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 칼럼】 "인생의 겨울이 오기전에." (딤전 4장 21절.)
[종그니 칼럼] 사회현실을 바로 보는 안목.
오늘이 음력으로는 11월 10일이고 일년중 하루의 해가 가장 짧은 동지(冬至)다. 옛말에 "동지 섣달 지나가면 얼어 죽을 내 아들 없다."는 말이 있듯, 동지날인 오늘 춘천 서면 새벽 온도가 영하 18도로 금년들어 가장 춥다. 이런 추위가 앞으로 한달 여 동안은 맹위를 떨칠 것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요양원 앞 의암호는 이미 며칠 전에 꽁꽁 얼어 붙었다. 이 혹한을 온 몸으로 견디고 있는 들짐승들은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오늘 아침 길 고양이들도 너무 추워서인지 사료를 먹으러 나오지 않았다. 창 밖을 보면 들풀들은 물론이고 화단에 있는 화초들도 모두 말라 있고, 산야의 모든 나무들도 벌거 벗은 채로 이 혹독한 엄동설한을 보내고 있다. 여기 요양원에 와 있는 늙은 어른들도 인생의 좋았던 시절 다 지나가고, 인생 말년의 한 겨울을 만나 꺼져가는 심지처럼 인생의 끝자락을 요양원에서 보내고 있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 곁에 무엇이 남아 있나요? 지난 젊은 날 그토록 손에 거머쥐려 했던 것들 중에 지금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지금 여러분 곁에 누가 있나요? 할배도 할멈도 떠나 가고, 자식도 딸도 제갈 길로 다 떠나 가고, 친구도 재물도 건강도 인생의 봄 여름 가을도 다 지나 가고, 지금 이렇게 인생의 겨울 한 복판에서 벌거벗은 나목처럼 모든 생기를 다 잃은 채 이제 홀로 살수 없는 몸이되어 외롭게 노년을 보내고 있는 여러분!
다 져버리고 마지막 남은 나무 잎새처럼 내 몸하나 덩그러니 이 요양원에 의탁하고 있는데, 이젠 단 하나 남은 이 몸둥이 마저 내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진작 내 상전이 되어 버렸다. 앉기도 걷기도 먹기도 대소변 보기도 힘이 들어 지금은 기저귀를 차고 산다. 이도 빠지고 눈도 침침하고 귀도 잘 안 들리고 게다가 치매까지 와 버리면, 살아 있는것 같으나 의사소통조차 어렵다. 숨 쉬고 있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기름이 떨어질때 까지 어둠을 밝히기라도 하지만, 치매가 오면 스스로 할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인생인 것이다. 건망증과 치매가 뭐가 다를까? 오십보 백보다. 나 역시 이 겨울 문턱만 들어서면 인생 팔십이다. 지나간 수많은 세월들 들추어 무슨 소용 있을까마는, 내 나이 오십 아니 십년전만 해도 훨훨 날라다니 듯 용의주도 하던게 엇그제였는데, 지금은 내가 머물고 있는 춘천 서면 밖으로만 나가면 이내 길치가 되어 어리버리 해진다. 수없이 다니던 길들도 낯설기만 하다. 이것이 무슨신호 이겠는가? 이제 이 땅에 머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동안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던 삶을 청산하고, 나를 이땅에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 갈 준비를 하라는 신호이리라! 내가 어렸을 때는 부모를 의지하다가, 내가 자라 결혼을 하게되면 서로를 의지하다가, 늙게되면 자녀를 의지하다가 죽게 되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 가고, 하나님 형상으로 태어난 우리의 혼(魂)은 나를 이 땅에 보내신 이 에게로 돌아간다. 이것이 '원형이정'이다.
