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홀로서기

【종그니칼럼】권력의 생리

2024-07-22     김종근 목사

나는 지금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행복을 손에 쥐어 주어도 진정한 행복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돈을 손에 쥐어 주면 오만 상을 찌프리고 있던 사람도 얼굴 빛이 밝아진다. 그럼 생명 없는 돈에 행복이 있어서인가?  내가 옛날 청년의 때에 서울 을지로 5가에서 성남시로 가는 뻐스 요금 50원이 없어서 쩔쩔매던 때가 있었다. 약국에 들려 오십원을 빌려주면 내일 와서 갚겠다며 사정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그래 50원이 없어서 구걸을 해?" 이런 맘이었으리라. 하는수 없이 파출소를 들려 순경에게 얘기했더니 그 순경에게 무슨 진술을 하던 40대 쯤 되어 보이는 이가 선뜻 50원을 내게 주었다. 나는 약속대로 다음 날 그 파출소로 음로수 몇병을 사들고 가서 50원을 갚았다. 그때 나는 50원의 위력을 알았다. 그리고 무의탁 양로원을 하던 그 때는 예순 다섯 분의 어르신들을 모시면서 한끼 한끼가 참 절박했었다. 모든 것이 자비량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무능해서 나라로부터 단돈 10원의 후원금도 받아 보지 못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가평 설악면을 잠시 볼 일이 있어 들렀다가 양로원으로 오는데 부동산을 하고 있는 이가 나를 부르더니 나더러 '부동산 매매계약서'를 써 달래서 써 주었더니 사례비 20만원을 주었다. 아마 내가 무의탁양로원을 하니까 그렇게 도움을 준 것이다. 그 돈으로 청평 농협 마트에서 양로원 식자재를 사려고 차를 주차시키다가 남의 차 앞 밤바와 부딛쳤다. 상대방 차주가 20만원을 요구해서 반찬 사는게 물거품이 된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렇게 어렵게 양로원을 운영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섬기는 어르신들에게 식재비 살 돈이 없어서 끼니를 거르게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게 있었다. 사정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면 이 돌파구를 뚫고 나갈 방법을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하는데 인간의 방법을 통해서 이 난관을 풀어가려 했었다. 무의탁 양로원을 세우신 이가 하나님이신데 나는 '세운자도 나요 운영자도 나'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독불장군처럼 기도가 식어 버린 내 손에 무슨 은혜의 식량이 나오겠는가? 양로원 운영이 날이 갈수록 어려워 지면서 내 힘으로 하는 것이라는 자만을 철저하게 꺽으셨다. 차분히 문제를 풀어 갈 생각보다 손 쉬운 방법을 찾다가 사기꾼들의 소굴인 서울 종로바닥을 알게 되었다. 쑥맥인 나는 그들이 들려주는 얘기들을 그대로 믿었다 그들 중엔 장관출신도 있고 장성출신도 있다고 하니 참 요지경속이었다.  

그들에게 쑥맥인 나는 아주 좋은 먹잇감 이었다. 내가 그곳이 사기꾼들의 소굴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호주머니를 다 털리고난 후 였다. 그곳에서 거짓과 말 바꾸기로 이골이 난 그들은 바로 그것이 생존수단이었다. 그들의 거짓에 속은 내가 문제일 뿐이다. 우리는 곧 잘 환경이나 남의 탓으로 문제를 호도할 때가 참 많다. 그래서는 나를 바로 볼수 없다. 흔히 인생을 길(道)에다 비유한다. "길(正道)"이라는 말을 곧 잘하면서도 나는 가끔 세상을 너무 쉽게 판단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때마다 나는 언제나 영락없이 패배자가 되어 있었다. 실패와 역경의 원인 제공은 내가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팔십이 낼 모레다. 팔십? 나는 내 나이에 스스로 놀랄 때가 있다. 나이만 팔십이지 하는 짓은 지금도 영락없이 어린아이다. 이제 콩팥도 나빠져서 걷기조차 힘들어졌다. 

