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범화된 이중칭의(double justification)와 합의되지 않은 이중전가(double imputation)

이중칭의와 이중전가는 종교개혁 후에 형성된 구원 이해 도식이다.

2021-03-04     고경태

이중칭의(double justification)는 두 형태(two type)가 있다. 첫째는 칭의와 성화 관계이고, 둘째는 능동적 칭의와 수동적 칭의라는 개념이다(참고, 박재은, “능동적 칭의(Active Justification) 개념의 신학적 중요성과 필요성 고찰”, 『갱신과부흥』 22호). 능동적 칭의와 수동적 칭의는 영원한 칭의(eternal Justification)와 연결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칭의는 실체에 부여하는 하나님의 법적 선언이다. 영원한 칭의는 판결을 받을 실체가 없는 상태이고, 객관적 칭의도 시간에서 일어났지만 판결받은 실체는 없기 때문에 과도한 사변이라고 분류할 수 있다. 영원한 칭의는 예정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칭의, 예정과 선택 그리고 구원과 영생은 긴밀한 관계이다. 칼빈은 이신칭의를 힌지(hinge, 경첩, 돌쩌귀)라고 제시한 것이 이해되는 부분이다.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신칭의)을 선언했지만, 강조한 것은 십자가 신학이다.

1541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이중칭의에 대해서 루터파 진영과 로마교회의 토론이었는데 칭의(처음칭의)와 성화(칭의 된 후 과정) 관계에 대한 토의가 있었다. 그 회의장에서 합의했지만(오직 은혜, 협력 은혜), 뒷방에 있는 양측 수장들이 거부하면서 양측 모두가 거부한 사례가 되었다. 로마교회는 트렌트 회의로 자기 이해를 결정했고(1545-1563), 개신교회는 루터파(일치신조, Formula concordiae. 1577)와 칼빈파도 각각의 진영에서 자기 이해(네덜란드 세일치신조, 스코틀랜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형성시켰다. 스위스에서는 칼빈과 불링거가 2차 스위스 신앙고백서를 형성시켰다. 잉글랜드에서는 39개 신조를 형성시켰다. 모두 이중칭의에 관련한 구도가 있는데, 로마 교회와 개신교 진영이 각각 다르다. 개신교는 "칭의와 성화가 모두 은혜라는 구도(duplex gratia)"로 이중칭의 개념을 모두 합의했다. 로마 교회는 칭의가 아닌 의화의 시작은 교회의 존재와 교회의 수단으로 은혜의 주입을, 개신교는 하나님의 소명에 의한, 성령과 교회의 방편으로 은혜의 전가를 구도화시켰다. 칭의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칭의의 저자(시발자, 발화자)가 누구인지 규정하는 것이 핵심 사안일 것이다. 개혁파는 칭의의 저자를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제시한다(근거 히 12:2).

그런데 개신교 진영에서 칭의와 성화 관계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전제(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를 지킨다고 하면서도 내용으로는 그렇지 않은 복잡한 구도가 발생했다. 구원은 시작과 마지막이 있다. 로마 교회는 의화의 시작과 의화의 마지막을 규정하고 있는데, 의화가 시작되었지만 마지막에서 칭의를 받지 못할 수 있다(구원 탈락 가능성 인정). 그래서 필자는 Justification에는 칭의(稱義)와 의화(義化), 두 개념이 있다고 분석했다. 서양은 한 어휘에 두 개념을 쓰기 때문에 분별이 어렵지만, 우리는 각각 어휘가 있기 때문에 자기 어휘를 사용할 수 있다. 칭의라고 하면 의화가 되지 않았지만 의인이라고 불려진, 칭(稱)된 상태이다. 의화는 말 그대로 의(義)가 된, 화(化)가 진행된 상태이다. 구원 탈락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칭의’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서양 학자들은 justification을 사용하고 있으니 독자가 면밀하게 검토해 하고, 우리나라는 칭의와 의화가 분리되었으니 분리해서 사용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Justification by faith, 이신칭의'(以信稱義)와 이신득의(以信得義)로 구분할 수 있다. 루터가 십자가 신학으로 내재적 의에 대해서 거부하는 형태와 칼빈이 죽임과 살림으로 끊임없는 자기부정을 제시한 것을 보아야 한다. 루터와 칼빈은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사역이기 때문에 구원의 확실성을 견지했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서 성화를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칭의를 강조하기 때문에 성화가 무시된다는 주장인 것 같다. 칭의만 강조하면 구원파적이라고 분류하는 구도는 무지한 단정이다. 자기 칭의(개인 구원)의 시점, 발화자에 대한 인식이 없고, 단순하게 시간 개념만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칭의는 구속주께서 행하신 은혜이지만, 그 은혜를 받는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칭의를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성화를 진행하실 것인데, 칭의 후에 성화가 없다면 칭의하신 하나님께서 쉬신다 혹은 포기하신다는 결론 밖에 되지 않는다. 구원의 확실성은 하나님의 의지의 불변성에 기초한 것이다. 칭의를 믿는 사람에게 성화가 없을 수 있다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칭의가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17세기에서 개신교 진영에서 칭의와 성화 관계에 대한 갈등은 보이지 않는다. 칼빈은 “칭의를 죄사함과 의의 전가”로 규정했다. 칼빈의 글은 광의적 개념이 많기 때문에 수련하는 후진들은 겸손하게 수렴해야 한다. 17세기 브리튼의 신학자들은 “칭의(justification)에 대한 연구”를 제시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은 “구원(salvation)에 대한 교리”이다. 그런데 브리튼의 신학자들은 칭의, 언약 등에 대해서 몰두한 연구한 저작에 대해서 청교도가 성화를 소홀하게 여긴다는 비판은 없다. 잉글랜드 퓨리탄들은 “칭의와 전가 교리”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전개한다. 그들에게서 구체화된 개념이 이중전가(double imputation)이다. 우리는 브리튼에 의 개념과 언약 개념에 영향을 끼친 사상가를 프랑스의 피터 라무스(Peter Ramus, 1515-1572)로 이해하고 있다. 라무스는 논리학 체계를 새롭게 형성시켰는데, 그 중 하나는 나무 구조(tree structure)이다.

