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서애 류성룡이 그립다.

【종그니칼럼】1%의 행복 【종그니칼럼】악력(握力)운동. 【종그니칼럼】퇴계와 두향의 초월적 사랑

2023-01-17     김종근 목사

조선역사에서 최대의 위기이자 가장 큰 국제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을, 세계사는 조선과 일본으로 국한하여 보지 않고, '제 일차 중일전쟁'이라 말한다. 그럼에도 전쟁의 최대 공신을 뽑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신으로는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을, 문신으로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 1607)을 꼽는다.   

그렇다면 서애는 당연히 1등 공신이 되어야 함에도, 2등 공신으로 밖에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전쟁 말기에는 '주화오국(主和誤國)'의 누명을 쓰고 삭탈관직 되었다. 서애연구 6권에 실린 논문, "임란 극복의 주역, 류성룡 축출 과정과 그 배경"에서, 류을하 박사가 이에 대하여 자세히 밝히고 있다. 서애는 전시(戰時)난국 타개의 재상으로, 오로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내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을 바쳤다. 그래서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면, 기존의 인습이나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 기존 평시의 모든 제도를 전시체제하에서 유연하게 변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전시개병제를 도입하여, 군역에서 제외된 양반이나 천민도, 모두 병역의무를 지게 하였다. 그리고 천민들도 공을 세우면, 면천(免賤)뿐만 아니라 벼슬까지도 약속하였다. 그리고 공물작미법으로 방납 이권을 봉쇄하고, 부자 증세를 도모하였다. 조선 역사에서 전무후한 전란을 당하여, 거국적으로 이를 타개할만한 인물로, 구제도(앙상레짐)를  타파할 그릇으로, 서애 류성룡 외에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시제도는, 기득권 특수계층인 양반들의 엄청난 반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나라야 어찌 되든, 자기 위신을 지키는 것이 최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을 상대로 자신 또한 모든 기득권을 내려 놓고, 기득권자들에 대하여 서애는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전무후무한 위난을 갑자기 만나, 평시와는 완전히 다른 온 나라가 전란을 당하여, 전시체제를 갖추고 난국을 구제할 계책을 마련하여야 할 백척간두의 위기 앞에서도 저들은 말하기를, “옛부터 내려오는 관습을 변경할 수 없는 것이 나라의 중론이라 이러한 중론을 어길 수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러나 이것은 마치 병든 몸에 쌀밥과 고기 반찬을 여상히 먹으면서 병을 고치려는 것이나, 나막신을 신고서 큰 강을 건너려는 것처럼 너무도 구태의연한 행위."라고 질타했다. 하지만 이들은 나라의 안위보다 자신의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워, 서애의 이런 말이 귀에 들어 올리가 없었다.

전란 후, 이들은 있지도 않은 말까지 지어 내어 서애를 헐뜯고, 선조에게 서애를 이간질 했다. 이를테면, 서애가 쓸데없는 토목공사를 해서 국비를 탕진했다는 둥, 뇌물을 수수했다는 둥, 관직을 멋대로 남발하여 선심을 썼다는 둥, 심복들을 내외에 포진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나라 경리 양호가 머무는 객관에까지 서애를 비방하는 글을 몰래 부착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과의 강화협상이 결렬되어,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게 되자, 서애가 심유경과 짝짝꿍이 되어 화친을 주장하며, 나라를 망쳤다는, 소위 '주화오국'을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서애가 송나라의 진희보다 더한 악인이라며, 서애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 씌웠다.   

이에 대해 선조는 소인배처럼 교활하게도 기회주의적 입장을 보이다가, 필경은 이기주의자들의 편을 들어 준다. 선조 역시 자기 이익에 반하는 제도를 실시하려는 서애가 불편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방납 이권'에는 왕실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애의 세제 개혁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겁 많은 선조는, 중전 박씨부터 피난을 보내려는 것을, 서애가 극력 제지했으니, 이래저래 서애가 아주 못마땅했을 것이다. 서애는 임진란 첫해 왜군들이 한양을 넘어 평양까지 진격할 때도, 압록강 건너 명나라로 도망가려는 선조의 바지가랭이를 붙잡고 늘어졌었다. 이처럼 선조는 나라의 운명보다, 자신의 생명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정유재란으로 명군이 다시 조선에 파병되었을 때에, 명나라는 아예 조선을 직할통치할 마음까지 먹고 있었다. 고려때에 원(元)나라가, 이땅에 정동행성을 설치하려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에 서애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를 반대하였는데, 선조는 그렇지 않았다. 선조는 자신의 왕위(王位) 만 보존되면, 명(明)의 직할통치도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선조는 “우리나라의 형편으로는 절대로 왜적을 당할 수 없으니, 중국 사람이 조선 땅에 와서, 둔병하고 둔전하는 것도 안 될 것 없다.”고 했다.

