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4차로잔대회, 서울선언문에 대한 평가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형람서원)

2024-09-28     리폼드 투데이

1. 들어가는 말

대한민국 교회는 세계적인 위상을 갖고 있다. 2013년 WCC 10차 총회가 부산에서 개최되었고, 2024년에는 로잔 4차 대회가 인천에서 개최되었다(The Fourth Congress on World Evangelism). 2024년 10월에 서울에서 개최할 예정이었던 WEA 총회는 연기되었다. 이러한 세계 교회의 대회를 개최하고 주도할만큼의 외적 성장을 가졌다. 그러나 내적인 성장을 부족한 것은 세계 대회를 개최하면서도 회의의 내용을 주도하지 못한 것이다. 

한국 교회의 특징은 진리의 불변성과 성경무오에 대한 강한 믿음 체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 대회를 치를 때에 우리 교회의 영향력이 보이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움이 많다. 이번 로잔 대회에서도 로잔의 주최 측인 한국 교회의 영향력보다 로잔 대회를 반대하는 진영의 목소리가 반영된 것은 해프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주최 측의 주도성과 영향력이 발휘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모습은 보기 어렵다. 또한 진보적인 WCC와 복음주의적인 로잔 대회 등에서 세계 대회를 개최하는 모습이다. 세계 교회에서 보수적인 교회는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지 못한 연약한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보수적인 교회를 네크워크로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국 교회가 주도한다면 좋겠다. 한국 교회는 진보적 세계 대회에서나 복음적인 세계 대회에서 멋진 대회를 개최했지만 신학적 내용 전개의 영향력을 보이지 못했다. 

우리는 세계 교회에서 세 개의 큰 지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본래 기독교는 개신교, 로마 카톨릭, 정교회로 나눌 수 있는데, 흐름에서는 진보적 기독교, 복음적 기독교, 정통적 기독교로 구분할 수 있겠다. 진보적 기독교(WCC)에는 오리엔탈 정교회까지 수용하는 상황이고, 복음적 기독교인 로잔 대회에서는 신사도주의, 인터콥 등 개신교 내부에서 시비가 있는 집단들을 포용하고 있다. 이번 대회를 통해서 복음적 기독교 지류인 로잔 대회의 지향성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2. 4차로잔대회에 대한 개괄적 평가

첫째, 로잔 대회는 모두의 대회였지만, 두 진영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 진보적 기독교에서도 로잔 대회에 대한 아쉬움을 표출했다. 평화나무는 “이번 선언문은 퇴행적인 선언문”이라고 딱 잘라 말하는가 하면, CBS 뉴스는 "참석자들의 인터뷰에서 아쉬움과 넓은 선교 개념을 퇴행시켰다"고 평가했다. 진보적 기독교의 맹혹한 비판을 받은 것은 보수적 기독교의 강한 도전에 반응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4차 로잔대회의 서울 선언문(The Seoul Statement, 2024)는 33명의 신학자가 7개 주제에 97항, 13,000 단어로 작성된 방대한 선언문이다. 로잔의 신학 지향성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크리스찬투데이(Christianity Today)는 동성애(LGBT) 부분에서 애매한 표현, 양쪽 진영이 모두 만족할 수 없는 어휘가 있다고 평가했다.

인천에서 개최된 서울로잔대회는 로잔 출범 50주년을 기념하는 대회이다. 1차 로잔대회가 1974년에 개최되었고, 2,700 교회의 리더들(150여개 국가)이 참가한 국제 총체적 복음(the whole gospel)을 위한 대회이다. 로잔 서울 선언문은 1 주제는 복음에 대한 정의, 2주제는 성경에 대해서(성경 읽음과 순종), 3주제는 교회에 대해서(우리가 사랑하고 세우는 하나님 백성), 4주제는 인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회복되는 존재, 5주제는 제자도(권징) 거룩함과 선교에 대한 우리의 소명, 6주제는 열방의 가족: 우리가 인식하고 그들의 평화를 위해 섬기는 분쟁 중인 민족들, 7주제는 기술: 우리가 분별하고 관리하는 가속적 혁신이다.   

