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교회 분열사

삼선개헌 등 유신헌법 수호세력의 교권독재 삼선개헌 반대를 빌미로 이진태, 차남진, 김의환 등 축출 1979년 9월 이영수 목사의 부총회장 선출을 위해 호남세력 배제 비주류의 분열은 사실상 주류의 축출, 이는 광주5.18의 전조

2023-04-24     최장일 주필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강요시에 한경직 목사는 일본의 도꾜까지 찾아가 천황을 위한 강물 목욕과 요배와 충성서약까지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서 1938년 평양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 의결을 한 후, 한경직 목사는 앞장서서 신사에 참배하고, 반대자들을 일제에 일러바쳤다.

김재준 목사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정치적 존경심이라는 억지 해석을 붙여 신사참배에 참여했다. 박형룡 목사는 차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만주 봉천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주기철과 조만식과 삼일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순교적인 비폭력 저항에 나섰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신사 참배를 반대한 까닭에 투옥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한 성도들 가운데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가 주축이 되어 1946년 9월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52년 10월 고신 측 총회가 분열하였다. 1940년 자유주의 신학자인 송창근 목사와 김재준 목사가 주축이 되어 세운 조선신학교가 해방 후에 장로교회의 직영신학교로 인준받았으나, 본래 이 조선신학교는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폐교된 것을 계기로 서울에 일제로부터 허가받아 설립되었던 까닭에 출옥 성도들은 이 같은 조선신학교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해방 이후 조선신학교가 장로교 총회 직영 신학교로 인준된 것에 힘을 얻은 김재준 목사는 성경무오설을 대담하게 부인하여 가르쳤다. 이에 대하여 51인의 신학생들이 김재준 목사의 자유주의 신학을 문제 삼아, 1947년 4월 제33회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함으로써 총회 안에 신학적 논쟁이 일어났다. 1953년 4월 제38회 총회가 김재준의 목사면직을 즉석에서 결의하고 조선 신학교의 직영 취소와 동교 졸업생들의 교역자 채용 불가를 재확인하자, 1953년 6월에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생겨남으로써 장로교회는 두 번째로 분열되었다.

1959년 대전중앙교회에서 회집된 제44회 총회에서는 세계교회협의회(WWC) 가입 찬반 문제와 총회신학교 박형룡 박사의 3천만 환 불법 지출 사건으로 인한 교장직 사퇴 문제로 인하여 승동교회측과 연동교회측으로 교회들이 양분되었다. 이로써 대한예수교 장로회는 합동 교단과 통합 교단으로 분열되었다.

1960년 승동교회 측의 합동 교단과 고신측 교단이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교단의 합동을 시도하여, 동년 12월 13일에 합동하는 총회가 열렸으나, 한상동 목사가 중심이 되어 고신 총회를 환원함으로써 교단의 합동이 실패하였다. 이후 합동측 교단은 서울의 총회신학교(현재 총신대학교)를 중심으로 하고, 고신측은 부산의 고려신학교(현재 고신대학교)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69년 정부로부터 4년제 정규 대학으로 설립인가 된 총신대학의 학장의 직을 1972년 2월에 박형룡 박사가 사퇴함으로써 교단의 정치적 구도에 변화가 일어났고, 이와 관련하여 총신대학에 대한 주도권 싸움이 생겨났다. 특별히 1978년 10월 25일 박형룡 박사가 별세하자, 합동 교단 내에서 정규오 목사가 중심이 되어 김의환 교수를 신복음주의자로, 그리고 김희보 학장을 문서설주의자로 각각 규정하고 총회신학교 복구운동을 행함으로써 1979년 제 64회 총회에서 소위 합동보수교단이 분열하였다.

