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宇材소강석】'민족예언시인 윤동주 '를 논하다.
벌거숭이 윤동주 묘지에 떼장을 덮어 주었던 소강석 시인
암전된 역사의 밤하늘에 별의 시인이 태어나다.
풀잎이 시들고 들녘에 꽃잎도 떨어졌다. 별들은 숨을 죽이며 반짝거리기를 주저하고 있을 때 민족의 들녘에 암전된 역사의 슬픈 애가가 아리아로 메아리친다. 춤추는 이는 어디에도 없고 망국의 애가만 산야에 구슬프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랬다. 조선은 그렇게 망했고 섬처럼 흘러가는 역사의 파도 위에 슬픈 애가가 울려 퍼지고 상처 잎은 풀잎들만이 고난의 비바람을 맞으며 울고 있었다.
하버드대학교 역사학 교수 요한 바그너는 ‘역사의 대실패’라는 책에서 조선의 멸망 원인에 대해서 기술했다. 첫째, 역사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흥선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통해서 신문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라 안팎의 빗장을 닫아 버렸다.
둘째, 관료 사회와 지식층의 부패 때문이었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군신공조 정치론을 펴면서 이상국가를 꿈꿨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의 사상은 변질되고 사색당파와 세도정치에 함몰되고 말았다. 조선말기에는 폐해가 극에 달하면서 지방관리도 3권을 다 가졌고 지식층의 타락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구나 안동 김씨가 세도정책을 펴면서 백성들은 수탈과 착취로 인하여 가난에 허덕이며 도탄의 수렁에 빠졌다. 결국 농민반란인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왕은 청나라에 가서 혁명을 제압해 달라고 구걸할 정도였으니 나라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셋째, 국론이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서로 기득권 싸움만 하니까 왕의 지도력이 무력화됐다. 그러다가 조선의 국운은 기울어지고 1895년 8월 21일 명성황후가 일본의 자객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는 참람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다가 결국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였고 1910년 한일강제병합에 의해 일제에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완전히 빼앗기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역사학자가 아닌, 요한 바그너에 의해서 통찰된 조선멸망의 역사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자그마치 36년 동안이나 지배했다. 주권을 빼앗고 언어와 문화까지 빼앗았다. 참으로 치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역사였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우리 민족의 광야에 윤동주라는 별의 시인이 태어난다. 윤동주는 별의 시인이고 애국시인이며 저항적 민족 예언 시인이었다. 그때 청록파 시인들은 당시 민족의 고난이 어떻든 역사의 아픔과 민족의 아픔을 외면하고 자연과 교감을 나누는 서정시들을 썼다. 물론 그 분들도 자연과 인간의 서정을 심미적으로 노래한 훌륭한 시인들이었지만, 윤동주는 역사의 아픔을 온 몸으로 끌어안고 저항의 삶을 살다간 시인이었다.
왜 윤동주 시인이 위대한가? 그는 심미적인 서정적 시를 쓰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온 몸으로 민족의 아픔에 동참하고 일제의 억압과 폭압에 저항하는 시를 쓴 애국적 저항시인이요, 예언자적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요즘이야 사람들이 시를 개인의 서정성을 운율에 맞추어서 표현하는 언어예술로만 이해를 하고 있지만, 고대 사람들은 시를 언어예술이기 전에 신전에 임한 신의 이야기로 이해를 했다. 그래서 詩라는 글자를 한문으로 보면 말씀 언(言)변에 절 사(寺)자가 합해져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절 사로 사용했지만, 원래는 관청 시였다. 그 관청에는 왕과 재상들이 백성을 다스렸던 곳이다. 그런데 복음이 전해지지 않던 때에도 땅의 왕을 하제라고 부르고 하늘의 왕을 상제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땅에서 통치하는 하제는 하늘의 상제의 말씀을 잘 받들어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땅의 하제가 하늘의 상제의 말씀을 받은 것을 바로 시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시의 원래 뜻은 상제의 말씀을 모시는 신전, 곧 하나님의 말씀을 모시는 성전이라는 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윤동주는 암울한 시대에 맞서 시를 통해 저항한 민족 예언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애국적 저항시인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
첫째, 애국지사들이 모여 살던 명동촌에서 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명동촌은 그 당시 우국지사들과 선각자들이 모였던 총 집합 장소였다. 윤동주 시인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부유한 유지로서 독실한 장로요, 선각자였다. 그래서 윤동주는 할아버지가 선바위 아래서 독립투사들에게 독립자금을 대 주는 것을 보고 자랐다. 그리고 외삼촌 김약연은 명동촌에 학교와 교회를 세운 목사였다. 그래서 윤동주는 어린 시절부터 깊은 신앙과 저항정신, 민족혼을 가슴에 품고 자랐다. 그래서 그는 저항정신과 애국혼이 실려 있는 시들을 쓴 것이다.