걸핏하면 우리는 죽으면 끝나는 것이라고 착각속에 살 때가 참 많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창공을 나는 곤충들 대부분은 첨엔 땅속에서 혹은 물속에서 혹은 거름더미 속에서 살던 애벌레였던 것들이, 환골탈태하여 나비나 매미가 되어 창공을 훨훨 날 듯, 비록 지금은 땅을 딛고 살지만 그러나 우리 인간은 하늘을 응시하며 사는 영적존재인 것이다. 여러분! 하루에도 아침이 있고, 한 낮이 있고, 서산에 해가 지는 저녘 놀이 있다. 그리고 칠흙처럼 어두운 밤이 온다. 한 낮이면 그 시끄럽던 세상이 명멸하듯 어둠속에 휩싸인다. 그러나 어둔 밤이 왔다고 세상은 끝이 아니다. 어둔 밤이 지나가고 새벽 여명이 되면 여상히 어제처럼 아침 해가 불끈 떠 오른다. 이처럼 하루의 한 날도 우리에게 인생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2023년 금년도 벌써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다. 이처럼 계절은 년년 세세 우리에게 무엇을 계시해 주고 있는가? 지금 겨울이 깊어 산천초목이 다 죽은듯 보이지만, 그러나 엄동설한의 한 겨울이 지나 춘 3월 봄이 오면, 꽁꽁 얼어 붙어있던 온 땅이 따스한 햇살에 녹아 차디찬 대지를 뚫고 어린 생명의 싹들이 온 대지를 파랗게 문들일 것이다. 겨우 내 죽은 듯 앙상하던 나무 가지에도 새파란 봄이 오리라! 자연의 계절은 이처럼 우리 인생들에게 인생의 무상함이 아니라 대자연의 순환을 뛰어 넘는 영원한 인생을 얘기해 주고 있다. 인간은 일생을 살면서 다른 자연의 동물들처럼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때가 많다. 그러나 인간만은 그 차원이 다르다 네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짐승들은 물론이고 창공을 날으는 날 짐승까지도, 그 눈이 온통 땅을 향하여 먹이를 찾는데 있지만, 유독 인간만은 두 발을 땅에 딛고 직립보행을 하면서 그 얼굴과 눈은 저 하늘 대우주를 향하여 있다. 저 하늘의 태양과 대 우주를 넘어 영원을 사모하는 우주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더 우리 인간은 온 우주와 영원을 품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적 존재인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곳이 어디인가? 요양원입니다. 지난 날 여러분이 건강했을 때 살던 집이 아니라, 그때 세상에서 쥐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빈 몸으로 온 곳이 바로 이 요양원이다. 그러기에 요양원은 평생동안 쥐고 살아왔던 것들을 이제 미련없이 애착없이 다 내려 놓는 곳이지 지난 옛것을 쥐고 있을 곳이 아니다. 때문에 어르신 여러분의 유일무이한 소유는 오직 하나 '빈 몸뚱이' 뿐임을 아시고 손을 펴는 연습 내려놓는 연습을 하셔야 한다. 그리고 필경에는 이 몸둥이마저 흙으로 보내야 할 인생의 끝자락에 와 있다. 임종을 앞두고 있는 자에게 산해진미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인생의 겨울 아니 인생의 마지막을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마음을 비워야지 꺼져가는 심지 같은 지금, 다시 못올 옛날에 젖어 젊은 날 쥐고 있었던 이제 아무 소용없는 육신의 소유욕에 아직도 맘이 젖어, 가장 절실하고 가장 절박한 것을 잃어버리면 어찌합니까? 저와 여러분은 이제 떠날 이 세상 것들 육신의 소욕들이 아니라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왜냐고요? 이 세상을 떠나 갈때 몸둥이도 흙에 묻고 가는데 육신의 부산물인 돈 가지고 가는 사람 보셨나요? 자식이 아무리 효자라도 부모가 죽으면 무덤까지 밖에 못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 너머 하늘 나라까지 우리와 함께 가십니다. 지금 여러분은 자식 딸들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신가요? 이제 옛 생각을 접어야 합니다. 인생의 겨울을 맞고 있는 여러분에게 지금 가장 절실하고 가장 절박한 것은 자식이 아니라 여러분의 영혼을 책임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바울의 입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겨울이 오기전에 어서 나에게로 오라!" 겨울은 죽음을 말하지요. 오로지 평생동안 육신의 소욕을 좇아 살아왔던 우리가 세상 세파에 만신창이가 되어,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수님을 만날 맘이 생겨 예배당에 나오신 여러분은 진정 행복자시다. 어제밤도 잘 주무셨나요? 행복자십니다! 아침식사 하셨나요? 행복자십니다!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행복이지요.그런데 여러분! 내가 이 땅에 살아 있을 때, 이 세상을 떠나기 전 전혀 준비가 안된 먼 여정인 저 피안의 길을 앞에 두고, 이 길을 인도해주실 예수님을 만나는 것만큼 엄청난 축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는 날 동안 人間이란 단어가 말해주듯 이 땅에서 수없는 만남이 삶속에 있었지요. 그것이 바로 인생살이입니다. 그런데 이런 수없는 만남 중에 가장 의미있는 만남이 바로 '예수와의 만남' 인생 최후의 방점이 바로 예수와의 만남입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어 이 세상에 보내신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기 때문에 , 그 예수를 만나야 인생의 근본문제가 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죽음'이라는 인생의 겨울이 오기전에 반드시 주님앞에 나아 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제가 부산 영도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을 때, 스물 아홉 젊은 남자 집사가 간암으로 배에 복수가 차서 죽어 가고 있었다. 