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부흥(Revival)
우리들은 가룟 유다가 예수께 대하여 무슨 불만이 있어서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한 요한복 12:6절의 말씀으로 볼 때에, 그는 평소부터 늘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힌 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경우에 따라 예수님조차도 팔아먹을 수 있는 값어치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그런 가룟 유다에 관하여, 예수께서 그가 도둑이며 자신을 배반할 것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심 가운데 배신을 당하신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오늘 메시지의 본문에 있는 16절에 기록한바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곧, 사 53:12절 말씀을 인용하여 눅 22:37절에서 언급하는바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는 말씀)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라는 말씀과 같이, 그 모든 일들의 가까운 원인은 가룟 유다의 탐욕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조차도 이미 성령께서 다윗의 입술을 통하여 이르신 말씀이 응하게 함인 것이며, 바로 거기에 더욱 멀고 근원적인 원인이 있었음을 사도는 성령을 통하여 분별하며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즉 성령께서는 분명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그 존재를 드러내신 분이 결코 아니시며, 오히려 다윗의 시편과 이사야서를 통하여 미리 말씀하시는 사역 가운데서 그 자신을 드러내셨으니, 이제 베드로 사도야말로 그러한 성령님이 각 사람에게 충만하게 임하시어 말하도록 하신 것만을 말해야 함을 분명하게 확신하는 가운데서,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대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는 것을,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바 시 109:8절 말씀이 가르치고 있음을 깨달으며 순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를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요소이자 직분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지도록 철저히 헌신하며 수고하는 직무와, 그 직무를 따라 수행하는 말씀 사역의 직분임을 사도행전 1장의 말미에서 사도 누가는 분명하게 드러내어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사역을 위해 성령께서도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서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였으며, 또한 “각 사람 위에” 임하시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도록 하셨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진정한 ‘부흥’(revival)이다.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서 예비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며, 또한 “바대와 메데, 엘람, 메소보타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로 된 각 나라의 언어로 말하게 된 이적이 일어나는 것이 부흥인 것이 아니라, 다만 “바대와 메데, 엘람, 메소보타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과 로마로부터 온……사람들”로 된 각 나라의 언어로 들었던 “하나님의 큰 일” 곧,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일들로서의 말씀을 듣게 되었던 바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부흥의 본질인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이 경험하고 반응한바 놀라운 이적과 표적에 부흥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일들로서의 말씀을 듣는 그 자체에, 그리고 그 말씀 자체에 부흥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 6:2-3절에 기록한바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혹은 재정의 출납을 맡기]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곧 재정을 출납하여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고 하였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고 이어지는 7절에서 사도 누가는 기록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기대로 보자면, 그처럼 구제금을 나누는 일에 정신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린 그 자체로서 부흥을 논하겠지만, 사도들은 오히려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더욱 힘쓰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로 더욱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πληθύνω)”하였더라고 기록했다.
특별히 “흥왕하여” 혹은 “왕성하여”라는 말은 헬라어 단어는, 그 어원상 ‘충만함’을 뜻하는 말이다. 마치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때에, 모인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던 것처럼 그들의 심령에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게 된 것이 바로 ‘πληθύνω’인 것이다. 한마디로 성령 충만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 뿐인가? 행 12:24절에서 사도 누가는 야고보가 순교하고 베드로 사도가 투옥되는 안타까운 일들, 그리고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였을 때에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게 된 일들을 기록한 가운데서도 24절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고 사도 누가는 기록하지 않았는가?
그런즉 오늘 우리들의 시대에도 하나의 온전하고 굳건한 교회를 형성하기 위하여서 진정으로 필요하며 요구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것으로서의 말씀의 선포와, 또한 이를 각 사람의 형편과 심중에 맞도록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인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말하도록 하시는 바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설교와, 불의 혀처럼 갈리지는 것들로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신 성령님의 역사로 그 증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듣게 되는 바로 그러한 흥왕함이, 모든 강단(pulpit)들에서 이뤄지기를 위하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무리들로서의 교회가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