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 용서(사도행전 7장 54절~60절.)

[종그니칼럼] 집(아파트)이란

2023-12-12     김종근

인간은 태생적으로 홀로 살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서로 하나가 되어 살도록 창조된 존재, 서로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도록 창조된 존재, 즉 더불어서 살아야 할 존재인 것이다.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목회자로서의 진정한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섬기는 종된 삶'에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땅에 '사랑으로 섬기는 종'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문득 주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우리의 대답은 무엇일까요  ?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제 마누라에게도 주님의 참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고 삽니다.   금슬 좋은 부부는 서로의 마음을 읽고 살기에  자연히 하나가 될수가 있듯이 진정한 크리스쳔이란 '예수를 닮아가는 삶'에 있다면, 과연 우리는 주님을  닮아 가고 있나요?  도마가 어느 날 주님께 '하늘 나라를 보여달라'고 하자,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이미 하늘 나라를 보았거늘 어찌 하늘 나라를 보이라 하느냐?  하늘 나라는 바로 네 마음속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우리에게 묻기를, "네가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게 무엇이냐?"하실 때 이 물음에 우리의 대답은 무엇인가?저와 여러분은 날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내 삶 속에 아주 절절하게 다가 오고 있나요? 이처럼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혼'으로 깨달은 자만이, 그 누구도 용서할수 있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된다고 봅니다. 예수를 아는 그 믿음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혼으로 내려와야 비로소 '살아 있는 믿음'이 된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하였습니다.  그럼 여기서 '십자가의 길'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주님이 우리들을 옭아 매고 있는 모든 죄의 속박으로부터 참 자유케 하시려고, 십자가 제단에 자신을 희생양으로 드린 '십자가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이겨야지 왜 져?' '왜 죽어?' '왜 나만 손해를 봐야 해?' 하는 이기적인 맘으로 살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로는 주님의 참 사랑을 깨달을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참 사랑을 깨달아 그 사랑의 진수를 맛보아 알게 된다면,  진실로 우리의 삶은 송두리째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소욕이나 세상적인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동기간도 부모 자식도 그 욕심에 매여서 배려하는 마음을 찾아볼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하였습니다. 여기서 '십자가의 길'이란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다. 그럼 바로 된 예수쟁이의 삶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를 닮아가는데 있습니다.세상 이치에 밝은 사람을 흔히 '속물' 이라고 합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는 과연 목사나 주의 종으로서 세상에서 사용하는 속물과 달리, 성전에서 사용하는 물건을 聖物(성물)이라 하듯 우리가 세상으로 부터 "세상 사람 즉 속물과 확실히 다르다"는 '구별된 삶'을 살고 있는가?  그도 아니면 '세상'이 아닌 '예수'를 닮으려는 몸부림 이라도 있는가? 혹 세상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똑같이 좋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성경 인물 중에 주님을 가장 많이 닮은이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집사'이다.


스데반의 원 발음은 스테파노(면류관)다. 오늘 말씀의 중심은 스데반집사가 예수를 증거하다 돌에 맞아 순교하는 장면에 있다. 본문에서 스데반집사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중심 축에 있는 장로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목이 곧고 할례받지 못한자들"이라고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위선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살아 온 그들이 자신들의 썩은 심령을 그대로 보여주는 '예수의 거울'앞에 수치에 사로잡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의 삶은 이들에 비해 나아진게 뭐가 있을까요? 예수그리스도의 '붕어 빵'이라 할수있는 스데반으로부터 "목이 곧고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책망을 들은 이 무리들은, 이를 갈며 스데반 집사를 향하여 돌팔매질을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들의 부끄러운 위선들이 낱낱이 다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집사는 돌에 맞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가면서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죽을 힘을 다하여 기도 합니다 "주여 저들은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일을 알지못하기 때문이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여러분! 자녀를 위해서도 아니고, 부모를 위해서도 아니고, 친구를 위해서도  아닌, 바로 스데반 자신을 돌로 쳐 죽음에 이르게한 그 원수들을 향하여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드리는 아니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 제단에 산제사로 드리는 자기희생의 기도인 것입니다.
  