둘째, 가슴에 순결한 기독교정신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반도에 있는 기독교는 아무래도 일제의 폭압에 타협이 된 면이 있었지만, 윤동주가 살았을 당시 용정의 기독교는 순혈주의적 신학과 신앙의 순결에 목숨을 걸었던 전혀 때묻지 않았던 청정 지역이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을 똑같이 가르쳤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도 장로, 아버지 윤영석도 장로, 외삼촌 김약연은 목사였다. 특별히 어머니 김용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래서 윤동주에게 나라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윤동주 본인도 주일학교 선생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윤동주가 대학진학을 앞두게 되자, 아버지는 의대에 가서 의사가 되라고 권유했다. 그런데 윤동주는 천성적으로 갖고 태어난 문학성이 있었기에 문학의 길을 포기할 수 없어서 문과로 간 것이다.
순수서정시를 넘어선 저항적 예언시의 발현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하기 전, 명동촌에서 썼던 <초한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등 윤동주의 초기시들은 역사의식이나 저항정신 보다는 청록파와 같은 순수서정시였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면서 저항시를 쓰기 시작한다. 특별히 일제의 압제가 가장 극한으로 치닫던 1941년 그의 대표적 시들을 쓴다. 윤동주의 시대를 향한 저항정신과 독립의지, 그리고 예언자로서의 직관이 담긴 <눈 감고 간다>는 거친 돌밭 같은 역사의 여정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희망을 가슴에 품고 전진하라는 예언자적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또한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여 쓴 대표적 저항시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에 대한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고향의 명동촌 십자가를 생각하며 썼다는 설이 있고, 친구 정병욱과 함께 다녔던 이화여전 구내 형성교회의 십자가를 떠올리며 썼다는 설도 있다. 윤동주는 그 무렵 릴케, 발레리, 지드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며, 프랑스어를 독습하기도 하였다.
<십자가>를 쓴 1941년은 일제의 압제가 최악으로 치닫던 때이다. 그는 조국의 해방을 쫓아오던 햇빛으로 이미지화했다. 물론 역사학자들은 이 해석을 반대하는 경향이 많다. 그래서 쫓아오던 햇빛을 넓은 의미로 “모든 것이 억압되는 현실에 자유가 상실되는 것에 대한 지성의 공포이자 민족적 압제에 대항한 차별철폐의 염원을 담은 것” 이라고 해석하려 한다. 왜냐하면 당시 시대상황으로 볼 때 윤동주가 민족의 독립을 시적으로 드러낼 단계가 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윤동주의 시를 시대적 상황과 역사해석의 틀 안에 제한시키려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쫓아오던 햇빛을 ‘해방의 꿈’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광복의 축복이 아직은 십자가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첨탑이 저렇게 놓으니 올라갈 수도 없어 해방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의 꿈과 길은 오직 저 십자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이 아닌가? 그러니까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우리 민족이 더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자신에게 그 고난의 영광을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아낌없이 자신의 꽃처럼 피어나는 젊음의 피를 어두워져가는 하늘 밑, 민족의 제단에 드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그는 결국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후쿠오카 감옥에서 민족의 제단 위에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쏟으며 제물이 되어서 죽었던 것이다.그러므로 이 시 역시 예언적 저항시가 아닐 수 없다.
<십자가>와 더불어 그의 대표적 시인 <서시>도 일제의 압제가 가장 극심하던 시절에 쓰여지게 된다. ‘서시’에 대해 사람들이 보편 인류애나 보편적 가치를 쓴 것으로 생각하는데, 암울한 일제시대를 살아가는 민족을 향해 시대의 저항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시인은 섬세하고 순혈적인 예언자적 시성으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 민족, 죽어가는 백성, 죽어가는 조국의 하늘과 바람과 별을 끌어안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는 것이다.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의 세계를 오늘의 괴로운 현실과 시련이 차갑게 스치고 지나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언적 시성으로 오늘은 괴로운 현실이지만 내일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의 세계가 올 것을 내다보고 있다.
‘십자가’와 ‘서시’의 중간에 쓰여진 시가 바로 <자화상>이다. 일제 암흑기를 살아가는 청년 지성으로서 직접 저항의 삶을 살지 못하는 자아에 대한 부끄러움의 미학을 담고 있다. 그런데 윤동주의 삶은 일본 유학을 기점으로 전환기를 맞는다. 1942년 1월 19일 일본 유학 수속을 위해 ‘히라누마 도쥬’라는 창씨한 일본식 이름을 제출하고 나서 쓴 시가 <참회록>이다.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 고국에서 쓴 마지막 시로써 자신의 참회를 통하여 자신이 그리워하고 갈망하던 이상 세계가 올 것을 기대하고 있다.
