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백스터】그리스도의 능동적순종 교리를 거부

장대선 목사, 본지 논설위원

2023-08-23     리폼드 투데이

국에 있는 장로교 신학의 큰 흐름을 형성하는 것은 영미권을 중심으로 형성된 광범위한 ‘청교도주의’(puritanism)라 할 것이다. 원래 청교도라는 칭호는 잉글랜드 국교회에 대한 반대와 비순응을 표방한 기독교 진영(Nonconformist)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청교도’(Puritans)라는 칭호 가운데서 부름을 받는 기독교 그룹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등지의 광범위한 개혁적 성향의 기독교인들이라 하겠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에서 청교도라 함은, 잉글랜드의 초기 비국교도들과 분리주의자들(Brownists, 나중에는 the Pilgrim Fathers라 칭하는 그룹을 광범위하게 주도했다)의 사역자들을 지칭하는 경향으로 통용되고 있다. 즉, 리처드 백스터를 대표적으로 하는 잉글랜드 세대의 비국교도들과 잉글랜드로부터 분리하여 떠돌다가 아메리카 식민지에 정착한 뉴잉글랜드 비국교도들을 광범위하게 호칭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교도와 반대되는 비국교도로서의 청교도들의 다수에는, 나중에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분리주의 청교도들만이 아니라, 잉글랜드에 남아서 잉글랜드 국교회의 모든 박해를 감수했던 엄밀한 개혁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청교도라 칭하여 분류하기 어려운 측면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한마디로 브라운주의파 혹은 독립교회파, 그리고 회중주의파 청교도들이라고 구체적으로 칭하여야 마땅한 것이,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청교도들이다.

◆ 불완전한 청교도주의를 펼친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

그런데 한국에서 광범위하게 청교도라 칭하는 그룹의 신학적 성향을 대표적으로 드러내어 주는 17세기 비국교도 사역자가 있다. 그가 바로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다. 리처드 백스터야말로 필그림 파더스 이전의 17세기 비국교도로서의 청교도들 가운데서 나중에 독립교회 혹은 회중주의의 성향을 띄게 되는 청교도들의 신학적인 양상이 어떠함을 단적으로 드러낸 인물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리처드 백스터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한 신학자를 한국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그의 저작들을 다 읽어본 신학자도 국내에는 없을 것이다. 17세기의 영어권 신학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리처드 백스터 또한 엄청난 분량의 저작들을 작성하였으니, 심지어 800페이지가 넘어가는 엄청난 볼륨의 저술들이 다수인 것이다. 그런즉 그런 백스터의 저술들을 다 읽어보고 분석한 한국의 신학자를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은 일부 영어로 작성한 신학사전들 가운데서 리처드 백스터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참고해 볼 수 있는 정도에서 백스터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처드 백스터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는, 나중에 뉴잉글랜드에서 활동하여 널리 우리에게 알려진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양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즉, 브라운주의로 표방되기 이전의 느슨한 분리주의에서부터 독립교회, 그리고 회중주의에 이르는 청교도주의의 양상을 비교적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인물이 바로 리처드 백스터인 것이다.

예컨대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B. Ferguson)과 데이빗 라이트(David F. Wright) 등이 편집한 New Dictionary of Theology에서는 그를 장로교파가 아니라 군주제와 영국 국교회, 그리고 예전의 사용과 주교제도를 찬성한 인물이자, 1662년의 공동기도서도 받아들인 소극적인 비국교도(English Nonconformist)였던 것으로 평가한다.

한마디로 백스터를 위시한 일부 분리주의적인 성향의 독립교회파와 회중주의 사역자들이 보여주는 청교도주의의 성향이 엄밀하지 않은 개혁의 성격임을 백스터의 초기적인 활동과 경향 가운데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백스터가 말하는 개혁주의는 교리의 개혁인 칼뱅주의가 아니라 경건주의적인 실천으로서의 ‘부흥된’이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 개혁주의 신학에서 이탈하였던 주장을 펼친, 요한 피스카토르(Johannes Piscator, 1546-1625)

