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 일어나자!
【종그니칼럼】살아 온 한 해를 되 돌아 보며
성경은 우리에게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며 인간의 근본을 근면에 두었다. 일을 열심히 하여야 내 몸과 맘도 건강해지고 내가 부양하고 있는 식솔들도 인간다운 삶을 체득하고 누릴수 있기 때문이다. 일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요 가정을 살리는 원동력이다. 인간(人間)이란 단어가 말해주듯 人과 間 두 글자가 사람의 근본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태생적으로 홀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더불어서의 존재"인 것이다. '사람'을 뜻하는 '人'이란 두획이 서로 기대어 의존관계에 있음을 말햬주듯, "네가 있음으로 내가 있는" 바로 이것이 '人'의 관계다. '間'이란 뜻 또한 '사람과 사람사이'를 맺어주는 매개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말하면 '홀로'가 아닌 '더불어'서의 인간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말은 서로가 힘이 되어 주는 상호 의존적 관계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은 ''홀로서의 존재'보다 '너와 나의 더불어서의 존재'가 참된 인간관계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가족과의 공생관계가 있다. 옛날 자급자족의 시대에는 대부분의 마을들은 넓은 의미의 '집성촌' 즉 '씨족공동체'였었다. 지금이야 가족이 '부부중심의 핵가족'이 대부분이지만, 옛날예는 증조부까지 직계뿐아니라 방계까지 같이 4대 대가족 공동체였다. 이 대가족의 확장이 바로 '씨족공동체 마을'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가족 공동체'는 사회 공동체의 요람인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때문에 홀로서가 아닌 더불어서의 존재로 시작된다.
몇해전 나는 tv를 통해 열에 하나를 더한 자녀를 둔 가족공동체를 보았었다. 여기에 장남이 결혼을해서 벌써 두 자녀를 낳아 열 여섯의 대가족들을 보니, 마치 타임머신으로 나의 어린 시절을 보는듯 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는 열자녀를 둔 가정들이 많았었지만, 이제 가족제도가 근본부터 와해되어 나홀로 세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지금, 모처럼 바글바글한 대 가족을 보니,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시절로 온듯하여 감회가 깊었다. 가족공동체가 와해되고 있는 요즘 어린아이들의 공동체 생활은, 겨우 학교에서나 볼수 있을 뿐이다. tv를 통해서 그때 본 열다섯 대가족 공동체의 진면목은 한집에서 형제끼리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부대끼며 자람으로 우애가 돈독해지는 가족의 진수를 보는 것같아 나는 큰 울림을 받았다. 언니 오빠들이 즐거운 맘으로 어린 동생들을 알뜰 살뜰하게 보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아들의 사랑속에서 자란 동생들이 커가면서 그 아래의 동생들을 보살피는 동기간들의 우애의 모습들이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서 정말 인상깊게 각인되었다. 열이 넘는 자녀를 둔 아빠는 우리의 상상과 달리 여상히 직장을 다니고, 큰 아들은 군대를 가게 되고, 장녀는 직장을 다니게 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언제나 함께였다. 서로 알뜰하게 챙겨주고 등 하교길을 손잡고 같이 다녔다. 다시 말하면 서로 돕는 그래서 하나가 되는 공동체 의식이 아주 몸과 삶속에 깊숙히 배여있었다. 요즘 어디서도 볼수없는 역동적인 공동체의 훈훈한 진면목을 본 것이다. 그래! 옛날에는 온 가족들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저렇게 정겹게 살았었지!
