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 행복은 어디에. (빌립보서 2장 12절~18절.)

【종그니칼럼】과하지욕(跨下之 辱)

2024-04-08     김종근 목사

이 땅의 모든 사람들 즉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행복'을 찾고 있다. 이처럼 세상사람들이 그토록 찾고 싶어하는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사람들은 부강한 나라가 되거나 정의로운 나라가 되거나 혹은 내가 세상적으로 성공하게 되면 행복은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진정한 행복'은 물질에서 또는 세상이 줄수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나에대한 마음을 비울 때에 찾아온다. '비움' 이것이 행복으로의 지름 길이다. 옛날 영국 국왕 헨리 7세가 나라의 업무에 너무 짓눌려서 말을 타고 홀로 조용히 성밖으로 나와 말이 가는대로 산책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찬송소리가 낭낭하게 들려 왔다. 왕은 그 찬송소리를 찾아 한 참을 갔다. 마을 끝자락 울담도 없는 아주 작은 오두막집에서 늙은 촌로가 조그만 마당 평상에 앉아 하늘을 향하여 홀로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찬송이었다. 그 촌로의 주름진 얼굴에서는 잔잔한 평화와 은혜가 넘쳐 흘렀다. 그렇다!  행복은 돈이나 권세를 따라 오는 것이 아니다. 영국 왕 헨리 7세는 이 촌로를 통하여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진정한 행복자는 영국 왕 자신이 아니고, 모진 가난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는 바로 저 노인임을 깨달았다. 자신은 나랏 일을 하면서 백성을 사랑하여 감사와 즐거움으로 일을 해 본 기억이 없었다. 이처럼 행복은 하늘이 준 마음의 부유함에서 오는 것이지 권세나 명예 재물의 부유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독신으로 사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그 누구로부터도 간섭받기를 싫어한다.  그것은 대개 어려서 홀로 자라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몸에 배어 있어서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그리고 독신주의가 사회에 만연해서 남을 돌아 볼 줄 모르는 사회는 한마디로 병든 사회다. 진정한 행복은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눌 때에 온다. 그래서 행복은 나눔에서 온다. 슬픔을 함께 나누면 슬픔은 작아지고 기쁨을 함께 나누면 그 기쁨은 배로 커진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왜 죽였을까? 탐욕때문이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한 것도, 아간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도 탐욕때문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인생들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채 육신의 안목을 따라 행복을 찾고 있다.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세상을 정복하려한 것도 그 안에 행복이 있으리라고 믿기때문이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제거하고 왕이되려 한 것도 바로 그 권력 안에 행복이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의원선거가 있는 총선 기간이다. 여야 할 것없이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총 출동하여 한창 도토리 키재기들을 하고 있다.

내가 청평에서 춘천으로 이사온지 어언 17년이 되었다. 내가 춘천으로 이사올 때 나의 나이는 60대 초반 아직 혈기 왕성한 때였는데 그런데 어느덧 내 나이 팔십이 되었다. "인생아! 네가 무엇이냐!  너는 잠간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니라." 여러분은 과연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가? 인생의 생사화복이 그분에게 있음이 믿어지시는가? 진정한 행복은 이 땅에는 없기때문에 세상이 줄수있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을 만났기에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너는 내가 만난 하나님을 맛보아 알지어다."라며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 주고자 하였다. 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늘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는다. 오늘  본문 말씀이 있는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 쓴 멧세지다.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한 것이 죄가 되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는 되려 옥살이 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겨, 감옥 밖에 있는 이들을 위해 이 '빌립보서'를 기록했다. 오늘 본문 17~ 18절에서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리라." 그는 로마 지하 감옥 깊숙히 쇠사슬에 묶여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를 몸이면서도 감옥 밖에 있는 이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했다. 바로 이것이 살아 있는 신앙이다. 남아공의 만델라가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희락의 복음'이라고 한다.  

여러분! 세상을 한번 보시라. 돈에 미친 사람, 정치권력에, 마약에, 도박에 미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젊고 건강한 것도 중요하지만 "나 라는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는 더욱 중요하다. 내가 서울에서 목회할 때의 이야기다. 90세가 넘은 교회 권사 할머니가 임종이 가까이 다가 와서 나는 매일이다시피 병원으로 심방을 갔다. 임종 마지막이셨던 주말에 갔더니 미국에서 살고 있는 아들이 왔다.  정신줄이 가물 가물하던 어머니가 미국에서 온 아들에게 묻기를 "너 미국에서 예수 잘 믿고 있느냐?"  "아니요"  "그럼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그리고는 자리에 누워버렸다.  어머니의 임종이 가까이 온 것을 안 아들이 다급하게 말한다. "어머니 앞으로 예수 잘 믿고 장로 될께요 맹세합니다"  "그래야 내 새끼지." 그리고는 어머니는 눈을 감으셨다. 

