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최초의 바울서신이 주후 80년 경에 유통된 사본
【김영규】성경의 항존성과 영원성 【김영규】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시간 개념 【김영규】한국교회사와 한국의 현실 【김영규】미래 국가와 사회에서 기독신자의 위치 【김영규】칼빈주의와 한국 지식기반사회의 미래(렘5:24∼29)
최초의 바울서신(P46 성경사본)이 주후 80년 경에 유통된 사본이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총신대신대원 교수 신현우 박사는 “사본학, 왜 필요한 것인가?”라는 에세이에서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왔다”라는 부분으로 다음을 제시했다.
“이렇게 중요한 현대 신약 파피루스학 연구의 한 장을 한국 학자가 장식한 것은 한국인들에게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미국학자 Sturz 이야기를 잠시 접어두고, 한국학자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독일에서 유학하던 시절 파피루스(P) 46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여 일약 세계 사본학계를 발칵 뒤집은 한국인이 바로 김영규 교수이다. 20세기 최고의 사본학자 메쯔거도 그의 사본학 입문서 3판 부록에 김영규 교수의 논문을 다루고 있다(영문판, 265-56 참조).
김영규 교수의 논문은 로마에서 발간되는 세계 정상급 성서학 저널인 <비블리카(Biblica)> 69호에 1988년도에 실렸다. 그의 주장은 P46을 주후 200 년경에 필사된 것으로 믿는 국제학계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김 교수에 의하면, P46은 필체상 1세기 파피루스 필체로 쓰여졌으며, 따라서 주후 1세기(주후 80년경)에 필사된 것이다. 물론 자존심이 센 서양의 신약사본학계가 동양에서 온 한 유학생의 주장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이전처럼 주후 200년경을 고집하기를 그치고 반세기 이상 앞당겨 주후 2세기 초중반 정도로 절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한국학계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지만, 한국에는 신약사본학계가 형성되어있지 않아서 사람을 알아 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한국인들은 TV 동양학 강의로 일약 유명해진 김용옥만 좋아하지 말고 서양학으로 서양학자들의 숨을 죽인 자랑스러운 한국학자들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신현우 교수의 "사본학, 왜 필요한 것인가?>에서
사본학에서 이러한 섹션이 있는 것은 사본학에서 나사렛보다 더 나사렛인 대한민국의 한 학자가 사본학계를 강타시켰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김영규 박사이다. 김영규 박사는 1988년 독일 유학 시절에 “파피루스(P) 46”에 관한 논문을 <비블리카(Biblica)> 69호에 발표했다. 그 논문은 히브리서 사본 P46이 주후 200년경에 필사된 것이라는 당대 정설로 굳혀진 학문적 오류를 지적하고, 주후 80년경 필사본임을 밝힌 것이다. 김 박사의 견해는 아직도 독일이나 세계에서 반박하거나 바꾸지 못한 정설이다.
김영규 박사가 기독교개혁신보에 게재한 "그리스도의 부활 증언과 파피루스 46번"의 그림에서 가져왔음. P46이 AD 70년대 이전에만 발견되는 초서체 남아 있음으로 파피루스 연대를 수정했다.
그리고 김영규 박사의 연구를 김진욱 교수는 "깨어지는 파피루스의 위엄"이라는 에세이를 기독교개혁신보에 게재했다( http://repress.kr/2702/). 김진욱 교수는 P46이 로마서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정경 목록이 로마서-히브리서-고린도전서-고린도후서가 되어, 히브리서 바울 저작성에 대해서 주장했다. 김 박사는 "히브리서의 바울저작성"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김영규 박사는 성경이 계시 문서이며 유일한 구원의 방도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밝히 주장하는 학자이다. 사본학이라는 가장 원천 지식을 다루는 학자들의 실수를 폭로해서 사본학을 근거해서도 성경비평학이 아닌 계시문서로서 사본학을 진행할 수 있도록 확립했다. 성경비평학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
"P46의 초서체"라는 개념은 너무나 생소하다. 김 박사는 P46의 파이(Phi) 문자의 필체(모형)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에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밝혀, 년대를 수정한 것이다. 김 박사의 주장은 독일 및 세계 사본학의 정설을 바꾼 것이다. 1988년에 발생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학계에서 너무나 침묵하고 있다. 신현우 박사가 우리나라에서만(?) 유명한 도올 김용욱만 보지 말고, 세계 학문을 결정하고 전환시킨 우리의 연구자도 알아봐주라고 할 정도이다.
김 박사는 기존의 p46을 근거로 확립한 학문을 수정 및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도 오류 근거로 확립한 성경비평학이 많고, 그것을 답습하는 학도들이 많은 것은 개탄스러운 것이다.
주후 1세기 후반의 가장 오래된 바울 서신들의 책 파피루스(P46 = P. Beatty II + P. Mich. 222)는 첨가된 초서체의 필체나 내적인 언어 상 증거 들이 그 연대에 있어서 결정적이어서 오히려 날짜가 없는 다른 모든 문헌 파 피루스들의 필체 감정에 있어서기준이 될 정도로 명확한 시대적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기독교 안에 영지주의 이단들이 영향을 끼치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객관적인 성경들 이외에 다른 곳에서 기독교의 기원과 그 교 리에 대해서 찾으려고 하는 행위 자체는 너무 객관성이 없다. 19세기 후기에서부터 그런 파피루스들이 발견된 이래 계몽시대 이후 교회 안 에 있어 왔던 기독교 문헌들에 대한 비판적 작업들과 책들은 거의 폐기처분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런 정신을 가지고 기독교에 대한 적의적 태도를 가진것 자체가 무지한 자들의 다수를 내세워 거짓을 참으로 바꾸어 비난하는 폭력적 태도에 가깝다.<김영규, "세속의 도전과 성경의 권위"에서>
김영규 박사는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등으로 물리학계에서도 탁월한 학문 능력을 갖고 있다.
【김영규】성경의 항존성과 영원성
“계시 자체가 모든 기적들 중 가장 대표적 기적이며 기적의 전부”
자연질서와 안에서 밖을 보는 공간이 있는 모든 생명체에 있어서 근본적 오류들은 의식과 행동에 방향이 있다는 것과, 그 방향 자체가 외부 정보들을 자신에게로 모으는 판명성의 방향에 있다고 자주 지적한 바 있다.
마지막 빈 공간들을 가득 채운 큰 에너지를 가진 원소들이 한 세포라는 질서들을 이루든, 그런 세포들이 큰 질서의 정보들을 이미 가지고 자라서 독립적인 생명체가 되든, 그 생명체의 존속기간 동안 외부 정보들을 모으는 중심이 있고 그 정반대로 행동의 방향이 있는 그런 생명체의 근본적 틀 자체가 생명체의 기본 인자들 곧 가장 근본적인 인간 인자들로 있다는 것은 창조자 하나님이나 창조된 피조물 자체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큰 장애가 되고 있다.