우리나라 인구는 이제 정점을 찍고 서서히 쫄아 들어가고 있는데도 서울과 대도시 아파트 수요는 계속 늘어나는 이유는, 가족이 해체되고 출생이 아닌 나홀로 독신세대가 계속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란다. 끈끈했던 가족공동체가 출산율 저하로 빠르게 해체 되어 가고 있다. 그 이유는 아예 자녀를 낳지 않거나 어쩌다가 둘 낳거나 달랑 하나다. 이리되면 누나 오빠도 형 아우도 없다. 울타리 역할을 하던 방계가족들은 진작 사라져 버렸다. 학교공동체가 지식 공동체라면 가족 공동체는 인간공동체의 산실과 같은 혈육공동체로서 진정한 인간관계가 여기서부터 이루어 지는데, 이제 최소 단위의 스몰공동체마저 해체되어 가니, 이젠 단독자로서의 나만 있고 그래서 나만 아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나홀로 세대가 이 사회의 주류가 되고 있으니 과연 이 나라 공동체가 어찌될까? 답이 없어 암담하기만 하다. 사회의 기초공동체가 무너지니 인간관계도 사회안전망의 도덕률도 인륜도 천륜도 모두 빛을 잃어가고 있다. "일할수 있을 때 한 눈 팔지 말고 일할수 없는 날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라!" 하지만 이러한 불문률도 가족해체와 함께 이기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무너진지 벌써 오래다. 일은 우리가 일한만큼 삶의 질과 가치를 높여주고 안정과 진정한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직장에서 일을 하면 월급과 수당이 나온다. 그리고 같은 직장에서 일년이상을 근무하면 퇴직금이 축적된다. 어디 그뿐이랴! 자녀를 생산하면 가정의 미래가 보인다.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든든히 하기위해 보험을 들듯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우리미래의 뿌리다.
1975년 日本 월간지 문예춘추 (文藝春秋)지에 한 편의 논문이 실렸다. '자살(自殺)'이란 의미심장한 제목 아래 일본 사회의 지식층들이 공동 집필한 논문이다.이들은 동서고금의 모든 문명을 분석한 결과, 모든 국가가 외부의 적이 아닌 바로 내부의 문제로 붕괴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이 찾아낸 자살의 공통적 요인은 다름아닌 이기주의와 포퓰리즘(대중 영합)이었다. 국민들이 사회보다 자신의 개인적 이익에 치중하고, 나아가 상위계급이 민중과 야합할 때 국가는 쇠망의 길을 걷게된다는 것이다. 논문의 주안점은 로마제국 쇠락의 원인을 빵과 쾌락으로 요약하고 있다. 실질강건했던 로마가 팍스 대로마나시대가 시작되면서 그토록 실질강건했던 로마가, 대중적 번영을 노래하면서부터, 로마 시민들은 책임과 의무를 잊은 채 도덕적으로 나태해지고 말았다. 민중들은 걸핏하면 대지주 혹은 국가 기관으로 몰려가 먹거리를 요구했고, 이에 권력자들은 환심을 사기 위해 민중들에게 공짜로 돈과 식량을 내주었다. 일하지 않고 먹거리를 얻게된 시민들은 급격히 기강이 해이해지고, 지배층은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더욱 과김히 국고를 방출했다. 기원후 1세기 클라디우스 황제때 콜로세움 경기장엔 격투기등 대중경기가 주말마다 열렸다. 이처럼 대중들이 공공사회를 위한 의무보다 권리만을 주장하고 국가를 책임진 엘리트들은 대중의 비위를 맞추려할 때. 이미 그 사회는 자멸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처럼 로마는 로마시민들의 국가 공공성을 무시한 집단이기주의와 태만한 레저사회로 전락되면서 로마인들의 실질강건은 사라지고 점점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것은 비단 로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 역사의 무대에 출현한 모든 국가문명이 이러한 부패 때문에 몰락하였다. 국가가 실질강건의 기강을 잃고 자정능력을 상실하는 순간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 오늘의 대한민국의 상황이 바로 그와 판박이 이다. 지금 우리는 눈앞의 이익만 취득하려는 팽만한 이기심과 증세(增稅)는 거부하면서 무상복지를 원하고, 다가올 재정 파탄에는 눈을 감은 채 더 더 하고 아우성이다. 