"여러분! 이 어머니가 왜 일주일 동안 사경을 헤매면서도 살아 계셨을까요?" 아직 자식에 대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지요. 제게도 자식이 있다면 내 자식에게 마지막 할 말이 무엇일까? "내가 만난 하나님을 만나라는 유언"일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17절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를 위해서라면 내 생명을 모조리 쏟아 부어도 기뻐하리라." 여러분! 지금 나라가 매우 어려움에 있음을 아십니까? 예를들어 임진왜란 때 하나님이 보내신 이순신이 없었다면, 그당시 끝없이 몰려 오는 왜적들과 수년에 걸쳐 23번 싸워 23번 모두 대승을 거둔 그 백절불굴의 투혼으로 '노량 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이순신장군이 없었다면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이 역사의 무대에 살아 남을수 있었겠는가? 문둥병자를 위해 소록도 외딴 섬에서 일생을 바친이들,  그리고 이땅에 버려진 고아들을 위해 말없이 일생을 바친 무명인들이 그때마다 그자리를 지키고 있었기에 이 사회가 건강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 '행복이 가득한집'에서 어르신들을 섬기는 여러분들이 바로 이러한 희생의 보람과 기쁨 그리고 진정한 행복을 아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사람은 밥 만을 먹고 사는게 아니라 보람을 먹고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밀알처럼 썩어져 죽기위해 오셨다. 온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 제단에 어린양처럼 당신을 바치기 위해 오셨다. 창조주 하나님이 섬김의 종으로 이땅에 오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역설의 진리인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 삶이 행복자의 삶이라고 생각되시나요? 저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은 여러분과 함께 어울려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노인들과 함께하는 순간들이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를 위해서라면 나를 십자가 제단에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이처럼 바울은 섬김의 기쁨, 희생의 기쁨을 아는자였다. 바울은 또 이렇게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하려 함이라." 자랑! 여러분은 진정 자랑거리가 무엇이 있는가? 

마지막 날 예수님 앞에 가서 자랑할 수 있는 그 숭고한 자랑! 내 종아  잘하였다. 칭찬받을수 있는 그 숭고한 자랑!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섬김의 일'이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일에 함께하고 있다. 이 얼마나 가슴벅찬 일인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삶이 섬기는 삶이지 싶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먼저 섦기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섬김의 보람과 기쁨 그리고 감사가 삶속에 배어있어야 한다. 내 삶이 사랑으로 풍요로워야 다른 사람을 풍요롭게 할수 있기때문이다. 내 마음에 기쁨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수 있기때문이다. 내가 노인분들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청소하는 이 손이 하나님을 기쁘게하고 어르신들을 기쁘게할 때 하나님의 일 곧 섬김의 일이 가장 기쁘고 보람된 삶이 될 것이다. 지난 날 무의 탁 양로원을 한 내 경험으로는 늙으신 어르신들을 모시다 보면 걸어가면서 똥이 바지를 타고 내려와 흘러내리는 모습을 종종 볼수 있었다. 이것이 인생의 마지막 모습들이다. 이를 이해하고 그분들의 마지막 모습을 내가 채워드리는 희열! 바로 이것이 내가 이땅에서 사는 보람이고 의미이고 나의 진정한 행복이다.                

 

【종그니칼럼】과하지욕(跨下之 辱)

인류사 중, 중국 역사의 한 무대를 성경 말씀으로 들여다 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다. 동서의 모든 인류사가 그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중국 한(漢)을 세운 유방 고조가, 숙적 楚의 항우를 꺽기까지의 대 드라마 초한전(楚漢戰)을, 놀이에 담아 만든 장기와 바둑은, 동서고금 수천년을 이어 오고 있다. 부랑아로 미천한 마적출신 이었던 유방이, 몸을 세워 초한전(楚漢戰)에서 楚의 항우를 무찌르고, 중국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백전 백승의 명장으로 그리고 지략가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한신(韓信)과 책사 장량(張良)이다. 중국 천하 명승지 장가계는 장량이 漢나라 위업을 완수하고 표표히 사라져, 말년을 은둔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나아가고 물러남'의 진퇴를 알았던 인생의 달인이었다.

