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WEA의 실체①】전기복음주의와 후기복음주의

2021-09-04     리폼드 투데이

 

예장합동총회(총회장 소강석 목사)는 얼마 전에 3차례에 걸친 WEA 공청회를 개최하였다. 제105회 총회 WEA연구위원회(위원장 한기승 목사)가 주관하고, 주제는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본 WEA와 교류,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3차례의 공청회는 찬반으로 나누어 입장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WEA와의 교류를 찬성하는 입장의 발제자들은 ‘WEA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으므로 가입(교류)해도 변질을 염려하는 것은 기우에 불과하며, 협력관계 안에서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이다. 왜냐면 WEA 홈페이지 첫 화면에서 보듯이 WEA는 "복음주의자들과 함께 협력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공청회에서 WEA와의 교류를 반대하는 발제자들은 ‘WEA는 혼합된 신복음주의 신학이기에, 개혁주의 신학과 양립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여기서 공청회의 핵심은 ‘개혁신학의 관점’이다. 예장합동총회는 개혁주의 신학 과 신앙의 토대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예장합동 소속 목회자라면 여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역사적 개혁주의는 정통 칼빈주의로 이 신학은 어떠한 형태로든 양보하거나 타협이 불가한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는 1959년 11월 27일 제44회 총회에서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NAE도 탈퇴한다고 결의하였다. 합동교단은 그 이후 총회에서 위 원칙에 입각하여 교류를 추진해왔고 단 한번도 이 원칙을 위반한 적이 없다. WEA는 NAE의 발전된 기구이며 WEA의 가장 중요한 하부조직이다. 그러므로 NAE 탈퇴 결의는 곧 WEA 탈퇴를 의미한다.

WEA 홈페이지에 복음주의자들과 함께 협력을...이라는 정체성이 표기되어 있다. 

WEA(세계복음주의연맹)은 홈페이지 첫화면에 나타나듯 ‘복음주의’를 내세우기 때문에 명칭의 혼동으로 신학의 정체성을 숨기고 있다. 따라서 복음주의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어야 WEA가 말하는 복음주의가 무엇인지, 그 실체를 알 수 있다.

복음주의는 전기복음주의와 후기복음주의로 나눌 수 있는데, WEA는 후기복음주의 다른 말로 신복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WEA 실체를 밝히기에 앞서 여기서는 전기복음주의와 후기복음주의에 대해 알아보고, WEA가 추구하는 후기복음주의 즉 신복음주의가 어떤 신학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전기복음주의(정통개혁신학)

전기복음주의 신학에 대해 살피려면, 먼저 복음주의 신앙운동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주의가 신앙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또 신앙운동가들의 신학 사상이기 때문이다.

1) 신앙운동

복음주의 신앙운동은 독일에서 루터교(국교)를 갱신하려는 경건주의(필립 스페너, 헤르만 프랑케, 모라비아인과 진젠도르프 백작)가 시작하였다. 이 영향으로 영국 성공회(국교)를 갱신하려는 청교도 경건주의(존 브래드포드, 존 후퍼)로 이어진다. 또 요한 웨슬리가 모라비아인들의 집회에서 회심을 체험하고 ‘홀리클럽(The Holy Club)’의 멤버 조지 휫필드와 부흥주의 운동을 펼친다.

마지막 청교도인 조나단 웨드워드가 부흥주의의 영향을 받아 영적 대각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복음주의 신앙운동이 회심과 내적 경건운동으로 영미를 비롯해 남미와 아프리카로 확산된다. 여기까지가 전기복음주의에 해당된다.

이후 영적 대각성운동은 대표적으로 빌리 그래함을 통해 실용주의 노선으로 변경되고, 오순절 운동(은사신비주의, 기복주의, 교회성장학, 신사도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후기복음주의에 해당된다.

2) 신학

계몽주의 이후 ‘이성’이 신학의 심판관이 되었다. 이를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한다. 이 자유주의 신학이 영미까지 영향을 미쳐 정통신학들을 하나하나 짓밟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파를 망라해 신앙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묻고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중심에 구 프린스턴의 아치볼드 알렉산더, 찰스 핫지, B. B. 워필드, 그레샴 메이쳔, 코넬리우스 반틸 등이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감당했다. 1929년 메이쳔과 그의 동료들은 좌경화된 프린스턴신학교를 떠나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웠고, 미국장로교단(PCUSA)에서 면직된 후 1936년 동료들과 함께 정통장로교회(Othodox Presbyterian Church: OPC)를 설립하여 자유주의의 거센 도전에 굴하지 않고 정통개혁주의 신학을 지켜냈다.

메이쳔은 당시 상항이 절박했기 때문에 근본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성경의 기독교를 받는다는 표준에서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자로 인정받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예장합동 교단이 물려받은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는 전기복음주의자, 곧 핫지, 메이쳔, 워필드, 발코프, 박형룡, 박윤선으로 이어지는 칼빈주의 정통 개혁신학이다.

2. 후기 복음주의(신복음주의)

1) 급진적 근본주의

이성을 중심으로 한 철학사상과 과학주의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 때문에 칼 매킨타이어가 중심이 되어 반이성, 반과학, 반문화를 표방하는 급진적 근본주의가 발생하게 되었다(ICCC, 성경장로교회). 하지만 급진적 근본주의 운동은 정통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결국 이러한 신앙운동은 주류 개신교 교단의 위치에서 물러나 개신교계의 하위문화로 위상이 약화되었다.

