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흥종】사회적 소외자 대책과 한국교회
▶ 22회 샬롬나비학술대회 개회예배 설교(오영석 목사, 전 한신대 총장) ▶ 설교제목 : “최후 심판의 기준”(마 25: 31- 46) ▶ 두 사람의 증인을 선별하여 최후 심판의 기준을 새롭게 각인 ▶ 설교자는 안토니우스와 오방 최흥종 목사를 두 증인으로 선별 ▶ 여기서는 오방 최흥종 목사에 관한 설교문을 게재한다.
“내가 죽은 후에 하나님의 심판석 앞에서 육으로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다. 죽고 나면 나의 모든 명성은 휴짓조각이다. 나만 위하여 사는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목사의 진지한 생각은 뭔가?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하나님은 나 자기 일 생을 돌아보시면서 어떻게 평가하시고 심판하실 것인가? 나 자신의 성공과 명예를 위하여 교회를 부흥시키고, 교회당을 크게 짓는 것이 아닌가? 교인들은 어떤가? 이런 설교를 들으면 목사도 교인도 재수 없다고 한다. 기분 잡쳤다고 한다. 성공 승리, 출세, 복을 많이 받고 병을 고치고 사회적인 출세를 위한 설교를 하면 목사도 교인들도 다 좋아한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옥한흠 목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선한 열매들을 많이 맺은 증인 중에서 두 사람의 증인을 선별하여 최후 심판의 기준을 새롭게 각인시키려고 한다.
최흥종 목사(1880-1967)
그는 선교사들과 함께 나환자의 치료와 보호와 예방에 힘썼다. 선교사들이 광주의 양림동에서 나환자를 치료하고 돕는다는 소식이 펴지지 곳곳에 나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최홍종 집사가 땅을 바쳐서 마련한 나환자 숙소가 차고 넘치자 광주시민들이 광주를 나환자 집합소로 만든다고 강력하게 항의해서 할 수 없이 1926년 여수로 이전하여 지금의 애양원이 된 것이다.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의 순교와 손 목사님의 순교)
그는 유진벨 선교사의 권면으로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고 다니던 중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출소하자 바로 평양신학교에 복학하여 졸업하였고, 1920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호남에서 첫 목사였으며 1921년 1월 광주중앙교회 설립 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1922년 장로회 총회에서 시베리아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했는데, 소련에서 거주하는 교포들을 보호하고 전도하려고 자원하여 선교사로 나갔다. 그러나 소련의 무신론적인 정책에 의하여 그는 1년 4개월 만에 소련에서 추방되었다.
귀국하여 더욱 선교사들과 함께 열심히 나환자의 치료와 예방사업에 헌신하였다. 당시 그는 광주제일교회의 당회장으로서 1925년 11월 4일에 전국적인 나환자집단 치료소와 수용 시 설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서울에 상경하여 김구를 비롯한 김병로, 송진후, 조병 옥을 방문하고 그의 뜻을 설명하니 모두 그의 높은 뜻과 믿음에 감동하여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는 1932년에 전국구라협회를 조직하고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당시 일본 총독부에 그 제안서를 보냈다, 총독부가 이 제안서에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나환자 150명을 데리고 15일 동안 걸어서 총독부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 도중에서 전국에서 나환자들이 모여와서 500명 이 되었다. 일본 순경들은 상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환자들의 시위행진을 막지 못하였다. 여러 명이 도중에 사망도 하였다. 그들이 드디어 총독부의 뜰로 입성하였다.
당시 우가끼 총독이 마지못하여 최홍종 목사를 만나서 요구사항을 물었다. 최홍종 목사는 제안서대로 전국적인 나환자들의 치료소와 거주지를 마련해 줄 것과 치료된 분들의 재생사업의 길을 열어줄 것을 제안했다. 소록도를 나환자들의 거주지로 결정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총독은 그의 모든 제안을 승인하였다. 그래서 소록도의 100명 수용시설이 6,000명 정도 수용하도록 확대 개선되었다. 그는 거기서 나환자들과 예배를 드리고 치료하다가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광주로 돌아와서 여전히 나환자들과 걸인들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우가끼 총독이 광주를 순찰한다고 하자 전남지사는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큰 장터 주변의 빈민촌을 철거하였다. 최홍종 목사는 우가끼 총독을 만나서 철거된 빈민촌의 건설을 요구하였다, 총독이 그의 뜻을 수용하였으나 도지사가 끝내 반대하자 최목사는 광주의 갑부들을 방문하여 지원을 받아서 걸인들과 철거민들에게 매일 점심을 제공하고 광주제일교회의 도움과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을 위한 집들을 지어주었다. 최홍종 목사는 이것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광주에 넓게 펼치려고 광주 YMCA를 창설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고 YMCA의 회장직을 여러 번 수행하면서 YMCA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사망통고서 발송
그는 1935년에 호를 오방이라 짓고 모든 지인과 목사들에게 그가 사망하였다는 부고장을 보냈다. 오 五 방 放이라는 것은 5가지에서 해방된다는 의미다.
1. 자녀들과 가정에 매임에서 벗어난다.
2. 사회의 지위와 명예에서 벗어난다.
3,경제적인 이익에서 벗어난다.
4, 정치활동에서 벗어난다.
5. 종교의 종파에서 해방된다.
