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 칼럼】자화상
【종그니 칼럼】나목(裸 木)
늙으면 자연 회고적이 되는가? 문득 뜬금없이 우리나라 코미디계를 주름 잡았던 코이디언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김희갑 구봉서 서영춘 그리고 만담가로 유명했던 장쇠팔 백남봉 등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한때 우리나라 코미디계의 중심에 있던 배삼룡씨를 처음 만났던 때가 청평에서 무의탁 양로원을 시작한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였으니까 아마 2000년 봄 이었지 싶다. 연예인들과는 일면식도 없던 내가 공연을 해 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닌데 문주란 가수가 청평 삼회리에서 커피 샾을 하면서 남진 가수 배삼룡코미디 등과 함께 내가 운영하고 있는 무의탁 양로원을 찾아와 고맙게도 위로 공연을 해준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난생 첨으로 tv에서가 아닌 요양원에서 가수 남진과 코메디 배삼룡을 비롯한 여러 연예인들의 실물을 첨 봤다. 그때 배삼룡씨를 본 첫 인상이 "나는 솔찬히 모자라고 또 못났습니다." 라는 몸 짓과 연기가 몸에 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몸 전체에서 풍기는 바보스러움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그의 진면목이 바로 이것이구나 싶었다. 내가 배삼룡이라는 코미디언과 남진과 문주란가수들을 내가 운영하는 양로원에서 보게될 줄이야! 배삼룡 그는 몸짓 하나로 만인을 웃기는 코미디로 명성은 얻었지만 그러나 그가 걸어 온 인생여정은 순탄치를 못했다. 조금 못나고 조금은 띨띨한 연기의 삶과 실제의 삶에는 어떤 함수관계가 있을까? 혹 실제의 삶도 연기처럼 띨띨하게 인생을 살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그의 삶이 그대로 그의 연기로 재현된 것은 아니었을까? 허스키한 음성으로 한때 가요계를 주름 잡던 가수 문주란도 이제 나이 들어 삼회리에서 떠난지가 꽤 오래 되었다. 이렇게 한 날이 지나면 밤이 오듯 인생의 무대 위에 연출자가 바뀌는 것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들의 자화상이다.
그날 배삼룡씨가 입은 옷차림부터가 나를 웃겼다. 헐렁한 통바지에 낡은 넥타이로 허리를 질끈 묶고 바지 한쪽은 삐죽이 올라와 있었다. 그날 그는 당황하듯 허둥대며 남의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를 들어 헛말을 지껄이기도 하고, 문을 찾지 못해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바보 같은 그 모습이 너무도 우리네 삶과 맞아 떨어져서 그때 나는 마냥 낄낄 대고 웃어댔었다. 왜 그렇게 자지러지게 웃음이 나는 걸까? 바로 그게 옛 삶과 새 문명사이에서 바보스럽게 살아 온 우리네의 참 모습이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네들의 삶의 애환이 담긴 것을 리얼한 연기로 우리네 일상의 삶을 담아 내는 그게 바로 독보적인 농익은 프로일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는 실제의 삶과 연기사이 무슨 경계선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바보연기가 바로 그의 삶이었다. 이처럼 그는 그의 일상적인 삶속에서 해학을 찾아 냈다. 그로부터 몆년 후 그는 tv에서도 세인들의 입소문에서도 우리의 시야에서 영영 멀어지는가 싶었는데 어느 날 그가 칠십대 중반의 노인이 되어 병원 중환자실에서 산소 마스크를 끼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어느 기자가 한 생애가 심지처럼 다 타들어 가고 있는 그와 인터뷰한 기사를 내가 우연히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남은 수한이 마치 꺼져가는 심지처럼 가물거릴 때 그는 아직도 "자기를 찾는 무대가 있으면 나가서 연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아! 과연 그는 광대의 연기가 몸에 밴 전정한 프로였던 것이다. 그는 지금 남은 생명이 다 타들어 가는 심지처럼 가물거리고 있는 데도 독백으로 내 뱉는 말이 "나는 평생을 살면서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언제나 나는 당신들 보다 좀 모자라고 생긴 것도 당신네 보다 좀 못났다는 심경으로 살아 왔다."고 고백 했다. 아! 배삼룡! 그의 바보 연기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희대의 희극 배우 배삼룡! 