1979년 합동교단으로부터 분열되어 합동보수교단으로 출발하여 1985년 개혁의 명칭으로 새 출발한 개혁교단은 방배동 총회신학교의 주도권을 놓고서 1980년부터 여러 계파로 분열하였고, 1998년 12월 15일 9개 교단(합동보수명칭의 6개 교단, 개혁 명칭의 2개 교단, 호헌측 등 9개 교단)이 정규오 목사의 주도로 합동하였으나 2000년 곧바로 대부분 환원되었고, 2005년에는 광주전남권의 정규오 목사 계열의 개혁 측 교회들이 합동교단으로 합류함으로써 보수개혁교단은 개신대학원대학교 중심으로 교단을 재정비하였다.

1979년의 합동교단 분열의 발단은 박형룡 박사의 학장직 사퇴였고, 이 사퇴 문제는 사당동 신학교 부지 매각 결의가 단초가 되었다. 1959년의 합동과 통합의 분열의 경우 신학교 부지 매입과 관련된 3천만 환 불법 지출 사건이 단초가 된 것과 유사하게 1979년의 합동과 개혁의 분열의 경우도 신학교 부지 문제와 그에 따른 박형룡 박사의 사퇴가 교권 다툼 및 교단 분열로 이어진 것이다.

박형룡 박사의 아들인 박아론 교수의 말대로, 박 박사는 한국 교회가 낳은 위대한 보수신학자였으나 학교 경영자로서는 부족한 면이 있어서 사당동 캠퍼스 매각 및 이전 사건과 관련하여 그 책임을 지고 불명예스럽게 은퇴했으며, 1971년 12월 16일 총신대학 전체 이사회는 서울 회현동 성도교회의 담임목사로서 구약신학 강사였던 김희보 목사를 학장으로 선임하였다.

총회신학교는 1969년 12월 24일 정식으로 정부로부터 대학 인가를 받아 총회신학대학으로 출범하면서 초대 학장에 박형룡 박사가 선임되었었다. 이때 신학대학은 건물의 골조 공사만 겨우 마치고 내부 공사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신학대학은 재정 압박이 날로 가중되었다. 이같은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70년 11월 16일 승동교회에서 모인 실행 이사회는 총회산학대학 발전 위원 7인을 선정하였다. 이 발전위원들은 사당동 학교 부지를 1억 4천 5백만원에 1970년 12월 7일 매매 계약을 체결하고 문교부로부터 교사 이전 승인까지 1971년 2월 9일 받았으나, 재단이사장 백남로 장로의 위임장을 위조한 것이 탄로났다. 이에 1971년 6월 23일 300명의 신학생들이 학교 이전을 반대하고 학교의 비합리적 재정 운영을 항의하여 동맹 휴학했다.

1971년 9월 대전중앙교회당에서 열린 제 56회 총회는 총회신학대학 수습9인 위원회(김상도, 배태준, 박성겸, 이영수, 김일남, 김종호, 백동섭, 백남조, 김인득)의 보고대로, 재단 이사장 백남조 장로와 부이사장 김인득 장로를 제외한 재단 이사 전원과 실행 이사 전원의 사퇴를 결의했다. 그리고 재단이사 15인, 운영(실행)이사 15인, 직무이사(학장) 1인을 새로 뽑고, 전체 이사회에서 학장을 선임토록 하였는 바, 재단이사회의 경우 이사장 김윤찬, 부이사장 최동진, 서기 이영수, 회계 배태준, 감사 이봉학, 김상업이 선임되고, 15인의 운영(실행)이사도 선임하였으며, 총회신학대학 재산보호위원 7인(장덕훈, 김상도, 고응진, 김광철, 배태준, 이팔만, 최경섭)을 선정하였다. 재산보호위원회 위원장인 배태준 장로의 노력으로 학교 부지 매각 문제는 상당한 손해를 보고 백지화됨으로써 총회신학대학의 문제가 일단 수습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수습과정에서 박형룡 박사가 학장직에서 은퇴하면서, 그동안 박 박사를 핵심으로 교권을 장악했던 황해도 세력(대표: 이환수, 박찬목, 황금천 목사)과 호남세력(대표: 정규오 목사)이 약화되고 평안도(대표: 김윤찬 목사)과 영남세력(대표: 이영수 목사, 배태준 장로 등)이 득세하게 되었고, 이로써 재단이사회와 전체 이사회를 장악한 평안도와 영남 세력에 의해 김희보 목사가 1971년 12월 16일에 새 학장으로 선임되어 1972년 3월에 취임하였다.