그의 부고장은 이렇다. “나 오방 최홍종은 오늘부로 사망하였습니다. 혹시 길거리에서 나를 만나더라도 아는 체하지 마시고 여러분들의 모든 행사에 나를 기억하지 마시고 나를 여러 친지의 인명록이나 친구들의 이름에서 삭제하여 주시기를 앙망하나이다. 최 홍 종 오방 아룀”
그는 무등산 산자락에 토방집을 짓고 우거하였다. 일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1945년 조선 이 해방되자 전국에서 치안 문제가 심각해졌고 광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좌우익의 투쟁은 가열하였다, 광주의 정치적인 혼란을 막고 사회적인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광주에서 가장 신망 있는 인사를 건국준비위원장으로 선출해야 하였다, 좌우익 인사들이 싸우다가 만장일치로 무등산에서 칩거하고 영성에 매진하던 최홍종 목사를 추대하였다. 그것은 최홍종 목사가 좌우익을 넘어서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보았을 때, 그는 모든 사람의 존경과 신망을 받았다.
1945년 9. 10일 미군정 책임자 로버트 소령이 부임하여 최홍종 목사를 가장 존경하고 신임하는 자문으로 추대하였고 그는 위원장직을 신뢰받는 후임자에게 넘기고 그는 병든 자들을 돌보는 일에 투신하였다. 김구가 광주에 와서 최홍종 목사를 만나서 정치에 참여하고 그들 도와주라고 간청하였으나 그는 거부했다.,
1958년에 폐결핵 환자들이 급격하게 늘어나자 그들을 위한 휴양소 승동원을 건설하고 그들을 돌보았다. 그 시설의 운영은 최홍종 목사의 삶과 행실에 감동한 선교사 카딩통이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그는 당시에 너무나 가난한 농촌의 비참을 개선하려고 삼애학원을 (애신 愛神 , 애 愛 토 土 , 애린 愛隣 ) 창설하였다. 전국의 유명한 농학자들을 그 학원에 초청하여 청강생들에게 농촌부흥을 위한 강의를 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강의와 실습을 하여 익힌 기술을 통하여 그들의 고향 농촌의 생활을 향상하려고 힘을 쏟았다.
전국 목사들에게 보낸 경고문
그는 1966년 2.9일에 전국 목사들에게 보낸 경고문을 보냈다. 그 경고문에 의하면 목사들이 실제 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명목상의 목사들이고 진실로 주님을 추종하는 신자들도 한국교회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이 점을 통탄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목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주님의 제자직을 충실하게 수행하기를 바란다. 이 경고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하지 않는가?
그는 이 경고문을 보내고 무등산 본인의 토방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지금까지 살만치 충분히 살았고 선언하였다. 그는 금식하고 기도하다가 34일 만에 1966, 5, 14일에 소천하였다. 광주에서 도지사와 대학 총장들과 시장들과 사회의 지도인사들이 모여서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의 운구가 광주공원으로 운반되자 사회의 각층에서 문상하였고 특히 걸인들과 음성나환자들 200여 명이 모여서 매일 울고 최 목사님의 사랑과 업적을 기렸다. 그의 장례행렬에 지도자들과 수많은 시민이 뒤를 따랐고 특히 걸인들과 음성 나환자들이 “아버지,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홀로 먼저 가십니까?”호곡하였다.
최 목사의 도움으로 병이 치료된 나환자들의 자녀들 중고등 여생 100여 명이 줄을 서서 “최 목사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최 목사님 사랑합니다, 최 목사님 존경합니다.”를 외치면서 울었다. 그래서 최 목사님의 발인식 날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가 장례하던 날 광주의 모든 학교가 휴교하면서 그의 믿음과 사랑의 실천을 칭송하였다. 1962년에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을 수여하였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과 사랑의 실천을 했던 한 목사의 삶이 이렇게 고상하고 찬란한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1
최흥종 목사의 전기 <오방선생 최흥종>을 쓴 최장일 목사는 “그는 한마디로 선한 목자였다.”라고 평가한다. 최흥종 목사님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주 예수님에게 최대의 충성과 사랑을 바친 분이다. 그 신앙의 열매들이 그의 삶에서 아름답게 탐스럽게 열려서 지금까지 예수를 어떻게 믿어야 하고 믿는 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빛나는 증표가 된다. 최홍종 목사는 참으로 복음 증인의 삶을 빛나게 살았는데, 오늘 나와 여러분들은 어떤가? 하나님은 최후 심판하실 때, 안토니우스와 최홍종에게 무슨 상을 주실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 시게 한 사랑과 의의 길을 힘차게 걸어갔던 그분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들아 하고 칭찬하시고 그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고 의의 면류관을 씌워주시지 않겠는가? 나와 여러분의 최후심판장은 어떠할 것인가?
칼빈의 말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에 복종한다. 그는 하나님의 위엄을 경외하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힘쓴다. 그는 하나님을 공의로운 심판자이고 죄를 엄하게 벌하는 분으로 알고 있으므로, 항상 하나님의 심판석이 그들의 눈앞에 있는 것처럼 행 동한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열려있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경건한 자에게 영생의 상급을 주시고, 사악한 자를 벌하시는 것이 다 같이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형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죄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경외하기 때문에 죄를 억제하고 하나님을 주로 예배를 드리고 찬양한다. 만일 지옥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생각은 그에게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몸서리치는 생각이다. 여기에 순수한 종교가 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두려움이 결합한 신앙이다.” (기독교 강요 1권 2장)
한국 장로교회의 목사들이 보수진영에 속했느냐 진보 진영에 속했느냐를 떠나서 칼빈의 이 가르침만 진심으로 인식하고 실천한다면 신뢰도가 땅에 떨어진 한국교회는 갱신될 것이고 다시 복음의 능력을 회복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 한국교회는 산 위의 동네들도 숨길 수 없는 선하고 의로운 빛을, 복음의 빛을 성령의 능력 안에서 각처에서 비추리라 믿는다. 한국교회가 본회퍼의 말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비범한 제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기를 희망한다. <오영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