이런 연유로 결국 서애는 1598년 11월 19일 파직되고, 한 달도 안 된 12월 6일에는 삭탈관직까지 되었다. 수구세력은 이렇게 서애를 쫓아내고, 서둘러 서애가 시도한 모든 개혁정책을 원점으로 돌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구체제로 몽땅 복귀시켰다. 서애가 이렇게 팽을 당하여 멀리 고향 안동으로 내려갈 때,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서애가 낙향하면서 단양을 지날 때 쓴 시(詩), "단양행(丹陽行)"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나라를 지켜야 할 자들이, 나라의 엄청난 위기 앞에서도, 이러틋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버릴수 있을까하여, 주먹을 쥔 손이 부르르 떨린다.

我今流離經此中 (아금유리경차중) 
내가 이제 유랑하는 몸이 되어 이곳을 지나 가기로,
百口相隨飢凍迫 (백구상수기동박) 
식솔들은 따라오며 허기와 추위에 떨고 있네,
疲牛瘦馬鞭不動 (피우수마편부동) 
지친 소와 야윈 말은 채찍질에도 꿈쩍않는데,
日暮饕風吹虐雪 (일모도풍취학설) 
날 저물자 거센 눈 바람 사납게 몰아치네,
狐狸往往嘷我後 (호리왕왕호아후) 
늑대와 살괭이들이 등뒤에서 계속해서 울어대고,
猛獸咆咻當我前 (맹수포휴당아전) 
맹수는 포효하며 내 앞을 막아서네,
㩳然神動不可留 (송연신동불가류) 
두려워 정신이 없어 주저 앉을수 조차 없는데,
百里行盡無人煙 (백리행진무인연) 
백리 길을 걸어가도 인가의
연기는 보이지 않네,
僮僕號呼兒女泣 (동복호호아녀읍) 
시동들은 비명을 지르고 아이들은 울어대니,
丈夫到此難爲顔 (장부도차난위안) 
대장부도 이쯤되니 체면 세우기 조차 어렵네,
平生學道未得力 (평생학도미득력) 
평생 동안 학문을 닦았어도
이를 이길 길이없네,
外物寧作秋毫看 (외물영작추호간) 
몸밖에 일어난 일들을 어찌
소홀히 할수 있겠는가!
臨風快歌丹陽行 (임풍쾌가단양행) 
바람을 안고 가며 빠른 박자로 단양행을 지어 읊으니,
自古人間行路難 (자고인간행로난) 
예로부터 인생 행로는 고난의 길이로세,

한 겨울에 찬바람을 맞으며 식솔들 거느리고 단양을 지나가는 서애, 그 마음이 비감했을까? 그때만 하여도 단양은 심산유곡이었고, 더욱이 온 나라가 전란을 치른 뒤라서, 온 나라 마을들이 페허가 되어, 흉가처럼 텅텅 비어있는 집들이 태반이었다. 서애는 몸도 맘도 시리고 아리지만, 자기를 위시하여 외침에 대한 위정자들의 안이한  인식때문에, 온 나라가 초토화가 되어 추위에 떨고 있는 백성들을 보며, 얼마나 많은 피눈 물을 흘렸을까! 