코로나 때문에 장사가 안되고, 코로나 때문에 사업이 안된다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시민들이 풀어야 할 몫이지 이를 국가에 기댈 사안은 아니다 지난 날 대한민국이 기적을 낳은 것은, 미래를 위해 오늘을 참는 절제와 책임 그리고 부지런함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미래는 없고 오늘만 있다. 미래를 준비하며 국가전략을 짜야 할 정치관료와 엘리트들은 인기에만 영합하여 오늘 풀어야할 시급한 문제들 예를 들면, 공무원연금개혁 을 둘러싼 여야 합의는 빵과 서커스의 전형이다. 바로잡아야 한다는 절치부심은 아예 없어, 공무원 연금 파산의 구조적 원인은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면서 국민연금까지 끌어들여 1600조원이나 더 보태는 포퓰리즘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야당은 국익 대신 공무원 집단들의 편을 들었고 이에 여당은 야합을 했다. 야당은 공무원연금으로 모자라 국민연금까지 포퓰리즘의 난장판으로 끌어들였다. 여야 할것없이 달콤하게 속이는 조삼모사 (朝三暮四)의 정치술수에 열을 올리고 있다. 나라의 경제는 자꾸 기울어져가고 있는데, 해외여행에 얼이 빠진 대통령내외는 돈을 물쓰듯 외유에 흡씬 빠져 있다. 무상급식 무상보육이 서민층 몫을 더 줄이는 역설(逆說)을 보고도 여전히 무상복지를 외치고 있다. 집단의 이익이 국가 이익보다 우선시 되고, 집단 이익의 떼쓰기가 곳곳에서 난무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진정 걱정해야 할 것은 일본의 우경화도, 중국의 팽창주의도 아니다. 병리(病理)를 알면서도 치유할 힘인 자정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망조(亡兆)가 든 나라는 타살(他殺)당하기 전에 스스로 추락하는 법이다. 국가 자살을 걱정하던 40년 전 일본 지식인들의 경고가 무섭도록 절실하게 지금 우리앞에 다가오고 있다.
세계사를 놓고 나라의 흥망성쇠를 분석해 보면, 나라가 비실비실 해지면 마치 날 짐승들이 달려들듯 이웃 강한나라에게 삼키고 마는 것은 100년전 조선이 그랬듯이, 오늘의 한국이 지금 판박이가 되어가고 있다. 정치권 스스로의 자정능력으로는 이 병을 절대로 고칠수 없다. 아니 그들은 안 고칠 것이다. 그러면 국민인데 오늘 이 국민들이 혁명의 불을 지피기위해서는, 지식인들이 나서야 하는데 진작 속으로부터 썩어 문드러져 지식을 파는 쓰레기같은 소피스트들이 되어버린 저들에게서는 용광로와 같은 의로운 분노가 없다. 우선 국회의원을 100명 이내로 확 줄이고 권력특권 기능을 전부 없애버려야 한다. 시민봉기의 힘으로 이루지 못한다면 총을 들고서라도 국가 자살은 막아야 한다. 지성들이여! 고대 그리이스의 지식쟁이 소피스트들이 되고 말았는가! 아직 기백이 남아있다면 일어서라! 이는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모두의 외침이고 울분이다. 나라가 망하고 나서
"정치인들 때문에 망했다."
"좌빨 때문에 망했다."
"강성 노조 때문에 망했다."
"전교조 때문에 망했다."
"국민들의 무관심 때문에 망했다."라고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안에서 나를 주장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를 향한 외침이 나를 일깨운다! 종그나! 깨어 일어나라!
【종그니칼럼】살아 온 한 해를 되돌아 보며
몇해전 미국 애리조우나 州의 어느 중견교회에서, 공석이된 담임목사를, 멀리 시골에 있는 이를 어렵게 맞게 되었는데,그 목사님이 주일인 바로 오늘 온다 하여, 온 교인들이 주일 대예배에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교인들이 너 나 없이, 오실 목사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오실 목사님은 보이지 않고, 행색이 남루한 노숙자가, 교회에 들어 오는 교인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하나 그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이가 없었다.
예배시간이 다가 오자, 이 걸인도 교회안으로 들어 가려고하니, 교인들이 냄새난다며, 들어 오려는 것을 막아섰다. 예배시간이 되자, 장로가 새로 부임할 목사를 맞아 들어 오는데, 바로 조금 전까지 노숙자 행색으로 구걸하던 자가 아닌가?