그는 "내가 아직 설흔도 않했는데 왜 죽어야 하느냐"며, 소리를 질렀다. 배에 물이 차서 손톱도 안들어 갈 정도인데, "목이 마르다"며 물을 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는 지금 물을 찾을 것이 아니고 영혼의 갈증을 풀어 줄 예수님을 찾아야 했다. 여러분도 이제 자식 딸을 기다릴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찾아야 하고, 병원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내가 평생 동안 이고 지고 다니던 인생의 보따리를 찾을게 아니고, 그동안 내가 안고 지고 이고 살아 온 인생의 보따리를 이제 주님앞에 다 내려 놓아야 할 때입니다. 방이 따뜻하니까 봄 여름 인줄 아십니까? 이제 우리는 인생의 한 겨울앞에 서 있다! 인생의 시계가 마치 초침처럼 우리에게 인생의 겨울인 죽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작년에 1층에 계시던 103세된 할머니가 몇해 전 내게, "김목사! 내가 이러다 죽으면 억울해서 어떻게 해"하며 죽음을 두려워 하셨다. 그래선지 밤이면 침대에 누워 밤새도록 하나에서 백까지 세기를 반복했지만, 금년 봄에 소천하셨다. 이처럼 죽을 날이 정해져 있는데 더 살겠다고 해서 생명이 연장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 여러분은 일생을 사시면서 인생의 밭에 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두며 사셨습니까? 주후 2세기경에 한 독실한 성도가, 살아 있는 로마 황제가 아닌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를 믿는 것이 죄가 되어, 로마 황제 앞에 섰다. 로마 황제가 "네가 나를 섬기지 않고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섬긴다지? 만약 앞으로도 그리하면 로마에서 널 추방할 것이다. 그러자 이 "성도가 대답하기를 "누가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도 박해도 칼의 위험도 할수없나이다" "그래? 그럼 네 전 재산을 몰수 하겠다!" "황제여! 내 재산은 이미 하늘나라 창고에 있습니다." "네 놈을 아예 죽여버리겠다." "폐하 나는 이미 수십년전에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다시 내 영혼은 이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러한 믿음이 인생의 겨울을 준비한자의 믿음인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인생의 겨울이 이르기전에 어서 나에게 오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사망의 그늘이 너와 내 앞에 둘리며 가리우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종그니 칼럼] 사회현실을 바로 보는 안목.
우리의 얼굴을 보면, 입은 하나이고 귀는 둘이다. 모든 동물도 촉각 후각 취각이 발달 되어 있다. 인간이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의 이치와 인간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서는 보고 듣기를 많이 하라는 조물주의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이 아니겠는가? 귀만 둘인 것이 아니고 눈도 콧구멍도 둘이다.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百聞而 不如 一見)이라 했다.
전 세계의 선 후진국을 막론하고 현재 나이 30세의 남성은 평균적으로 10년간 학교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럼 같은 나이의 여성은 평균 몇 년간 학교 교육을 받았을까? 이 질문은 스웨덴의 저명한 통계학자인 Hans Rosling (1948~2017)이 쓴, 팩트풀니스(Factfulness)에 나오는 문제이다. 이 물음에 나는 제 3세계의 여성들이 아직도 교육의 기회에서 많은 차별을 받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듣는 것이 모자란 나의 선입관이었다. 정답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10년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난, 건강, 교육 등의 문제에 대한 상식이 아주 부족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런데 그가 쓴 책을 보니 많이 배운 사람도 못 배운 사람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 분야의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자기 분야 이외에서는 낙제점을 면치 못하였다. `한스 로슬링`은 침팬지에게 문제를 내도 확률상 평균 1/3의 정답률을 보일 것이라고 했다.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인간이 그러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 인간의 인식 세계는 자기 분야의 밖에서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계속하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며 끊임없이 자신의 사고체계를 계발해 가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이 처음 형성한 고정관념의 틀, 즉 기존 틀의 동굴에 빠져서 이 옛 틀의 사고에 굳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로슬링이 세계를 돌며 강의를 할 때 확실한 자료와 통계수치를 인용하며 설명을 하여도,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 경우를 무수히 보았단다. 그는 인간이 왜 이럴까 하는 의문에 대해 깊이 생각한 끝에, `팩트풀니스`라는 책을 쓰게 된 것이다.
