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 칼럼] 목사와 종
[종그니 칼럼]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내 나이 서른이 되엇을 때에 푸른 눈을 가진 나이 많은 미국 선교사의 눈물로 설교하는 모습에서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보았다. 주일 예배 때에 처음 들어 선 교회에서 이처럼 진순무구한 설교를 통하여 십자가의 참 사랑과 살아계신 하나님을 내 영혼 깊은 곳에서 만난 것도 처음이었다. 아니 고래심줄 같았던 내 아집이 심혼골수를 쪼개는 잔잔한 멧세지가 큰 울림으로 레마(lemma)처럼 병든 내 심령 깊숙히 파고 들어 와, 철옹성 같던 내 아집이 산산이 무서져버리고, 마침내 만 30세 되던 해에 코에 꿰어 주의 종이 되었다. 스물 셋 한창 젊은 나이에 폐결핵 말기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나긴 했으나 젊은 날의 꿈도 살 의욕조차도 모두 잃어버린 채 어느 하나 기댈 곳 없는 온 세상 모든 근심을 나홀로 지고 있는 것처럼 千辛萬苦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미국 바렛트선교사를 통하여 병들어 있던 내 영혼의 심지에 말씀이 레마로 파고 들어 와 좀비처럼 썩어문들어져 가던 내 심령에 신앙의 불이 붙자 세상의 모든 욕망의 쓰레기들이 다 타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인 본래의 내가 기적처럼 되 살아나 마침내 소경의 눈이 열리듯, '섬기는 종'의 길이 내눈 앞에 뚜렸이 펼쳐졌다. 내가 그때에 받은 '섬김의 길'이 내 심령에 각인이 되자, 그동안의 세상을 향한 나의 욕망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빛 없이 이름 없이 십자가의 길을 가라"는 말씀이 내게 임하자, 바로 이것이 '오늘을 사는 이웃들을 섬기는 종된 길'임을 깨달았다. 이제 내 인생 팔십이 된 지금 되돌아 보면 참 부끄러웠던 일도 감추고 싶은 오욕의 세월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를 위해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져 주신 주님이 걸어가신 '섬김의 길' '희생의 길'이 바로 내가 가야 할 종의 길임을 깨달았기에 그동안 꿈틀거렸던 나의 모든 욕망들은 모두 죽어지고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 사랑만을 드러내어 진실로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종의 길을 걸어가려는 본래의 나와 현실의 나와의 괴리에 몸부림치며 걸어 올 때도 많이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로 받은 이 심지의 그루터기는 그 모진 세파에도 그대로 남아 있어 종의 길을 걸어온 것을 보람으로 살아왔기에 나는 '목사'보다 '종'이라는 호칭이 언제나 마음에 더 친근히 다가왔다.
'교회'라는 말은 건물을 이름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부름을 입은 섬김의 공동체를 이름이다. 이러한 개념없이 교회라는 울타리안에 머물러 세상과 철옹성을 쌓지 말고 목사라는 어둔 이미지도 벗어버리고, 이웃과 사회에서 가장 평범한 서민 또는 가장 만만한 심부름꾼으로, 시내 길거리의 담배꽁초도 줍고 빗자루도 들고 요양원에 와서 어르신들 수발 봉사도 하고, 혹여 이일을 하기가 좀 거시기 하다면 와서 진정 '섬김의 종'된 삶이 무엇인지 현장에 와서 배우시라! 목사라는 호칭을 떼어 버리고 넥타이도 풀어버리고, 세상사람들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서 마치 동아리들이 어울리듯 그들과 호흡을 함께하며 하나가 되어 보시라! 무엇인가를 그들과 같이 하면 목사의 체통이 구겨지져 이상해 보이지 앓을까 하는 사고 자체가 바로 덜 떨어진 목사다. 주의 종의 일을 바로 체득하지 않으면 마치 땀 흘리지 않고 무임승차로 먹고 사는 불한당(不汗黨)처럼 보이기 싶상일 것이다. 본래 목사의 존재가 단지 인간의 심령 만의 구원이 아니라 점점 타락해 가는 세상을 밝히는 빛처럼 소금처럼 내가 녹아져야 함에도, 점차 세상과 등져 이웃과 소통을 끊게 되면 되려 아집의 성만 높이 쌓게되고 더불어 사는 존재로서의 삶을 망각하기 쉽다. 