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죄와 용서

[종그니 칼럼] 대한민국 헌법

2023-09-24     김종근 목사

성경에는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지으시고 아담과 이브를 그곳에서 살게 하시고 그들에게 딱 하나의 계명을 주셨다.  "에덴 동산의 모든 실과는 너희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너희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한 그 '금단의 열매'를 마귀의 꾐에 따 먹고는 아담은 변명하기를 "하나님이 짝지어 준 저 여자가 따서 내 입에 넣어주므로 먹었나이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과 이브때문이라고 변명한다. 그리고 이브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고 자기 허물을 뱀에게 돌린다. 이처럼 우리는 죄를 짓고서도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할 때가 참 많다. 내맘이 잘못 끌려서 한 행동이므로 솔직하게 "예 제가 했습니다." 하면될 것을 우리는 좀스럽게 온갖 변명을 한다. 좀더 솔직해 지자!  그리하면 마음 그릇이 달라지고 사물을 보는 안목도 달라진다.  3인조 도둑이 밤에 남의 집 물건을 훔쳤다.  하나는 망을 보고 둘은 집안으로 들어가서 훔쳐온 돈을 나누면서 망을 본 도둑에게 "너는 망만 보았으니 우리의 반만 가지라." 망을 본 도둑이  "너희도 양심이 있어야지 어찌 이럴수 있느냐"며 거세게 항의 했다. 이때 세 도둑놈의 양심은 어떤 양심일까?  흔히 어머니는 강하다고 말한다. 이는 자식을 향한 모성애를 말함이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도 죄로부터  자유로울만큼 강한자는 아무도 없다.

'견물생심'이란 말이 있다. 몸둥이를 이동하면서 필요한 것을 찾아야 하는 인간은 물질을 보게 되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그러나 동물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기에, 동물과 달리 내 것이 아닌 남의 물건에 욕심을 내면 도적이 된다. 정치꾼들이 돈으로 표심을 사는 것도 민심을 도적질한 것이다. 또 자력이  아닌 남에게 의존하여 사는 기생충같은 인생들도 있다. 모든 식물은 태어난 자리에서 뿌리를 내려 자란다. 하지만 다른 식물에 빨대를 꼽고 사는 기생식물도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 두 가지를 말하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죄를 짓지 않는 것'과 내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일지라도 용서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려면 '홀로서기' 즉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 부동한 신앙심을 길러야 한다. 우리 인생이 저절로 '생명의 존재'가 되는게 아니다. 하늘의 섭리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존재' 즉 반드시 "人間社會에서 꼭 있어야 할 존재"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사람이든 자연이든 맘에서 우러나는 사랑은 집착이나 소유가 아니라 나를 내어줌이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때 즉 나를 비워 나의 진심을 내어주지 못할 때 육신의 안목으로 피상적이고 육욕적인 헛된 것에 사로잡히게 되면, 자칫 마음 속에 화,  분노, 적개심 복수심 모멸감 등 온갖 부정적 감정들이 나를 주장하게 된다. 이러한 감정에 내가 사로잡히면 우리의 몸과 맘은 달아올라 견디지 못하게 된다. 울화로 가득 찬 증오는 우리 몸과 영혼을 죽이는 독소다.  이러한 독소가 스며들때 내적 자유도 설 곳을 잃어 비움의 삶, 내어 줌의 삶을 누리기 어렵다.    
용서를 위해서는 
첫째, '의지적 결심'이 있어야 하고,
둘째, 그때 울화와 분노의 매임에서 해방이 된다.
셋째, 용서할때 내면의 평화와 자유의 힘이생긴다. 
넷째, 용서하고 나면 상처 준 사람이 더 이상 내 마음을 주장하지 못한다. 
다섯째, 용서함으로 내가 나를 다스릴수 있게 된다. 
여섯째, 용서할 때 나와 상대방의 영혼의 상처가 치유된다. 
일곱째, 용서함으로 이것이 내 삶의 '반면교사'가 된다. 
여덟번째, 용서하게 되면 반목(反目)에서 돌이켜 참 자유를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보여준 십자가 사랑이다. 