그런 비밀이 풀리지 않는 이상 우리의 지각적 직관들이나 의식생활 그리고 언어생활 및 사고, 그런 행위들에 의해서 생산되는 사회 문화적 생산물들은 모두 오류 덩어리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기본 틀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모르고서 자연의 신비나 생명의 모든 현장들의 신비는 기본적으로 풀리지 않는다.
우리가 그런 비약을 물리학과 생물학의 경계선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지구 밖에 어디에서도 지금 현재까지 다른 예를 발견하지 못하여 상대적으로 그런 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역사와 우주의 역사가 진행되어 왔지만 그런 기본 틀을 벗어난 생명체의 아이디어는 아직도 증명되지 못하고 점점 더 인간이 그런 아이디어의 마지막 꽃처럼 증명되고 있을 뿐이다. 창조자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도 그런 틀의 진리성은 뒤집어지지 않고 창조자마저도 그런 틀을 가진 것처럼 증명되고 있을 뿐이다.
정보라는 개념을 시간이나 공간으로부터 독립시켜보려고 해도 그런 기본 인자들이 우리의 의식이나 표상이나 논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이상 그들 사이를 분리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우리에게 아직 없다.
수학적 개념에는 그런 오류가 없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극히 현명한 진짜 바보이다.
실로 잠재 에너지가 가장 크면서 가장 작은 정보 입자로서 지금 물질세계의 빛보다 무한히 빠른 절대 운동이 어떤 차원을 열면서 한 입자로 수축과 동시에 그런 절대운동을 시작하는 어떤 정보입자를 우리가 상상한다고 해도,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정보입자의 개념의 경우에도 인간인자로서 그런 근본적 오류들을 피할 길은 없다.
그러나 그런 오류들이 없는 무(無)는 의식이 없는 잠에서만 경험할 수 있듯이 아담이나 아브라함 등과 같은 인간들이 있기 전에도 ‘우리’(창 1:26)로 존재하는 자이시고 빛과 같은 첫 정보입자가 있기 전에도 존재하시며 그 첫 정보입자의 운동 이전에 운동하는 자로 계신 ‘하나님의 영’(창 1:2)이시며, 피조물이나 인간이 표상할 수 있는 어떤 표상으로도 서술할 수 없는 ‘여호와’이시며(출 3:14), 피조물이 듣도록 하신 귀를 지으시기 전에 들을 수 있는 자로 계시고, 인간이 말할 수 있도록 하신 입을 지으시기 전에 말할 수 있는 자로 계시며, 빛과 같은 정보 입자가 없이도 인간에게 눈이나 뇌 및 영혼을 지으시기 전에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아시며 가르치는 자로 계신다(출 4: 10-15)는 것이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의 경우, 그런 무는 죽은 이후에는 경험할 수 없다고 한다.
이 칼럼의 글에서 여러 번 강조하였지만, 지각 자체는 물질 세계가 아니라 아마 딴 세계일 수 있다고 했다. 지각 자체는 우리 주변 세계의 정보들이 우리의 감각기관들과 뇌를 통하여 다른 세계로 펼쳐지는 다른 세계로의 어떤 전환 형태일 수 있고 기억의 한 형태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전환 형태의 정보 자체의 속도가 만약 빛보다 빠르다는 사실을 증명만 할 수 있다면,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 증명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도 창조자 하나님이 곁에 보고 계시고 거기에 편재하실 수 있으며 거기에서도 명령에 의한 창조자로 계시면서도 ‘모세야, 모세야’라고 부르신 대로 거시정보의 전달방식인데도 우리 이름을 부르시는 자(출 3:4; 33:12)로 계실 수 있기 때문이다. ‘계시’ 자체가 모든 기적들 중 가장 대표적 기적이요 기적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앉아 있고 잠자며 서 있는 것 자체가 부분에 있어서나 전체에 있어서나 어디에서나 명령에 의해서 무로부터 존재하도록 하시는 현장이요, 은혜와 자비로 충만한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나누는 것 자체가 무례한 짓이요 은혜를 모르는 불충한 짓이며 하나님에 대한 극히 무지한 소치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일이나 피조물의 일이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곳에서는 오류라는 말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성경의 항존성과 영원성 및 그 권위는 그런 하나님의 살아 계시고 영원한 품성들을 가진 자가 그 기초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칭하는 것(히 1:1-2)이 가장 바르다.
【김영규】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시간 개념
“시간의 원형은 하나님께서 그 시간을 공급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해야”
빛의 속도는 등속을 넘어 가속을 향하여 달릴 때, 흔히 물질의 형태들이 변하고 시간도 변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빛의 등속은 아직 가속이 아니다. 블랙홀들은 중력의 힘이 이미 충분히 커서 그 중심을 향하여 등속에 있어서 빛의 속도에 도달한 세계를 표상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불랙홀이 가속으로 빛의 속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불랙홀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불랙홀 중에서 중력의 힘이 빛의 속도로 가속하는 불랙홀도 가능한데, 그런 불랙홀들의 경우에는 중력장의 반경이 무한대로 가능하더라도 빛의 속도 크기의 반 이하인 반경인 경우는 불가능하다.
지금의 우주가 슈퍼클러스터 별로 마지막 차가운 세계로 가속화된 세계로 여긴다면, 아직 우주의 끝의 정보가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중력의 장의 반경이 빛의 속도 크기의 반경 이하의 불랙홀이 인간에 의해서 관찰되는 일은 불가능하고, 아마 최초 우주에서만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해도 빛의 속도 크기의 반경보다 큰 무한대한 크기의 중력장의 반경을 가진 세계가 가능하기 때문에 우주 팽창에 있어서 등속이나 가속에 대한 가설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예를 들어 우리의 은하계가 우주에 있어서 아주 오래된 별로서 그 은하계의 중력장, 태양의 중력장, 지구의 중력장, 달의 중력장 등 다양한 중력의 장들이 겹치면서 어떤 질서로 있을 때, 각 중력장의 중력 상수들에 어떤 정보의 세계가 질서로 숨어 있느냐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가속과 힘의 개념을 없애버리면서 그들 사이의 관계로 이해하여 모두 에너지 개념으로 정리될 때, 그런 상관관계는 질서로서 정보의 세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중력의 장들이든 정보의 세계가 선행하는지, 또는 가속의 세계가 선행하는지도 알 수 없다.
우리가 생산하거나 관찰할 수 있는 힘의 세계는 대부분 질서로서 정보가 없는 힘의 세계이고 단지 힘의 직선 운동을 위상기하학적으로 외부적 질서의 운동으로 변경하는 방식으로 마치 거기에 질서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이용할 뿐이며 그런 힘의 개념은 ‘자연’의 가속이나 힘의 본질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가정할 수 있다.
