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문명과 화석연료
【종그니칼럼】녹두국과 중국
인류역사상 전대미문의 최첨단 과학의 문이 활짝 펼쳐져 있는 현대의 개념으로 볼 때 케케묵은 책이지만 옛적에 우리 선인(先人)들이 당시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하여 남긴 책들 중에 내가 즐겨 인용하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이란 책에 이런 글이 있다. "천지지간 만물지 중에 유인이 최귀( 天地之間 萬物之中 唯人 最貴; 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생물 중에 오직 인간이 가장 존귀하다.) 이렇게 옛 사람은 "사람이 만물의 으뜸임을 갈파' 하였는데 이는 오로지 이 세상을 인간중심에 무게를 둔 형안(炯眼)이었다. 그럼 과연 이 선인 (先人)이 남긴 이 말의 핵심은 한 마디로 오늘에 있어서 인본주의다. 조물주는 이 우주의 중심 축을 人間에게 주셨음은 소위 인간을 '작은 우주'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기에 인간은 모든 피조물 중 가장 으뜸으로 오로지 인간에게만 부여된' 자유의지(自由意志)적 존재인 '하나님의 형상'을 찰나에 불과한 육신의 소욕에 사로잡혀 한 순간에 모두 잃음으로써 우주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우주의 중심축에서의 역할을 잃어버리고 우주의 본질을 이루는 자연질서를 거스리는 타락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모름지기 새로운 피조물 즉 새 인류로 거듭나야 대자연으로부터 사람의 예우를 제대로 받게될 것은 물론이다. 인간이 근세 19세기부터 지금까지 약 200여년 동안 사용한 에너지가 태초에서 부터 19세기까지 다시 말하면 인간이 지구에서 살기 시작한 구석기 시대로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사용한 에너지의 약 25배를 더 사용해 온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면 인간은 신체적으로 점점 더 건강해져야 할 텐데 도리어 점점 더 무력해지고 있는 것은 왜 일까?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지하 땅속 깊숙히 감춰져 있던 화석연료를 채굴하면서 이 연료를 사용하게 되면 어떤 문제나 후유증이 있을 것인가를 주도면밀한 분석이나 검토없이 목전의 유익만 따져서 과소비한 탓으로 기후 온난화를 자초했던 것은 아닐까? 목전의 이익앞에 인류는 '열량불변의 법칙'마저 망각한 것일까? 인류는 이 법칙을 익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러한 지구의 온난화를 스스로 자초한 것은 인간의 무분별한 탐욕이 불러온 대 재앙이다. 이는 마치 전설속의 레바이단을 보는 듯 하다. 얼마전 세계 모든 나라 젊은이들에게 "무엇이 가장 가치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가족'을 꼽았는데 유독 대한민국 청소년들만은 '돈'을 최고로 선호하는 가치로 선택하고 '가족'은 그 다음이었단다. 나는 이러한 선호도 그래프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이러한 그래프들이 장차 이 나라의 실상과 허상이 적나라하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허지만 우리나라 20대들이 아이 낳는 것을 꺼리는 가장 실제적인 것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그들의 대답은 아이러니 하게도 '이타주의 (利他主義)'가 가장 주된 이유였다. 내 선입관을 뛰어넘는 참 의아한 대답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내가 지금 현재를 살아 보니 산다는게 너무 힘들다. 이 힘든 삶을 나 하나로 끝내고 싶다. 그것은 나의 2세를 출산하지 않는 것이다". 실로 이 얼마나 고뇌에 찬 오늘의 질곡속에서 내 뱉는 통한의 이타주의인가!