왕을 비롯하여 화를 자초한 이 나라 위정자들은, 자업자득으로 엄청난 대란을 몰고 왔음에도, 나라의 안위는 뒷전이고, 자신의 호신과 이익 채우기에 급급했다. 그럼에도 나라의 녹 따박 따박 받아 먹는 중신들은 나라를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건져 낸 이순신을 죽음으로 몰아 세우고, 서애 마저 역신으로 몰아 내고 말았다. 이런 조선은 차라리 나라없는 설움을 톡톡히 격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차라리 이순신이 역성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서애 선생이 쫓겨날 때의 조선의 정치판과, 오늘의 정치판이 마치 판박이 같다. 그럼에도 오늘의 위정자들이 우물안 개구리처럼 쌈박질만 하고 있어 답답하다. 지금 이 나라는, 북한이 핵무기로 전방위로 위협하고, 세계 경제는 위기로 치닫고 있는 이때, 여야가 위기 극복을 위해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이다.

아무리 야당 대표가 맘에 내키지 않더라도, 사방으로 죄여 오는 이 난국을 풀기위해서는, 서로 만나 머리를 맞대면,  꼬였던 난제들이 실태래처럼 풀릴수도 있잖은가! 그리고 작년 10월 말에 이태원에서 159명이라는 아까운 젊은이들이 생명을 잃었는데, 이에대해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단 한마디라도 애도의 뜻을 표해주었더면 얼마나 좋았을까?

또 자신의 입맛에 맞는 당대표를 세우기 위해 대놓고 정당에 개입하는 대통령의 처사는, 마땅히 침묵해야 할 것에는 의중을 드러내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다. 서애는 비록 조선이 자신을 축출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조국을 너무 사랑하였기에, 조선이 다시는 환란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징비록(懲毖錄)'을 썼다. 그런 서애가, 저 세상에서 지금 이땅의 후손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참으로 답답하다. 인간은 인간이기에 누구나 불완전 하다. 그러기에 지혜란 구해야할 것과 피해야할 것을 아는 지식이다. 제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 하더라도,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반드시 두 귀로 듣고 두 눈으로 보고 살아야,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람이 된다. 춘천호반에서 종그니가

고려대 법대, 총신신대원 졸업, 광운대 정보복지대학원 졸업, 서울 용산소망교회, 경남 하동교회,  부산 영도 교회 시무. 현재, 행복이 가득한 교회(예장합동) 행복이 가득한 집(요양원) 시무 

