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방선생 최흥종】개정판 구입안내
애양원 설립자의 생애와 신앙, 최장일 지음
오방선생 최흥종 목사가 소천되기 하루전 1966년 5월 13일 남긴 최후유언장
" 말은 못해도 정신은 총하다. 최후유언
예수잘 믿고 구원(확신을 가져라)...
나는 가도 영원 미래세계에서(만나자)...
죽는것이 아니니 염려말라...잘있거라. "
1. 오방선생 최흥종(崔興琮,1880년5월2일~1966년5월14일)은 목사이다. 기독교 목사는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세우고 확장시킨다. 최흥종 목사는 "오방선생"으로 잘알려져, "오방선생 최흥종"이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그러나 우리는 "목사 최흥종"을 부각시키고 싶다. 최흥종은 광주 최초의 장로였고 목사였다.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사역하고 광주 무등산에서 소천된 그리스도인이고 목사이다.
2. 오방선생 최흥종은 1904년 12월 25일에 선교사들을 만났고, 세례를 받았고, 장로가 되었고, 목사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하다가 투옥되기도 했고, 석방되자마자 북문밖교회(현재 광주중앙교회)를 분립해서 개척했다. 그리고 시베리아 우스리스크 지역에 2회 해외선교 활동을 했고, 소련이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동포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하면서 사역의 동력을 상실했다. 그 후 귀국하여 제주도 모슬포교회에서 사역하셨다. 그리고 1909년부터 한센인들을 돌보는 사역을 진행했다. 당시 동갑내기 선교사인 서서평, 윌슨과 동역했다.
3. 오방선생 최흥종 목사는 1920년 12월 2일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는데, 당시 신학생은 각 지역에서 사역하다가 몇 개월간 평양신학교에 모여서 공부를 했다. 당시 교회와 사역에는 성경과 기도만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최흥종은 성경의 핵심 사상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정확하게 실천했다. 이러한 사례는 칼빈에게서 나타났다. 칼빈은 제네바, 한 도시를 그리스도의 나라로 효과적으로 구성한 최초의 사역자이다. 칼빈은 1,000년의 기독교 자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루었지만, 최흥종은 성경과 기도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사회 질서를 구현했다. 가장 약한 이웃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일으켜 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했다. 그리스도인은 풍부한 자료와 성경과 기도로 진행해도 동일한 방향으로 유사한 현상을 발생시킨다.
4. 오방선생 최흥종이 후기에 만난 사람들이 대한민국에서 유력한 수도공동체 지도자들이었다. 이현필, 정인세, 김준호, 김준 등이다. 그들은 가난한 환자나 장애자들을 돌보는데 평생을 보냈다. 그런데 교회는 그들을 신비주의자로 부른다. 사랑을 실천하면 신비주의자인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최흥종 목사는 장로교 목사이지만 영성운동가들과 교류하며 가르침을 준 사역자로 이해할 것을 제언한다.
5. 오방선생 최흥종은 1935년 신사참배에 항거하는 의미에서 정관수술을 했다. 그리고 5가지를 버린다는 뜻에서 오방을 선언하면서, 오방 최흥종이 되었다. 1935년은 일제가 신사참배 강요의 마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때이다. 조선장로교회의 각 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인정하면서 결국 1938년 9월10일 총회에서 신사참재를 결의했다. 최흥종은 신사참배 거부를 온몸으로 표현했다. 필자는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거부표현, 한상동 목사의 신사참배 거부를 조직적으로 운동함, 박형룡 박사의 망명 그리고 최흥종의 자기부인 등을 모두 다양한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