진정 주의 종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 일까? 얼마 전 나는 어느 교인이 자기의 담임목사에게 보내는 글을 본적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강단에 서는 목회자분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성도들의 삶을 전혀 모르는 것 같다. 많은 목사님들이 교회 안에서 온실 같은 삶을 살면서 존경만 받고 칭찬만 받고 대접만 받는 삶을 살다 보니 정작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하나님이 맡기신 성도들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또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를 많이 보게 된다. 목사님들이 스스로 사회현장에 뛰어 들어 노동도 해보고 돈도 벌어도 보고 헝크러져 있는 집안 일과 영혼의 때보다 집안에 찌든 때를 예수님의 몸을 닦듯 집안에 쌓인 일들을 손수 실천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의 종이 있어야 할 자리' 사실 이런 얘기들이 종종 있어 왔지만, 주의 종들의 귀는 무슨 말이라도 다 귀담아 들을수 있는 귀가 활짝 열려있어야 한다. 만약 듣는 귀가 거듭나지를 못하게 되면 목사도 종도 아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사도의 신앙교회 (Apostolic faith church)'는, 옛날 초대교회 때의 사도들은 자신들의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하고 교인들에 짐을 지우지 않았다. 이처럼 "초대교회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교회 헌금에 의존하지 않고 평일에는 목회자들이 아무리 힘든 노동도 마다 하지 않고 노동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중세이후 목자들의 신분 특히 카톨릭에서는 신부 위에 주교 주교 위에 추기경 그 위에 교황이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만인평등을 외치면서 이는 자가당착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다단계식 직위만 봐도 신분제의 특권 냄새가 물씬난다. 제정 러시아 때에는 동방정교회가 있었다. 정교회는 아마 카도릭과 비슷한 체제였지만 이들은 제정 러시아의 충실한 충견역할을 했다. 그 반대급부로 특권을 누리는 것은 극소수 주교들 뿐이었는데 제정 러시아 특권층에게 종교의 힘을 주는 댓가로 이 정교회에 쥐어 주는 헌금 장단에 그들은 권력의 시녀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특권도 잠시 제정러시아가 레닌등을 필두로한 쁘롤레따리아의 농민 혁명이 일어나자 민세비끄의 귀족들과 주의 종의 위치에서 일탈되어 세속의 풍요에 심령이 썩어버린 성직자들은 제정 러시아가 아래로부터의 공산주의 혁명으로 모든 체제가 송두리째 바뀌어버린 시대의 변화에 전혀 감지를 못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몸하나 둘 곳조차 없이 한 겨울 동토의 땅 시베리아 유배지로 몽땅 내 몰리게 되자, 그들은 영하 50도를 오르내리는 혹독한 추위속에서 설상가상으로 엄청난 눈 사태까지 만나 길 위에서 동사하는 사태가 부지기로 일어나고 결국 혹한과 눈 사태에 모두 얼어 죽고 말았다. 무리속에는 아이를 가진 임산부도 있었고 지팡이를 짚는 노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한번도 격지않은 혹독한 맹추위에 속수무책으로 생명을 잃었다. 무릇 목회자들이 이처럼 높은 특권의 성을 쌓고 누리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하는 것은 그런 특권을 누리는 이들이 있긴 있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한국교회 대부분은 미자립인데다 목사는 근로자 평균 임금에도 턱없이 못 미치게 생활하는게 대부분이다. 대다수는 금수저가 아닌 흙수저로 산다.