얼마 전 내 누님 아들(생질)이 전화로 나더러 성남에서 사시는 지 부모님을 찾아 보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 지 부모에게서 빌린 돈 1500만원을 갚아달라는 전화가 왔다. 그동안 생질 놈이 단 한번도 내게 찾아온 적이 없었다. 내가 동기간들과 그리 살갑게 지내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면에서 그 녀석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녀석은 작심하고 내게 쌓인 불만을 쏟아냈다. "삼촌은 내가 왜 오지 않느냐고 하시겠지만 삼촌이 조카들에게 본을 보여야 내가 본을 받을 것 아닌가요?" 이렇게 자기 변호를 하며 내게 전화로 항의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성남을 가지 않으니까 지도 내게 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 부모에게 빌린 돈 1500만원을 갚아달라 고 했다. 내가 지난 날 무의탁 양로원할 때 누님에게서 빌린 돈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동기간에게서 빌린 돈이라 우선 순위에서 밀리다 보니 오늘까지 미뤄진 것이다. 생질로부터 호된 말을 듣고난 후 나는 그 돈을 매월 얼마 씩 나누어서 생질에게 갚고 있다. 그것을 갚지 않고는 내가 주님의 나라에 갈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무의탁 양로원 할 때 보다야 지금 형편이 하늘만큼 낫다. 누나에게서 빌린 돈을 지금까지 못 갚고 있었던 것은 무의탁 양로원할 때 여기저기 빌린 돈들이 너무 많아서다. 친소관계를 따져 순위를 정하여 이 빚을 조금씩 갚고 있다. 그 당시 내게 돈을 줄 때에 대부분 다시 받을 맘으로 돈을 준이는 거의 없다. '차용증서' 한장없이 나를 믿고 준 것이 그 증거다.

그 당시 무의탁 양로원을 참 눈물겹게 운영했었다. 그러나 무의탁양로원을 짓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오갈 곳 없는 그들을 섬기라하신 이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아무리 다급한 문제가 생겨도 나는 당황치 않았다. 예를 들어 당장 운영할 돈 즉 식자재 살 돈이 떨어지면 놀랍게도 나에게 이 사명을 주신 이가 그때마다 위기를 해결해 주셨다. 나는 그때에야 눈물의 선지자 이사야의 맘을 헤아릴 줄 알게 되었다. 이처럼 무의탁 양로원을 눈물의 기도로 운영했었다. IMF직후라서 모두가 다 무척 어려웠을 때라 그때 나는 만난을 무릅쓰고 무의탁 양로원을 시작 했었다. 의지할곳 없는 어르신들을 섬길수 있는 무의탁 양로원을 지었으니 세상의 안목으로 보면 고생을 사서하는 참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어르신들을 모실 수 있는 운영비는 사회모금을 통해서 어찌되겠지 했던 나의 천진난만한 생각은 천길 나락속으로 떨어 졌었다. 그당시 요양원제도가 없던 시절 나는 무의탁 양로원을 설립하여 이를 수레처럼 앞에서 끌고가면 나와 뜻을 같이하는 그래서 '무의탁 양로원'이라는 수례를 뒤에서 밀어주는 뜻을 같이 할 이들이 많이 있을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순박한 바램이었다.공공기관에도 노크를 해 봤지만 대답은 '노'였다. 이처럼 나라로 부터 한푼 지원도 없이 매일같이 다리품을 팔아서 참 어렵게 운영을 했다. 빚진 인생!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살아 온 삶을 뒤돌아 보면 홀로서기로 살기 보다 내 주변에 있는 이들과 더불살이처럼 의존적으로 살아온 시절이 많았다. 그래서 동기간에게서 뿐만아니라 형으로서도 오빠로서도 동생으로서도 그리고 자식으로서도 주님의 종으로서도 내게 안겨진 도리도 다하지 못하면서 내 능력 밖에 있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를 돕겠다고 한 일 들이 결국 본의 아니게 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하는 빚진 삶을 살게 되었다. 

무의탁 양로원을 지을 때도 나는 생각이 단순했다. 오갈곳 없는 노인분들 을 모실수 있는 보금자리만 마련 되면 그 다음 운영문제는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않다고 생각했다. 아직 다가 오지도 않은 한참 뒤의 문제를 미리 끌어다 놓고 염려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생각했다. 집을 지어 주신이가 그 다음 문제도 해결해 주시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나라에서도 '노인복지'가 거의 전무했었고 또 국가적으로 IMF 직후여서 살기가 더욱 힘들었던 때라  "사회공동체가 이를 보완하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또 무려 20여년 동안 해오던 일반목회에서 섬김의 길을 걷고자 목회의 길을 바꾸어 온갖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오늘 여기까지 온 것은 이는 절대 내 의지로 된 것이 아니다. 우리 속담에 '십시일반 (十匙一飯)이란 말처럼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가 "이 일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너무 컸다.  "내게 부여된 사명대로 살겠다"는 각오가 없었다면 내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촌부로 살다가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 무엇인가를 늦게나마 깨달았기에 나에게 주어진 이 길 즉 '섬김의 종된 길'을 걸어 왔기에 후회는 없다.  

