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 칼럼】인도의 독립과 간디(Gandhi Mohandas Karamchand)
【종그니 칼럼】 역사의 irony
강원도 정선에 가면 나라로부터 허가 받은 카지노(casino)라는 사행장(射倖場)이 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전국의 내로라 하는 노름꾼들은 물론이고 세계를 주름 잡는 도박꾼들이 모여드는 곳이라고 한다. 이는 마치 한 여름밤의 모기떼들을 쫓기위해 마당에 모닥불을 피어놓으면 불을 보고 주변의 수많은 불나방들이 떼를 지어 날라와서 활활타오르는 불섭속으로 뛰어드는 모습들을 보는 듯 하다. 나도 수년 전에 춘천의 목사들과 그곳을 스쳐 지나간 적이 있다 그곳의 드넓은 주차장은 물론이고 차를 세울수 있는 공간엔 카지노판을 찾는 차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꽉차 있었다. '카지노'라는 허가난 노름판이 이렇게 인기가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이런 모든 현상들은 우리 사회가 퇴페와 사행성으로 얼룩져 있음을 단적의로 보여주고 있는 사례라 할 것이다. 카지노 건물 주변 골목 길에는 주인없는 차들로 뒤엉켜 있고 행색이 초라한 이들이 건물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모습들도 눈에 띄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이들이 이 곳을 찾아 올때는 하나같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자가용을 몰고 왔다가 하룻밤 혹은 며칠사이에 돈만 잃은게 아니고 인생의 모든 것을 홀랑 다 잃어버리고 이제는 갈 곳없는 노숙자가 되어 망연자실한 모습들을 보게 된다. 허가난 노름판! 국가는 왜 사회를 좀 먹는 이런 음지의 것들을 양성화 한 것일까? 정치하고 노름하고 닮아서일까? 소위 정치하는 이들의 면면을 보면 쌍판들이 도찌니 개찌니다. 그래서 언뜻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며칠전 나는 춘천 어느 식당가에서 젊은 여자들이 좁은 골목 길에서 줄 담배를 태우고 있는 모습들을 보았다. 그런데 어제도 전혀 다른 식당 골목에서 몸에 착 달라 붙은 옷으로 말쑥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아주 능숙한 솜씨로 담배 연기를 목안 깊숙히 빨아들이 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문득 그 젊은 여자가 담배를 태우게 된 동기가 궁금했다. 왜 젊은 여자가 길 위에서 그 쓰디 쓴 담배를 입안 깊숙히 빨아들일까? 담배를 빨아들 일때 혹 무슨 쾌감이 있는 것은 아닐까? '노름과 긱연 그리고 정치' 나는 간혹 그 삼각관계가 궁금하다. 노름꾼들이든 정상모리배들이든 담배를 꼬나물지 않고 노름을 한다거나 나라를 사행장으로 만들고 있는 꾼들을 나는 본적이 없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이전 국호는 '조선' 이었다. 조선(朝鮮)이란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가 평화를 구가하고 있을 때에는 朝鮮이란 말이 맞을지 몰라도 세계가 혼란스러울 때는 '朝鮮'이란 이름은 적합한 명칭이 아니지 싶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가 김일성 일가의 전제국가를 세습하고 있는 북한과 달리, '조선'이란 명칭을 과감하게 버리고 '대한민국'이라 명명한 것은 지극히 잘한 것이라 여겨진다. 꼭 땅덩이가 커야 대국인 것이 아니다. 약 80년전 인도는 중국 다음으로 큰 대륙의 나라였지만 대국 값을 못하고 유럽 여러 나라 그 중 영국으로부터 아주 치욕스런 내정간섭을 받아야 했다. 마치 우리나라가 1905년 이후 계산된 일제로부터 아주 굴욕적인 내정간섭을 받다가 종내는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었듯이 나라가 국힘을 잃게 되면 '강자의 논리'대로 나라잃은 민족이 되고 만다. 