이스라엘에 바젤이란 아이가, 또래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는데, 바젤이 꼭꼭숨어서 찾을 수 가없자 친구들이 찾는 걸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바젤이 울며 이를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가 달래며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자신을 꼭꼭 숨기신단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우리를 섭리하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는 세상을 보는 눈으로 하나님을 보려고 하니,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거란다."
옛날 성 프랜치스코가 추운 겨울 날, 수도원 회의에 참석하려고, 겨울 외투를 입고 집밖을 나서는데, 더러운 땟국물이 덕지덕지 묻은 거지가, 길가 담벽에 앉아, 오들 오들 떨고 있었다. 이를 본 프란치스코가, 단 하나밖에 없는 외투를 벗어서 그에게 입혔다. 그리고 잰걸음으로 가려는데, 그 걸인이 프랜치스코의 발걸음을 손사래로 막으며, 너무 추워서 그러니 나를 좀 껴안아 달라고 했다. 그래 할 수 없이 그를 안으려고 그를 보는 순간, 그 걸인은 얼굴에 피 고름이 흐르는 문둥이었다. 그래도 팔을 펴서 그를 겨우 껴 앉는데, 살 썩은 냄새가 진동하였다.
이렇게 십분이 지나고, 삼십분이 지나는 동안, 프란치스코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그때 하늘에서 들려온 주님의 음성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 눈을 떠 보니, 그가 껴 안았던 그 문둥이는 간 곳 없고, 문둥이에게 입혀 주었던 외투만 남아 있었다. 이처럼 주님은, 노숙자로도 오시고, 문둥이 모습으로도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아기예수로 이땅에 오실때, 우리는 그를 맞이할 마음의 방이 없어서, 주님은 이 땅에 가장 낮은 구유로, 우리를 찾아 오시었다. 구약의 모든 말씀에 주석을 달만큼,성경 말씀에 해박한 지식을 지녔던 바리새인도, 그리고 사두개인도, 부귀를 누리던 임금도,아기 예수를 아는 이가 없었다.
이 땅에 오실 아기 예수를 손꼽아 기다리던 이는, 오로지 팔십 평생 성전을 떠나지 않고, 오실 예수를 기다린 안나 할머니와, 그리고 시므온 할아버지 뿐이었다.
지금도 엄청나게 큰 교회들이 즐비하지만, 가장 가난한 걸인하나도, 따뜻한 가슴으로 품지 못하는, 그래서 노숙자들 보다 더 송장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회칠한 무덤처럼 껍떼기만 화려하게 치장한, 부끄러운 우리들! 그 뉘라서 아기 예수를 온 심령으로 맞아 들일 수 있으랴!
이 추운 겨울, 곳곳에서 떨고 있는, 가장 작은 자로 오신 주님을 본다.
내게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내 것이 어디 있는가!
나만 나만하는 나로만 살지 말고, 너가 있으므로 나가 있는,
서로로 사는 우리로 살자!
부자들이 사는 고급 아파트 단지엔, 오로지 나 만 있고, 우리는 아예 없다. 나 또한 사십년을 주의 종으로 음지에서 살면서, 생명의 말씀과, 사랑에 주린 헐벗은 자들에게, 과연 상생으로 살았는가를 묻는 다면, 참 부끄러울 뿐이다.
눈을 들어 낮은 곳을 보라! 이 나라 유사이래 가장 잘 산다는 지금, 사랑에 배고픈 자들에게, 재물의 부요함을 자랑하나, 정작 사랑에 부요한 자들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이웃을 위해 온 몸을 던지신 주님을 성전에서 찾지 마시라! 이 차운 세밑, 주님의 눈으로, 헐벗고 주린 이 들을 보라!
우리에게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지순한 사랑이 없어서가 아닌가!
먹을 것이 없어서 주림이 아니고, 마실 물이 없어서 목 마름이 아니라,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사랑이 없어서, 주림이요 목마름이 아닌가!.
"사람의 마음이, 물욕으로 차 있게 되는 순간, 반드시 물욕의 종이 된다.
사랑이란, 상대에게 꼭 필요한 것을, 내게 있는 것으로 채워주는 것이다."
- Diogen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