전가 교리(imputation)는 루터가 로마 교회의 의의 주입의 주장을 개혁하여 제언한 개념이고, 성경에 등장하는 어휘이다. 전가(轉嫁)가 법적 용어이기 때문에, 우리는 법정적 칭의(forensic justification)라고 한다. 이중전가 구도는 잉글랜드 퓨리탄에서 시작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잉글랜드 퓨리탄은 “칭의와 전가 개념”을 세분화시켰다. 그 목적은 무엇일까?

필자는 플라키우스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분류시킨 사례를 보았다. 그런데 그가 거기에서 “획득한 의를 전가”한다는 제시는 보지 못했다.

Flacius also used the debate as an occasion to develop explicitly the distinction between Christ’s active(his obedience to the law) and passive(his payment of sin on behalf of human race) righteousness in his work(concerning Righteousness vs. Osiander), (1552년, p. 20-21).

순수-루터파의 플라키우스와 필립파는 모두 오시안더의 의화 체계를 부정했다. 플라키우스는 오시안더를 배격하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그리고 그의 사역 안에서 의를 제시했다. 그런데 잉글랜드 퓨티탄은 그리스도께서 능동적 순종을 해서 획득한 의, 수동적 순종을 해서 획득한 의를 말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피스카토르의 견해를 들면서 주장하고 있는데, 피스카토르가 수동적 순종으로 획득한 의만을 전가하다가 정죄받았다는 보고가 반복되이 있다. 피스카토르는 프랑스 개혁파 교회에서 정죄된 것으로 보이는데(라로쉘 총회), 그는 독일 개혁파 신학자로 분류되어 있다. 그가 여러 신학 문제로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공적 판단은 교과서나 신학저술의 2차적 진술로 평가할 수 없다. 공적 판단의 근거는 1차적 진술과 공적 문헌으로 판단한다. 판단은 구체적 실체로 판단해야 한다.

“의의 이중전가” 체계는 “구원의 이중칭의” 체계 안에서 발생한 것이다.

개신교의 이중칭의의 구도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처음칭의와 최종칭의의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구원의 확실성). 둘째 처음칭의와 최종칭의의 결과가 다를 수 있다(구원 탈락의 가능성). 후자의 구도는 트렌트 종교회의와 유사한 패턴인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레겐스부르크 회의(1541년) 결정 수준이다. 루터는 보편적 속죄 범위를 가졌지만,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확실했다고 한다. 신학자의 주장을 보면 그의 심장을 엿볼 수 있다. 구원받은 사람은 완전할 수 없지만, 주께서 새롭게하신 심장은 동일하다. 오직은혜의 이중칭의에서 이중전가 구도가 있는 이중전가 중 하나를 취사선택해야 할 의무는 없다. 오히려 이중칭의에서 “구원의 확실성과 탈락 가능성”의 갈림길에서 플로우챠트처럼(Ramism thought method) 다음 단계로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구원의 탈락 가능성은 주장한다면 트렌트 종교회의 결정(로마 카톨릭주의), 알미니안의 형태의 유사 반복으로 분류할 수 있다. 17-18세기 개혁파는 로마 카톨릭, 알미니안, 소시니안을 배격하는 것이 동일패턴이었다. 필자는 배격한 것이 실패했다고 평가하고, 배격을 목표하는 것을 지양하도록 제언한다. 배격은 소극적이기 때문이고, 적극적으로 복음의 내용을 밝히는 것을 제언한다.