내가 몸담고 있는 요양원 이름이, '행복이 가득한집' 이다. 이름 그대로 "행복이 가득하길 비는 맘"으로 지은 이름이다. 이 땅위의 모든 사람들은 행복에 목말라 있다. 그럼 오고 오는 모든 사람들이 찾는 그 행복은 과연 어디 있을까?  어떤이는 돈에, 또 어떤이는 권력에 있다고 믿고, 거기에 모든 것을 거는 이가 있다.   옛날 영국 헨리 5세가, 매일같이 산더미처럼 밀려오는 국정업무에 지쳐, 아무도 몰래 홀로 궁을 나와, 한적한 농촌 마을을 거닐다가, 해질무렵 은은한 찬송 소리에 끌려 가 보니, 마을 어귀 외딴 집 에서,  남루한 옷을 입은 늙은이가 마루에 앉아, 온 맘으로 감사의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왕이라는 직무에 짓눌려 온 왕은 이 농부 할아범에게서, 인생의 참 행복의 진수를 보았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텔마 톰슨' 이라는 여인은, 2차 세계대전 중에,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며, 육군 장교와 교제끝에 결혼을 했다. 남편이 캘리포니아에 있는 '모제이브 사막' 근처의  육군훈련소로 배속 되자, 이 새색시는 신혼의 단맛에 젖어, 멋 모르고 이곳까지 왔다. 온통 눈이 남편에게 꽂혀, 따라 오고 보니, 풀 한포기 없는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가득 찬 그곳에서의 삶은, 참으로 외롭고 처절할만큼 고달프기만 했다. 숨쉬기도 눈뜨기도 불편한 사막의 불모지에서의, 하루 하루의 고역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남편이 부대로 나가고 조그만 오두막 집에 홀로 남게 되면, 50도가 넘는 살인적인 무더위에, 이야기할 상대라고는, 고작 멕시코인과 인디언 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영어를 모르기 때문에, 의사소통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이곳에서는 언제나 모래 바람만 불어, 호흡하는 공기속에 모래가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며칠이 못되어 그녀의 입에서 신세 한탄이 저절로 나왔고, 상실감에 젖어 슬프고 외롭고 억울한 생각이 들어, 친정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이런 곳에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당장이라도 짐을꾸려 집으로 돌아가고 싶고, 이곳에 더 눌러 사느니, 차라리 감옥에 가는 편이 낫겠다."는 내용으로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호소했다. 그런데, 당장 오라거나, 자신을 위로해줄거라 기대했던 아버지의 답장은, '단 두 얘기' 뿐 이었다. "감옥에 갇힌 두 사나이가 옥중의 조그만 창틀을 통해 바깥세상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밤마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헤아리면서, 자신의 미래를 꿈꾸며 살았고, 다른 한 사람은 감옥에 굴러다니는 먼지와 바퀴벌레를 세며, 불평과 원망으로 살았단다. 네가 환경을 보는 관점을 바꾸거라."  너무 간결하고 단호한 편지 내용에 처음엔 크게 실망했지만, 아버지의 진솔한 어드바이스가, 마치 중세의 철옹성 같던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 '코페르니 쿠스적 대전환 (Copernican revolution)' 으로, 마침내 중세에서 근세로 탈바꿈한 만큼이나, 그녀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아버지의 글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던 그녀는, 친정 아버지의 이 한마디의 충고로, 자신의 어리석었음을 직시하고, 그때부터 그녀는 주어진 현재의 상황에서, 무엇이든 좋은 점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오늘의 나에게 밤 하늘의 별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자신의 주변을 꼼꼼히 살피던 어느 날, 새색씨는 날마다 마주치는 원주민들에게 다가가 어울려 친구가 되었다. 그들이 보여준 의외의 반응은 그녀를 놀라게 했다. 그녀가 그들의 편물이라 든가, 도자기에 대해 흥미를 보이면, 그들은 여행자에게는 팔지도 않던 소중한 것들을, 이것 저것 마구 선물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자라고 있는, 선인장, 난초, 여호수아 나무 등, 기기묘묘한 사막의 식물들에대해 연구했고, 사막의 낙조(落照)를 바라보기도 하고, 일백만년 전의 사막이, 바다 밑에 있었을 무렵에 존재했을 조개 껍질을 찾아보기도 했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변화시켰을까? '모제이브의 사막'은 변함이 없고, 인디언들도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마침내 그녀는 '참담했던 자연환경'을, 생애에서 가장 '즐거운 모험'으로 바꾸었고, 새롭게 '발견한 세계'에 자극을 받자, 그녀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그것을 소재로하여 "빛나는성벽" 이라는 소설을 썼다. '출판 싸인회'에서 그녀는 이렇게 인사했다.  “사막에서 생활하는 동안에,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자연환경이 악마가 되어 나의 귀에 대고,  ‘너는 불행하다 !' '너는 외톨이다 !'  '너는 희망이 없다 !'라고  말하는, '그 악마의 소리'와 동시에,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 이곳으로 너를 인도한 이는 바로 너의 하나님이다! 이곳에서 너의 새로운 꿈을 실현해 보라!"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이후 나는 '마귀의 소리'에 귀를 막고, 오로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귀울이면서, 오늘의 이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앞에 바로 내 안에 있으며,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있다!.  '어떤 상황' 이나 '조건' 때문에 행복하고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가짐'이 바로 행복과 불행을 결정한다.  마음은 몸을 지배하고 다스린다. 덥다고 짜증을 부리면, 몸도 마음도 상하게 된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신경질을 부리면, 나머지 가족들까지 바로 그 영향아래 놓이게 된다. '부정적 바이러스'는, 모든 가족과 모든 공동체에 번져서 병들게 한다. 어떠한 여건에서도 긍정의 사고를 갖자! 예를 들어 '자살'을 반대로 하면 '살자'가 되듯, "내 인생의 사전에는 불가능은 없다."라고 갈파했던 나폴레옹은, 그 긍정으로 한때 전 유럽을 제패한 황제가 되었지만, 그가 세인트 헤레나섬에 유배되어 죽어가면서 마지막 남긴 독백은, "내 생애에 행복한 날은 단 6일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런가 하면, 일생동안 보지도 듣지도 말도 못한, 삼중고(三重苦)의 헬렌 켈러는, "내 생애 행복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는 말을 남겼다. 하늘나라는 죽은 후에 가는 곳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 속에 이미 와 있다. 내게 이미 주어진 것을 찾아 갖는 것, 그 것을 누리는 것이 은혜이고 신앙이다.