내가 잘 아는 지인 목사도 교회를 마치 건물로 보고 목회를 접으려는 마음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지만, 교인들보다 자신이 먼저 떠날 수 없어 난감해 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다. 주의 종이 있어야 할 곳은 바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날 일반 목회를 하다가 특수목회라 할 무의탁 양로원을 십여년 동안 운영하면서 차거운 세파에 씻겨 참 바보처럼 믿고 의지했던 목사 장로들로부터 속고 또 속는 돌이킬수 없는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산이 높아 험산준령이 아니고 강물이 깊어 모진세파가 일어나는게 아니다. 나는 무의탁양로원을 건축해 놓으면 나와 뜻을 함께할 동역자들의 봉사의 손길 들이 모여들 줄로만 알았다. 옛말에 도둑을 맞으려면 개도 안짖는다는 말처럼, 나는 목사 장로는 모두 나의 마음과 같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얼굴을 둘 셋이상 가진 야누스들도 많았다. 이것은 내가 모든 것을 잃고난 후에야 밝혀진 것들이다.
여러 얼굴을 가진 야누스 같은 세상에서 과연 누구를 믿을수 있을까! 문득 1000여년전 당(唐)나라 때의 시인 한산(寒山)의 詩 한수가 떠오른다.
"人問寒山道 寒山路不通
(인문한산도 한산로 불통)
저 높은 한산으로 가는 길을 묻는가/
한산으로는 갈수가 없다네
夏川氷未釋 日出露朦용
(하천빙미석 일출무몽용)
여름에도 얼음이 녹지아니하고/
해가 떠오르면 안개가 자욱하다네
似我何由屆 與君心不同
(사아하유계 여군심부동)
나같은 사람이 어떻게 한산에 갔느냐고? 그대 마음과 같지 않기 때문 이라네!
君心若似我 還得道其中.
(군시약사아 환득도기중.)
그러나 만약 그대 마음이 내 마음과 같다면 그대는 이미 한산에 와 있으리라."
위에 나오는 한산(寒山)의 구도자처럼 육신의 소욕이나 세파에서 완전히 벗어나 은인자중하는 세상 초월자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그러나 민초들의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하는 노동을 마다하지 않고 내가 땀흘려 생활할 때는 그들의 생업 현장을 느끼고, 배우는 게 참 많다. 몸으로 일해서 번돈의 가치는 단돈 1,000원의 가치도 엄청 크게 보인다. 나는 우리 목회자들이 세상을 좀 더 이해하고 낮아지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주의 종이 진짜 있어야 할 자리를 깨닫게 되었다는 고백을 들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일반 사람도 하기 어려운 것은 목사도 마찬가지다. 나는 목사의 현실 감각을 과장할 마음이 없다. 어쨌든 목사가 현실 감각이 너무 빨라서도 안 된다. 목사가 너무 지나치게 정치나 경제문제에 깊숙히 개입하거나 경제와 정치이념에 빠지거나 하는 것은 목자 본연의 자리를 일탈할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아 간다면 목사는 설 자리가 없다. 우선 자신의 소명의식이 분명하여야 한다. 목사는 현실에 살되 현실을 뛰어넘는 참 가치를 삶으로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 모두가 이해타산적이고 자기 잇속만 차리는 데도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처럼 다른 사람에게 틈을 내주고 참 바보처럼 그러나 그게 진짜 몰라서라기 보다 오히려 물질주의적인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 그리할 때, 그게 지금 이 사회에 필요한 목자의 참 모습이 아닐까?