자연의 힘이나 가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정식이 정보로서 존재하는 그런 힘이나 가속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공을 던지는 가속에는 정보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인간에 의해서 재생하는 자연과 원 ‘자연’ 자체는 다른 것이라고 말해야 될 것이다.
우리가 흔히 가정하는 타임머신은 잘못된 가설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등속이든 가속이든 빛의 절대속도보다 더 큰 절대속도가 있다고 전혀 가설하지 않고 추론된 아이디어이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영혼이 없거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만 해도 그런 시간여행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부활을 마치 양자들의 공간 이동으로 간단하게 생각하는 것도 자연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인간이 생성이 되고 자라며 그 생명이 유지되는데 있어서 있다가 사라지는 수많은 유도 인자들의 신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기에 그런 허무한 상상을 하게 된다. 물론 문화에 사실을 강조하면 돈도 되지 못하고 문화도 되지 못한다. 그러나 삶에 진실을 제거하면 너무 허무한 삶으로 전락된다.
자연은 그 자체로서 아름다움이나 신비라는 무게가 있는 세계이다. 도덕이나 엄밀한 과학도 그런 진실이나 자연에 약간 가까울 뿐이다. 여하튼 중력장의 반경이 빛의 속도 크기의 반 보다 큰 반경을 가지면서 무한대로 큰 반경을 가진 불랙홀들도 수 없이 가정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 은하계의 중심에 있는 불랙홀에는 ‘자연’이라는 어떤 질서가 있다는 점에서 고유하고 독특한 ‘본성적’ 블랙홀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즉 모든 자연적 빈 공간들도 시간으로 풀어야 할 ‘나머지’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시간이란 것은 무엇인가? 반복하여 말하지만, 일상적인 시계에서 표상이 되어 있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주 역사의 방향을 전체적으로 운동이라고 본다면, 그 운동에 비해 영원히 정지되어 있는 부동 자체가 가상적 시간의 원형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주의 전체 역사가 거꾸로 가지 못하는 전체 운동과 정반대로 정지되어져 있는 것이 시간이라고 한다면, 그런 시간은 데카르트 좌표 식으로 기존 차원에 직각으로 있는 새로운 차원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주의 모든 운동 방향이 전체적으로 비가역적인 성격으로 남아 있는지가 여전히 증명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의 숨어있는 차원들이 얼마나 있는지도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미 칼럼의 글에서 소개했듯이 물질의 근원적 입자들의 경우에도 그런 가역성이나 차원들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의 음전자 혹은 더 높은 에너지대에 존재하는 양전자, 기타 힘의 입자들이 광자들로 몰락할 때 그 광자들이 빛의 속도로 몰락하는 방향에 마치 시간 자체가 숨어 있다가 풀어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으며 그 전에 스핀을 가지고 존재하는 입자의 생성과 정 반대 방향에 가상적으로 시간이 있다고 해야 된다.
그런데 우주의 현 중력의 법칙에 따라 등속으로든 가속으로든 빛의 속도로 빛의 속도 반경보다 더 작게 수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창조의 원리 외에는 그런 입자들의 생성을 설명할 수 없는 이상, 시간의 원형은 창조자에게 있다고 해야 된다. 그렇다면 피조물의 시간여행은 더욱 더 불가능한 것이다.
화산이 폭발하는 것이나 전자(電子)가 부서져서 빛을 내는 것이나 자연의 기존 질서가 몰락 할 때마다 혼돈으로 관찰이 되는 것 자체가 이미 자연 자체가 그 원형인 정보의 세계로 갈 수 없음을 증명하는 좋은 증거로 남아 있다.
더 높은 에너지 대의 힉스 입자들을 발견하였다고 해서 잃어버린 힉스의 장에 있는 ‘자연적 정보’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좀 더 지속적인 핵융합 발전기를 개발하기 위해서도 이 차이를 간과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쉬울 것이다.
창조 세계 속에는 그것이 거꾸로 가지 못한다는 면에서 혼돈만이 발견이 되는 것이다. 반면 하나님께서 항상 주시는 자로 계시기 때문에 항상 질서가 발견이 되는 것이다.
【김영규】 한국교회사와 한국의 현실
“평생 벌콥의 조직신학만을 가르친 것은 고 신복윤 교수의 업적”
총신과 합신의 교수를 역임하셨던 故신복윤 교수님이 향년 91세(1926년 탄생)로 지난 2016 1월 14일에 소천하셨다.
익히 알고 있듯이 해방 후 한국 장로교 역사는 신사참배 문제로 옥중에서 풀러 나온 분들과 그렇지 않는 분들 사이에 공적으로 혹은 깊게 회개하지 않는 문제로 얼룩진 역사를 남겼다.
그러나 정작 한국교회에서 발생한 얼룩진 역사는 미국에 있는 프린스톤 장로교 신학교가 1930년대 자유주의 신학 문제로 빛을 잃어 가고 있는 그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한국 유학생들이 선택한 신학적 입장들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6.25 사변과 함께 강제 월북되어 인민군 협력 거부로 소천한 남궁혁 교수와, 북한에 남아 있다가 순교한 이성휘 교수, 그리고 평양신학교 한국인 교수 중 한 사람이었던 박형룡 교수가 프린스톤 장로교 신학교 출신이었다. 뿐만 아니라 평양신학교와 달리 선교사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설립되었다고 자랑하는 조선신학교의 역사와 함께 해방 후 계속 그 조선신학교 교수들로 활동하였던 송창근 교수와 김재준 교수 등도 같은 프린스톤 장로교 신학교 출신이다.
박윤선 교수께서 그 프린스톤 장로교 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 입장들을 피해 메이쳔 교수 밑에서 수학하였던 상징적인 유학생활과 달리 이들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 목사 등은 프린스톤 장로교 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들을 여과 없이 수학하여 받아들인 대표적인 유학생들이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장로교신학교 재건 운동의 열매로 총회의 장로교 신학교 직영 결의에 따라 1948년 6월에 총회신학교가 51인 동지회를 중심으로 개교하였을 때, 고 신복윤 교수께서도 그 직영 장로교신학교의 임시교장이었던 박형룡 교수 밑으로 옮겨 수학하였다.
이것은 고 신복윤 교수님으로부터 직접 확인한 내용으로 당시 박형룡 교수께서 교수하실 때 이미 벌콥의 조식신학을 번역한 프린트물을 가지고 가르침을 받았다고 기억하셨다. 그런 연장선에서 신복윤 교수님도 평생 벌콥의 조직신학만을 고집하여 가르치셨다는 사실은 말할 수 없는 그의 공헌이다.