저울에 '행복'과 '불행'을 달때, 행복이 불행보다 1%만 많아도, 저울추는 '행복'쪽으로 기울게 된다. '행복의 조건'에는 많은 것이 필요 없다. 우리의 삶에서 단 '1%'만 더해지면, 행복한 거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1%'가 빠져나가, '불행'하다 느낄 때도 있다.  약간의 좋은 것 1%는, 우리 삶속에서 겨자 씨보다 작은 것'일 수 있다.  기도할 때의 평화로움, 그리고 상대를 향한 따뜻한 미소, 좋았던 추억, 긍정의 마음, 파란 하늘, 태양, 달, 별, 나무와 꽃들, 그리고, 잔잔한 그리움까지, 이러한 긍정의 "1%"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오늘 그 1%를, '행복의 저울 추' 쪽에 올려 놓자! 나는 오늘 아침 새벽예배 준비를 하려고, 안경을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길래, 손으로 얼굴을 만졌더니, 아! 글쎄 내가 찾던 안경이 바로 내 얼굴에 붙어 있었다!! 나는 김(金)가 이고, 경주 김(金)가 족보에 올라있다. 족보 중 가장 좋은 족보가 하나님 가문이다.   '행복의 사닥다리'를 올라 갈 때, 그 사닥다리를 붙들어 주시는 이가, 임마누엘 이심을 잊지 말자!

◆【종그니칼럼】 악력(握力)운동.

얼마 전 강원대학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는데, 주치의가 내게 말하기를 "일년동안 혈관 치료때문에 신장 기능이 많이 떨어졌다."고 해서, 신장전문의 진찰을 받았더니, 신장기능이 겨우 30% 정도만 남았단다.  

이 수치는 작년에 비하면, 10%이상이 떨어진 수치다. 작년 만해도 "사는 날 동안, 투석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이젠 "자칫하면, 투석까지도 하게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니, 내가 나를 생각해 보아도 참 바보다.

전도서에 "만사에 정한 때가 있다."고 했듯이, 옛말에 "호미로 막을 것을 자칫 가래로도 못 막는다."는 말은 바로 맹한 나를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지난 일년 동안 몸 관리를 좀 더 잘할 것을! 하고 후회해 보지만, 죽은 자식 불알만지기지 다시는 돌이킬수 없는 일을 이제 와 탓해서 무엇하랴!

몇해 전엔 몸에 혈전(피떡)이 생겨서, 이때문에 건강을 잃고 몇년 동안 고생을 했었다. 이젠 몸도 늙어 모든 기능도 노화되어 가는 것을 어쩌랴! 나는 양로원과 요양원에서 어언 이십 오년 동안 많은 어르신들을 섬겨왔다. 그동안 입소한 분들 대부분이 인생 말년에 오신분들이라, 건강하신 분은 단 한 분도 없었다. 설혹 몸은 비교적 건강해도 치매가 있든지, 사고력은 건강하지만 몸이 불편하셨다.

이처럼 말년을 치매 혹은 당뇨나, 중풍과 같은 혈류병 등으로 몸도 맘도 망가진채로, 고달픈 여생을 지내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서, 지금도 많은 상념에 젖을 때가 있다. 지난 날 건강했을 때, 세상일에 너무 매여, 하나뿐인 몸둥이를 얼마나 혹사시켰었던가! 백년도 못사는 걸 천년 만년 살것처럼, 젊은 날 몸을 좀 아꼈더라면, 건강한 노후를 보낼수도 있지 않았을까? 지나고 보니, 병은 내 몸의 가장 약한부위에서 부터 스며드는 것같다. 

예를들면, 손에 쥐는 힘(악력)이 약한 사람은, 정상인보다 심혈관계 질환이나 암 발병 위험이 높다고 한다. 흔히 허벅지나 가슴과 같은 큰 근육을 키우는 것도 멋스럽겠지만, 그보다 먼저 손으로 ‘쥐는 힘’인 악력을 길러야 한다. 쥐는 힘이 약하면, 당뇨, 암, 치매와 같은 질병이 들어 오고, 자연 사망률도 높아 진다. 손으로 물건을 쥐는 악력이, 온 몸의 근육근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 힘을 나타내는 표지가 된다.