2) 신복음주의의 등장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와 급진적 근본주의 양극단을 모두 비판하며 새로운 신학적 모색을 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시작은 회중교회 목사인 헤롤드 오켄가(Herald John Ockenga)가 뉴잉글랜드 협회(NEF)를 설립하면서이다. 이 협회로부터 전국복음주의협회(NAE)가 창설되고, 오켄카는 자신들이 주창하는 신학운동을 ‘신복음주의(new evangelicalism)’라고 했다.

오켄가는 NAE가 ‘넓은 장막을 펼친 복음주의’를 표방하며 “본질적인 것은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은 자유를, 모든 것에는 사랑을”이라는 구호를 토대로,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았고, 개혁주의(칼빈주의) 교회들, 알미니안주의와 웨슬리 교단들, 다수의 성결교단과 오순절 교단들을 가입시켰다. 그리고 자신들의 신학의 요람으로 풀러신학교를 설립했다.

오켄가와 함께 신복음주의의 대변자로 칭함을 받는 빌리 그래함, 「Chistianity Today)」의 편집장인 칼 헨리, 오켄카 뒤를 이어 풀러신학교의 2대 학장이 된 에드워드 존 카넬이 초기 신복음주의자들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메이천의 제자인 칼 메킨타이어가 급진적 근본주의자였다면, 메이천의 제자인 해럴드 오켄카는 신복음주의자가 되었다. 대표적인 신복음주의자를 배출한 학교로 휫튼 대학교를 2차 대각성(찰스 피니)의 영향을 받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세웠다. 이 학교 출신 고든 클라크, 칼 헨리, 에드워드 J. 카넬, 빌리 그래함, 역사학자 마크 A. 놀이 신복음주의를 주도했다.

3) 신복음주의의 성경관

박형룡 박사는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고, WCC의 사회복음 운동을 따라가며, 과학의 빛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신복음주의는 허울 좋은 이름이고 실제는 ‘신자유주의 운동’이라고 했다. 로이드 존스 박사도 “신복음주의라고 하는 것은 더는 옛 복음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라고 했다.

3. 신복음주의 문제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는 우리는 신복음주의자들과 함께 할 수 없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성경에 대한 태도에 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분리했다. 존 카넬은 초기에 핫지와 워필드의 가르침을 고수했다. 그러나 풀러신학교의 ‘성경무오설 논쟁’ 후에 ‘성경의 무오성’에서 후퇴했다. 이는 정통 개혁주의 신학이 ‘유기적 축자영감’에서 ‘축자(逐字)’ 즉 문장과 단어에 이르기까지 영감되어 무오하다는 것을 제거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고등비평도 성경의 증언 즉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에 분명한 반대를 포함하지 않는 한 수용해야 한다고 하며, 또한 무신론적 자연과학에 굴복하여 유신 진화론을 주장했다.

클라크 H. 피녹은 “성령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성경의 사본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라도 구원을 주는 믿음을 일으키신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경 영감에는 불합리성과 모순이 없다”라고 주장한다. 버나드 램도 이성을 신뢰하므로 과학과 성경의 조화를 끊임없이 모색하였고, 끝내는 칼 바르트에게서 자신의 성경관을 의탁했다.

WEA는 첫 번째 신앙 진술에서 성경의 ‘무오(inerrancy)’ 대신에 ‘무류(infallible)’를 채택했다. 여기서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분리하는 그들의 신앙을 볼 수 있다.

‘성경이 모든 하나님의 지식의 원천일 뿐 아니라 모든 신지식의 바름과 거짓 여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시금석이며, 재판관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정통 개혁주의자들에게, 성경 무류의 입장은 용납할 수 없는 신학인 것이다.

4. 나가는 글

복음주의 역사신학자 이재근 교수는 ‘WEA는 미국의 신복음주의자들이 세운 NAE 같다’라고 했으며 문병호 교수도 ‘NAE는 WEA라는 세계적 조직의 지역적 구조’라고 했다. 박형룡 박사도 ‘NAE가 WEA의 지역단위로서 신복음주의의 조직적 전선 역할을 한다’, “WEA는 사이비 보수주의자 단체이며 새로운 이단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WEA가 우리 교단이 지켜오고 추구하는 신학적 입장과 크게 다른 점이 없다는 일부 총신대 교수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다. WEA를 주도하는 신학자들은 신복음주의자들이다. WEA 교류 및 가입을 찬성하는 자들은 끊임없이 WEA의 ‘신앙진술(7항)’이 복음주의와 다름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이는 신복음주의 신학이 변질한 신학인데도 복음주의와 다름 없다,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신복음주의자라는 것을 천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들은 정통개혁신학을 근거로 신복음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가입이나 교류가 불가하다는 주장에 대해서 오히려 ‘근본주의’ 혹은 ‘분리주의’라고 매도한다. 이는 마치 한국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우리 교단을 향해 쏟아냈던 비난과 다르지 않다.

“WEA와 교류를 반대하는 것은, 신복음주의 신학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