젊은 날에 나는 나를 이 땅에 보내신 이의 뜻을  묻지도 않고 천금같은 세월을 육신의 욕망을 이루려는 욕심때문에 젊은 날들을 허송하였다. 그 숱한 젊은 날들을 육신의 소욕을 쫒는데 낭비했기에 나를 이 시대에 보내신 이에게 진 빚이 너무 커서 '섬김의 종'이 되었다. '섬김의 종'이란 무엇인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내게 있는 것으로 채워 줌이다. 나는 일반 목회를 할 때에도 내게 있는 것으로 채워 주고파 비움의 삶을 살고 싶었다. 나는 목회하면서 지체부자유자와 지적장애자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뿐만아니라 무의탁 양로원과 요양원을 합하여 무려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운영해 오면서 끝자락 인생들의 모습들을 수없이 보아 왔다. 

요양원으로 입소한 이 들은 살 집을 잃어서 혹은 자식이 없어서 온 것이 아니라 건강을 잃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홀로서기를 할수가 없어서 입소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걸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한다. 늙어간다는 것과 몸이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 몸이 늙어 병들었기 때문이다. 늙어 가는 것은 몸 뿐만이 아니다. 누군가는 '늙어가는 것'에 대하여 '익어가는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말한이도 있지만 그것은 언어의 희화일 뿐이다. 요양원에 입소할 자격은 건강상태로 측정한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와상 환자는 걷기는 고사하고 몸도 가누지 못하기 때문에 대 소변도 기저귀에 본다. 대변을 자기힘으로 보지 못하면 식사도 수저나 젓가락을 사용할 힘도 없기때문에 식사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요양원에 입소할수 있는 객관적 기준은 건강보험공단에서 시행하는 1등급~ 5등급의 기준에 맞아야 한다. 1등급 환자란 하루 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어 요양보호사의 도움없이는 몸을 움직일수 없는 완전한 와상환자로 그대로 방치하면 욕창이 난다. 2등급 환자는 아직 자신의 몸을 스스로 눕고 앉을 수는 있으나 홀로 걷지는 못하고 장소 이동은 Wheel- chair로 하고 대 소변을 스스로 처리를 못하기 때문에 기저귀를 착용해야 하고 식사도 도움이 필요하다. 3등급 환자는 워커로 홀로 걷기도 할수 있다. 식사나 배설도 홀로 할수 있다. 4~5등급은 대개의 경우 치매환자다. 치매는 무서운 병이다.  점차 인지능력을 잃어 과거는 기억 하는데 '단기 기억' 즉 방금 한 일은 전혀 기억을 못한다. 자신이 눕고 자는 방을 들고 나는 것은 할수는 있지만 나온 후에  자기 방을 찾지 못한다. 

치매 환자는 대개의 경우 길과 길이 아닌 것조차 분별을 못한다. 물론 중증 치매가 되면 똥도 식별을 못한다. 그래서 치매환자가 집을 나가면 매우 위험하다.  왜냐하면 길과 길이 아닌 것을 구별을 못하기 때문이다. 치매에 버금가게 힘든 병이 중풍이다.  사지가 마비되어 살아 있으나 살아 숨쉬기도 힘들 정도다. 그는 혀가 굳어 말도 잘 못한다. 그래서 말 한마디 하려고 죽을 힘을 다해도 말은 입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 어떤 이는 살다가 갑자기 귀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이비인후과 의사들은 하나같이 귀의 기능에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 것도 듣지 못한다. 그는 사람을 만나면 입술부터 본다.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알아채기 위해서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다시 들을 수만 있다면 더 큰 행복은 바라지 않겠다."고.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는 죄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암흑의 절벽에 매달려서라도 살 수만 했다면 행복할 것 같다고 했다.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고 했다. 이처럼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너무나 귀중한 것이다. 돈 많이 줄테니 내 대신 죽어 달라면 응하는 사람이 있을까?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생명보다 귀한 것이 이땅에 뭐가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다고 일자리가 없다고, 늙었다고 외롭다고 그래서 불행하다고 말한다. 보고 듣고 숨 쉬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내게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태어날 때 빈 몸으로 태어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이도 살고 있다. 지금 곧 죽어가는 누군가의 애잔한 소리를 들을 때도 있다. 누군가가 간절히 기다리는 기적들이 내게는 날마다 일상으로 일어나고 있는 데도 세상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있다. 늙고 병든 후에야 생명과 건강의 고귀함을 비로소 알 때가 있다. 시력을 잃고 나서야 '건강한 눈'으로 책을 읽던 그 시절이 행복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건강할 때 건강의 소중함을 아는 것이 행복이라면 내게 생명을 주셔서 내가 살아 있을 때 우주와 온 세상을 보고 누릴수 있는 축복은 내가 원하거나 할수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요 은혜인줄 아는 것 바로 이것이 축복인 것이다. 