윤동주가 꿈 꿨던 이상 세계, 간판 없는 거리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저항시 위에 또 하나의 위대한 시가 있다. 시인은 일제의 폭압과 압제에 시를 쓰며 저항하고 항거했지만 진정으로 고대하고 꿈꾸었던 지향점이 있었다. 그것은 세계열강의 야만적 폭력과 침탈이 사라지고 러시아, 중국, 일본, 대한제국도 함께 평화롭게 어우러져 사는 이상의 세계를 추구한 것이다. 시인의 내적인 염원을 표현한 시가 <간판 없는 거리>라는 시다.
일본의 우에노 교수는 “이 시는 저항시라고 할 수도 없고 독립운동의 정신을 촉발시키는 시라고 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윤동주 시인이 조국 독립과 해방을 초월해서 전쟁이 없고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이 없으며 억압과 폭력이 없는 정말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시라고 해석한다. 그런 암울한 시대에 윤동주는 이런 시를 통해서 적어도 항일정신을 넘어 온 세상이 평화롭게 사는 희망의 혼을 담은 예언자적 시요, 모든 민족에게 예언자적 희망과 서광을 비추어주며 제사장적 위로의 메시지를 주려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 유학 중이었던 윤동주는 고종사촌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던 송몽규를 운명적으로 만나 함께 독립운동을 모의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그때 부장판사가 윤동주가 죽어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자신의 행위를 한 번만 부인하면 목숨을 구해주겠다고 회유하고 사정을 하기까지 하였다. 그래도 윤동주는 끝까지 부인하지 않고 감옥을 선택했다. 마침내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감옥에서 생체실험 주사를 맞고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만 했어도 살 수 있었는데 그는 끝까지 조국을 향한 순혈적 지조를 지키다가 죽었다. 한 마디로 민족의 제단에 그의 삶과 시를 거룩한 화제로 드린 것이다.
그의 삶이 너무나 애처롭고 안타까웠다. 그래서 내가 윤동주를 대변하고 싶은 마음에 때로는 동주가 내 안에 들어오고, 내가 동주 안에 들어가면서 시적 화자와 일체화를 이루며 한 편, 한 편 시를 써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별 헤는 밤’이라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평전시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윤동주의 평전시집이 출판된 것은 한국 문단사에 최초였으며 이 시집을 통해서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는 올해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민족 예언시인 윤동주의 재발견
지금까지 대부분 윤동주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노래한 순수 서정시인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윤동주를 연구해 보니까 절대 아니다. 그는 정말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조국의 현실을 아파하고 독립을 염원한 위대한 민족적 저항시인이고 예언자적 시인이었다. 독립기념관에 가면 윤동주 시인을 이육사, 이상화, 한용운 시인과 더불어 애국저항시인으로 선정 해 놓은 것을 보았다.
그의 시혼은 지금도 우리 민족의 광야에 별이 비추고 있다. 시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윤동주 시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윤동주의 시는 황량하고 피폐한 우리 가슴에 시심이라는 한 송이 꽃을 선물해 주었다. 윤동주의 시가 별이 되어서 우리 민족의 광야를 비추어 피 흘리는 전쟁터가 아닌 향기로운 꽃밭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예술의전당에서 ‘겨레사랑 2016 한국가곡 페스티벌’을 개최하였다. 특별히 음악회에서 제가 직접 작사, 작곡한 윤동주 추모곡을 발표하였다.
나는 소강석 목사를 전혀 모릅니다. 십년 전에 그의 설교를 TV에서 한번 들었지만 그렇고 그런 설교였읍니다. 지인이 소 목사가 쓴 글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분이 시인이라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윤동주 시인과 시를 평한 글인데 시적인 감상과 상상력을 내장한 감동적인 글입니다. 소 목사님의 글은 부드럽게 속삭이고 그의 시선은 지평을 너머서 조국과 민족과 역사의 뜻을 새겨보게 합니다.
소강석 목사가 쓰신 윤동주 시인에 대한 논평의 내용이 아주 귀중하고 문체가 수준 높고 시적인 영감이 번득거립니다. 그런 소 목사님께서 큰 교회를 이룩하시고 국가도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훌륭한 사업을 희생적으로 하셨습니다. 소 목사님의 진솔한 믿음과 고상한 뜻의 실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목사들이 15만이 있고 좋은 목사들이 가끔 있겠지만 소 목사님은 그의 창의적인 사상과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복음의 능력을 실존적으로 체험하고 이 살벌하고 황폐한 한국사회와 소망을 상실한 한국교회에 신선한 감동과 감격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소강석 목사님께서 한경직, 김재준 목사님같은 선각자들의 바통을 이어 받아 교파를 초월하여 쇠락한 한국교회를 빛과 소금의 교회로 갱신시키는 역사를 이루길 기대합니다. 소 목사님의 이 글이 교계에만 아니라 문학계와 학계에도 널리 알려져서 추락한 한국교회에도 이런 인재와 지도자가 건재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길 바랍니다.
내가 아는 교수들과 생각하는 목사들 40여명에게 소 목사님의 글을 알렸습니다. 좋은 기사를 보내주어서 감사합니다. - 오영석 목사(전 한신대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