나는 이제서야 젊은이들의 고뇌에찬 결혼관과 가족관에 대해서 그들의 깊은 속내를 알 수있었다. 그동안 나는 그들의 독신주의나 출산거부를 극단적 이기주의가 낳은 망국적 이기주의로 보고 정시(正視)가 아닌 사시(斜視)의 눈으로 그들을 피상적으로 보고 판단 했었다. 우리는 모든 사회문제들을 정시가 아닌 사시의 안목으로 판단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옛날 '팍스 대로마나'를 세운 옥타비아누스가 전 로마 젊은이들을 향하여 '자녀출산 장려운동'을 펼쳤지만 젊은이들은 시큰둥했었다고 한다. 청춘남녀들의 이성교제는 활발했지만 결혼해서 출산까지 올인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한다. 오늘을 사는 인류에게 있어서 당면과제는 선진 나라마다 젊은이들 감소문제와 고질적인 에너지 분쟁문제다. 특히 에너지 문제는 감소는 고사하고 전쟁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을 뿐만아니라 지구의 순환마저 깨뜨려 이에 대한 인간의 대 성찰이 절실이 필요한 때다. 이러한 대자연 안에서의 인간의 위치는 어느만큼인가? 얼마 전 국제 지질학 연합소위원회는 현 지질시대인 ‘홀로세’를 ‘인류세’로 전환하는 안건을 부결했단다. 인류세 도입이 지금으로선 너무 성급한 주장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러함에도 인류세의 문제 제기는 인간의 활동이 지구에 남긴 흔적에 대해 깊이 성찰할 수 있는 동기를 주었다. 지금 우리는 '문명의 부산물'인 이산화 탄소가 지구 대기중에 급증하면서 전대미문의 기후 위기에 봉착해 있다. 눈에 보이는 연료는 연소되면 사라지는 것 같지만 '열량불변의 법칙'그대로 대기권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자연 속에서 인류는 갈수록 큰 영향력과 엄청난 파급력을 지니고 있어 마치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듯이 보일 때도 있다. 허지만 그럴수록 인류는 대자연에 대하여 겸허 하여야 한다. ‘인류세’ 도입 문제를 계기로 인류와 대자연과의 이러한 갈등이 대자연의 한 단면인 생명의 속성들과 심각하게 갈등할 수밖에 없는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모든 생명은 물질과 에너지의 순환에서만 생존할 수 있다. 이러한 대순환의 사슬은 거대하다. 지구권과 생명권은 서로 공존 순환하며 지구의 역사를 만들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자연'을 얘기할 때 곧잘 '자연히' '스스로' 혹은 '저절로"라고 표현할 때가 많다. 여기에서도 대자연을 이런 전제하에서 얘기할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연'이란 의미가 '불가지를 전제로한 명칭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빛 에너지를 받아들여 물을 산소로 바꿔 대기에 내뿜으면서 화학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이를 이용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한 뒤 이를 변형시켜 포도당을 만들어 냈다. 곧 이어 이를 섭취한 뒤 분해하면서 산소를 이용해 에너지를 얻고서 이산화 탄소를 대기로 배출하는 동물이 탄생하였다. 생명은 이처럼 쉼 없는 연쇄 속에서 태양이 건네준 빛 에너지를 공기 ·물을 사용해 각양각색의 에너지로 바꿔 몸을 이루는 물질 속에 저장한다. 이 물질이 먹이 사슬을 타고 돌다가 다시 지구의 일부가 된다. 대기 중 이산화 탄소는 빛 에너지를 통해 광합성을 하는 식물들 속에서 포도당이 되고, 생명체들은 살기위해 포도당을 산화시켜 다시 이산화 탄소를 형성한 뒤 대기에 배출한다. 이러한 산화 환원의 순환은 단 시간 내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무려 38억년에 걸친 생명의 탄생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진 것이다. 1820년과 2020년 사이 200여년간 인류가 사용하는 에너지는 대략 25배 정도 증가했다고 추론한다. 