그의 일반서민들의 애환을 희극으로 그려내는 연기의 이면에는 언제나 그는 "낮고 진솔한 자세로" 우리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의 바보 연기의 진면목은 언제나 상대보다 한 단계 더 내려가 연기를 연출하는 겸손이 몸에 밴 연출자였다. 실제의 삶과 무대 위의 삶은 무엇이 다를까? 아마 배삼룡은 삶과 연기가 하나였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일제 치하에서 해방이 되자 국제정세에 해박한 이승만은 절묘한 기회를 포착해서 남한에 대한민국 단독 정부를 세웠다. 마치 연기같은 극적이고도 절묘한 정치수완이었다. 그래서 삶이란 그대로 연출이 아닐까 싶다. 그는 당대 최고의 정략가였고 국제정세를 나름대로 소화하여 정세의 판도를 꿰뚫어 보는 형안이 있는 지략가였다. 바로 이것이 민초들은 감히 엄두도 낼수 없는 그분야 프로들만 할수있는 기회포착이고 절묘한 권모술수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쉬운 것은 반쪽 나라를 세울 그 안목을 가지고 모두의 힘을 모아 당시의 민족 중진들이 소아(小我)를 버리고 초아적(超我的)으로 조국을 하나로 만드는 일에 더 온 힘을 쏟았었더라면 이 민족은 지금 하나가 아니었을까?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란 말이 있듯이 그 당시의 행태를 보니 하나같이 하나가 되기는 애시당초 물건너 갔었기 때문에 목전의 야욕이 최우선 순위가 되었기에 지금 국토가 두 동강이 난채로 70여 성상을 서로 으르렁거리며 지내오고 있다. 남한 만의 단독정부가 아닌 하루빨리 국론을 통일한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것이 당시의 대세였음에도 몰아적이 아닌 개인적 명리에 이골이 난 모리배들 때문에 역사는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으로 두 동강 나면서부터 민족 또한 두동강으로 찢겨지고 만 것이다. 세계정세가 어떻게 흐르든 각자의 야심을 뒤로 하고 국내외의 여론까지 하나의 조국을 세우는 일에 혼신을 다했더라면 민족이 갈라지는 것과 인족의 비극인 6 25 라는 전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설혹 출발은 미약했을 지라도 그 나중은 심히 창대케 되지 않았을까? 이미 다 지난 일인 것을 이제 그 일을 되 뇌여서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고 반문할수도 있겠지만 복기(復碁)없는 역사는 가르침도 없다.
아무튼 처음부터 첫 단추를 잘못 꿰어 이것이 원인이 되어 6 25 전란이 터지고 같은 동포끼리 피비린내 나는 전란은 수년동안 지속되었지만 결국 전란 이전의 원점으로 돌아가 우리 스스로 38선을 그어 놓고 같은 민족끼리 한반도에 두 정권이 들어서는 참으로 바보 코미디같은 분단의 시대를 어언 100년 가까이 지금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부끄러운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가? 그래서 천리 길도 첫 걸음이 아주 중요하듯 매사에 첫 시작과 방향 설정이 아주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고 있는 삶을 녹여서 인생의 무대위에 올려 놓는 것이 삶의 재현이요 이를 다시 무대위에서 표현한 또 한편의 인생인 것이다. 어느 시대이건 우리는 우리 인격의 그릇과 됨됨이대로 인생의 무대위에서 마치 연기하듯 시대에 맞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공산주의의 산실인 소련은 공산주의가 꽃을 피우는 날 모든 나라와 법은 스스로 설 곳을 잃고 사라지게 된다고 '국가고사론'을 외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주의의 종주국이었 던 소련이 세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지도 오래다. 지금 중국 러시아 북한 등에 남아 있는 공산주의 잔재 또한 설곳을 잃어가고 있다. 이처럼 인생만 무상한 것이 아니고 유한한 인간에게서 나온 모든 사상도 한 시대를 지나게 되면 스스로 설곳을 잃게 된다. 공산주의 이론의 핵심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없이 지체부자유자까지 모든 인간들은 서로 협동하여 먹거리를 만들어 내고 그 공동의 이익을 함께 갖는 이상사회를 구현하려는 사회공동체이론이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하나가 되어 협동적으로 자신들이 맡은 분야를 이루어 내는데 있다. 여기에서 노동의 가치를 최고의 순위에 놓고 각자의 지분을 정의롭게 분배받는 것 이러한 사회를 '공산사회주의'라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맹점은 어떻게 자본없이 노동력만으로 상품을 만들어 낼수있느냐? 는 것이다.
