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흥종 목사가 세운 애양원 방문소감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 칼럼

2020-07-01     리폼드 투데이

지난 11월 15일 부산에서 집회를 마치고 여수로 건너와 여수애양원을 방문했습니다. 

아직도 그곳에는 한센병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악수도 하고 직접 선물도 건네었습니다. 그 분들은 제 방송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있노라하며 저를 환대해 주었습니다. 이미 여러 번 방문 했었지만 이곳 교인들과 함께 만나서 선물도 나누어 주고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애양원은 1909년부터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했던 광주나병원이 1926년에 여수로 이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광주나병원은 오방선생 최흥종 목사께서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지금의 광주시 남구 봉선동) 땅을 1,000평이나 기증하고 직접 나환자들을 돌보았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포사이드 선교사가 오웬 선교사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조랑말을 타고 목포에서 광주로 오던 중에 영산포 근처 산모퉁이에 쓰러진 한 여자를 발견했는데, 그 여인은 손과 발은 짓물렀고 퉁퉁 부어있었으며 걸친 누더기 옷은 피와 고름으로 온통 얼룩져있는 한센병 환자였습니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그 환자를 자기가 타고 온 말에 태우고 자신은 마부가 되어 양림동 제중병원으로 들어와 윌슨 선교사에게 그 여자에 대한 치료와 거처를 부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었기에, 포사이드 선교사는 그 근처의 벽돌 굽던 가마터에 그녀를 옮겨두고 선교사들이 쓰던 침구와 옷가지를 주어 거처하게 했습니다. 며칠 후 에 그 여인은 죽고 말았고, 포사이드 선교사도 목포로 내려갔지만, 이 일이 소문이 나서 환센병 환자들이 하나둘 모여들게 되었고, 최흥종 목사가 전담하여 이들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오방선생 최흥종 목사

최흥종 목사는 포사이드 선교사가 나병여인에게서 병이 옮길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돌보는 것에 감화를 받고 중생하였습니다. 저는 애양원 교회 옆에 마련된  역사관을 둘러보고 애양원의 역사를 돌아보자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 나의 사역이.... 물론 죽도록 충성한다고 하지만 포사이드, 윌슨, 최흥종 목사님을 생각하자니 너무나도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으며 부끄러웠습니다. 오늘 최흥종 목사님의 친손자인 최협 교수 그리고 최흥종 목사의 종조카이자 <오방선생 최흥종>이라는 책의 저자인 최장일 목사와 함께 동행하며 다시 한번 최흥종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광주 최초의 장로이자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1921년 목사안수를 받고 광주중앙교회 초대 담임목사가 되었던 최흥종 목사는 1908년부터 윌슨 선교사를 도와서 광주기독병원 의무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1909년 4월 3일 성령체험 이후 가마터 환센인들을 돌보고 광주나병원을 세우고, 애양원을 만들고, 나주 호혜원과 소록도 나환자 갱생촌을 건설하는 나환자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1908년 윌슨의 백내장 수술 전경. 윌슨 바로 우측에 조수로 일하던 최흥종 목사. 광주기독병원 역사관에 전시

그는 가족들을 뒤로 하고 한센인들을 돌보았고, 이러한 모습이 믿지 않는 호남사람들에게 감명을 준 거에요. 그래서 1966년 5월 14일 최흥종 목사가 돌아가셔서 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르던 1966년 5월 18일에는 10만여 명의 광주시민이 애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세웠던 나주 호혜원의 한센인들 300여 명이 달려와서 “아버지, 아버지” 외치며 울면서 하관이 끝난 무덤가를 해가 질때까지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나라에 한센환자가 거의 없어진 것은 이분들의 공로입니다. 또한 포사이드 선교사, 윌슨 선교사, 최흥종 목사님의 희생과 헌신으로 인해 호남의 복음화가 잘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이런 분들과 같은 목자상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더욱 이 시대를 잘 살펴서, 첫째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리고 소외계층, 취약계층의 사람들을 돌보고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다시 세상으로부터 칭송을 받고 눈부신 교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