그 증가분의 대부분은 지구의 수많은 세월에 의한 화석연료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말하면 이러한 화석연료는 환원된 채 에너지를 담고 있던 생명체들의 몸이 지층에 묻힌 뒤 지각활동에 의해 더 깊은 지층으로 내려간 채 수억년에 걸쳐 고온 고압 상태에서 변형된 화학물질이다. 현재 인간이 배출하고 있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87%는 화석연료의 연소 즉 산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산화탄소는 결과적으로 태양의 복사 에너지를 대기 중에 가둠으로써 기온을 상승시키는 온실가스 역할을 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기후 위기를 절감하는 시대에서 살고 있다. 더 큰 위기는 지구 내에 존재하는 순환의 기능이 깨어져 이를 복구하지 못한 채 정상에서 점점 비정상으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도하게 배출된 이산화 탄소 가운데 일부만 순환의 기능에 작동되고 나머지는 대기 중에 고스란히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화석연료로 374억 t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며 얻는 에너지는 2022년 기준 14만 테라와트(terawatt)에 이른다. 인류는 이 에너지를 이용해 철강을 제조하거나 먹거리를 길러 내고, 비닐과 플라스틱의 원료가 되는 화학물질을 얻어내고, 음식과 물건을 가공하며, 자동차나 비행기와 같은 운송 수단으로 먼 거리를 이동하거나 화물을 운송하며, 대형 건물을 짓고 불을 밝히고 냉난방을 하면서 거대 도시를 가동한다. 이 모든 과정에는 놀랍게도 집적된 고밀도의 에너지가 사용된다. 우리는 무심코 승용차를 운행하지만, 1.5t 승용차가 시속 100㎞로 달리려면 대략 말 50마리 이상의 파워가 요구된다. 이처럼 고도로 집적된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가 가능해 졌고, 거대 도시들로 이뤄진 국가 체계가 구축됐으며, 급속한 세계화가 이루어 졌다.
200년 전과 비교할 때 인류는 25배에 이르는 에너지를 화석연료를 태워 쓰면서 '같은 기간 120배가 넘는 경제적 성장'을 이뤘다. 문명이 구축되고 유지되는 과정에서 폭발적인 양상으로 고도로 집적된 에너지가 사용된 것이다. 문명의 주체를 인류로 간주할 때 자칫 착시현상에 빠질 수 있다. 문명화를 고스란히 인류의 역량으로 이뤘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문명화의 전 과정에는 고도로 집적된 에너지가 동력으로 쓰여 왔고 또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쓰일 것이다. 왜냐하면 동력없이 문명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량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작다. 인간은 지구의 순환을 주도할 능력이 아예 없으며,우리 스스로 문명에 필요한 동력을 모두 창출할 수있는 능력도 없다. 그래서 인간은 되려 고도의 문명을 통하여 더 무력해진 모습을 보게 된다. 오랜 기간 대자연의 순환에 적응 하기 보다는 되려 발전을 통하여 구축된 것과 응축된 에너지와의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할수밖에 없다. 오늘에 이르러 나타나는 대부분의 질병은 이러한 간극에서 기원한다. 고체 에너지처럼 서로 밀접한 유대관계로 구성된 가족과 마을 공동체에 이렇게 응축된 에너지가 흡수되면서 사회 구성원들은 액체 속의 입자처럼 빠르게 부유한다. 고집적(高集的)에너지를 쓰는 삶의 공간에서 개체가 통제력을 갖는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더 나아가 사회는 성장을 본래의 속성으로 여기고 그 동력을 소유하기 위해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킨다.