나라가 없는 사회는 개념속에는 있을지 몰라도 나라없는 사회는 현실에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나라가 형성된 이후에는 나라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공산주의 사회 공동체 에서는 서로 공동으로 생산을 하는 것이다. 농산물을 생산할 때 자본보다 노동의 기여가 가장 크다는 전제하에 배분하자는 것이 공산 사회주의다. 자본가에 의해 자본이 들어가면 노동에 의한 생산이 자본가의 손으로 다 들어간는 것이 공산주의 이론이다. 문제는 이론과 실제다. 내가 2000년대 초에 중국 여행을 갔을 때 어느 도시에서 3층건물을 지으면서 한 사람은 지붕으로 기와를 던져 올리고 한 사람은 이를 받아서 지붕을 덮고 있었는데 지붕위로 기와 한장을 던져 올리고 쉬고 지붕을 덮는 이도 기와 한장 받아서 놓고 쉬고 이런식으로 일을 하니 일하는 능률이 오를리가 없다.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일꾼을 불러다 날 일로 시키면 대개 백년하청이다. 그러나 분아별로 일을 줄 때 값을 정해서 일을 맡기면 단 시간 내에 일을 마무리 한다. 이게 자본주의의 우수성이다. 내가 내 고향 땅 임실에서 열아홉 해를 보내고 있을 때에 파란 눈을 가진 벨기에의 극 상층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래서 장래가 보장되는 젊은이가 최상층으로서의 모든 시혜를 마다하고 7년의 세월동안 카토릭 신부(神父)의 수업을 마치고 사제로써 극 소수 특수층이 누릴수 있는 길도 뒤로하고 6 25전란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세계 최 빈국의 나라 대한민국을 자원하여 신부(神父)로 처음 부임한 곳이 바로 전북 '임실 성당이었다. 당시 임실은 사제들간에 "임실 순창 거창 고창은 다 떨어진 구두창"이라 불릴만큼 목회가 아주 힘든 지역이었다. 푸른 눈을 가진 벨기에 출신 젊은 사제의 눈에 이 당시 우리 대한민국이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 졌을까? 그 당시 대한민국은 신생국으로 아프리카 보다도 훨씬 더 가난한 최빈국으로 그 누구도 이 신생 대한민국에서 살겠다고 자원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장래가 보장된 모든 길을 마다하고 자기의 전 생애를 바칠 곳으로 극동의 조용한 아침의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선택하여 찾아온 것이다. 그가 바로 몆해 전에 돌아가신 지정환(한국명)신부다.
그는 내가 소년이었을 때 나에게 세례를 주셨고 그후 그는 임실에 치즈공장을 구상하고, 앞날이 창창하여 젊은 꿈을 가지고 일터에서 일 할수 있는 일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천금같은 젊은 날들을 허송하고 있는 이나라 청소년들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장래의 꿈을 이룰수 있는 일거리를 창출하고자 이 가난한 대한민국인으로 살다 이곳에 뼈를 묻으려고 찾아와 꿈을 잃은 젊은이들에게 꿈을 주기 위해 그는 동분서주 하였다. 그가 처음 나실인(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후 그는 조금도 망서림없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신생의 나라 대한민국을 선택하고 달려온 것이다 그는 성품이 지극히 온화하였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이 유신 헌법을 만들어 영구집권을 획책하자 그는 이를 온 몸으로 반대하다가 벨기에로 추방되어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궁여책으로 대한민국의 발전에 투자하거나 기여한 사람은 그가 외국인일지라도 재 입국을 허용하자 다행히 지정환신부도 한국으로 재입국 할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격으면서 임실 치즈공장이 얼굴을 드러낼 즈음 나는 서울로 유학을 와 있었는데 그는 임실치즈의 성공을 위해 온 몸을 던진 결과 마침내 임실치즈는 본 궤도에 올랐고 '임실치즈'가 본 궤도에 오르게 되자 지정환 신부는 여기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후계자에게 이를 이양한 후 이에 어떠한 관여도 어떠한 노후의 혜택도 거절하셨다. 은퇴 후 지정환 신부는 노후에 감당키어려운 우환으로 한국어와 영어까지 모두 다 잃어버리는 실어증까지 격으며 병마와 싸우다가 소천하셨다. 왜 그렇게까지 몸이 망가지셨을까? 평생동안 몸을 아끼지 않고 혹사시켰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이 영면하시기 1년전 기도 중에 문득 그분의 모습이 떠올라 나의 은사님이신 박찬원 선생님과 함께 지정환 신부님을 뵈었을 때 그는 내가 '주의 종'(목사)된 것을 온몸으로 안아주며 내가 '종의 길'을 바로 갈수 있도록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었다. 비록 신부'가 아닌 '목사'로 늙어 은퇴한 후에야 병중에 있는 그분 앞에 나타났지만 내가 '주의 종'된 것을 대단히 좋아하시고 온 몸으로 나를 축복해 주셨비에 나는 그때의 그 순간을 잊을수가 없다.