‘용서 신학’을 전개한 신학자 스미즈는 이렇게 말한다.  "용서하는 것은 죄수를 풀어주고 나서 그 죄수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용서를 모르는 너여!  용서하며 살자! 그러면 용서를 받을 것이다 (누가복음 6장 37절). 남의 허물을 용서할 줄 모르면 주님도 나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마태 6,14; ) 성 프란치스코는 “분노와 흥분은 자신과 다른이에게 용서의 장애물이 되므로,죄 때문에 화를 내거나 흥분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우리가 진실로 용서하기  힘든 것도 용서할수 있는 힘을 주심으로 악을 악으로 갚는 일 없이, 진정으로 악을 선으로 갚는 용서를 하자.”  용서란 누군가가 내게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해서, "이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값지 않고  그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가 기독교 안으로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바뀌게되면 죄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을 넘어서서 '새 사람'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이 바로 '용서'이다. 

2007년 개봉되어 큰 화제를 몰고왔던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내겐 늘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아 있다.  주인공 신애는 모든 것을 잃고난 후, 어린 아들 손을 잡고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 온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던 신애에게 업친데 덮친격으로 청천벽력같은 사건이 발생한다. 유일한 희망이고 의지였던 아들이 유괴 살해된 것이다. 너무나 큰 충격 앞에 주저 앉아 있던 신애는 오로지 신앙에 매달리며 평상심을 찾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리고 마침내 주변 사람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면회하러 간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그를 용서해주러 간 것이다. 면회실에서 신애는 살인범의 태도에 또 한번 무너지고 만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백번천번 준비했던 말을 꺼내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란 말을 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살인범은 세상 편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미 제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마치 마귀같은 음흉한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밖으로 나온 신애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는다.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았대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또 다시 그를 용서하냐구요?” 곰곰히 따지고 보니 용서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용서에는 반드시 분별과 절차와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누군가와의 관계 안에서 큰 상처를 입었는데, 원인을 곰곰히 분석해 보니 50:50 쌍방 과실이라면 서로 용서하는 게 맞다.  아니 상대방이 70, 내가30 정도 된다 할지라도  용서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살다 보면 0대100 같은 경우도 만난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당하는 경우 말이다. 그럴 경우에 필요한 것이 용서 이전에 반드시 정당한 과정과 절차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때론 비록 그것이 개인이 아니고 더더구나 국가라면 잘못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 용서인 것이다.  씻을수 없는 깊은 상처와 치명적인 고통을 안겨준 인간 말종들이 있다.  그럼에도 끝끝내 사과 한 마디 없이 큰소리 떵떵치는 사악한 존재들, 피해자들은 너무 억울해서 피를 토하고  있는데 아무런 죄의식도 없는 민족이나  인간들을 무조건  용서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일제의 정한론자들은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다시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이 나라를 한번도 아니고 두번 세번이나 민족을 송두리째 망가뜨리고도 끝까지 참회를 거부하고 있는 일제 군국주의자들!   일신의 영달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 권력욕에 빠져 선량한 백성들을 무수히 죽인 군부 독재자들은 활개를 치고 있다.  엄연히 인격이 있고 국격이 있는데 마냥 용서만 한다면 우습게 될 것이다. 그에 합당한 처벌과 배상, 진정성 있는 사과가 먼저 선행되어져야 한다.  때론 무조건적 용서가 가장 좋은 선택일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정의의 감정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예수님처럼 일흔 일곱 번 이라도 용서하는 것도 사람 됨에 있기에, 하신 말씀이다.  눈만 뜨면 용서하라!  밥 먹듯이 용서하라! 그러나 용서에도 격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가 용서를 빌때이다.  용서받지 못할 자들이 가는 곳은 어딘가? 마음의 지옥이다.  그곳은 죽어서 지옥이 아니라 살아서의 구제불능의 인생들이 가는 곳이다. 그러기에 지옥은 내가 만든 곳이니, 지옥에 빠지지 않으려거든 유혹에서 멀리 떨어져 바로 서시라!

[종그니 칼럼] 대한민국 헌법

내가 우리나라 헌법을 비롯한 법서(法書)를 손에서 놓은 지가 아마 줄잡아도 근 50년 가까이 되었지 싶다. 며칠 전에 절친한 변호사님이 `대한민국 헌법`에 대하여 짧게 촌평한 글을 보고 그 내용에 공감 가는 것이 많아 짧은 내 생각을 여기에 보태어 보았다.

제11조 제2항 :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제3항 : 훈장 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한다.

(지난날 조선왕조는 아주 쫀쫀한 계급사회였기에 어떠한 모양으로든 인권유린의 구제도로 돌아가지 아니하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이는 요즈음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갑질 논란이 독버섯처럼 형성되어 가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제31조 제4항 : 교육의 자주성ㆍ전문성ㆍ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하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의 중립성을 훼손하려는 시도가 항상 있었다.)

