서 남용을 예측하면서 진행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것도 영혼을 절망에 빠뜨릴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 예측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가 될 수 있는 것도 밝히는데(43쪽), 율법주의는 이단(다른 복음)입니다. 더 위험한 발언은 "그분을 믿는 믿음을 방해할 수도 있다"(43쪽)는 것입니다. 믿음에 위해가 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인지하면서도 교회에 필요한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쉽게 납득할 수 없습니다. 교회 교리가 예측하지 않은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지만, 문제점을 인지하면서도 가르침을 진행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측한 문제점은 전혀 가벼운 일들이 아닙니다.
여덟째, 비키와 스몰리의 독서 능력은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밝히기도 합니다(44쪽). 그런데 그들은 "청교도 저서들에 나타난 영적인 달콤함"을 사용합니다. 달콤함은 신학자들이 사용하는 어휘인데, 하나님의 신비, 복음에 부착시키는 어휘인데, 그들은 청교도 신학 저술에다 부착시켰습니다. 달콤함은 복음, 성경(참고, 시 119편)에 부착하여 극찬하며 복음에 정진하는 어휘입니다. 비키와 스몰리는 칼빈이 사용한 suavitas(sweetness)를 청교도 저술에 부착시켰습니다.
아홉째, 비키와 스몰리는 "청교도들이 성령께서 죄인을 회심시킨다고 믿었다"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인데 명확한 명제화는 어그러짐을 나오게 할 것입니다. 불완전한 명제에 동의하면 그 유도에 들어가게 됩니다. 죄인의 구주는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비키와 스몰리는 회심시키는 성령과 죄인을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명확하게 구분하게 됩니다. 그것도 중생(구원) 전에 성령의 사역입니다. 중생 후의 성령의 사역까지 구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은준론>에서는 구원 후의 성령의 사역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오직 중생 전의 회심을 위한 성령의 일반 사역, 율법의 역할, 죄를 확신하는(conviction) 것에 착념되어 있습니다.
열째, 준비론(prepration)의 문제점은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가시적으로 식별이 가능하다는 것과 단계"입니다(48쪽). '단계'에 대해서는 율법주의, 알미니안과 같지만, 비키와 스몰리는 은혜로 얻은 구원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48쪽). 복음에서 '단계'를 주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교회에서 두 교회 체계가 등장할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가르치는 교회와 듣는 교회로 두 교회주의입니다. 그리고 세례와 견진례로 구분하여 진행합니다. 그런데 청교도들도 "단계와 가시적 식별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결코 쉽게 용납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성령이 진행하는 준비 사역을 사람이 가시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비키와 스몰리는 성령의 일반 사역으로 준비론을 규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준비론은 중생 전에(성령의 일반 사역으로 율법을 통해서) 준비하는 사역이 됩니다. 또한 그들이 준비가 되었다는 가시적 평가를 위한 식별도 가능하고, 그것을 식별하는 인격이 있기 때문에 단계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가시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도 드러내놓고 주장하지 않으며, 알미니안도 그렇습니다. <은준론>에서는 "준비가 되었다 혹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판단을 하는 "실제 주체와 시행 주체"를 정확하게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준비가 되었다는 회심 체험과 그 보고를 듣고 평가하는 인격 주체가 누구인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열한째, 비키와 스몰리는 "페리 밀러, 노만 페티트, 로버트 켄달"의 주장을 전적으로 반대하면서 논리를 진행합니다. 페리 밀러와 노만 페티트의 주장에 대해서 거부하면서 진행하는 것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페리 밀러의 주장을 반박한 체계를 밝힌 미국의 대표적 학자는 리차드 멀러입니다. 밀러 테제(Miller Thesis)과 멀러 테제(Muller Thesis)로 대조됩니다. 비키와 스몰리는 멀러 라인으로 멀러 테제를 갖고 연구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페리 밀러와 노만 페티트가 이전 학자이기 때문에 새로운 이론이 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학문 이론은 또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을 개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론을 제안한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비키와 스몰리가 미국 초기 회중파 신학에 대한 로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을 설립한 정신이 청교도 정신이라는 것을 부각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엄격한 종교 활동을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CRC 계열 사역자가 뉴잉글랜드(회중파) 신학을 적극적으로 채용하는 것에 대해서 대한민국 장로파 교회는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입니다. 교회 정치(행정)는 보이지 않는 진리가 구현되는 실제입니다. 교회에 부여된 진리는 주 예수께서 위탁하신 생명의 복음입니다. CRC 사역자(네덜란드 개혁파)가 잉글랜드 퓨리턴, 그리고 뉴잉글랜드 퓨리턴의 신학을 적극 채용하는 신학적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혹자는 아 브라켈(Wilhelmus à Brakel, 1635-1711)을 근거로 두기도 합니다.