인도는 중국 보다 더 인구가 많고 중국 다음으로 큰 대륙을 지닌 나라다. 인도는 한때 무굴제국으로 세계를 제패한 적이 있었지만 제국이 몰락한 이후는 세계열강으로 부터 무수한 간섭을 받아 인도의 국력은 한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영웅은 어떻게 출현하는 걸까? 세상이 영웅을 만들까? 영웅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닐까? 여러분은 저 유명한 트라팔카르(Trafalg ar)해전을 혹 기억하시는가? 이 해전은 나폴레옹이 1805년 10월 스페인의 트라팔카르 앞 바다에서 영국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함대가 프랑스 와 스페인 연합의 무적함대를 크게 무찔러 세계해전사에 유례가 없는 대첩(大捷)으로 대승을 얻은 그 유명한 '트라팔카해전'이다. 이 해전에서 구국의 영웅 영국 넬슨제독의 생명을 건 고군분투로 예상을 뒤엎고 영국이 승리함으로서 나폴레옹은 완전히 몰락하고 영국은 모든 제해권을 독점하게 되어 마침내 대영제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때가 바로 엘리자베스 여왕 치세 때의 일이다. 이를 두고 세계사는 조선의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일본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둠으로써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왜란의 주범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의 해전에서 일본의 연전 연패로 재기불능으로 완전히 몰락하여 역사의 무대에서 영영사라지고 말았다. 만약 임진왜란때 이순신이 없었다면 아세아의 판도는 어찌되었을까? 임진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땅을 당시 중국의 명(明)을 치는 길로 삼으려 했다. 참 대단한 야욕이었다. 이를 두고 세계사는 임진왜란을 제일차 '중일전쟁' 이라 하고 그후 수백년이 지난 조선말기에 역시 조선 땅에서 일어 난 일본과 중국 청(靑)과의 전쟁을 "제2차 중일 전쟁"이라 칭한다. 이처럼 세계사에서 약소국은 언제나 이름없는 개 차반이다. 트라팔카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영국은 이후 무소불위의 전제국이 되어 세계를 손 아귀에 넣고 신생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 등을 호령하는 명실공히 무소불위의 '태양이 지지 않는 대 제국'이 되었다. 이때 인도 (印度)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무하마드 간디'다. 인도가 낳은 세계적인 혁명가 무하마드 간디, 아버지의 뜻으로 '마푸 무하마드 간디'(위대한 영혼)라 이름하였다. 한때 세계의 정치 경제를 이끌만큼 번성했던 무굴제국이 1857년의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 영국 '빅토리아여왕'은 인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1869년에 영국처럼 인도에도 대지주가 나오고 또 이때로부터 새로 생긴 조혼제도에 의해 간디는 겨우 14살에 결혼을 하게 되는데 첫날밤 치르는 법을 형수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한다. 간디는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많은 문제아였다. 그 일례로 그는 초등학교때부터 사창가까지 갔으며 인도에서 전통적으로 금하는 육식을14살 때에 "고기를 먹으면 강해진다."고 믿고 당시에도 인도에서 육식을 엄격히 금하였는데도 그는 염소 고기를 즐겨 먹고 또 담배까지 태우는 당시의 눈으로 보면 영락없이 아주 못된 '비행소년'이었다. 이러한 자신의 비행에 극심한 자괴감에 빠져 여러번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버팀목이셨던 아버지가 돌연 돌아가시자 그 충격으로 비행을 멈추고 대학에 진학했다.