최근 50년간 발생한 전쟁의 대부분은 이러한 '고집적 에너지'와 관련된 분쟁으로 촉발 되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재생되지도 않고 순환되지도 않는 모래 땅이 아니면 바다 깊숙히 묻혀 있는 어찌보면 조물주의 헤아림으로 땅속 깊숙히 감추어 놓았을 '응고된 에너지'가 통제력 없는 인간의 탐욕의 눈 안에 들어 오자 눈이 뒤집힌 이들은 정신없이 마구잡이로 퍼올려 문명의 성장에 사용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지금의 패러다임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현실 앞에서 탐욕의 속도를 조절하는 절제의 부레이크를 움켜잡고 정녕 우리 인류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이는 우리의 미래는 블랙홀처럼 텅 비어있다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아니하다. 이토록 물질로부터 참 자유 할수 있는 인간이 아닌 물질의 노예라 할 만큼 연약함을 깨닫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미래를 채워 가는 첫 걸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문명의 유지와 발전에서 끊임 없는 자기모순과 더불어 자연순환의 궤를 넘는 현대문명을 어떻게 반전시켜 나아갈 바를 고민하는 정반합(正反合)의 계기를 오늘의 대학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부단히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탐구한다는 것’, 자녀를 낳지 않는다는 동기부여가 지금까지 나는 오늘의 젊은 세대들이 바로 내일이 없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발로라고' 여겼던 나의 잘못된 선입관이 이제야 바로 알고 보니, "순전한 이타주의에서 나온 발상"이라 하니 이 얼마나 잘못된 기성세대의 몰이해인가! 이기주의의 정점에서 인간들의 잘못된 과학만능주의에 의해 '저절로의 대자연'을 아니 이 지구촌을 필경은 회생불능으로 만들지나 않을까 심히 염려스럽다. 우리 모르게 우리를 병들게 하는 이기주의가 결국 우리를 병들게 하는 매를 만든다.
【종그니칼럼】녹두국과 중국
내가 5~6년 전에 중국 여행을 갔었는데 그곳 중국 현지인들이 우리를 보고 한국을 `녹두 국가`라고 비아냥 투로 하는 말을 들었었다. `녹두`란 네모꼴로 생긴 `팥`의 한 종류다. 그들의 말인즉 남한 땅만을 놓고 보면 땅 모양새가 녹두 알갱이처럼 네모진 아주 작은 나라라는 것이다. "너희가 중국관광을 휘젓고 다니지만 나라 땅덩이가 고작 녹두알갱이만 하고 또 지난날 중국 변방에 속한 속국이었다."는 교만이 저변에 깔린 어투였다.
옛말에 "큰 나무 아래엔 어린나무가 자랄 수 없어도 사람은 큰 사람 밑에서 자라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현재 중국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되자 세계질서가 아직 혼란한 틈을 타 주변의 다른 약소 민족국가를 강압적으로 합방하여 세계에서 가장 덩치가 큰 전체주의 공산국가가 되었음에도 덩칫값을 못하고 전 세계로부터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덩치만 크다고 대국인가? 결코 아니다. 대국이면 대국다운 아량과 포용이 있어야 한다.
중국을 형성하고 있는 중심체가 한족(漢族)인데, 중국 역사상 그들이 중국 중원의 주인이 된 것은 극히 이례적이고 대개 이민족들이 중국 중원의 강자가 되었었다. 요즘 시진핑이 하는 꼴을 보면, 영락없이 중국 진(秦)나라 시황제 흉내를 내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중국 국부로 상징되는 마오쩌둥 의 홍위병들을 오늘 2~30대 젊은이들이 그대로 그 길을 쏙 닮아 가고 있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것도 중국 주변국들의 그들만이 간직하고 있는 역사를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송두리째 중국역사와 문화의 아류로 흡입해서 그 민족 고유의 역사를 폄하 왜곡하여 고사(枯死)시키고 있다. 한 예로 광활한 만주를 중심으로 일천 년의 역사를 가진 고구려 문화를 동국 정방이란 이름으로 중국역사에 흡입시키고 있다. 이런 식으로 대한민국 고유의 모든 문화와 역사를 송두리째 중국화하면서 심지어 아리랑도, 김치도, 한복도 자기들의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우리는 이처럼 동으로는 일본이, 서로는 중국이 우리 고유의 역사를 훔치고 나라를 삼키려는 두 찬탈자를 양 옆구리에 낀 채 살고 있다.