그러기에 악력은 몸 전체의 근력을 나타낼 뿐 아니라, 질병과 건강 상태를 알려 주는, 중요한 생체지표가 된단다. 왜냐하면 바로 이 것이, 내 몸 전체의 근력을 축약해서 알려주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악력이 낮을수록, 심혈관 질환이나 암과 같은 질환 위험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악력과 관련이 있는 질병은 다음과 같다.

먼저, 악력(쥐는 힘)이 약한 사람은, 정상인보다 심혈관계 질환과 암 발병 위험이 높단다. 삼성서울병원 이정권 교수팀이,  고령화 연구 패널조사(2006~2016년)에 참여한, 45세 이상 7639명을 대상으로 악력과 사망률의 상관관계를 분석했다. 이 교수팀은 악력계를 이용해, 양손 악력을 각각 두 번씩 잰 값의 평균값으로, 조사 대상자 각각의 악력을 산출했다. 그 결과, 남녀 모두 악력이 강한 그룹의 사망률이, 악력이 약한 그룹보다 월등히 낮았다고 한다. 악력이 강한 남성의 암 발병률은, 악력이 약한 남성의 59% 수준이었다. 심장 질환 사망률도 악력이 센 남성이, 악력이 약한 남성의 54%에 불과했단다

두번째로, 악력이 약하면, 빈혈 위험이 2배까지 증가된다고 한다. 악력이 강하면 당뇨병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 미국 오클랜드대 연구팀은 2011~2014년, 미국 국가건강검진에 참여한 성인들의 악력과, 건강 상태를 분석했더니, 체중 대비 악력이 낮은 사람은, 당뇨병 위험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신 근력은 당뇨병 예방에 아주 중요한데, 이 것은 우리 몸의 근육은, 몸속 조직 중 포도당을 가장 많이 소모하는 부위이기 때문이다. 근육량이 많으면 포도당을 에너지원으로 많이 사용하고, 결국 혈당을 낮추는 데 도움을 주게 된다.  또한 악력이 좋으면 뇌도 건강하다. 영국과 호주 공동 연구팀은, 악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문제 해결 능력과 기억력, 그리고 추론 능력과 상황에 대한 판단 능력도 훨씬 더 뛰어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악력이 세다는 것은, 근육의 감소가 적어 뇌에 있어서, 서로 다른 영역을 연결하는, 신경 세포의 섬유질 위축이 적기 때문이다. 운동으로 악력을 키우는 방법은 팔굽혀 펴기, 아령 들기, 손을 폈다 오므렸다 하는 등이 있다. 운동 외에 일상 속에서 쉽게 악력을 키우는 방법도 있다. 한 손으로 페트병 뚜껑을 돌려 딸 경우처럼, 손으로 쥐고 하는 모든 일이나 운동은, 손가락과 손바닥 근육 발달에 큰 도움이 된다. 다만 무리해서 이 운동을 할 경우, 손가락을 굽힐 때 사용되는 힘줄인 ‘굴곡건’ 조직에 건초염이 생길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평소 물건을 잘 쥐지 못하고 떨어뜨릴 정도로 악력이 약하다면, 손아귀 힘과 함께, 전신 근육량을 늘리는 운동이 꼭 필요하다.  혹여 당신은 몸을 아껴 밭일을 한다거나, 몸으로 하는 일을 싫어하는가? 이를 아시라! 당신이 비록 눈부시게 발달한, 현대문명 속에 푹 빠져 살고 있어도, 당신의 몸은 5만년전에 나타난, 크로마뇽인의 몸과 하등 진화된 것이 없다는 것을! 산해진미를 먹고, 좋은 약을 복용한다고 건강이 잘 유지 되는 것 아니다.  성경에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한 것은 괜한 빈말이 아니다. 몸은 끊임없이 움직여야, 세포를 비롯, 잠자던 몸의 모든 기능들이 살아서 움직이도록, 그렇게 조물주가 만드신 것이다. 