이때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영국을 직접 보고 듣고 배우고 오라는 권면을 받고 유학을 결심하자 이제는 카스트들이 간디의 영국 유학을 반대하였다. 부까촉 천민들은 그림자도 더럽다는 것이다. 간디는 여기에 매이지 않고 1888년 영국의 변호사가 되기위해 영국 런던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아직 십대의 간디는 흔히 십대들이 그러하듯이 어느 틀이나 제도에 매이기를 싫어하였다. 그래서 대단히 돌발적이고 기존의 틀에 매이기를 아주 싫어하는 반항아 였다. 그는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총각 행세를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반항아처럼 천방지축으로 굴던 어느 날 그는 영국 식민지의 피지배자로서의 자신의 현 주소를 정확히 읽고 그는 본연의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사교활동을 완전히 끊고 법률공부에 매진하여 마침내 그는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는 사건을 정확히 파악하여 그 사건에 맞는 법률 용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해야 하는데 간디는 아직 인생경륜이 부족하여 변론을 마음만큼 제대로 못했지만 그러나 그는 근면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였다. 그리고 그는 마음의 뜻을 세우고 1893년에 아프리카 남아공으로 이주하였다. 이곳 남아공에서는 간디에게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남아공 나탈주에는 이민 온 정착 인도인들 다시 말하면 계약노동자들이 많았다. 영국에서도 남아공에서도 간디는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또는 식민지인이라는 이유로 걸핏하면 최악의 수모를 격어야 했다. 그는 기차에서도 이루말할수없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마차를 타고서도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로얄석을 끊었음에도 마부의 말대로 "유색인은 유럽인 전용좌석에 앉을수 없다"는 이유로 자리에서 쫒겨나야 했다.
이처럼 청년 간디는 혹독한 인종차별을 격으면서 비로소 자기가 해야 할 일과 이 시대에 어떻게 쓰임을 받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면서 소명의식을 갖게 되었다. 즉 그는 대영제국의 잘못된 식민주의 정책과 오로지 영국의 시각으로만 보는 모든 앙상레짐을 하나 하나 타파해야 한다 는 이 시대의 부름에 어떻게 자신이 대응해야 할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대영제국의 황민이 아니면 식민지인 또는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인도인 차별을 혹독히 하고 있는 제도에 대해 분연히 일어선 때의 간디의 나이 25세였다. 그는 남아공에서 인도인들을 중심으로 인도 국민회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남아공에서 인권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인도에 있는 가족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폭력에는 비폭력으로' 이것이 간디가 내건 슬로건이었다. 그러다가 간디의 명성에 금이간 사건이 발생하였다. 바로 '보어전쟁'(남아전쟁 1899~1902)이다. 이 전쟁은 영국과 아프리카의 트랜스바알과 오랜지 자유국과의 전쟁으로 영국은 이 지역에서 금과 보석이 발견되자 이를 탐내어 일으킨 식민전쟁이었다. 결국 이 두나라는 영국에 굴복하여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간디가 영국군으로 이 전쟁에 참전하다 이 사단이 일어난 것이다. (이로 인해 훈장까지받음) 약소국을 무단 침입한 영국의 승전을 위해 간디가 왜 영국군으로 이 전쟁에 참전했을까? 아마 자신이 영국신민임을 보여주기 위함이 야니었을까? 참 아이러니하다. 바로 이 때문에 간디는 자신의 명성에 먹칠을 한 꼴이 되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은 누구나 수많은 우여곡절을 격으면서 쓸모 있는 재목으로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대영제국은 보아전쟁 후에 피지배자들인 식민지인들에 대한 새로운 차별법으로 '아시아인 등록법'이라는 감시법을 만들었다. '보어전쟁'을 통하여 그리고 '아시아인 등록법'을 통하여 무소불위로 식민지인들에게 가하는 영국의 야누스적인 가증스러움을 직접 격고서야 간디는 1906년 9월에 비로소 인도인의 혼과 정체성을 지닌 인도인의 옷으로 갈아 입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새로운 인도 인'으로 거듭 남을 행동에 옮긴 것이다. 그리고 '사티아그라하'에서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을 병행하자 간디의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싸우는 동기가 되었다. 