특별히 ‘복음’이라는 주제에 있어서 백스터“그리스도의 죽음은 우주적인 구속의 행위”라고 설명하면서, 형벌과 희생의 죽음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옛 율법을 범하고서 참회하는 자들에게 사면을 베푸시는 새 율법을 제정하셨다고 했다. 그러므로 새 율법에 대한 순종인 회개와 신앙은 개인을 구원하는 실재적인 의로서, 효과적인 부르심에 의해 발생하고 성도의 견인의 은혜에 의해 보존된다고 했다. 이를 가리켜서 ‘신율법주의’(Neonomianism)라 칭하며, 이는 사실상 아르미니우스주의에 “새 율법”의 교훈을 덧붙인 아미로주의(Amyraldian)라는 평가를 받는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율법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더불어서 죄인의 믿음과 회개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백스터의 신율법주의 가운데서는, 칭의를 위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인”(완전하고 엄밀한 의미에서의 구속이 아니라 형벌과 희생의 죽음으로서의 구속) 믿음만이 아니라, 새로운 조건인 믿음에 수반하는 회개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본다.  

바로 이 점에서 아미로주의의 성격을 백스터가 드러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백스터는 독일 신학자 파레우스(David Pareus, 1548-1622)와 수동적 슨종을 주장한 피스카토르(Johannes Piscator, 1546-1625)를 지지하며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의해 칭의에 있어서 의가 전가된다고 하는 교리를 반대했다.

왜냐하면 피스카토르가 주장한 바와 같이, 만일에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이 의의 전가가 되어서 신자를 의롭다고 칭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무율법주의자가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으로 확보되어 신자에게 전가되는 의는, 법정적인 것(Forensic)이지 실재적인 능력의 주입(infusion)이거나 육체적인 의의 주입이 아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가 신자에게 전가되지는 않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십자가의 구속만)에 대한 믿음에 더하여 회개를 수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피스카토르와 백스터로 이어지는 칭의론에 대하여 찰스 핫지는 그의 조직신학 책에서 비판하였는데, 특히 피스카토르의 그러한 주장이야말로 개혁주의 신학 안에서의 최초의 이탈이라고 언급했다. ‘파레우스와 피스카토르-백스터’로 이어지는 연계 가운데서 백스터주의라 불리기도 하는 신율법주의가 분리주의 청교도들을 통해서 식민지 아메리카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 것이다.

◆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인정하면서도, 준비론의 오류에 빠지지 않은 신학을 펼친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

그런데 희한하게도 작금에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에 있어서의 능동적 순종의 측면에 관한 두 대립, 그리고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꽃피운 준비론(preparation)의 주장은, 이러한 일부 청교도들의 신학 양상들(즉, 피스카토르-백스터-신율법주의의 연계)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정한 백스터가 신율법주의에 따라 신자들의 자발적인 회개의 필연성을 강조했던 역사와 달리, 한국에서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긍정하는 자들에 의해 인간의 능동적인 회개를 위한 준비론이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정하는 한국의 몇몇 장로교회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준비론을 포함한 뉴잉글랜드 중심의 청교도들을 비판하는 가운데 있다. 이는 아마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그 효과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그러한 의미에서 리처드 백스터의 신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비판적인 이해가 한국의 청교도주의를 논의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개혁주의와 장로교회들에서 널리 인정하는 루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년-1661)나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 등이 공히,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하여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준비론으로 연결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 이해가 시급하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그것은 예컨대 능동적 순종의 효력 혹은 효과는 주입된 것이 아니라 법정적으로 전가된 것이기에, 칭의 이후에도 회개를 포함하는 율법에 대한 순종이 공히 신자 자신의 의지로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가 효력있게 전가되는 은혜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이해를 포함하는 것을 가리킨다. . 

하지만 그 모든 논의에 있어서 더욱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겸손’이다. 신학적 논의와 논쟁은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올바르게 정립하려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반대의 주장을 펼치는 자에게 가장 먼저 귀를 내밀어야만 한다. 또한 입을 열어서 그 주장에 대해 정확히 이해한 것인지를 물어보는 태도, 그런 연후에야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또 다른 각도에서 제기하는 겸손하고 생산적인 논의가 빠지게 될 때에, 결국 그 모든 논의는 한낱 말싸움이 되는 것이다. 그런 말싸움에서는 이겨도 진 것이요 마귀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것에 다름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