나는 하루만 일을 안해도 몸에 근질병이 생긴다. 내 정신은 현대인을 따라 사는지 모르겠으나, 내 몸은 여상히 구석기시대의 몸이기 때문이다.   해마다 봄이되면 제비들이 돌아와, 요양원 건물 양지바른 곳에, 아주 정교하게 집을 짓는다. 이처럼 집은 날 짐승들도 짓는다. 그런데 사람이 짓는 집은, 구석기시대의 집과 달리, 현대의 건축양식은 마치 살아 숨쉬는 것처럼, 눈부시게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날짐승들이 짓는 집은, 구석시대의 것이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왜 그럴까? 그 차이는 무엇일까?

동물은 육체뿐이므로 오로지 육체의 본능을 따라 살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족할 줄 아는 마음이다. 

【종그니칼럼】퇴계와 두향의 초월적 사랑

우리는 우리나라의 고유의 문화와 학문에 대해, 부지 불식간에 가벼히 여기는 경향이 없지 않다.  

퇴계(退溪) 이황(李湟),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이다. 중국 宋대의 정호(程顥) 정이(程伊) 혹은, 주희(朱熹)의 성리학을 뛰어 넘는, 당대 제일의 독보적인 학문과 이론을 폈기에, 그는 국내에서보다 해외로 부터, 미승유의 칭송을 받고 있는 분이다. 이처럼 조선의 선비정신을 세웠던 그에게, 학문의 깊은 조예와는 사뭇 다른, 한 여인을 향한 선비의 담백한 로맨스가, 마치 한 편의 서사시가 된, 그의 고결하고 담백한 사랑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퇴계 이황(李滉)은 그가 48歲때에, 경치 좋은 단양(丹陽) 군수(郡守)로 부임 했는데, 그 고을 관기였던 18세의 꽃다운 두향과 만나게 된다. 두향은 첫 눈에 대나무처럼 올 곧은 퇴계를 흠모하게 되고, 퇴계 또한 부인과 아들을 잇따라 잃은 후라, 심신이 무척 외롭고 고달팠 던 때에 대 학자의 고고한 가슴속으로 두향이가 비집고 들어 왔다.

나이 차가 3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 넘을 뿐 아니라, 반상(班常)의 신분이 엄격한 사대부사회에서 일어난 로맨스였다. 두향은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詩와 書畵와 거문고에 능했고, 특히 매화(梅花)를 잘 그렸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인품이 넉넉한 퇴계의 곁에서 거문고를 타며, 퇴계의 얼굴에서 잔잔한 미소가 떠나지 않게 한, 그야말로 매화 꽃같은 여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을 시작한지 "꼭 9개월 만에", 퇴계가 경상도 풍기 군수로, 전근 발령을 받게 된다.천만뜻밖의 이 사건은 두 사람 모두에게 견디기 힘든 충격이었다.

관기(官妓)를 못 데리고 가는 당시의 규율때문에, 퇴계는, 결국 두향을 두고, 홀로 풍기로 떠나야만 했다 시리고 아픈 마음을 속으로 삭이며, 이별의 애닲픔을 견뎌야 했던 선비의 시린맘을 그 뉘라서 알랴! 퇴계가 풍기로 떠나면서 꾸린 짐 속에는, 두향이 준 수석두개와, 매화 화분(花盆) 한 개가 들어 있었다.

떠나기 전날 밤에 마주 앉아 주고 받았던, 한시(漢詩)가 백미다.
"死別己呑聲(사별기탄성) 生別常惻測(생별상측측)
"죽어 이별은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측량할 길 없네." 

그리고 퇴계는 말을 이었다
"내일이면 너와 이별이다. 다시 만날 기약이 없으니 이것이 애처롭구나!"

두향은  말없이 흐느끼며 붓을 들어 詩 한수를 썼다. 
"이별이 너무 서러워 
잔 들고 슬피 눈물 짓는데, 
어느덧 술잔도 눈물 되어 비워지고, 
님마저 가시는 구나! 
꽃 지고 새우는 
봄 날을 어이 할 꺼나."