우리는 페리 밀러, 노만 페티트, 로버트 켄달의 저술을 정확하게 분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2차 저술에 근거하여 상대를 규정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단의 결정에 의한다면 직무적 양심으로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비키와 스몰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어떤 연관 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학술적 그리고 양심적으로 위배가 있습니다. 저는 칼 바르트의 신학을 배격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박형룡 박사와 서철원 박사의 가르침을 따름이며, 칼 바르트의 저술을 그 신학관에 입각해서 비판적 독서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종성 교수의 가르침을 따라서 칼 바르트의 저술을 인정한다면 직무적으로 정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비키와 스몰리의 분석을 인정하려면 페리 밀러의 저술에 대한 분석이 병행하여 베키와 스몰리의 분석의 정당성을 먼저 결정해야 합니다. 1차 저술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필요합니다. 박형룡의 제자라고 주장하면서 칼 바르트에 대해서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으며, 박형룡의 제자이면서 칼 바르트의 신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제시해야 합니다. 박형룡 박사는 벌코프 신학을 채용하면서도 종말론에서 왜 역사적 전천년기론을 취하는지에 대해서 선교사(이눌서, William D. Reynolds)의 가르침을 연속함으로 말씀했다고 저는 들었습니다. 이상웅 교수는 이눌서 후임인 구레인 선교사의 무천년기론 종말론 이해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총평 : 비키와 스몰리 가 “은혜로 말미암은 준비”를 주장하는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성령의 일반 사역(율법)을 주일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에서 시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설교는 구속의 말씀으로 성령께서 조명하는 구원의 사역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령의 일반 사역으로 분류시킨 것은 교회와 사회(특별계시와 일반계시)의 구분을 약화시키는 한 폐단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가 나올 수 있는 이유는 상식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보편주의"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반계시로 구원에 이른다고 말을 하지 못하고, 회심 직전까지 인도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방법에 대한 청교도 고찰”이라고 저술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일반 사역(은혜)로 진행하는 준비는 청교도 사역자, 그리고 비키와 스몰리의 독특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합리성에 의한 교육 체계의 가능성을 개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성과 계시 문제, 국가와 교회 문제는 종교개혁 후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입니다.
둘째, 준비된 상태를 파악해야 하며, 준비가 완료된 자와 준비가 진행 중인 자를 분류하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강단에서 두 상태에 대해서 어떻게 배려해야 할지 모르게 되며, 준비된 자에게 준비를 가르치는 부당함이 발생합니다. 주일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을 구원(회심하지 않았다는) 전의 준비 상태로 파악한다는 설정은 좋은 자세가 아닙니다.
셋째, 앤 허친슨에 대해서 명확한 제시가 없습니다. 앤 허친슨을 정죄한 당시 재판관에 대해서도 명확한 제시가 없습니다. 준비론을 말하려면, 율법폐기론의 부당성을 말하려면, 앤 허친슨에 대해서 명확한 거부 의식을 표현해야 합니다. 율법폐기론은 거부하면서, 앤 허친슨에 대해서 침묵하는 방식은 시대의 조류에 대한 인식을 하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넷째, 준비에 대해서는 WCF나 39조 신조에서 명백하게 거부한 문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그 문장을 다른 각도로 해석하면서 인정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준비는 회심 전 상태에 대해서 진행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회심전 상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심은 명확하겠지만, 구체적인 구도를 파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긴 문장을 읽어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 글도 길게 느낄 수 있습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비키와 스몰리는 미국 사역자로서 미국 사회와 교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위한 노력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고, 그 작품을 한국 사역자가 한국 사회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모두 청교도(뉴잉글랜드)와 다른 교파 사역자인 것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저작권자 © 리폼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