나는 오늘의 이 사회가 교회를, 목사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알고 있다. 세상 물정에 이골이 난 정치인들이 경제인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을만큼, 말 따로 행동 따로 그래서 진짜 어렵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자리에서는, 국외자처럼 비켜서 있는 모습에서 세상 사람들은 실망을 넘어 이제는 분노를 쏟아 낸다. 나는 십여년 전에 '바보로 오신 예수'라는 설교집을 펴낸 적이 있다. 책 제목이 '바보로 오신 예수'였다. 바로 이것이 내가 예수를 바라보는 이유다. 주의 종은 사회의 머리로 사는게 아니고 섬기는 종으로 즉 "남 섬기는 종의 도를 몸소 행해 보이셨네"하는 찬송가처럼 바로 이것이 목자의 삶이 되어야 한다. 교회란 남섬기는 종의 길 이웃이 지는 십자가를 내가 지고 가는 삶에서 일탈하지 않도록 생활 현장에 뛰어들어 서민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함께 지내는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 "만만치 않은 2024년"
이제 2023년이 저 만치 가고 새해 새날이 밝았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보면 그 모든 일들을 어떻게 보냈는지 의아할 정도로 실로 격정의 한 해였다. 새해 벽두부터 북한 위협에 대응한다는 한미일 동맹은 동아시아와 세계로 확산되고, 북중러는 더 강한 결속으로 한반도 위기는 점차 증폭되고 있다. 2022년 이태원 참사의 대처에 있어 마냥 손을 놓고있던 정부는 작년에는 또 잼버리 망신을 당했다. 얼마 남지 않은 생태환경 시간표에는 현실 타개에 여념이 없는 정부는 마냥 미적거리고 있다.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모인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도 산유국과 선진국의 홍보장처럼 되어버렸다. '독립운동사'조차 지금의 흑백 이원론으로만 보며 홍범도 장군 사태를 일으킨 국방부와 軍은 수해복구 작업 중 순직한 채 상병 사건은 오히려 은폐되어, 지난 날 12.12 사태 당시를 자꾸 떠올리게 한다. '결혼해라, 아이 낳아라' 온갖 주문은 하면서도 정작 젊은이들의 입장속으로 파고 들어 문제의 답을 찾으려는 정치인은 없다. 국민통합에 힘써야 할 정부와 여당은 엉뚱하게도 서울편입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 모든 失政의 책임을 무겁게 인식해야 할 대통령은, 2024년 금년도를 어떻게 설계해 나갈지 부디 5년 10년을 내다보는 형안이 있기를 빈다. 마치 이전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채 다시 새 일을 시작하는 것 같은 무거움을 느낀다. 특히 올해는 미국과 러시아의 대통령 선거, 대만 총통 선거 등 무려 50여 국가에서 대선, 총선이 예정되어 있다. 특히 트럼프가 다시 돌아 온다면 미국을 넘어 전 세계가 더 크게 요동칠 것이다. 그러나 나쁜 여건을 통해서도 역사는 달라지기도 하듯, 어쩌면 트럼프의 당선은 적어도 한미일 vs 북중러로 빈틈없는 위기의 한반도에는 뜻밖의 돌파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올해 우리나라도 4월 총선이 있다. 언제부턴가 정치가 국민에게 희망보다 되려 낙심을 주는 게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번 총선은 이준석, 이낙연 등을 통해 철옹성 같은 양당정치에 제법 적지 않은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권력 중독과 양당 기득권이 바스라 지고, 나라와 국민의 안위, 복리보다 반사이익과 당리당략이 우선하는 정치문화가 무너져내리는 기회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 그러나 정치가 풀지 못한다고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할 게 아니라 우리 서로가 '여기 사람 있음'을 외쳐서 깨울 필요가 있다. 내 생각이나 의견의 옳고 그름보다는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문제와 과제들을 함께 고민해 나가는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책임과 역할이 아닌가 싶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사야 40장 3~4절)"
[종그니 칼럼] 삶이란 무엇인가?
작년 봄엔 걷기가 너무 힘들어서 병원을 찾았더니 동맥혈관에 혈전이 폐 입구를 막고 있어서 질식사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였다. 신장 기능 또한 낮은 수치라서 전립선 조직 검사까지 받았었다. 이후 열 달이 지난 엊그제, CT 촬영을 통해서 본바 갑상선은 물혹이고, 폐는 결핵의 흔적일 수도 있으니 3개월 후에 다시 한 번 보자고 했다. 나무도 늙으면 고목이 되듯 늙어가는 몸뚱이에 내일 일을 물어 무엇 하겠는가.