그땐 그래도 기력이 많이 회복되었을 때라 조금은 안심했었는데 푸른 눈을 가진 대한민국인으로 그리고 '지정환'이란 한국인으로 일생을 살면서 이 나라 젊은이들을 위해 온 몸을 바치신 그 희생에 늦게나마 삼가 경의를 드린다. 벨기에의 최상층의 집안에서 태어난 것만으로도 그의 장래는 탄탄대로 로 보장되어 있는 모든 기득권이나 특권을 마다하고 극동의 이름도 없는 그리고 일제에 의해 나라 없는 삶을 살다가 겨우 해방이 되자마자 다시 6 25 전란으로 민초들의 삶은 피폐할대로 피폐해져버린 가난한 신생 대한민국에서 우리와 일생을 함께 하신 그 숭고한 삶은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 '고 지정환 신부'는 자신이 걸어 온 희생의 삶에 대해 누구에게 얘기 한번 해본 적도 없고 모든 것을 자신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께로 돌렸다. 그래서 그는 임실치즈 공장을 제 3자에게 줄 때에도 자기 지분을 얘기하거나 어떠한 흥정도 없이 그가 임실치즈를 성공적으로 잘 운영할수 있을 것인가의 성실성만을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말년에 큰 병을 얻어 아주 어려웠을 때에도 단 한번도 임실치즈에 손을 내민 일이 없었다. 공과 사를 분명히 하는 그러한 그분의 청렴성에 나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나는 어렸을 때 그분에게서 성세성사를 받았다. 당시 나를 향한 그분의 마음은 내가 '종의 길'즉 신부가 되길 바라셨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지정환 신부님은 물론이고 김반석 신부님과 조카되시는 김병환 신부로부터 남 다른 총애를 받기만 했을뿐 신부가 되겠다고 단 한번도 약속한 적은 없었지만 그러나 나의 진로문제를 놓고 여러 주의 종들이 기도해주신 은혜로 내 의지와는 전혀관계없이 주님의 종된 길을 걸어왔지 싶다. 우리의 삶속에서의 하루는 혹 구우일모(九牛一毛)처럼 여겨질지 몰라도 적어도 오늘은 수많은 날들 중 하나가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 온 날들 중 '끝 날'이요. 앞으로 남은 날들 중 '첫 날'인 것이다. 혹 오늘이 나의 남은 날들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의 남은 날을 위해 새롭게 시작하는 날이 바로 오늘인 것이다. 그러하다면 내게 주어진 이 날을 마냥 흘러 보내서야 되겠는가! 이제 민족이 하나가 되기위해 지금 일어서야 할 때다. 가장 큰 무지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종그니 칼럼】나목(裸 木)
공자가 제자 子路와 泰山자락을 지나가는데, 웬 아낙이 무덤 앞에서 슬피 우는 모습을 보았다. 공자는 제자를 시켜 이 깊은 산골에서 왜 그리 슬피 우는지, 그 까닭을 알아 오라 했다. 사연인즉 `호랑이`가 자기 시아버님을 죽이고 수년 후엔 남편을 죽이더니 이번엔 하나뿐인 내 외아들을 죽여서 운다고 하였다. 공자가 되묻기를 "그럼 도회지로 나가 살면 될 것을, 왜 이런 깊은 산중에 살면서 화를 자초하느냐."고 물었다. 그 여인의 대답이 "나라의 학정이 범보다 무섭기 때문이라"고 답하더란다. "범보다 무서운 것이 나라의 학정(虐政)이라"는 거다.
옛날 내가 어렸을 때, 아버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밤길에 가장 무서운 게 무엇인 줄 아느냐?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게 사람이다.“
요즘 자식에게 얹혀사는 노인 중에 스스로 노후를 요양원에서 지내시겠다고 자기 발로 찾아가는 이는 거의 없다. 언제는 팔십이 다 된 내 친구가 춘천 MBC 방송 쪽으로 공지천을 따라 걷기운동을 하던 때였다. 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가는 길을 막고서 "담배 한 개비만 빌리자"고 한 것이다. "아! 이를 어쩐다?, 내가 목사라서 소지한 담배가 없어서 말이야." 했더니, 아이들은 한참 위아래로 꼬나보고 `가보슈`하더란다.