인간이 생명을 얻어 이땅에 태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어진 생명을 어떻게 살고 마치느냐 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여러분! 스데반집사가 누군가요? 스데반 집사는 사도들에 의해 선발된 당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일곱 집사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당시 사회의 중심 축에 있었던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적인 행실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스데반집사를 통하여 자신들의 치부가 여지없이 들어나자, 이를 참지못한 이 무리들에 의해 공회로 끌려와서도, 스데반집사는 성령이 충만하여 공회당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오늘 본문 말씀 7장 1절~53절 말씀을 피를 토하듯이,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가 바로 구세 주"라고,  생명을 건 증언을 합니다. 이 절대절명의 순교의 자리에는, 후에 바울이 된 사울도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죽음'을 가장 정확하고 생생하게 기록한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스데반 집사의 순교의 멧세지다. 평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도, 스데반 집사는 언제나 은혜와 성령이 충만했기에 이 증거로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위대한 것은 자신을 돌로 내려치는 자들에게 맞아 죽어 가면서도, 그들을 위하여 '용서의 기도'를 올린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의 진수를, 그는 죽어가면서도 우리에게 천사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집사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새 사람, 새 인류로 거듭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모두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용서할수 있는 사람만이, '용서 받은 참 크리스찬'이 됩니다. 스데반집사는 오로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늘 나라가 이땅에도 이루어지길 바랐기에, 그리고 천국에서 주님이 자신을 맞아주실 것을 믿었기에,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또 용서받은 영혼으로 서기 위해,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용서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험난한 광야 길을 은총의 불기둥과 구름기둥 없이 어찌 갈수 있겠으며, 진퇴양난의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없이 만경창파가 일렁이는 엄혹한 고난의 바다가 어찌 갈라지겠으며, 마라의 쓴물이 어떻게 단물로 바뀔수 있겠는가? '엘림의 오아시스' 처럼 우리의 생명수이자 반석이신 예수없이 영혼의 목마름, 타들어가는 갈증을 어찌 해결할수 있겠는가? 아모스 8장 11절에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목마름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목마름 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반석이요 생명수이며 하늘나라의 만나이신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날마다 먹어야 삽니다.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여러분은 먹을수있습니까? 용서는 인간의 생각이나 계산이 끝나고 예수의 심장으로 바뀔 때라야 진정한 용서의 마음이 우러나옵니다. 우리 서로 용서하며 삽시다!  용서가 있는 곳에 진정한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안식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60절에서 스데반집사가 무릅을 꿇고 기도하기를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처럼 성경은 죽었다 하지 않고 "스데반집사가 잤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보통 사람들은 남에게 맞으면 억울해서 잠을 못잡니다.  남을 때린 사람도 괴로워서 못잡니다. 그런데 스데반집사는 무수한 돌팔매를 맞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이렇게 기도를 마친 후에 '잤다'는 것이다. 이말은 죄에 물든 인간들의 사악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그의 영혼속에 평화와 안식이 임해서 하나님 품에 안겼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목사님 사모님이 오랜 세월 병석에 누워 있어 목사님이 병수발을 한지 5년이 되었다. 그동안 목사님도 병수발에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그래서 부억에서 한약을 들고 툇 마루를 올라오면서 "이제 그만 죽지"하는 맘으로, 한약 한 숫갈을 떠 먹이자 사모님이 그만 마지막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여러분! 약중에서 제일 좋은 약이 '사랑의 약'입니다 그는 '살리는 약'을 먹인게 아니고 '사랑이 녹아 있지 않은 약'을 먹인 것이다. 이처럼 몸이 불편한 것을 치유하는 약도 '사랑'이요. 미움의 앙금을 없애는 약도 '사랑'입니다.

남과 북이 분단된지 70여년이 지났지만, 서로 용서의 마음보다 주적으로 피맺힌 원한의 골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여러분! 이를 아시라! 남과 북이 갈라진 것은 불과 70여년 이지만 우리 민족이 함께한 세월은 반만년입니다. 주님은 북한의 김일성 독재 공산당보다도 훨씬 더 악랄한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도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알지 못하기 때문." 이라고 십자가 위에서 용서의 기도를 올렸듯이, 스데반 집사 또한 자신을 향하여 내려치는 살인자들의 돌에 맞아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저들을 향하여,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저들은 자신들의 죄를 알지 못하기 때문" 이라고 용서의 기도를 드리고 있듯이, 여러분! 분단의 조국에서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가장 절실하게 중요한 것은 세상이 주는 물질이 아니라, 바로 상대의 앙금을 사랑의 용광로에 넣고 녹여버리는 진솔한 용서와 사랑입니다. 중국 周나라 태공망이 말하기를 "傷人之語는 還是自傷이니 含血噴人이면 先汚基口"라 했습니다. ("남을 해치는 말은 도리어 자신을 해치는 것이니, 이는 마치 입에 피를 가득 머금어 남에게 뿌리려면 먼저 자기의 입이 더러워 진다.")고 했다. "미움을 받았다고 같이 미워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복수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혹시 용서하지 못할 이가 있습니까? 용서하십시요!