이때 인도의 두 종교 즉 힌두교와 무슬림이 나라의 독립운동보다 더 깊숙이 들어와 인도인의 마음을 찢어 놓음으로 안타깝게도 신앙이 분열되고 말았다. 인도 온 민족이 대영제국에서의 독립이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선행되어야 함에도 조국을 되찾는 문제보다 고유의 종교를 지키는 것을 최우선에 두었다. 스와라지(자치운동으로 영국인을 내쫒고 인도인이 스스로 인도를 통치하는 일)과 스와데시(인도독립운동의 하나로 영국 화폐 배척운동)으로 간디의 대표적인 비폭력 저항 운동이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간디는 그의 나이 46세에 고국 인도로 영구 귀국하였다. 그는 영국군으로 인도 국민들의 참전문제로 큰 고민에 빠졌던 간디는 영국이 승전국이 되면 인도의 자치를 약속받고 노동자와 군인들 130여만명이 참전하여 마침내 1918년에 승전하였으나, 그러나 "롤래트법" 즉 계엄령으로 인도의 자치약속은 한갖 휴지조각이 되자, 간디는 "영국이 하는 일은 그 어떤 것도 비협력 하자"며 이에 반발하자 영국은 무장한 군인들을 앞세워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하였다. 이로써 마침내 인도국민의 반영 감정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간디 또한 거짓을 밥먹듯하는 영국에 '무저항 운동'으로 즉 스와라지 스와데시 운동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는 '국산애용운동'으로 손수 물래를 돌려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이 '무저항 운동'으로 간디는 6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무렵 인도의 시성(詩聖) 타골(Tagore)이 간디에게 '마하트마 간디'라는 칭호를 주었다. 비폭력저항운동으로 완전한 독립운동을 이룩하겠다는 간디는 78명이 하나가되어 영국제품 불매운동과 국산품 애용운동과 소금세 반대운동을 시작했는데 삽시간에 수만명으로 늘어나 영국군대 앞에서 소금을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한 비폭력 저항운동이 급기야 전국적으로 모든 민초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 들고 일어나자 간디가 석방되고 가정용 소금을 만드는 것을 영국이 허용하였다. 그러나 인도는 이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완전한 독립이다"며 거세게 요구하자 '윈스턴 처칠'마저도 간디를 싫어하였다. 세계무대에서의 영국의 입지 또한 점점 줄어들었다. 인도인들에게 아무런 사전 예고 없이 "제 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차질없이 참전하라"는 명령에 불복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자 이 독립선언이 마침내 인도의 독립운동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마침내 1948년 8월15일 힌반도 조선이 해방되던 해에 인도 또한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간디는 1948년까지 두 종교를 화합시키려 전력투구했지만 보람도 없이 인도는 파키스탄과 인도로 갈라서고 말았다. 그리고 간디는 민족 분리주의자의 테러에 의해 흉탄에 맞아 서거했다. 그때 간디의 나이 79세 (1869~1948)였다. 소위 이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자들아! 도박과 같은 요행에 국민의 마음을 사려고 동해 바다에 석유가 나온다고 국민들을 호도하려들지 말고 진정 이 나라를 변화시키려면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는 썩어 문들이진 위정자들 부터 먼저 변화가 되시라!
【종그니 칼럼】 역사의 irony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boutgeois revolution)의 시작은, '앙시앵 레짐'즉 봉건적 구제도의모순에서 비롯되었다. 프랑스 전체인구의 2%, 즉 약 10만의 승복(가톨릭 사제)과, 약 40만의 귀족들이, 온전히 국가권력을 독점하고 나머지 절대다수는, 아무 권한은 없고 세금만 부담해야 하는, 제3신분의 평민들이었다.
물론 이 평민들 안에는, 상 중공업 인들과, 법률가, 의사, 문필가 등 '부르주아 시민계급'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국가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는 데에, 프랑스혁명의 직접적인 동인이 되었다. 조세부담 문제로, 3 部會(사제, 귀족, 평민)가 1789년 소집되자, 재빠르게 시민계급이 '3 부회'를거부하고 '국민회의'를 조직, 그해 5월 14일 정치범수용소인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 혁명이 발발하였다.
8월 26일, 근대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귀중한 문헌인 '인권선언'이 채택되고, 입헌군주제인 '91년헌법' 이 채택되었다. 이때 마르세유 의용군이 부른 '라인 강 수비대의 노래'(라 마르세예즈)가, 훗날 프랑스 國歌가 되었다.