우선 중국은 가짜와 짝퉁이 판치는 나라다. 상품을 제대로 만들어 세계시장에 내놓으려는 상도덕도, 경쟁력 있는 기술도 없다 보니, 대부분이 시제품 수준이다. 오로지 모 제품 짝퉁 불량품이 주류를 이룬다. 또한 신기술 개발에 임하는 기본자세조차 되어 있지 않다. 제철생산도 선박도 모든 신기술에 있어서 아직 함량 미달이다. 산업스파이를 이용하여 신기술을 빼내어 이용한 후, 토사구팽이라는 예도 비일비재하다. 제품을 만드는 장인 정신이나, 기업가 정신이 아예 빠져 있는 이유는, 저들은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시하는 자유민주주의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
일본이 축소지향주의라면 중국은 허풍지향주의라고 해야 할까? 최소한 먹거리를 가지고는 장난질을 말아야 하는데,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대국다운 면모의 느긋함이나 넉넉함이 전혀 없다. 세계공동사회에서 이런 이단아의 말로는 자명하다. 지난 세기 소련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듯이 중국 역시 머지않아 모래 알갱이처럼 산산이 바스러져서 그에 예속된 이민족들이 독립되고 한족(漢族)만의 소중국으로 환골탈태 되어야 할 현대판 `레바이아단`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우리는 `아주 작다`는 것을 강조할 때 표현방식도 아주 다양하다. 예를 들어 봉급이 아주 작을 때, ‘쥐꼬리만 한 봉급’, 방이 아주 작을 때, ‘콧구멍만 한 방’, 가게가 작을 때, ‘구멍가게’, 눈이 아주 작을 때, ‘새우 눈’ 밭이 아주 작을 때, ‘손바닥만 한 밭뙈기’ 유대인들은 작은 것을 말할 때 `겨자씨만 하다`는 말을 쓴다. 그만큼 겨자씨는 아주 작은 알갱이다.
내가 해마다 봄이면 심는 상추씨와 그 외 도라지 씨앗, 그리고 달맞이꽃 씨앗도 참 작다. 겨자 씨앗의 지름은 대개 0.2mm 정도란다. 11월경에 씨앗을 뿌리는데 씨앗에서 싹이 나오면 채소처럼 자라면서 한가운데 줄기가 점점 굵게 자리를 잡으면서 마치 나무순처럼 왕성하게 자라기 시작한다. 겨자는 이스라엘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지만 특히 갈릴리에서 많이 서식한다고 한다. 유채꽃 빛깔로 길쭉하게 꽃이 피는데 2~3월경 갈릴리 호숫가는 마치 제주도 유채꽃처럼 온 산야가 겨자 꽃으로 샛노랗게 물든다.
이처럼 아주 작은 씨앗에 어떤 특별한 생장능력이 있길래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랄까? 겨자 식물이 이렇게 다 자라게 되면 키가 2~3m는 물론이고 기후가 좋은 요단 강 기슭이나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는 3~4m 높이까지 자라나 무성해진 가지 사이로 새 떼들이 날아와 서식한다 하니 이 얼마나 경이로운 섭리인가!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우주적이지만 그 시작은 바로 겨자씨 한 알’처럼 `작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세계열강들과 비교해 볼 때 이스라엘은 마치 겨자씨에 비교할 만큼 작다. 하지만 손바닥만 한 땅에 겨우 500여만 명이 사는 이스라엘이 언뜻 보기엔 아랍연합국들에 의해 우겨쌈을 당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 세계의 정치 경제를 움직이고 있는 게 바로 이스라엘이다.
그럼, 중국이 대국인가? 이스라엘이 대국인가? 그리고 아주 작지만 전 세계를 전율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게 또 하나 있다. 바로 온 세계를 공포의 팬더믹속으로 빠뜨리고서 쥐고 흔들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다. 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인간 공동체를 근본부터 위협하고 있다.
오늘날 크고 작은 모든 문제들은 나를 비롯한 모든 인간의 잘못된 思考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생각한 바가 크다고 꼭 유익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작다고 그 존재 가치가 무시되는 것도 아니다.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고 그늘도 만들어 인간 새들이 날아와 서로 공생하며 안식할 수 있는 사랑 나무 숲들이 울창한 나라들을 만들어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