왜냐하면 그 전 조선신학교 때 1947년 4월 18일 조선신학교 51명의 신학생(51인 동지회) 진정서 사건 때 참여한 인물들 중에 정규오 목사, 김준곤 박사, 조동진 목사, 차남진 박사 등 많은 유력한 인사들이 포함되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박형룡 박사의 신학적 근본정신을 살려내 유지하신 분은 바로 신복윤 교수라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장로교 교회 안에 자유주의 신학이 깊숙이 들어 왔었다는 증거는 조선신학교 신학생들(51인 동지회)의 진정서 사건을 통해서 공적으로 정확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 진정서를 통해 당시 조선신학교의 면학 분위기도 읽을 수 있다.
당시 학생들 중에는 노회 추천 없이 입학한 자들도 많아서 육체부활이나 재림, 심판, 삼위일체, 예수 그리스도 처녀 탄생, 삼위일체를 믿지 않고 주일성수도 하지 않는 재학생들도 있었고 신학생 중에는 흡연자,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을 도적하여 팔아먹는 자, 다른 교파 신자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도 있었다는 문제점들도 확인이 되고 있다.
이 ‘정통을 사랑하는 학생 일동’의 그 진정서에는 ‘개혁교회’로서 자신들의 신앙 정체성과 “우리가 유아로부터 믿어오던 신앙과 성경관의 근본적으로 뒤집어지는 것”에 대한 저항적 자세가 분명히 표현이 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조선신학교의 처음 설립 정신으로서 신앙은 보수적이지만 신학은 자유라는 교육이념이 신학교육의 현장에서 구현되면서 한국 장로교회 안에 ‘근대주의 신학사상, 성경의 고등비평, 자유주의 신학과 합리주의 신학’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는 확실한 증거를 그 진정서 내용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그 당시 김재준 교수의 가르침 안에는 최초로 독일의 근대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근본 문제인 마르시온 신학의 핵심 내용에 따라 구약을 기독교 성경이 아니라 유대교의 성경으로 전제하고 모세 오경에 대해서 J.E.D.P 문서들을 소개하거나 이사야에 대해서 다른 문서들을 소개하면서 문서들 사이에 법적, 사상적 혹은 시대적 차이들에 의해서 모순들과 오류들이 생겼을 것으로 가정해 보는 성경에 대한 문학적 역사적 연구와 과학적 철학적 비판을 해야 한다는 연구방법들과 그 결과들이 소개되었다는 점이 그 문제의 핵심이다.
따라서 성경 각 권들의 시대성, 역사성, 저자 등이 부정 되고 성경 각 권이 글로서 완성되기 전까지 시대적 변천과 발전 및 외부적 영향들을 연구하는 소위 세계 곳곳에서 유행하는 학문적 방법들과 그 결과물들이 고스란히 그대로 소개된 결과가 바로 “성경은 교리의 교과서가 아니다. 신구약 전체를 뒤지면서 삼위일체니 교리니를 찾아 내고자함은 어리석음이니 하나님은 성경에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태도로 이어졌고 그 결과 “예정론에 대하여 의미가 없다. 결국 칼빈의 예정론은 숙명론에 돌아간다”고 가르치게 되었다.
또한 마가복음 선행설, 복음서들의 원 자료(로기아)와 타 자료 사용설, 쉴라이어막허 인격 영감설 등과 같은 송창근 교수의 가르침은 당시 한국 선교사들이 위험한 것으로 배제하기를 원했던 미국이나 기타 선교사 파송 교회들 안에 이미 급격히 퍼지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적 방법론들과 함께 세계 학문들과 교류한다는 명목 아래 한국장로교회 안에 심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탐구된 역사적 예수는 다른 종교들의 기원자들과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져 버린 결과 기독교가 없어져 버린 것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사소한 일들이 아닌 그런 하나님과 성경을 모독하는 성직자들의 불경건한 행위들로 인하여 민족이 해방되었어도 그 해방 이전의 치욕보다 더 뼈아픈 전쟁과 그 분단의 슬픔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늘날까지 형벌로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경에 따르면, 그런 형벌에는 냉전 시대의 정치 역학적 국제 환경들의 영향들보다 이런 참된 교회의 진리에 대한 책임에 있어서 무의식적인 행위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반영이 더 무서운 원인으로 있을 수 있음을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를 탓하기 전에 진리를 찾고 진실을 지켜내며 불행을 이기는 일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들도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그런 마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신다는 사실을 더 믿고 싶을 뿐이다.
【김영규】미래 국가와 사회에서 기독신자의 위치
“자연이나 본성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겸손한 태도 가져야”
미래의 국가나 사회는 지식기반 국가나 사회로 가야 한다는 말은 어느 정도 맞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 지식기반 사회가 없었던 때는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지식기반 국가나 사회가 되기 위해서 어떤 지식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야 할 것인지가 더 중요할 것이다.
발전해야 할 미래의 집단 지식
즉 한 나라가 미래 지속 가능한 지식에 기반을 둔 국가나 사회로 길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합리적 지식이나 전통적 혹은 관습적 지식에 의해서 발전되어 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과거보다 지금 확고히 검증된 기초과학 지식이나 인류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진보된 기술들에 기초한 최고의 합리적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열린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로부터 생산된 지식들을 국가 구성 주체들이 빨리 공유해 가는 방향으로 국가나 사회의 시스템을 확고히 하는 일이 더 절실하다고 할 것이다.
통상적으로 전체 경제규모가 개인의 경제규모를 좌우하겠지만, 개인의 경제규모가 크고 삶의 질이 높다고 해서 행복지수도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행복지수의 질에 있어서 상대적인 성격을 고려할 때, 그 구성원들에게 그런 최고의 합리적 지식이란 인간의 고유한 특성에 따라 개인의 행복에 어느 정도 크고 작게 기여하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를 위해서 장기간 국가는 개인들의 성장과 함께 저출산과 장수시대로 가는 사회에서도 통하는 인간 행복지수를 높여주는 특별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런 프로그램들은 인류의 과거 역사를 통해서나 현재 진보된 어떤 국가의 예들에 의해서도 찾을 수 없으며 앞서 시도해 본 적이 없는 극히 비판적 프로그램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프로그램에 있어서 미래 생산 활동에 있어서 자동화 수준과 경제행위자들 수의 적정성에 대한 고려에 못지 않게 개인들의 미래 성장에 대한 맞춤형 진단 능력과 그 진단에 따른 개인별 해법들 및 전체 사회의 그런 지식들의 넓은 공유성을 위한 실천 방안들이 현실적으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전체 사회나 학교 제도가 한 개인의 맞춤형 진단을 수행할 때 무의식이나 의식과 같은 근대적 개념들에 의해서 진단하였다고 한다면, 최근 전까지도 1초의 반인 500 밀리초 내에 무의식과 의식 세계에 대해서 모두 설명해내야 하는 과제로부터 이제는 뇌세포 내에서 분자들이나 원자 구조들 내부의 젭토 초나 아토 초의 변화들까지 읽어내어 그 합리적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시대에 접어든 시점에 와서 인간 발전에 대한 예측된 프로그램들을 찾아내고 그 프로그램들을 가능한 한 빨리 넓게 적용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기초과학 지식이나 첨단 과학기술이 갑자기 나노기술로부터 피코 기술로 거치지 않고 바로 펨토 시대나 아토 시대로 바로 넘어가 버린 상태에서 더 뒤로 물러설 수 없는 과학기술 시대로 넘어와 버렸기 때문에, 산업과 교육도 거기에 맞출 수밖에 없다.