1793년, 프랑스혁명을 주도했던 로베스피에르 (Robespierre)는, 뜻밖에 공포정치(the Terror)를자행하다가 공분을 사서, 1년 후, 그는 자기가 정적을 단죄하던 바로 그 단두대에 처형되고 말았다(1794년). 이를 '테를 도미를(열 월) 반동'이라 부른다.
이런 난마와 같은 바탕 아래에서, 나폴레옹(Napoleon 1769~1821)이 혜성처럼 프랑스 정치무대에 등단, 1796년 알프스를 넘어,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다음 해에 이집트 원정 후, 1804년 황제에 즉위,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 넬슨 제독과 결투를 떴으나 대패, 그러나 그해 다시 '아우스테를리쯔 전투'에서 대승, 마침내 유럽을 손아귀에 집어넣었다.
그 여세를 몰아 1812년 기고만장한 그는, 한겨울 무모하게도 러시아원정을 단행하였으나, 여지없이 대패하여 정예부대60여만 명을 잃고, 러시아 코자크 기병에게 쫓기다가, 상황이 매우 급하자 숨을 곳을 찾아, 시골 양복점의 문을 두드렸다.
"난 지금 러시아군에 쫓기고 있소, 날 좀 숨겨주시오!" 시몬이라는 집주인은, 별 볼품 없어 보인 작달막한 이 남자의 행색이, 너무도 불쌍하게 보여서, 침실 벽장 안에 쑤셔 넣고, 여러 겹의 이불로덮어 숨겨 주었다. 그리고 곧바로 러시아군이 들이닥쳐,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그들이 다락문을 열고, 그안의 이불을창으로 팍팍 찔러보고는, 이내 사라졌다. 사지에서 겨우 살아난 나폴레옹은, 누가 보아도 그야말로형편 없는 포로군 행색이었다. 이런 몰골의 나폴레옹은, 자신을 사지에서 구해준 이발소 주인에게말했다.
"나는 프랑스 황제다. 그대는 짐을 살려준 생명의 은인이다. 소원을 말해 보라." 집주인은 거지 차림의 그가 전쟁의 참화로 정신병자가 되어, 미친 말을 하는 거로 알고, 빈정거리는 투로, "이발소지붕 기와 몇 장이 깨져 물이 새니, 그거나 고쳐주고 가쇼."
"아니 겨우 그것인가! 내겐 불가능은 없다. 말하라!"
"그럼 양복점 기와까지 새로 덮어 주쇼."
"이보게 나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란 말이다. 더 큰 소원을 말하라!"
"아 그러시오? 그럼 다락 속에서 이불을 덮고 있을 때, 그 기분이 어땠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나폴레옹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그리고 잠시 후, 프랑스군이 나폴레옹 황제를 찾아 옹위했다.
나폴레옹은 부하들에게,
"이 사나이를 체포하라! 그리고 날이 새면 즉시 총살하라!" 이발소 주인은, 애써 잡혀 죽을 사람 살려 주고 결박을 당하여 끌려갔고, 다음 날 아침 허허벌판에 세워진 나무에 묶여 졌다. 동쪽 하늘이밝아 오자, 드디어 총살 구령이 시작되었다. 하나!. 두울!
바로 그때, 한 전령이 말을 타고 달려오며 소리쳤다. "잠깐 멈추라! 총살을 취소하라는 황제의 명령이다!." 전령관이 사형집행을 멈추게 한 뒤에, 그에게 황제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그 종이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이제 알겠는가?"
코르시카 섬의 평민 출신이, 앙시앵 레짐의 큰 산을 넘어,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지만, 1813년 라이프치히 전쟁에서 패배, 1814년 엘바 섬에 유배되었다가, 신출귀몰하게 엘바 섬을 탈출하여, 회심의 Waterloo 전투에 임했으나 분루를 삼켜야 했다. 그는 다시 대서양의 孤島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되어, 1821년, 영광과 파란으로 얼룩진 생애를마쳤다. 작금, 집권층이나 야권 등 국 정치리 자들은, 현 시국이 얼마나 엄중한가를 아시고, 초아적으로 자신을 던져, 나라를 바로 세우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