육신의 안목으로만 부모님이 보인다면 그리고 잃어버린 나를 찾아 내려면 먼저 하나님을 만나시라!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다. 모든 만남 중  가장 큰 만남 즉 움직일수 없는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놀랍게도 나는 하나님을 만나고서야 나를 안뒤 나의 간절한 소원들을 다 이루었던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축복받은 인간으로 태어났는가를 깨닫게 된다면 그 순간 우리들이 사는 날들이 모두 기적의 연속이 아니었을까?  바로 이 것이 우리의 행복이 아닐까? 저마다 서로의 얼굴이 다르듯이 각자의 인생을 살면서 자신을 먼저 사랑 하시라. 두 눈이 있어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두 귀가 있어 감미로운 음악을 들을 수 있고, 두 손이 있어 부드러움을 만질수 있으며, 두 발이 있어 자유스럽게 가고픈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고 이를 가슴으로 혼으로 기쁨과 슬픔을 몸소 느끼며 살고 있잖은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산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것인가!

【종그니칼럼】권력의 생리

중국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 때의 한비자가, 회한에 찬 말이 떠오른다. "태산에 부딪쳐 넘어지는 사람은 없다,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것은 작은 돌 뿌리다." 그러나 돌뿌리에 치이면 넘어지는데 그치지만, 태산에 부딪치면 예외 없이 다 죽고 만다. 얼마나 많은 산악인들이 히말리야라는 태산을 정복하려다 죽었고, 또 얼마나 많은 경세가들이 정치권력이라는 태산의 숲에 함몰되어 죽어갔는가!

춘추 전국시대 말에 한(韓)에서 태어난 한비자(韓非子)는 맹자의 성선설에 맞서, 성악설로 유명한 순자(荀子)의 제자로, 그에게서 형명법술(刑名法術)을 익혀, 순자의 성악설과, 노 장의 무위자연설을 법에 녹여 내, 당대 제일의 법조인이 되었다. 한비자가 진시황의 부름을 받고 秦의 수도 함양에 갔다가, 동문수학한 학우 이사(李斯)의 모함에 걸려, 누명을 쓰고 죄수의 몸이 되자, 죽음을 직감한 그는,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49세때다.

아이러니 하게도 소위 칠웅(七雄)이 할거하던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흉노족의 침략을 막기위해 만리장성을 쌓았고, 법가 이사의 건의로 국가에 실용적인 책 외에는, 천하에 있는 모든 경서를 불사르고, 시황제의 명령에 불복한 수 많은 유생들을 살륙한 사건을 분서갱유(焚書坑儒)라 한다. 이러한 예는 시황제 뿐아니라. 동서고금 우리나라 군부독재 시절에 도, 절대자의 뜻에 반하는 책은, 불온서적으로 금서(禁書)가 되거나 불살라 졌다. 시황제와 같은 독재자들은, 오직 그 만이 만민을 호령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이 곧 법이었다.

시황제를 예로 든다면, 세상 모든 것을 다 거머 쥔 그는, 죽음까지도 정복하고자 불로 불사약을 찾았지만, 그 역시 주어진 천명을, 한 찰라도 늘리지 못하고, 멀리 변방을 순찰하다가, 달리는 수레안에서 한비자와 같은 49세 불혹의 나이에 풍토병을 얻어, 환관 조고의 손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죽마고우 한비자를 죽인 이사(李斯)는, 楚나라 사람으로, 진(秦)의 시황제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군현제(郡縣制) 를 확립하고, 분서갱유로 사상을 통일한 그도, 시황제가 죽자, 불알 없는 내시 조고의 간계에 걸려 들어, 아들과 함께 함양성밖에서, 어이없게 참담한 목베임을 당하고 말았다.권세에 눈이 어두어 죽마고우 한비자를 죽인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하게 끝나버린 것이다.