`한스 로슬링`은 인간의 이런 인식을 `고착화된 본능`으로 보고 있다. 이를테면 사람은 모든 것을 "서로 다른 두 집단"으로 나누고 둘 사이에 거대한 불평등의 틈, 즉 거부하기 힘든 본능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 일례로 세상을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로 나누고 그 간극을 메울 수 없는 여건이 존재하기 때문 이라고 보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오늘날 우리 사회 갈등의 저변에도, 이런 본능적인 고정관념들이 자리 잡고 있다. 즉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상대의 이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부정적인 본능이 있다. 보수가 집권하면 인권이 크게 위축되고 부정부패를 일삼을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 그리고 진보가 집권하면 나라를 공산주의자들에게 팔아넘길 것이라는 본능적 예단 등등이 그러하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색안경을 끼고 조금이라도 트집 잡을 것이 있으면 그것 보라는 듯이 침소봉대하여 상대를 비난하기에 열을 올린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냉전 독재 시대에 형성된 빨갱이 논리와 자본 독재 논리에 사로잡혀 있을 것인가? 그래서 한스 로슬링은 책 제목을 ‘팩트풀니스 (Factfulness)’라고 하였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충실하라`는 얘기다. 어렵고 복잡한 문제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하긴 요즘처럼 가짜 뉴스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진실도 오염되고 있다. 그럴지라도 진실한 사실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그럼 진실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스 로슬링은 `듣기를 많이 하는 겸손과 사물에 대한 궁극적인 목마름`을 얘기하고 있다. 겸손이란, "인간의 본능만으로 객관적 사실을 올바르게 파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하는 지식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울러,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을 때, "기존의 고정관념의 틀을 흔쾌히 바꾸는 것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에 대한 호기심이란, 새로운 정보를 마다치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이름이다. 아울러 설혹 나의 세계관에 맞지 않는 사항일지라도 이를 끌어안고 그것이 지닌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분명 새겨들어야 할 말이 아닌가?
진정한 보수, 그리고 진정한 진보라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에 충실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겸허히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이 틀렸다고 인식했다면 그에 터 잡은 자신의 틀에 매여 있었던 고정관념도 과단성있게 바꿀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고정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나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생각할까?" 하는 긍정의 사고를 하고 그들로서도 사물을 바라보는 폭넓은 도량을 가져야 할 것이다.
보시라! 낮이 있어 밤이 있고 양지가 있어 음지가 있듯이, 인간의 思考도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오지랖을 넓혀보면 서로에게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서로의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할 때에도 "과연 이것은 누가 뭐라고 하여도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인가?"를 생각하라. 서로를 살리는 相生의 공통분모를 찾아 차근차근 풀어나갈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한다면 반드시 相生의 길이 열리지 않겠는가?
오늘의 유럽을 보라! 그곳은 공산주의 나라도 자본주의 나라도 아니다. 수정 자본주의, 수정사회주의 사회체계다. 진정한 합리적 보수주의자 이거나 진보주의자들이여! 지금 이 나라가 좌우로 나뉘어 우리의 눈과 귀를 어지럽게 하는 이유는 과거에 형성된 고정관념에 고착되어 있다는 것이고, 자기의 주장만이 옳다고 생각하여 자기와 생각이 다른 말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위 세인들이 말하는 수구꼴통이니 좌빨이니 하는 자들로 지난날 이 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좌우가 날카롭게 각을 세워 민족의 전란까지 자초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민족의 뼈아픈 고통을 치르고도 상대의 소리에는 귀를 닫고 자신들의 목소리만 내고 있어 이들이 진정한 보수, 진정한 진보의 눈을 가리고 있다. 그러나 사회가 진정 건강하려면 이들의 뒤에 가려져 있는 합리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나서야 할 것이다. 이들이 서로 손잡고 저 수구꼴통과 좌빨을 퇴출해야 한다.
협상의 기술을 논한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Factfulness)를 읽으면서, 거짓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에 사실의 충실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바라기는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겸손으로 무장하고 진실에 충실히 하는 보수와 진보가 하루빨리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이끌어 주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