후진적 효소나 촉매 기술을 가지고 먹고사는 길이 좁아 졌고 산업구조의 무게감이 첨단 광학기술 산업으로 급히 옮아가야 겨우 세계 경쟁에 있어서 약간 앞설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나 어른들은 그런 최고의 지식을 습득하는 시대에 맞게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 가능한 한 바로 적용해 미래 인재를 길러내야 할 당위성을 안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자연’(nature) 혹은 ‘본성’은 젭토 초 기술까지 요구하고 있다. 느린 문화의 상징인 법치사회는 조금씩 축소되어야 하고 어설픈 과학적 지식들과 기술들도 물러나야 하며 모든 인문과학이 기반을 두고 있는 언어생활 일반이나 창작 활동 및 감성들의 표출 활동 일반에도 그런 맞춤형 최고의 지식들이 빨리 적용이 되어야 미래사회로 가는 안전한 자리가 확보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새로운 지식을 팔고 사는 시대로 빨리 발전하는 미래 세계상 앞에 인류 사회가 걸어온 과거의 세계상에 묶여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빠른 지식 정보 사회의 장점을 살려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의사 결정시간을 빨리 흡수하는 제도들과 정치 사회 체계를 구축하여 집단적으로 구성원들 모두에게 지속 가능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더 깊게 성찰하게 하고, 거기에서 발견되고 고증된 진리들을 지구상의 어떤 사회보다 빨리 적용할 필요가 있는 시대로 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급한 대안이 될지 모른다.
인간 인자들은 긴 역사 자체가 증명하듯이 아주 느린 인자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따라서 느린 문화, 느린 생활은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다. 또한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대 시대에 와서 더욱 더 공직자들이나 책임을 맡은 자들은 고도의 민주사회의 이념이나 청지기 사상에도 불구하고 결코 명예직이 아니라는 것도 잘 증명이 되고 있다.
크고 작은 다수들을 대표하는 자들이 특별한 능력을 갖지 않으면 그 명예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 이제 자연스러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능력 중에서 자연이나 본성 앞에서 항상 자신이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놀라운 합리성을 넘어 급하게 필요로 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덕목은 그 자연이나 어떤 본성을 인간이 새롭게 창조하거나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자연이나 본성을 주의하고 보호하되 가능한 멀리서 바라보는 연습에 열중하면서 그런 것에 대한 최고의 지식들이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급하게 함부로 그 자연이나 본성에 훼손을 가해서는 아니 된다는 겸손하고 소박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인간은 본성을 창조할 수 없어
물론 그런 태도를 넘어 기독교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놀라운 답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자랑일 것이다. 그런 답들을 가진 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만큼 국가나 사회 앞에서 그 책임이 무겁다고 해야 할 것이다.
【김영규】칼빈주의와 한국 지식기반사회의 미래
들어가는 말
A. Kuyper나 H. Bavinck나 모두 영혼과 육체라는 이원론을 믿었을 때, 당연히 유물론주의나 진화론에 대한 반박의 근거를 위해서 일반은총이나 일반학문론에 대해서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두 분은 일찍이 모든 은총이 초자연적 성격이 있다는 점에서도 동의하였고 칼빈에 따라 일반학문의 뒤에도 선천적으로 종교적 배경을 인정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주의 학문론 일반을 세워 보기 위해서 노력하였던 헤르만 도예베르트가 칼빈의 정신을 기본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다만 실천적 의미에서 칼빈주의의 영향에 대해서 전혀 다른 이해를 가진 막스 베버의 경우의 예를 들고자 한다.
1.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의 뿌리와 칼빈주의
막스베버가 자본주의 정신과 칼빈주의에 나타난 합리적 금욕주의와의 관계에 대해서 논하였을 때, 현대문화의 분명한 요소들과의 관계해서 금욕적 기독교의 문화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석하는데 그 중심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금욕적 합리주의가 사회정치적 윤리의 내용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종교집단으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사회집단들의 조직방식과 기능들에 대해서 어떤 결정적인 의미가 있는지를 가리키는 일은 과제로 남아 있었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그 당시 미국의 경우에도 부의 추구에는 윤리적 종교적 의미가 없을뿐더러 기계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는 그런 종교적 금욕의 정신으로부터 더 이상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스포츠의 성격까지 있음을 지적하였다. 거슬러 그런 종교적 요소의 소멸은 프랭클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막스 베버가 금욕적 합리주의가 자본주의 정신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과 초기 기반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입장이었다.
그에 의하면, "퓨리탄주의는 국고적 독점적 형식의 유기적 사회체제 즉 기독교적 사회주의의 윤리적 바탕 아래 독점업자들과의 국가와 교회의 동맹에 반대하여 자신의 창의적 능력과 발원에 의한 합리적이고 법적인 영리의 개인주의적 추구를 대립시켰다. 영국에서 그런 국가적으로 특권을 가진 독점산업들은 사라져 버렸지만, 그런 합리적이고 법적인 영리의 개인주의적 추구가 관료적 권력 들에 반대하여 발생하는 산업들의 구축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하였다.
비록 도덕적이지 아닐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더 생산적일 수 있다고 하는 현실에 대한 Peter F. Drucker의 입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정신의 태동기에 공리주의로 물들어 있는 도덕적 교훈들이 어떤 틀이 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관찰하였던 것이다. 정직은 신용을 가져오기 때문에 유익하며 시간을 지키는 것, 근면 및 검소는 돈이 되기 때문에 유익하다는 생각은 부정할 수 없는 오래동안 자본주의 정신에 숨어 있는 틀임을 이끌어 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자본주의 정신으로 충만된 벤자민 프랭클린의 기업정신의 교훈들을 인용하였던 것이다.
1) 시간이 돈임을 생각하라.
2) 신용이 돈임을 생각하라.
3) 돈이 생산능력을 가지며 결실할 수 있는 본성을 가졌다고 생각하라.
4) 지불이 좋은 사람은 만인의 돈주머니의 주인임을 명심하라.
5) 근면과 검소의 덕 이외에 모든 거래들에 있어서 시간을 지키는 것과 공정하다는 것보다 큰 유익이 되는 것은 없다.
6) 한 사람의 신용에 영향을 주는 가장 사소한 행동이라도 조심해야 한다.
7) 이렇게 함으로 너가 빚을 지고 있는 자를 기억하고 있고 너는 조심성이 있고 존경스러운 사람으로 보이도록 하며 그것이 너의 신용을 증가시킨다.
