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진】이 시대가 미가야 선지자를 부른다

하영진 목사(총신대, 총신신대원79회, 시카고 거주)

2025-10-11     리폼드 투데이

열왕기상서 22장에 보면 기가 막힌 정치 야합사건이 나온다. 역사적으로 또한 정서적으로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북쪽 이스라엘의 사악한 왕 아합과 남쪽 유다 왕 여호사밧이 정치적 야합을 이루는 장면이 전개된다. 이 둘은 도저히 함께 동맹을 맺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런데 아합과 여호사밧이 야합하여 두 나라가 동맹을 맺고 아람을 치기로 한다.

그래도 이 두 왕의 생각에는 하나님 두려워 하는 생각은 있었나보다. 이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적 발로에서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그렇게 조상적부터 살아왔기에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의 뜻을 묻기로 했다. 이는 어찌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간사한 생각일뿐이었다.

아합의 명령에 따라 아합과 여호사밧 앞에 선지자 4백여명이 모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백명이 넘는 선지자들이 한결같이 하나님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주실것이라고 예언한다. 이둘 선지라는 무리가 이구동성 권력자 앞에서 아부성 발언을 한것이었다.

그래도 아합 보다는 조금 더 낫다고 볼 수 있는 유다 왕 여호사밧은 무언가 찜찜한 생각이 들어 누구 다른 선지자가 없느냐고 아합에게 묻는다. 그러자 아합이 미가야라고 하는 선지자 녀석이 있기는 한데, 그 녀석은 언제나 자기에게 부정적인 예언만 해온 녀석이기에 물어볼 가치도 없다고 일언지하 미가야를 폄훼하며 무시하자고 한다.

그러자 여호사밧이 그래도 그 미가야도 선지자이니 그의 말을 들어보자고 한다. 어쩌면 여호사밧은 미가야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먼저의 사백여 선지자들의 동의에 재청을 확인해 보자는 마음일것이었으리라. 쉽게 말해서 확인사살을 해보기를 원한것이었다. 아합은 할 수 없이 미가야를 불러온다. 미가야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선지자요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바른말을 하는 올곧은 선지자였다. 

미가야는 아합의 예상대로 사백여 어용 선지자들이 했던 승리의 예언에 동의하지도 재청을 외치지도 않았다. 미가야는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왕상 22:14>"고 선언하고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선포한다. 아합과 여호사밧 두 왕이 야합하고 두 나라가 동맹을 맺어 아람을 쳐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전쟁에서 패하고 말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다.

이에 격분한 아합은 미가야 선지자를 감옥에 가두고, 자기가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개가를 부르며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만 주라" 하고는 전쟁에 나간다. 여기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이란 목숨만을 부지할 수만 있는 최소한의 음식과 물만 공급하라는 말이다. 이 말에는 자기가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오면 친히 국문하여 처리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아합은 전투중 전사하고 여호사밧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는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아합과 여호사밧 앞에서 아부를 떨면서 아람과의 전쟁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필히 승리를 안겨주실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사백여명의 선지자然 하던 가짜 선지자들은 어디에 숨었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자, 여기에서 오늘날 우리 목사들는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지 교훈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하시는 역사 앞에 겸손히 머리 숙여야 한다. 

오늘날에도 아합왕과 여호사밧왕 앞에서 아부떠는 가짜 선지자들처럼 권력 앞에서 납작 엎드려 아부떠는 가짜 어용 목사들이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런 가짜 목사들은 언제나 남들보다 앞장서서 떠버리며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큰소리 친다. 그리고 권력과 금력 앞에서 사족을 못쓴다. 감투라는 것은 죄다 쫓아다니며 머리에 얹고는 명함 앞뒤에 깨알같은 글씨로 인쇄하여 가는 곳마다 뿌리는 특징이 있다.