로잔대회의 가장 큰 실수는 성명서가 마지막에 나오지 않고 회의 도중에 나온 것이다. 그것도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온 큰 실수가 있었다. 이러한 진행에서 치명적 실수는 대회 진행의 투명성에 심각한 오해를 낳게 했을 것이다. 혹 유출된 선언문과 결정된 선언문이 달랐다면 그러한 의혹이 불식되었을 것인데, 큰 차이없이 진행되었다. 그래서 분과별 테이블에서 토론하여 합의해서 작성한 과정과 문장들이 무의미하게 될 수 밖에 없었다. 

3. 복음에 대한 로잔 신학에 대해서

우리는 여기에서 로잔에서 말하는 복음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을 피한다. 그 이유는 복음에 대한 정의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먼저 공동체의 복음에 대한 규약을 해야 할 시점이 된 것 같다. 그러한 규약이 없이 개념화시킨 다른 공동체의 개념을 평가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럼에도 로잔이 말하는 복음은 내용 이전에 하나님이 선교를 주도하는 케이프타운의 서약(2010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근거한다. 필자는 복음의 선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한 성령의 권능과 인도라고 생각한다(행 1:8).    

로잔 언약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제언했기 때문에, 창조에서 복음 개념이 수립되어, 창조 회복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피조물의 회복이 성령을 통해서 말씀으로(by his Word through his Spirit) 변혁될 것으로 상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까지 창조의 회복으로 구상화시켰는데, 필자에게 복음은 죄사함과 영생의 복음이다. 즉 로잔의 복음에는 죄사함과 영생의 내용이 없다. 마지막 기도 문장 “오 하나님, 우리 아버지시여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영을 통해 새 창조의 충만함을 주시옵소서!”는 로잔의 복음 이해, 창조와 성령으로 집약된 것을 볼 수 있다. 그 과정에 “당신의 아들”은 통과하는 거점, 도구적 위치에 있다. 필자에게 복음, 예수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이시다(계 1:8, 21:6, 22:13). 

4. 성경에 대한 로잔 신학에 대해서

“The Bible: The Holy Scriptures We Read and Obey”, 로잔의 성경 개념은 복음주의의 성경 개념이다. 복음주의와 보수주의(개혁신학)의 성경 개념은 1978년 시카고 선언(The Chicago Statement on Biblical Inerrancy)에서 구체화된 무류 논쟁(무류(無謬, infallibility)와 무오(無誤, inerrancy))에서 쉽게 구분되었다. 로잔의 성경 개념은 무류의 수준에서 약간 더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무류’는 성경원문의 무오를 인정하지 않으며, 칼 바르트의 신학적 소양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될 때에 무류하다는 견해이다. 시카고 선언은 자유주의적 경향, 고등비평, 로마 카톨릭의 주장에 거슬러 무오를 변호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로잔의 성경 개념은 시카고 선언과 유사하지 않다. 로잔에서 성경을 말할 때 “읽음과 순종”으로 제시해서,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에 대한 배려는 없다. 성경은 개인적 유익을 위한 목적이 아닌, 교회의 지체들을 위한 성경이다. 

5. 교회에 대한 로잔 신학에 대해서

제4차 로잔대회(2024년)의 주제는 “교회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이다. 이것이 4차 로잔대회의 선언서가 협의적으로 작성된 이유일 것이다. 로잔의 교회관은 콘스탄티노플 신경의 교회관을 명시했다. “교회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이다(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다만 그 문장은 니케야 신조의 단어(in the words of the Nicene Creed)라고 말한 것은 좋은 사례가 아니다. 콘스탄티노플의 교회의 네 속성은 진보적 기독교와 보수적 기독교가 모두 취하는 문장이지만, 지향성에서 같지 않다. “교회의 선교는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는 것이다”라는 문장에 대해서 진보적 기독교에서도 부정적 의미를 비췄다. 그러나 보수적 기독교적 성향인 필자도 만족하지 않는다. “교회의 선교는 복음을 전도해서 성령의 권능으로 그리스도인(성도)를 세우는 것”을 목표하기 때문이다. 로잔의 신학은 그리스도를 닮은 실천(Christlike practice)을 추구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추구한다. 

6. 인간에 대한 로잔 신학에 대해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회복으로 규정하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다. 포괄적으로 모든 종교도 유사하게 혹은 동일하게 인정하는 부분이다. 죄와 회복을 말할 때에 복음선포와 죄사함의 구도는 없다. 단순하게 그리스도에 의해서 창조된 하나님의 새로운 인류로 규정했다(52항).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와도 충만한 교제를 요청했다(55항). 