8) 너가 치밀하고 존경스러운 사람으로 알려진다면, 1년에 6파운드가 100파운드 효용을 갖는다.
이런 기업정신들에 숨어 있는 윤리적 요소들이 그렇게 공리주의적인 것으로 변모하기 전에, 그런 요소들은 순수히 윤리적 차원에서 자본주의 뿌리가 형성되는 과정에서는 자본주의적 합리적 경영과 기업상을 굳건히 지키게 하는 틀로서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비록 자본주의 질서 이전에 이미 중국이나 인디아, 바벨론 등 고대나 중세에도 자본주의 정신이 있었어도, 그런 기업정신이 조건으로 하는 독특한 사회윤리는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막스 베버는 그 당시 퓨리탄들에 대해서 신학적 해석을 하지 않고 사회 경제적 해석을 했지만, 그들에 대한 상당한 신학적 이해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막스 베버의 주장의 특별한 점은 근대 자본주의 문화나 진보정신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세속적 향략주의나 계몽주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그 깊은 내면적 관계에 있어 비세속주의와 금욕주의로부터 나왔다고 분석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퀘이커와 메노나이트파들 중에 부요한 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영리적 안목의 고도한 발달은 생활의 종교적 규제와 관계하고, 경건한 신자들의 경우 그들의 강하게 발전된 영리적 감각은 강렬한 신앙과 관계한다고 분석하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산계급적 영리생활을 하였던 자들이 많이 따랐던 칼빈주의가 자본주의 문화에 크게 영향을 끼친 점들도 그 종교적 가르침과 반대되는 유물주의나 반금욕적 향략주의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종교적인 길에서 찾아야 된다고 보았다.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관계를 연구할 때, 당연히 인정하였던 사실은 칼빈주의 운동의 창설자나 대표자가 자본주의 정신을 일깨우는 것을 전 생애의 목적으로 삼았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세속적 재화에 긍정적 윤리적 가치를 부여하였던 자들도 없었고, 어느 누구도 윤리적 문화사회의 개척자이거나 인도주의적 사회개혁운동이나 문화운동이나 문화이상의 대표자들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들의 순수한 종교적 동기에 제한된 것들이 후대에 자본주의 정신이나 문화를 결과로 낳을 줄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들도 바라지 않은 것들이었다고 막스 베버는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신앙과 종교적 삶의 실천에 의해서 창조된, 소위 생의 여정에 방향을 제시하고 어떤 개인을 그 안에 확고히 세웠던 그 심리적 동인들(psychologisch -en Antriebe)이 자본주의 문화와 정신에 분명히 관계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그런 심리적 동인을 야기한 칼빈주의의 교리와 실천적 종교적 관심들과의 관계가 무엇이었는가를 막스 베버는 다룰 수밖에 없었다. 물론 좀 더 직접적으로 자본주의 정신과 관련된 칼빈주의자들의 시간관, 직업관, 노동관, 일상적인 생활태도와 내면적 태도에 대해서도 다루었지만, 종교적 가치와 관계가 없기 때문에, 퓨리탄들이 적대시하였고 회의적인 문화제도에 대해서 긍정적인 영향을 준 요소들도 분석하고 있다.
역사적 칼빈주의 5대교리에 따라 그 신학적 영향과 생활태도에 대해서 다루지는 안했어도, 칼빈주의의 중심교리들을 가능한 객관적으로 다루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그에 의하면 칼빈주의의 예정론에 대해서 그 예정론은 반드시 그 결과로서 구원의 서정이 따라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예정설에 윤리적 기초를 둠으로써 이 세상 안에 있는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예정된 신자들의 영적 귀족주의가 생겨났다고 평가하였다. 세상 안에서 이런 영적 귀족주의는 이 세상 밖에서의 수도승의 영적 귀족주의와 다른 점이라고 하였다.
칼빈 뿐만 아니라 모든 개혁주의자들이 예정론은 숙명론이 아니라고 신론에 근거하여 분명히 밝혀 논증했음에도 막스 베버는 예정론을 결국 운명론과 같은 것처럼 이해하였다. 물론 예정의 원인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 외에 최고의 원인은 없다는 입장을 막스 베버가 어느 정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스스로 계시하시기 전에 인간에게 신비로 남아 있다는 입장에 대해서도 그리고 예정의 불가항력적 성격에 대해서도 그가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정의 내용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방식이 예정론에 포함되어 있고 그리스도도 택자를 위해서만 죽었다고 해서, 하나님도 그를 도울 수 없다고 하는 해석은 운명론에 가까운 사상으로 예정론을 해석하는 것이다. 만물의 세세한 것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기뻐하신 뜻에 최고의 원인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론과 다른 것이다.
2. 지식기반사회의 도래와 한국에서의 적응정도 및 문제점
Peter F. Drucker는 본인이 일찍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탈자본주의 사회로 이동을 예측하였다고 말한다. 즉 모든 육체적 작업에 지식을 적용함으로 분석하고 재조직하는 방식에 의한 성공이다. 작업 전에 청사진과 설계도면을 그리고 과거 도제제도처럼 작업에 대한 비밀을 지키기보다는 작업에 대해서 비회원과 의논하며 훈련이나 작업연구에 대해서 기록으로 남기는 그런 일이 처음 거기에 도입된 것이었다.