“의의 이중전가” 체계가 구원의 확실성을 견지한다면, 논리적 난맥 혹은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논리적 모순은 수동적 순종의 의와 함께, 반드시 능동적 순종의 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문제가 있다. 수동적 의가 있는데 능동적 의가 없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주장은 탈락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 둘째, 수동적 의가 전가되고 능동적 의로 전가된다면 굳이 둘을 말할 필요가 없다. 수동적 칭의와 능동적 칭의는 첫째칭의와 성화 과정 그리고 최중칭의 구도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수동적 순종의 의가 전가된 뒤에 자동으로(신학에서 사용하지 않은 공학적 어휘이다) 능동적 순종으로 전개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수동 순종의 의로 구원이 가능하다면 굳이 능동적 순종의 의 전가를 제시하거나 강조할 필요가 없다.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사용된 동사가 수동문과 능동문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에는 능동형 동사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믿음의 결국은 곧 영혼의 구원이며(벧전 1:9), 구원을 시작하신 이가 구원을 이루실 것이다(빌 1:6).

칭의와 성화에서, 성화 그리스도인의 “삶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필자는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who and what) 살 것인가? 어떻게(how and why) 살 것인가?의 문제라고 분류했다. 스코틀랜드 언약도(장로파)는 무엇으로 살 것인가?에 대해서 질문하고 답하는데, 잉글랜드 퓨리탄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질문하고 답하려고 한 것으로 분류했다. 동일한 장소와 시간(where and when)에서 그리스도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나를 구원하신 이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것인가? 구원하신 이의 명령을 성경에서 찾아 능동적으로 준행하여 살 것인가?

이중칭의에 대한 개신교 안의 견해는 다양하다. 여러 견해를 이단 혹은 이단적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그것은 내용의 위법성 문제가 아니라, 통제 능력 문제로 평가한다. 이단으로 규정하면 배격된 인물과 사상을 집단에서 퇴출시켜야 하며 통제도 가능해야 한다. 한 집단에서 이단으로 배격해서 퇴출시켰는데, 오히려 세상에서 영향력은 더 강하다면 어떤 상황이 되겠는가? 쥐가 고양이를 배격할 수 없다. 이단은 세상보다 악한 무리이다. 이단은 세상을 점령해서 세상으로 교회를 박해할 것이다. 교회는 박해 받을 때에 박해하는 자를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며 자기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교회의 배격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이었다. 황제가 그리스도인일 때도 그랬다. 스코틀랜드 장로파는 소극적으로 내부에 들어온 다른 견해에 관용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관용이 허용되면서 17세기 문서만 소장하고 있는 수준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교회는 신생 집단으로 신학화를 구성하면서 16-17세기 신학 산물로 신학을 구성하려는 집단과 16세부터 20세기까지 산물을 포괄하여 구성하려는 집단의 갈등이 있다. 필자는 루터와 칼빈, 그리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로 신학을 구성하려고 노력하자고 제언한다. 그것이 인간 영혼의 구원의 합당한 방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세상의 공공재가 아니라 특별계시로, 영혼 구원의 유일한 방편이고 은혜의 유일한 원천이다. 복음은 세상과 나눌 수 있는 선물이 아니다. 복음의 사람이 세상 속에서 사랑으로 봉사함으로 유익을 주어야 한다.

필자는 이중칭의에 대해서는 루터와 칼빈이 동일하게 견지한 오직 은혜(전적 은혜)를 제언한다. 이중전가의 신학화는 개신교 진영에서 진행되었지만 합의되지 않았다고 제시한다. 오히려 1541년의 레겐스부르크 회의 수준의 이중칭의 이해가 등장하였는데, 루터와 칼빈의 사상을 말하지만 레겐스부르크 회의 수준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개신교회는 루터와 칼빈의 이신칭의 범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됨과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를 반복하며 교회를 이루려고 한다. 이 체계를 17세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1646년)가 잘 정립했다고 평가한다.

창조와 구원은 하나님의 의지이고 능력의 산물이다. 하나님의 경륜에 인간, 천사 누구도 힐문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의지와 지식이 아닌 계시에 의존해서 사유와 생활을 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디에 있는가? 죽은 자를 살려내는 주님께 있으며, 주 하나님께서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응답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구원의 구도를 탐구하는 것도 유익하지만, 구원하신 주님의 이름을 고백해야 교회가 세워지고 주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기독교는 명확하다. 기독교는 창립자께서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구속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며 전파하는 종교이다. 기독교는 들은 자가 전하는 방식으로 포교 방법을 정확하게 계시되어 있다. 구주의 이름을 들었고, 주의 이름을 전파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듣고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예수를 전한다.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형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