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폐기론과 신율법주의

2021-03-16     고경태

율법폐기론(anitinomianism), 신율법주의(neo-nomianism) 논쟁은 16-17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것이고, 그 논쟁이 한국 교회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같지만 전혀 다른 논의이다.

율법주의(ligalism)과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는 같지 않다.

nomianism을 기점으로 anti(반(反))인가? neo(신(新))인가로 나뉜다. nomianism은 nomos(법, 규범, 질서)와 연관된 개념이다. 중세 시대 이후에 유럽에서는 법 이해가 발전했고, 국제법까지 형성되던 때였다. 국가와 국가 관계의 법 이해가 국제법이고, 필자는 교회와 국가(생활) 관계 설정에서 율법폐기론과 신율법주의 논쟁이라 제시하고 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생활의 연관성을 인정한다면 신율법주의가 되고, 교회와 관계가 약하거나 부정한다면 율법폐기론이 된다. 교회의 가르침을 중요하게 세우면 신율법주의가 된다. 절대화시키면 로마 카톨릭주의, 조금 약화시키면 주교주의가 될 것이고, 좀 더 약화된 개념은 감리교식 감독주의라고 분류한다. 프랭크 터너는 율법폐기론자들을 교회의 권위에 대해서 불신한 것으로 제시하며, 신비주의자, 초기 퀘이커교도, 미국 복음주의 각성 운동, 모라비안, 경건주의, 진젠도르프, 웨슬리안 등으로 제시했다(프랭크 터너: 2016, 107-127)

교회와 정부 역할을 완전하게 부정하는 재세례파에서 스스로 성경을 읽어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겠다는 경건주의가 있고, 회중제도를 취하는 회중파와 침례파가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교회의 가르침(목사의 설교)과 개인경건생활의 강조에서 개인경건생활이 강조될수록 율법폐기론이 된다.

루터와 칼빈의 공통점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을 강조한 것이다. 루터에게서 좀 더 강조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에게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에 대해 매우 중요하게 이해한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와 왕국에 실현되기를 기대하는 삶과 사회제도와 직결되었다. 천상의 주 예수께서 통치하심을 믿었고, 주의 말씀으로 통치가 현실화된다고 간주한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발생된 개념이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Divine Right of Kings)이다. 왕국을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신 것까지 왕과 교회가 인정했지만, 통치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었다. 1077년 카노사의 굴욕(Humiliation of Canossa)과 유사한 일이 제임스 6세 관계에서 발생하기도 했다. 멜빌은 1592년 황금법(Golden Acts, 김중락: 2017, 193)으로 암흑법(Black Acts, 왕은 국가뿐만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다)을 무효화시켜 “주의 말씀이 왕국을 다스린다”는 장로파 의식의 근간을 확립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지만, 16-17세기에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규정하는 권위에 대한 교회와 왕국의 갈등을 보아야 한다. 18세기부터 유럽에는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었지만, 국교는 기독교(개신교와 천주교)를 유지했다. 율법폐기론과 신율법주의 논쟁은 개신교 진영에서 피할 수 없었다. 율법폐기론과 신율법주의는 거룩한 생활을 하기 위한 방편을 위한 논쟁이다. 국가와 관계가 거의 정립된 이후에는 개인성경독서와 교회권위에 대한 논쟁이다.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면 신율법주의가 될 것이고, 개인성경독서를 강조하면 율법폐기론이 된다. 양자 모두 “죄를 죽이며 거룩하게 사는 것”에 일치한다. 교회의 권위는 선포된 복음의 내용인지, 사역자의 권위인지 파악해야 한다.

한국에서 율법폐기론과 신율법주의 논쟁은 유럽의 논쟁과 전혀 연결성이 없는 독자적인 갈등이다. 유럽 교회 역사와 신학 논의 사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신학자는 윤리가 없는 교회모습을 율법폐기론이라고 말하는데 근거가 없는 자기 규범에 의한 자기주장일 뿐이다. 율법폐기론이 거룩한 생활을 절대로 부정하지 않는다. 거룩한 생활을 거부하는 집단은 없다. 거룩한 생활을 탐욕으로 전환시킨 형태는 율법폐기론이 아닌 맘몬니즘(mammonism)이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성도들이 거룩하게 살려는 몸부림이 없기 때문에 문제일 것이다. 율법폐기론과 신율법주의 논쟁은 거룩하게 살려는 몸부림을 하는 교회와 성도들의 논쟁이다. 거룩한 모습이 없는 상태에서는 율법폐기론이나 신율법주의에 대한 논의나 판정을 할 수 없다. 그러한 논의를 위해서는 먼저 거룩한 모습이라도 산출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국가 관계는 논의할 사안이 되지 못한다. 최근 코로나19 때문에 국가가 교회에 대한 행정에 대한 이해가 분분하다. 필자는 국가의 행정이 교회에 대해서 적절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국가는 교회와 사역자에 대한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먼저 사역자가 존중받도록 지식 능력과 윤리 모습이 있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현재 문제점은 신뢰를 받을 만한 어떤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의 단초는 성직자의 무지였다. 한국 교회는 일제시대부터 성직자의 무지에 대해서 비판받았는데, 100년 동안 개혁되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상황이 온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처럼 교회 사역자가 사회에서 지식의 최선봉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17-18세기 유럽처럼 율법폐기론과 신율법주의 논쟁을 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참고서적]

프랭크 터너, 『예일대 지성사 강의』, 서상복 역(서울: 책세상, 2016년).

김중락, 『스코틀랜드 종교개사』 (서울: 흑곰북스, 2017).

Edwin Nisbet Moore, 『언약도의 역사와 유산』, 오수영 역(서울: CLC, 2018).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형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