또한 흔히 입담좋은 후세 사가(史家)들은, '역발산기개세'라 일컫는 당대 불세출의 명장 초(楚)의 왕 항우가, "아주 하찮은 댕댕이 넝쿨(유방)에 걸려 죽었다."고 폄하하지만, 그러나 유방에게는, 장자방이라 일컷는 장량과, 당대제일의 명장 한신(韓臣)과 같은 태산에 치어 죽은 것이다.

박정희는 18년의 독재로 대한민국을 최빈국에서 중 진국으로,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음에도, 스스로 만든 인(人)의 장막에 갇혀, 처음 마음을 잃어버리고, 종신집권을 획책하다가, 결국 그는, 총으로 권력을 거머 쥐었던 그 총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옛말에, "기만즉 일, 인만즉 상,(器滿 卽 溢, 人滿 卽 喪)이라"했다. 우리나라 국부라 일컷는 우남 이승만 또한, 3.15 부정선거로 하와이로 망명했다가 서거후에야,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박정희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다.

어떤이는 일제시대 때 '조선'이란 조국은 없고, 그때 있었던 것은 일제뿐이었다고 말한다. 그러하다. 나의 선친도 일제치하에서 모진 세월을 지냈고, 6 25전란 때는 낮에는 태극기를 들었고, 밤엔 북조선 인민기를 들었다. 이를 우리는 '민초'라 한다. 들 풀은 바람 부는 대로 몸을 누인다. 허지만 그때 많은 선각자들은,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올 것을 믿었기에, 중국 북간도로, 또는 만주로 구라파 등 세계 각처로 가서, 손에 칼을 들고 일제와 온 몸으로 맞서 싸웠기에,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았다.

흔히 역사의 흐름을 잘못 짚은 사람들이, 나라 잃은 시절에 나라를 일제에 빼앗겼으니, "그 시절 조국은 없고 일제만 있었다."고, 일제의 일군(日軍)에 몸 담은 것을 합리화하는, 이들이 있어 안타깝다. 누가 민초처럼 살아온 삶을 지적하는 이가 있는가?

시오니즘을 아시는가! 이스라엘은 나라 잃은 세월이 무려 20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었지만, 세계 각지로 디아스포라가 되어, 그 긴긴 세월, 망국의 맺힌 한을 신앙으로 견디면서, 자자손손 마음의 조국 즉 민족혼을 잃지 않았기에, 2000년동안 조국 없는 설움을 씻고, 마침내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았다.

MB 정권시절에 방송계의 황제 소리를 들었던 최시중은, 양재동 파이시티 인허가를 미끼로, 수억원을 받은 혐의로 법정에 섰다. 인생의 황혼기에 권력의 노른자에서, 자기를 지킴보다 돈에 눈이 가려져서, 올무에 걸려 넘어졌다. MB정권 탄생에 일등공신 이었던 정두언 전 의원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내가 참으로 존경했던 깨끗한 진보정치가 노회찬 정의당 대표는, 하찮은 돈 몇푼에 온 생애가 얼룩지자 고결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정치인에게 주는 돈은 공짜가 없다. 독가시가 달린 생선이라, 삼키면 걸리게 되어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도덕적으로 깨끗하다고 자부해온 민주화 시민운동가들이, 권력의 단 맛에 취해, 하루아침에 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 이들을 보라! 대통령 후보에 까지 올랐던 충남지사 안희정, 안철수의 배려로 서울 시장이된 후, 3선을 연임한 박원순, 현정권의 적자라 일컫는 김경수, 그 또한 킹크랲 가시가 목에 걸려, 앞길이 구만리같은 나이에 영오의 몸이 되고 말았다.

누군가가 말했다. "정치인은 교도소의 담장 위를 걸어가는 곡예사." 라고. 정치와 권력의 세계에서 이를 비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집권 4년차를 넘어 종착지에 다다른 현 정권 또한 그 베일이 벗겨지면, 또 지나간 정권의 전철을 밟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스럽다. 제발 바라기는, 청와대의 문짝이 나가 떨어지는 소리가, 이제 제발 들리지 않기를 두손 모아 기도 한다.

불 나방은 불섭에 들어면 타죽을 줄을 알면서도 불을 좋아한다. 서로 대통령이 되겠다는 불나방들이 우후죽순처럼 권력의 불섭에 뛰어들고 있다. 언제쯤 이 나라에 민주주의 꽃을 피울 날이 올까? 좌우를 보아도, 여야를 보아도, 국민의 권리와 의무의식을 보아도, 아직도 마냥 요원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