이날 밤의 이별은 이생에선 다시 못 볼 긴긴 이별로 이어져, 퇴계가 일흔으로 세상을 하직 할 때까지, 두 사람은 이내 한번도 다시 만나지 못했다. 퇴계가 부제학(副提學)
공조판서(工曹判書)에서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승승장구(乘勝長驅)하는데도, 두향은 퇴계에게 누가 될까 염려하여, 끝까지 그리움을 홀로 새겼다. 퇴계와 이별한 후, 두향은 관기(官妓)를 그만두고, 퇴계와 즐겨갔던 남한강 강가에 움막을 짓고, 평생을 홀로 살았다. 동서고금 이런 사랑이 또 있을까! 고귀한 사랑은 바로 인격인 것이다. 이별후 이들은 만나지도 못하고, 서로 서신만 주고 받았다. 

다음은 퇴계가 두향에게 보낸 詩다. 
"黃卷中間對聖賢(황권중간대성현) 
 누렇게 바랜 옛 책속에  성현의 말씀을 대하면서,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 
 빈 방에 홀로  초연히 앉았는데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소식) 
 매화 핀 창가에  봄 소식을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막향요금탄절현) 
그대도 거문고 마주 앉아 연줄이 끊겼다 탄식 말라.

퇴계는, 말년(末年)에 안동(安東)의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조용하게 지냈는데, 한 때는 병세가 위독해서, 자신도 모르게 옷을 입은 채로 설사를 하게 되었다. 그 경황에서도 그는 시중드는 사람에게 "내 몸이 불결하니 두향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며, 매화 화분을 딴 방으로 옮겨달라" 하였다. 그 매화(梅花)가 바로 두향이 준 것 이여서, 두향을 보는 듯이 각별히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명종과 선조가 해마다 퇴계에게 큰 벼슬을 내리면서, 조정으로 나올 것을 간곡히 청했지만, 그는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출세보다는 학문에 진력했던 군자(君子)였다. 그러나 詩 書와 음악과 그리고 한 女人을 사랑했던 로맨티스트였고, 또 달과 山과 江과 梅花를 유달리 사랑했던 풍류객(風流客)이었다. 

기록(記錄)에 의하면 그가 병이 깊어 누워 있던, 1570년 섣달 초 여드렛날, 제자들이 부축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창문으로는 눈부신 겨울 햇살이 쏟아져 들어 왔고, 윗목에는 매화 화분에서 두세 송이 꽃망울이, 퇴계의 눈에, 두향이의 눈과 콧망울처럼 보여, 
“저 매화에 물 주거라!“

이 말을 끝으로 선생은 미소 띤 표정으로 앉아서 이 땅을 하직 했으니, 이때 선생의 나이 70세 였다. 눈을 감은 그날은 맑았는데, 오후 다섯시쯤 갑자기 흰 구름이 집 위로 몰려들더니, 눈이 한 치 남짓 내렸고, 조금 뒤 선생이 숨을 거두시자, 구름은 흩어지고 눈도 그쳤다. 두향이 퇴계에게 주었던 매화는, 그 대를 이어 지금도 안동의 도산서원에 그대로 피고 있다고 한다. 

어느 날 두향이 안동의 퇴계에게 난초를 보냈다. 
단양에서 두향과 함께 
기르던 것임을 알아차린 
퇴계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자신이 평소에 마시던 
우물물을 손수 길어 
두향에게 보냈다. 
이 우물물을 받은 두향은 물을 마시지 못하고, 새벽마다 일어나서
퇴계의 건강을 비는 
정화수(井花水)로 
소중히 다루었다. 

어느 날 이 정화수가
빛깔이 변하는 것을 보고,
퇴계가 돌아가셨다고
느낀 두향은,
소복 차림으로 
단양에서 머나먼 
도산서원 까지 4일간을 걸어서 돌아가신 님을 뵈었다. 

퇴계가 사람이 죽어서야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퇴계 종가(宗家)에서는
두향이 묘(墓)에 벌초하고 그녀의 넋을 기린다. 

퇴계 선생의 파격적인 사랑을, 공식적으로는 
인정할 수 없지만, 
그 애달픈 사랑을 
잊지는 않는 다는 것이, 
사람의 禮인 모양이다.

이처럼 진솔한 사랑은 고금을 초월하여 사랑하는 님에게, 변치않는 숭고한 사랑으로, 이렇게 승화(昇華)시키기에 그 사랑이 어떤 보화보다 귀하다. 내 고향 임실(任實)의 뜻은 정든 님이 머물러 있는 곳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