또 한사람 한신(韓信)은, 지략과 용맹을 겸한 당대 제일의 명장으로, 장량과 더불어 중국 중원에 漢을 세운 대들보요 기둥이었다. 그런데 그가 젊었을 때는, 남아의 패기나 기개보다, 자신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은둔자로 지냈다. 시정 건달들이 “내 가랑이 밑으로 지나 가라.”며 시비를 걸 때에도, 한신은 시정 건달의 가랑이 밑을 아무렇지도 않게 엎드려 기어 나왔다. 이처럼 자신을 굽힐 줄 알고 낮출 줄 아는 능소능대하는 자라야, 가히 천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한신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나는 난세를 잠재우고, 중국 통일의 큰 위업을 도모하려 하는데, 이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빼앗길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의 마음 그릇을 알 까닭이 없는 시정인들은, 겉만 보고 한신을 향해 ‘겁쟁이’라고 야유하였다. 뿐만 아니라 韓信은 통일 과업을 이룬 후, 논공행상에서 밀려, 또 한번 견디기 힘든 수모를 격었지만, 한신의 이 일을 두고 후세의 史 家들은,  "과하지욕(袴下之辱;사타구니 아래로 기어 나왔다.")이라 하였다. 지난  날 '역발산 기개세'라 일컫던 항우를 유방이 이기자, 사람들은 "항우가 댕댕이 넝쿨에 걸려 넘어져 죽었다."며, 유방을 댕댕이 넝쿨에 비하했다. 두 얼굴을 가진 유방의 사람됨을 익히 안 한신은, 장량처럼 은둔의 길을 마다하고, 온갖 수모를 격으면서도, 천하를 재 편성하려 했지만, 결국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한채,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흔히 사람들은, "큰 일을 위해 작은 희생은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韓信의 과하지욕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그는 천금같은 시간을, 시정잡배들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금의 권력지향주의자들은 이 작은 희생을 가지고, '자신의 전부를 바친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 무엇이 큰 일이고, 무엇이 작은 일인지, 사리판단도 제대로 못한 어리석은 정치망상자들은, 국민을 호도 하는 권모술수를 터득하기 전에, 자신의 다스림과, 국민을 섬기는 이치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너희에게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왔다"는 '역설의 진리'를 말씀 하셨다. 그러면서 "집안 식구끼리도 서로 원수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도 하셨다. 그토록 사랑을 강조하셨던 주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몸에 암 덩이가 있어 죽어가는 환자에겐, 칼로 암덩이를 도려 내야 하듯이, 주님은 죄악이라는 암에 신음하고 있는 우리를 수술하셔서, 새 사람의 참 자유를 주시고자, 수술의 칼을 들고 오신 것이다. 수술의 칼을 들고 계시는 주님의 수술대 앞에 서는 것, 바로 이것이 죄에 신음하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고 긴박한 일이 아닐까? 그런데 나라의 큰 일을 도모하겠다고 하는 이들은, 나라를 다스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잃어버린 나를 찾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 임에도, 오로지 육신의 소욕을 따라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만을 추구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근 2년가까이 온 세계에 기승을 부리고 있음에도, 이 팬더믹 상황을 오로지 백신이나 정치 내지 경제논리로만 해법을 찾으려 하고 있다. 먼저 잃어버린 본연의 나를 찾아야, 나의 이웃이 보이고, 자연이 살아야 나도 사는 것인데, 인간 외의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한 들러리로 인식하는데 길들여진 우리는,이 역설의 진리를 외면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위주의 이기심을 채우는 것에만 흠뻑 빠져 있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님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가족, 더 나아가 자기 자신까지도, 우주의 이치인 원형이정을 따르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다면, 과감하게 잘라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평화가 아니라, 너희 몸과 한살이 된 죄성을 도려낼 칼을 들고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과거의 잘못된 판단으로, 참된 교훈을 이끌어 내지 못한 어리석은 죄성을, 말씀의 칼로 과감하게 베어 버려야 할 것이다. 모든 재앙은 이기적인 생각으로부터 일어난다. 이기주의는 인류에게 내려진 최대의 저주이다. 조물주가 우리의 심장에 불어 넣은 양심은, 인생의 가야 할 길을 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어제를 회상하여 양심에 어그러짐이 없는 삶을 살수만 있다면, 그외 무엇을 더 바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