다만 한가지 소원은 지난날 10여 년 동안 무의탁 양로원을 해 오면서 그때 진 빚들을 과연 내가 다 갚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혹여라도 몸이 병들어 요양 등급환자로 요양원에 입소하게 된다면 그걸 어찌 산자라 할 수 있겠는가?
지난날 대우그룹을 창업한 `고 김우중 회장`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는데, 내 손으로 마무리해야 할 일은 많은데 주어진 시간이 짧아 조급 하기만 하다. 언제부턴가 내 앞가림도 못 하는 늙은이가 되었지만 눈만 감으면 지금 어렵게 사는 이웃들이 눈에 밟힌다.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처럼 옛 로마인들은 사통팔달로 수많은 길을 닦았다. 그 길들 좌우에는 수많은 로마인의 무덤들이 있다. 죽은자들은 그 비문을 통하여 오늘도 그 길을 걷는 산자와 대화를 한다. "산 자여! 네가 지금 이 길을 걷고 있듯이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라고.
중국 漢.唐시대의 `낙양성` 바로 북쪽에는 죽은 자의 공동묘지인 `북망산`이 있었다. 산자의 이승과 죽은자의 저승이 절묘하게 공존했다. 늙으면 마침내 가야 하는 길이 북망산이라면 이생의 삶이 아무리 화려했어도 죽음이 얼마나 거시기한가.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일화 한 가지가 있다. 그가 했던 모든 작품이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자, 한 기자가 찰리 채플린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여러 작품이 모두 히트를 했는데 그중 최고로 꼽는 작품은 무엇입니까?” 나 역시 그가 했던 영화를 거의 봤기 때문에, 최고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이 과연 무엇일까 싶어 몹시 궁금했다. 내가 생각했던 최고의 작품은 기계화되어 가는 사회에 인간은 그 부속품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모던타임즈’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엉뚱했다. “다음 작품입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그의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오로지 미래를 생각하면서 현재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은 늙은이든 젊은이든 할 것 없이 얼마나 곧잘 과거지향적인가. 현재이든 미래이든 지금 당장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 쓸모없는 과거인데 많은 이들이 지나가 버린 과거에 연연하면서, 오늘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이미 흘러간 물로는 방아를 찧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 말을 아는가? "순간을 지배하는 자라야 인생을 지배한다." (에센 바흐)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와서 예수님께 당신이 하늘에서 온 징표를 보이라고 요구하고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신 놀라운 징표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지체부자유자, 시각 장애인, 한센병자, 등등 수많은 자들을 치유하셨을 뿐 아니라,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으로 수만 명의 주린 배를 채워 주시기도 하셨다. 이외에도 당신이 하늘에서 오신 표징을 얼마나 많이 보여주셨던가.
그럼 그들이 그토록 끈질기게 요구했던 표징은 과연 무엇인가? 그들은 이스라엘에 해방을 가져다줄 정치적 메시아를 원했다. 저들의 생각은 오로지 이생의 것에 매여 있었기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진정 그들이 보고 싶은 표징은 죄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과거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켰던 것처럼 오늘 로마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저들은 로마로부터의 현세적 해방을 원하고 있는데 주님의 표징은 이 정치적인 자유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였다.
이렇게 세상의 소욕에만 목말라 있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죽어가는 이에게 억만금의 통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처럼 세상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많은 표징을 보고서도, 지금도 세상 적 안목의 표징만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요즘 자기가 낳은 어린 자식을 죽이는 인면수심의 작태들이 세상을 혼란케 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의 곁에 와 있음에도 우리는 하나님형상으로 오신 주님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가 "하나님을 보여 달라." 했을 때, 주님이" 나를 본 자는 이미 하나님을 보았거늘 어찌 하나님을 보여 달라 하느냐." 진정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이 무지 앞에 과연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