하나님 이름을 빙자하여 성도들과 국민들 앞에서 헛소리만 해대는 목사들이 있다. 교회는 정교분리원칙에 의하여 정치에 간섭하면 안된다고 떠벌인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의 기원도 모르고 그 말이 함의하는 뜻도 전혀 모르고 떠벌인다. 무식한 놈이 용감하다는 말을 그대로 실천하는 무지렁이 들이다. 보수주의자들을 향하여 극우라는 좌파언론이 씌운 프레임을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면서 자기는 말씀중심으로 살어간다고 허풍을 떤다. 실제로는 실천적무신론자(實踐的 無神論者: practical atheist) 이면서도 말이다.

과연 오늘날에도 미가야 선지자처럼 수백 수천의 가짜 어용 목사들 앞에서 일당백(一當百)이요 일기당천(一騎當千) 할 목사가 있을까? 

과연 서슬이 퍼런 좌파 매국정권 앞에서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감내하며 하나님의 정의(justice)와 공의(righteousness)를 선포할 목사가 있을까?

과연 우리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미가야 선지자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미가야 선지자같은 한 사람, 한 목사를 보았다. 좌파 정권에 의하여 감옥에 갇힌 한 목사를 보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미가야 선지자 손현보 목사를 보았다. 

우리들도 나서야 한다. 오늘날의 미가야 선지자가 되어야 한다. 나 자신이 또 한 명의 손현보가 되어야 한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조선 5백년 동안 인식론의 기본도 없는 유교의 성리학이 우리 한국인들의 삶과 뇌리에 너무 깊이 박혀버렸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사람이란 누구인가? 국가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등등의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변이 없지요. 그리고 理와 氣의 관계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논쟁만 했지요. 그래서 조선 후기에 정약용을 비롯한 학자들이 서민의 삶에 필요한 학문을 하자고 實學을 시작하였지요. 쉽게 말해서 어떻게 살것인가에 관한, 즉 why가 아닌 how를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저 나라에 충성(事君以忠), 부모에 효도(事親以孝), 군위신강(君爲臣綱),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등등의 삼강오륜에 충실한 삶을 강조했지요. 

철학, 즉 사고체계의 가장 기본인 인식론(認識論: epistemology)도 없이 그저 공자 맹자의 가르침에 충실해왔던 폐해가 너무 큽니다. 왜 한국사람들이 孔孟을 섬겨야 합니까? 왜 도처에 공자를 섬기는 사당이 있습니까? 왜 지금도 공자학원이 후대를 양성하는 한국의 학교에 침투해 있습니까? 왜 국립 서울대학교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이승만이나 김구 도서관은 없고 씨진핑 도서관이 있어야 합니까?

심지어 기독교에도 성리학적 사고체계가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총회장 하려고 기를 쓰고 돈을 뿌리고 하는 짓거리 입니다. 서열이 높은 자리에 앉아서 위세를 떨고 싶은 것잊요. 섬기는 자가 큰자이고 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설교 하고는 정작 자신들은 딴짓거리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총회장을 역임한 목사에게 중국에서도, 유교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전임이라는 뜻을 가진  '증경' 이라는 기괴한 호칭을 붙이는 것이 웬일입니까? 왜 또 이들이 총회시 단상과 동등한 높이에 자리를 틀고 앉아서 거드름 피우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이는 개신교단 중에서 가장 민주적 정치에 가깝다는 그래서 개혁이라는 단어와 개혁신학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사는 장로교단의 겉과 속이 다른 민낮이기도 합니다.

신학적으로 개혁주의(改革主義: Reformationism)를 지향하는 교단이라는 장로교단 목사들이 하나님을 섬김보다 신사임당을 더 섬기고, 칼뱅보다는 신사임당을 더 존경한다는 비아냥거리는 말이 돌아다니는 현실을 직시하고 철저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중국에 쎼쎼만 하면 된다는 그 누구를 비난하기 보다는 유교적이고 성리학적 사고에 찌들어있는 목사들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성리학적 사고를 따르는 conform이 아닌, 진정으로 뒤집어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reform을 해야 합니다.

개혁주의 교회의 라틴어 구호인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개혁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를 날마다 되새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