테일러는 그 당시 자본가들로부터 사회주의자라는 등 격렬하게 공박을 당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지식의 의미의 첫 번째 국면인 100년동안 지식이 작업도구와 제조공정 그리고 제품에 적용하였던 시대로부터, 새로운 의미의 지식이 작업 자체에 적용될 때에도 거친 반발이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런 단계를 그가 지식이 지식 자체에 적용되는 단계라고 하여 경영혁명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식경제를 넘어 탈 자본주의 사회인 지식사회로 가는 단계로 본 것이다. 거기에는 지식은 전통적 생산요소들인 자본이나 노동과 함께 이제 유일하게 의미있는 근본적인 생산수단이 되고 있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처럼 전통적인 제조업 직업을 창조하는 일은 단기적인 방편에 불과하며 미래의 장기적인 안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단계를 걸쳐 지식은 이제 하나의 자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자원 그 자체가 되었다고 한다. 비록 토지나 노동, 자본 없이는 지식이 스스로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지만, 지식은 한 자원이 아니라 자원 그 자체로 이제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역학을 창조한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필수적인 자원으로서 지식은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고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경제와 사회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자본이나 노동은 그 중심자리를 지식에게 내놓는 형편이 되었다. 지식은 모든 작업의 중심생산수단이 되어 왔고,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기반사회의 경우, 지식은 그 자체로 메말라 있어(sterile) 아무 것도 만들지 못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러 지식이 한꺼번에 결합되어 하나의 지식으로 융합될 때, 생산적이다. 지식이 지식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만 생산적이기 때문에, 거기에 반드시 조직(organization)이 있어야 하고, 그 기능 속에 조직의 과업이 있고 거기에 그 존재의 근거와 기능이 있다고 하였다. 거기에서의 조직원은 조직 속에서만 자신의 가치를 느끼며 어느 조직원도 관여할 수 없는 오직 자신만이 갖는 사명과 책임이 있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현대조직은 동료(colleages)조직이요 동반자(associates) 조직이며 그 지식인들 사이에 높다거나 낮다거나 하는 서열이 없다는 것이다. 그 조직에 결정이 내리는 사람들이 있고 조직의 사명, 조직의 이념, 조직의 성과 그리고 조직의 결과에 대해서 책임이 지는 사람들도 있으며 조직의 사명에 관심을 갖는 전략을 수립하며 집행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결과를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그들이 조직에 있어서 명령하는 자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다만 방향만을 제시할 뿐이라고 한 것이다. 그들의 자리는 공동과업에 대한 그들의 공헌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근원적으로 교회 안에서 개혁주의 교회직분자들이 수종하는 자로 기능하는 조직과 비슷하게 현대사회 안에서 저절로 발전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거기에 꼭 따라야 할 내용이 있다면, 늘 변하는 관리방식(management of change)과 탈중앙화(decentralized)라고 하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할 능력을 가져야 하고 끊임없이 개발해야 하며, 어떻게 혁신하는지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사결정을 빨리 내리는 과정에서 중앙화를 막고 그 조직은 끊임없이 그 사회를 뒤집고 해체하며 불안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식이 조직의 기능 속에서 늘 유동적 자원으로 생산성을 발휘하도록, 새로운 경제이론이 필요하다고 제창하였다. 이런 지식에 기초한 경제이론은 기존의 경제이론과 근본적으로 달라서, 불완전경쟁이 그 자체 안에 내포하고 있으며 투자된 지식수익은 예측할 수 없다고 하였다. 즉 소비의 증가가 지식의 증가로 이어졌다는 증거도 없고 투자의 증가가 지식의 증거로 이어졌다는 증거도 없다고 그는 분석하였다.
이것이 바로 소위 지식기반경제이론(the theory of knowledge-based economy)이다. 이런 지식기반 사회와 경제를 위해서 모든 선진국들이 가장 큰 투자를 하는 셈인데, 실제적으로 나라마다 지식생산성을 높이는데 종종 실패하고 있다고 예증하였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새로운 첨단기술이라는 지식자원은 생산성이 높은데, 그것을 상품으로 개발하는 지식생산성은 일본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특별히 과거 소련의 경우, 지식자본 생산성은 낮았고 지속적으로 떨어져서 지금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OECD로부터 권고받았던 내용으로서 지식자본의 생산력을 떨어뜨리는 중앙집권화를 피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런 지식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네 가지를 그는 제안하고 있다.
1) 높은 목표를 세워라. 즉 이상을 가져라.
2) 지식이 생산성을 갖도록 지식자원의 집중화가 필요로 하다.
3) 변화를 기회로 삼기 위해서 체계적인 개발이 필요로 하다.
4) 시간관리가 필요로 하다.
이렇게 지식기반사회로 가기 위해서 특별히 언급한 것이 교육에 대한 그의 견해이다. 국가가 전체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 지식기반사회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 개발되어야 하는데, 그런 사회에서는 학생의 장점을 맞추어 교육하는 것보다 약점에 초점을 교육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진단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몇몇 핵심기술에 대해서 최소한 자격을 갖추도록 교육하라는 것이다.
거기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전과목 A학점을 받는 학생은 전반적으로 평범한 기준에 꼭 맞는 학생들이다. 그들은 성취하는 학생이 아니다. 그들은 순응을 잘하는 학생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평생교육에 대해서 아주 강조하였다. 그가 말하는 지식기반사회에 있어서 교육의 새로운 공리가 있다면, 사람은 배우면 배울수록 더욱 더 자주 더 많이 배워야 할 것이다(The more schooling a person has, the more often he or she will need further schooling)는 공리이다. 그 다음 강조한 것이 소위 무작위 접근(random access)이 가능하게 하는 교육제도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개인이 어느 직업으로 이동이 가능하도록 하는 다전공사회를 말하는 것이고, 학교와 직업 사이에 경계선이 없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두 가지 교육에 대한 진단은 지식기반사회로 가기 위한 길로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Peter F. Drucker가 그때까지의 자신의 연구의 결론을 집약시킨 지식사회로의 전환에 대한 예측들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이는 이런 지식사회에로 전환이 모든 국가사회의 일반적인 특성이 되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과거 IMF 지원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위해서 우리는 세계의 모든 여론이나 경제단체로부터 그런 사회구조로의 빠른 구조개혁을 요청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그런 개혁에조차도 미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핵심적으로 소개된 지식기반사회가 갖는 근본적 성격에 대한 이해가 미흡하지 않았는가라고 어렵게 진단해 본다. 소위 지식기반사회의 교육제도의 공리와 관련해서 평생교육의 질을 높이라는 권고가 주목이 되고 지식기반을 넓히라는 권고가 주목이 된다.
3. 칼빈주의 입장에서 본 한국 지식기반사회의 문제점들과 교회의 역할
막스 베버는 일반적으로 엄밀한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을 가진 퓨리탄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세력에 대해서 저항세력이지만, 오히려 후에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는 데 정신적 바탕을 이루었다고 분석하였다. 엄밀한 종교적 신앙의 내용이 대사회에 엄밀한 합리적 정신을 심었고 그 바탕 위에 공리주의 사고가 결합되어 순수한 퓨리탄주의가 변질되고 사라졌어도 그 엄밀한 합리적 정신을 없이 하지 못하여 그런 혼합주의가 자본주의 문화를 분석하는 것을 비판하는 입장에 선 Peter F. Drucker는 개신교 안에서 현실참여나 사회 속의 기독교를 강조하여 사회개혁을 추구하고 사회적 입법을 추진하며 교회가 사회적 기관이 될 정도가 되었을 때, 오히려 개신교는 급속히 결속력과 매력을 잃게 되었고 따라서 신자들을 잃게 되었다는 경고를 한 바 있다.
지식기반사회로 돌입된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더 전문화를 요구하는 것만큼 교회가 본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권유를 하고 있다. 물론 지식기반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전반적인 특성에 의해서도 그런 현상은 그에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된다. 그런 그 둘 사이에 공통된 의견은 기독교는 가장 기독교적이어야 사회와 세계의 미래에 공헌한다는 암시이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주의가 탈인간화에 핵심을 두고 있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엄밀한 지식 때문에 가장 넓게 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사회에 공헌할 점이 많다고 보는 것이다. 성경에 가르침대로 세상은 본래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적의적이고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때문에, 당연히 순수한 교회의 성격을 주장하면 할수록 사회로부터 미움을 받는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이 세상에서 언제나 희생되지만,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한 희생으로 공헌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하지 않고는 먹지도 말라(살후3:10)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엄격한 생활과 책임에 적용되었던 정신이 그 발전에 공헌하였다면, 지식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전혀 다른 정신이 거기에 공헌할 수 있다.