그리고 56-70항이 성 정체성(sexual identity)에 대한 진술인데, 57항의 “우리는 섹슈얼리티(sexuality, 성적 지향성)에 대한 왜곡을 탄식한다”이 양 진영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문장이다. 보수적 기독교에서는 ‘죄’라고 명시하지 않았음에 탄식하고, 진보적 기독교는 ‘왜곡’이라는 표현에 탄식했다. 69항에서 등장한 어휘는 “동성 매력(same-sex attraction)”이라는 어휘이다. 이 항은 부정적 의미의 문항(해악을 애통한다)에서 중간적 의미(사랑이 부족했음을 회개)로 변경되었다. 서울 선언문은 동성애에의 거대한 파도에 완파는 아닌 거의 완파된 수준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로잔 대회에 참가한 참가자들의 많은 숫자는 동성애를 허용한 교회의 사역자들이었을 것이다. 세계 교회에서 동성애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표현한 교회는 한국 교회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7. 제자도에 대한 로잔 신학에 대해서

참고로 ‘제자도’로 번역한 Discipleship은 ‘권징’으로 번역할 수 있다. 로잔 선언문에서 “제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근거한 제자도는 율법적 기독교를 구상화시키는 새로운 개념으로 볼 수 있다. 

8. 열방의 가족에 대한 로잔 신학에 대해서

로잔 신학의 큰 매력은 “열방을 가족(The Family of Nations)”으로 세우는 개념으로 보인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여러 요소에 대해서 로잔 선언문이 담기를 기대하는 인터뷰를 보았다. 평화를 사랑하고, 폭력을 싫어하는 것은 인간의 선한 본성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에서 선교를 하나님이 해야 한다고 주장했듯이, 인간의 선한 본성으로 선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보수적인 기독교의 기본 체계이다(전적부패). 기독교가 평화를 보여주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를 보여주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 어떤 이슬람 학자는 이슬람보다 기독교가 더 폭력적이었다고 역사를 평가했다. 기독교와 이슬람 종교들이 평화성을 드러내는 것을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높이고 전해야 한다.

9. 기술(Technology)에 대한 로잔 신학에 대해서

로잔 선언문에서 기술을 언급한 것은 유념해서 보아야 한다. 로잔 선언문에서 기술의 위험성을 지적했지만,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기술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우리의 시대가 트랜스휴먼(Transhuman) 시대이기 때문이다. 기술 사회는 포스트휴먼(posthuman) 사회를 예고하고 있다. 그런데 로잔 선언문에 트랜스휴먼의 위험성을 지적하지 않고, 기술을 선하게 활용해서 새래운 시대 도래를 준비하도록 문장을 작성했다. 트랜스휴먼은 호메 사피엔스의 다음 인류로 설정한 것인데,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 )는 호모 데우스(Homo Deus)를 주장했다. 

10. 나가는 말

로잔 선언문은 나가는 말에서 죄용서를 말한다. 그러나 그 죄용서는 피의 죄용서 개념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킴(to turn from their sins)”이다. 그것을 화해(reconciled)로 규정했다. 결정문 마지막에 “So that we, the church, may declare and display Christ together!(우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고 마감했다. 그런데, “오 하나님, 우리를 도우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마쳤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한 특이한 모습을 보였다. 

로잔의 주요 인물은 존 스토트(John Stott)와 빌그 그래함(Billy Graham)이 있다. 이 복음주의 운동은 로이드 존즈(Martin Lloyd-Jones, 1899-1981) 박사가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의 신학 범주에서는 로이드 존즈의 성령세례 이해에서 함께 하지 않는다. 그 로이드 존즈와 존 스토트가 복음주의 운동에서 결이 다르게 형성된 것이 로잔 대회이다. 

로잔 대회는 대한민국 장로회의 총회 기간에 개최된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그리고 성명서가 사전에 나오는 심각한 실수를 범했다. 그리고 내용면에서는 보수적 기독교와 진보적 기독교에서 수용되지 못한 중간적 위치에 섰다. 그런데 로잔의 지향성은 중립일 것인가? 보수적인가? 진보적인가?로 볼 때, 세 진영에서 모두 동일한 가치로 평가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로잔의 신학은 어디로 갈 것인가? 양측에서 비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로잔 스스로가 결정해야 될 문제이다.  

요한계시록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