나이 들어 병들면 누가 무서울까? 자식들이 제일 무섭다고들 한다. 옛말에도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했다. 요즘은 65세 이상이 되어 홀로 걷기가 불편하게 되면, 자연히 자식들 성화에 등떠 밀려 요양 등급자가 된다. 그러면 영락없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요양원으로 입소하게 된다. 법에 보장된 `거주 이전의 자유`나 생존권을 포함한 자녀로부터 부양받을 권리는 병든 노인에겐 아무 쓸모가 없는 사문서에 불과하다. 당사자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늙어 병들면 가야하는 곳이 바로 요양원이다. 그러나 몸과 맘이 건강하다면 노후를 자존감 있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몇 해 전 얘기다.
부산고속도로 어느 휴게소에서 70세 전후의 노부부가 한가로이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노부부 옆자리에는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녀 둘이 식사하고 있었다. 그때 노부부의 부인이 손에 든 물컵을 그만 식당 바닥에 떨어뜨리자, 옆자리에서 식사하던 젊은이가 바로 내뱉는 말이 뭔줄 아는가?
"씨발 늙어서 물컵도 제대로 들지못하면 집에 가만히 자빠져있지, 집 밖으로 기어 나와서 민폐를 끼치고 이 무슨 지랄이야!," 하고 씩씩거리며 분위기를 아주 험하게 하더란다. 이때 노부부의 영감님이 한마디 거들었다.
"나이가 먹어 몸이 아둔해져서 젊은이에게 실수를 했네요. 놀라게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냄새나는 짐뎅이들! 나이들은 쳐먹어 가지고 씨발 어이구! 야! 틀딱이들! 재수 없다. 나가자."
음식을 먹다 말고 두 남녀는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간 젊은 남녀가 탄 차가 후진을 하다가 옆 차를 드르륵 긁어 흠집을 냈다.
노부부도 음식을 다 먹은 뒤라 밖으로 나와 차를 타려고 하니, 다른 차가 노부부 승용차를 드르륵 긁는 게 아닌가? 노부부 차는 1억 8천만 원 정도의 최상급 "메르세데스 벤츠"였다. 두 젊은 남녀는 차에서 내려 긁힌 상황을 보고 어쩔 줄 몰라했다. 나타난 차 주인을 쳐다보니 조금 전 식당에서 아주 저질스럽게 욕했던 노부부의 차가 아닌가! 막말하던 젊은 남자가 머쓱해 하며 하는 말이, "어르신, 정말 죄송합니다." 갑자기 악마가 천사로 변한 것이다.
노인분이 하는 말, "차 운전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요. 보험회사에서 지금 온답니다. 그분과 얘기하세요. 나이 먹어 가지고 밖으로 돌아다녀 죄송합니다."
막말한 젊은 남자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보험회사직원의 설명에 의하면 이 정도의 흠집이라면 수리비만 2,500만 원 정도 배상해야 한다나.
노인분이 말했다. "당신이 식당에서 우리에게 심한 욕지거리만 안 했다면, 난 수리비를 청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올바른 인성으로 노인을 어른으로 대하세요. 당신도 머잖아 반드시 노인이 됩니다"라고 말하고 노인 부부는 차를 타고 가버렸다.
에베소서 5장 16절에서 바울이 말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라는 경구에도 우리는 천금 같은 시간을 이 악한 세상을 닮아가는 데 낭비하고 있다. 옛말에 "少年은 易老하고 學難成하니, 一寸光陰 이라도 不可輕하라"하였다 이 무슨 말인가? "소년은 늙기 쉽고 인성의 근본을 깨우치기는 어려우니, 일분일초라도 가벼이 말라."는 뜻이겠지요.
오늘을 여는 젊은이들이여! 늙은이를 무시하지 마시라! 오늘의 늙은이가 있기에 젊은 그대들이 있고 지난날 우리들의 무대를 그대들에게 비켜 주었듯이, 오늘 늙은 우리들의 모습이 내일 그대들의 모습인 걸 아시라!
겨울의 나목(벌거벗은 나무)을 보라! 잎이 피고 꽃이 피고, 그리고 탐스러운 과일이 주렁주렁 붉게 영글고 무성하게 푸르던 잎이 가을 앞에 붉게 물들더니, 찬 서리 한방에 단풍 되어 져버리고 이제 벌거벗은 나목이 된 대자연의 순환의 이치를 배우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