욕심도 우상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정신이 지식생산성을 낮게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나, 창조사상과 부활사상과 결합할 때, 더욱 예정론에 기반을 둔 구원론 사상과 결합할 때, 투자하지 않고 어떤 사회에 고도의 지식생산을 이루어 지게 하는 원천지가 될 수 있다. 문화상품이나 관광상품을 개발하고 지하철 손잡이에까지 광고장소를 삼는 지식생산성의 확대는 근원적인 확대가 아니다.
끝맺는 말
지식기반사회에서 교육은 학교에서 평생학습량의 2%를 받고 나머지는 다른 곳에서 받는다는 말이 맞다면, 교회는 평생지식학습 장소로서 학교보다 더 절대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일반학자들이 지식창출과 활용에 중요한 요소는 근면성, 충성심에 있다기보다는 혁신성, 창의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강조는 지식집약도가 높은 상품을 생산하는 데 강조를 두는 경향과 이어지고 지식을 직접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실용적 지식으로 정의하는 경향으로부터 이뤄지는 국가정책과 이어진다.
그럴 경우, 중국이나 일본보다 지식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자원집약도가 약한 한국의 경우, 분명히 경쟁력이 떨어진다. 특별히 중국이 빨리 지식기반사회로 진행하게 되면, 한국의 지식기반사회란 그 일부로 흡수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타난 주변국가와 다른 시간적 차별화가 그 사회와 문화의 우월성을 결정할 것이다. 거기에서 핵심은 인적자원일 것이다.
그렇다면, 칼빈과 같이 인간 안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과 지혜의 희귀한 표본을 보고 하늘과 땅이라는 눈부신 극장에서 그 창조의 본래의 주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숙고하되,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로서 여기며 언제나 곤비한 인간(miseri peccatores)으로서 모든 위선자들과 대적자들 안에서도 하나님의 변명할 수 없는 섬광을 찾는 자가 필요하다.
더구나 이 세상의 모든 역사 안에서 미래 나라의 미완성된 교향곡의 서곡을 연주하는 것처럼 사는 인간상이 필요하다. 실로 인적 자원의 고도의 신뢰성을 가진 오직 말씀만을 먹고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다만 세상에서의 보상을 하나님께 알려지는 바로 즐거워하는 인간상이 미래의 지식기반사회의 이상들과 결합할 때, 세계가 부러워하는 모범적인 국가사회가 될 것이다.
김영규 박사 프로필
▷독일 궤팅켄대학(Th.D.)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eq.)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74회 졸업
▷총신대학교 신학과(B.A.), 74학번.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역임
▷Director, Research Institute for the Bible and Reformed Theolegy(www.ribrt.org)
주요저서 및 논문
■ 『Calvin and the Old Testament:Sola Scriptura and the Trintarian God as an Unique Author of the Old Testament(Germanic), 1993. ISBN 89-950009-1-0 93230』(Seoul 1994.) - 궤팅켄대학 박사학위(Th.D.) 논문
■ 『A Dialogical Document and the Metaplasmic Phases of the Pre-Mosaic Hevrew hehind Gen 23.(Germanic. 1993.) ISBN 89-950009-0-2 93700』(Seoul. 1994.) - 창세기 23장에 관한 논문은 인류 역사 중 20세기에 와서 땅이 그 창세기 기록의 진실을 밝힌 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모두 고인들이 되었지만, 그 당시 고대 애굽어 기록들과 문헌들 편집의 최고 권위자이었던 H.W.Helck 교수와 고대 아카드 언어나 고대 슈메르 언어의 대가였던 D.O.Edzard의 자문을 받아, 독립적으로 주전 2400년 전의 고대 슈메르 문서들의 대화체 기록 방식들과 동일한 시기의 셈족 기록물들인 에불라 토판들에서 발견된 대화체 기록 방식들 및 고대 애굽 중 왕조의 편지들이나 기록물들에서 증거된 대화체 관용 표현들을 연구하여, 지금 현 창세기 23장에 기록된 그대로가 그 당시 "대화체 중재재판 판매 문서"의 직접적인 내용임을 증명한 논문이었다. 그런 대화체의 시대적 제한성 때문에 야곱에 관한 기록을 마지막으로 한 지금 창세기는 완성된 후 많은 세월을 지나 요셉의 죽음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 첨가된 것은 그 기록자를 알리는 간기(Colophon)라는 사실이 가정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화체 기록에 있어서 '그리고 역시 누가 누구 앞에 이르기를'과 같은 직접 화법 인용 관용구는 셈족 에불라 토판에서도 발견이 되나, '그리고 역시' 없이 '이제 내가 너에게 말하여 이른 것에 대해서' 등과 같은 직접화법 관용구는 후대 고대 애굽의 직접화법에서 증명이 되지 않는 창세기 족장시대에 해당된 고대 애굽 왕조들인 12 왕조와 13 왕조의 고유한 표현방식이라는 것이다.
■ 『17세기 개혁신학』(개혁주의성경연구소, 1995.)
■ 『조직신학 편람 I,II-2,III,IV.』(개혁주의성경연구소, 1998.)
■ 『엄밀한 개혁주의와 그 신학』(도서출판 하나, 1998.)
■ 『Biblica Hebraica et Graeca(Archaic Hebrew Texts and Greek Handwriting Texts of the First Century AD.) ISBN 89-89519-02-0 93230, 2002, RIBRT』(개혁주의성경연구소, 2002.)
■ "Paleographical Dating of 46 to the Later First Century, (Biblica-로마교황청 직영 국제학술기관지, Vol. 69, No. 2, 1988.) P46(최초 바울서신 모음집 사본)의 연대 측정이 주후 1세기 말인 최소한 도미티안 황제시대 이후가 아님을 증명하였다. 또한 필자에 의하면, "P46의 필체는 주후 1세기 안에서는 물론 1세기 전후 수 많은 문헌 파피루스들 중에서도 극히 희귀하게 지금 남아 있는 주전 3세기 전형적인 교육교본 필체를 가진 파피루스 사본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한다. 논문바로가기 https://www.friktech.com/rel/p46.htm
■ "도르트회의 Marburg 대학의 대표자 Rudolphus Goclenius(1547-1628)의 철학과 신학에 대해서"(대한논총, 2009.)
■ "하이델베르그 대학과 바젤대학의 개혁신학자 J.Jacobus Grynaeus(1540-1617)의 신학에 대해서"(대한논총, 2011.)
■ "초기 청교도 신학 안에서 법치사회의 기독교적 이상과 그 개혁정신 및 그 한계에 대해서"토마스 카트라이트의 논쟁자들을 중심으로"(대한논총,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