제32조 제4항 : 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ㆍ임금 및 근로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제32조 제5항 : 연소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동서고금에서 역사적으로 여자와 연소자의 근로 착취가 있었기에 이런 조문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제35조 제3항 : 국가는 주택개발정책 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과연 이 나라에 쾌적한 주거문화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주택이 주거용이 아닌 투기의 목적이 되지 않도록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이란 용어도 그러하다.

‘大’ + ‘統’ +‘領’ : 국가수반에 대한 이 칭호는,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민주주의의 논리에 어긋나는, 그리고 국민을 너무 왜소하게 만드는 위압적인 용어가 아닐까? 대통령이라는 용어는 1870년대 일본 군국주의의 정치학자가 president의 번역어로 만든 용어라고 들었다. 집권자들의 자기 권력욕과 맞아떨어진 구제도의 산물이다. 중국과 타이완에서는 총통(總統)이라는 말로 번역했다. 이는 대통령이든 총통이든 어느 것이나, 전제군주의 냄새가 물씬 나는 시대착오적 용어다.

생각해 보라! 우리 헌법의 근본은 국가주의도 전제국도 아닌 국민이 주체인 민주국가로 헌법 서두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가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국가 권력의 근원을 국민의 주권에 두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기에 대통령(大統領)이라는 칭호는 민주정치의 헌법 정신과는 전혀 맞지 아니한 칭호일 뿐 아니라 무궁화나 봉황의 대통령 문양 또한 민주주의 이념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권위주의 제왕의 냄새가 물씬 나는, 낡은 사고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로마 시대의 시저는 `임페라토르`즉 `존엄자`라는 칭호를 주었지만 황제의 제위에 연연하다가 죽음을 자초하고 말았다.

현 정권 또한 국민 과반수의 지지도 얻지 못했음을 알고 대통령 후보 때의 공약을 잊지 말고 국무위원 후보를 발탁할 때는 `인사가 만사`라는 말처럼 정권의 이익보다 국민 대통합과 국가발전을 위해, 적재적소의 인재를 널리 구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이러한 당위의 논리를 뒤로 한 채 오로지 정권유지 차원에서 입맛에 맞는 인사를 하므로 자칫 국정을 그르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또 하나는 현 정권의 탈북민 문제인데 그들과 폭넓게 소통해서 자유를 찾아온 그들에게 상실감이 없는 대책을 세워주리라고 내가 믿었던 것은 문 대통령이 인권변호사 출신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현 정권의 통일부 장관 세 사람이 모두 탈북민들에 의해 고소나 고발된 상태라고 한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이를 아시라! 북한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남북협상 카드에는 단언컨대 남북통일이나 남북연대의 비전은 없다고 본다. 북한 당국자의 말에 말려들지 말고 당당하시라! 그 이유는 김정은을 국가 존엄으로 인지하고 있는 저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고 그들의 균형 잃은 편견을 바로 고치는 사고(思考)의 대전환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통령선거는 나라의 백년대계를 바라보는 훌륭한 인재를 뽑는 것이어야 함에도 국가보다 당의 이익을 앞세워, 이를 권력쟁취의 발판으로 변질시켜 왔다.

지금 한반도가 남북으로 찢겨 있어 저마다 통일을 말하면서도 남한은 또 동서로 찢겨 있는 우를 범하고 있다. 지역주의와 망국적 좌우의 이념으로 나라의 바른 정치를 더욱 굴곡을 줘 왔다. 이제 우리는 치리자의 논리를 벗어나서 이같이 편향된 무소불위의 정치 행태에 이젠 신물이 난다. 지난날 수없이 되풀이해온 고답적인 행태를 벗어나 좌우를 아우를 줄 아는 대통령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고심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예를 들자면 대통령은 직선제로 뽑되 책임내각제 형태로 가는 절충형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헌법은 어떤 국가의 헌법과 비교해 봐도 대단히 체계적이고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헌법에 담겨 있는 그 규범적인 의미를 곰곰이 되씹어 보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어떠한 자세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가 자명해진다. 그러나 이런 모든 문제는 제도보다 현실이다. 시스템보다 시스템의 운용에서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헌법을 자기 안에 내재화시켜 생활화하고 그리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우리 헌법이 현실 세계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그런 세계를 물려줄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