김희보 목사가 새 학장으로 선임되는 과정에서 전체 이사회의 삼분의 이의 찬성을 얻지 못하므로써, 김학장의 취임이 불법이라고 규탄하고 반대하는 일이 황해도 출신의 이환수 목사와 박찬목 목사 그리고 호남 출신의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 생겨났다. 그러나 김희보 학장은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1980년 2월까지 8년간 총회신학대학이 총신대학교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놓았다. 그는 1973년 11월에 기숙사를 완공했고, 1976년 12월에는 대학부 학생들을 위한 제2교사를 준공하였으며, 1975년 12월에는 ‘총회신학대학’을 ‘총신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처럼 김희보 학장의 대학 운영이 견실해 감에 따라 반대세력(황해도와 호남세력)은 김의환 교수를 신복음주의자로, 차영배 교수를 반 박형룡 신학자로, 그리고 김희보 학장을 문서설자로 규정하여 총회신학대학의 신학이 박형룡의 신학을 벗어나 좌경화 내지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규탄하면서 자신들의 교권 회복을 위해 투쟁했다.

정규오 목사에 의하면 총회신학대학의 신학 변질의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두 번째 원인은 김희보 학장의 소위 문서설이었다. 정규오 목사가 문제 삼은 김희보 학장의 논문은 [신학지남] 제 43권 4집 (1976년 겨울)에 실린 “족장시대의 이방법들에 관한 소고”와, 이 논문의 내용을 담은 강의 “족장시대의 문화적 사회적 배경에 대한 연구”(1978년 8월 목회신학원 강의)였다. 

지금까지의 한국장로교회 분열사는 모 신문에 게재된 다락방 계열의 신학교 교수인 나용화 목사의 글이다. 그런데 그의 입장은 최소한 1979년 전후의 상황에 대해 단 한마디도 없다. 당연하다. 그는 그 역사의 현장에 있지 않았고,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 합동교단 소속 교회사학자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70년대 유신정권 말기의 합동교단과 총신대학의 상황, 그리고 합신교단의 탄생 등에 대해서 소설을 쓰고 있다. 

그 소설에서 누락된 것은 ①합동교단 교권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삼선개헌 등 유신헌법 수호세력"이었다는 것, ②이를 위해 삼선개헌을 반대한다는 빌미로 이진태, 차남진, 김의환 등 총신 교수 들을 축출한 것, ③1979년 9월 주류단독 대구총회는 이영수 목사의 부총회장 선출을 위해 호남세력 배제한 것, ④79년 9월 비주류의 분열은 사실상 주류의 비주류 축출이었으며, 이는 광주 5.18의 전조였다는 것 등이다. 

한편 1979년 10월 총신대학 신학과 3학년들이 주축이 되어 교련검열을 반대하며 학장실을 점거하고 농성하면서 이영수 부총회장, 김인득 이사장, 김희보 학장의 퇴진을 요구하였으나, 10.26사건으로 계엄령이 내려져 잠시 중단되었다가, 1980년 2월부터 이영수 및 김희보 학장 퇴진 운동은 계속되었으며, 3월초 총신대학 이사회에서 이를 거부하자, 이사들이 타고 온 승용차를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총신대학은 학원민주화를 통해 총학생회를 조직하고, 결국 김희보 학장을 퇴진시켰다. 이때 신학부(신학연구원) 대표들은 투쟁보다는 학교를 떠나자는 주장이 우세하여, 남서울교회로 가기로 결정하자, 눈치만 보던 신학부 교수들은 학생들을 따라가서 합동신학교를 만들게 되었다.     

지난 6월 합동총회 목장기도회에서 공연된 갈라콘서트 <불의연대기>는 70년 대 후반에 합동교권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대서사시이며, 이는 희생양의 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