이처럼 스데반집사는 저들의 돌팔매에 죽어가면서도 용서의 기도를 드림으로, 최고의 영예인 생명의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스데반집사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죽을 힘을 다하여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누가 보았나요? 주님이 보셨습니다. 그리고 후에 바울이 된 사울도 그 현장에서 스데반의 마지막 순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 스데반 집사의 형언할 수없는 거룩한 순교의 모습을 보고 이루 말할수 없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자기를 향하여 돌 팔매질을 하는 그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눈물로 용서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본 사울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자기를 죽이려고 돌을 던진 이들을 위해 죽어 가면서 어떻게 기도를한단 말인가?" "도대체 어찌 이런 일이 있을수 있단 말인가?"하며, 예수쟁이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는 그의 발걸음이 무겁기만했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고 돌 팔매질을 하는 철천지 원수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는 스데반의 미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어찌 이런 일이 있을수 있느냐" 며 서다가 걷다가, 천만 뜻밖에 '부활한 예수'를 만납니다. 이때 사울이 예수의 발아래 엎드러지며 "주여! 당신이 뉘시오니까?"  주님이 대답하시기를 "나는 네가 그토록 싫어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니라!"  이 말씀앞에 사울의 눈이 시력을 잃을정도로 충격을 받았고,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배타적이던 사울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어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스데반이 순교하므로 사울을 사도 바울로 변화시킨 것이다. 우리가 인생의 고된 길을 걸을 때 진정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은,  언제든 날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지고 지순한 예수 사랑 뿐이다.

[종그니칼럼] 집(아파트)이란

나는 어려서 부모의 슬하에서 자랄 때 말고, 내 집을 소유한 것이 딱 한 번 있다. 1982년 부천에 있는 열아홉 평 아파트다. 비록 은행 융자 800만 원을 안고, 합 2800만 원에 매입했지만, 내가 주의 종이 된 순종의 열매였다. 이 아파트에 입주하던 날, 아내는 아주 좋아서 몇 달 동안을, 매일 쓸고 닦곤 하더니, 친구의 33평 아파트를 보더니만, 그 후론 시큰둥해졌었다. 이 아파트는 먼 훗날 무의탁 양로원 지을 때 종잣돈으로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1977년 결혼 후에도 삭월세방을 전전하던 때, 서울 송파구 송파동 반지하에서 살던 어느 날 밤, 새벽에 오줌이 마러서 침대에서 방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방에 물이 차 있었다. 그날 나는 밤이 새도록 마누라의 신세타령을 찬송가로 들으며, 계속해서 지하방으로 들어오는 물을 밖으로 담아냈다. 그러고 며칠 후 동사무소에서 이번 홍수로, 손해를 입은 것을 빠짐없이 적어달라 해서 적어 보냈다. 그러고 한 1년쯤 지나서 나온 수해보상이 일률적으로 `모포 한 장`이 전부였다. 그 많은 수해 의연금은 제 놈들 손 사이로 흘러간 데 없다.

요즘 서울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단다. 그래서 연일 난리다. 우리나라에서의 집은 주거용이 아니고, 어린아이 키 재기 하듯 부(富)의 상징이자, 불로소득의 황금알을 낳는 황금 거위다. 그래서 너 나 없이 은행빚을 내서라도 아파트를 사겠다고, 잔머리 굴리며 온통 아파트라는 판도라 상자에 미쳐 있다. 십인십색의 이 불로소득의 투기꾼들을 상대로 해서, 당국은 집값 안정이라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왜 당국은 수십 년을 두고, 아파트를 주거용이 아닌 투기용으로 방관하고 있는 것인지, 왜 이 문제가 그토록 풀기 힘든 판도라 상자가 되었는지, 그리고 왜 공개념 제도를 도입하지 않는 것인지도 묻고 싶다.

*누에고치를 비롯한 많은 곤충은, 자기의 창자에서 실을 뽑아 집을 짓고, 그리고 성충이 된 후에는, 미련없이 집을 버린다.

*제비도, 흙에 침을 섞은 진흙으로 온 힘을 다하여 집을 지어, 고작 반년 동안 살다가, 미련없이 버리고 강남으로 날아간다.

*까치도, 볏짚을 물어다가 집을 짓는데, 입이 헐을만큼 애써 집을 지어, 알을 낳아 새끼가 날게 되면, 그렇게 힘들게 지은 집을 버린다.

곤충도 날 짐승도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사는데, 오직 인간만이 집을 주거용이 아닌 투기용으로 사고팔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래 봤자 종내에는 너나없이 낙엽이 지듯 왔던 자리로 가건만, 집을 마련했으면 집 없는 이에게 기회를 양보하면 되는 순리를 거슬려, 돈의 노예가 된 수전노(守錢奴)들은, 한 치의 양보가 없다. 현대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 몸의 구조는 문명과 더불어 전혀 진화되지 못하고, 구석기인들의 신체구조에 머물러 있는 조물주의 섭리를 알라!

그래서 옛날 소크라테스가 우리에게 "너 자신을 알라" 고 일갈한 것이 아닌가?

그래 이토록 무지한 이유로 역리(逆理)가 그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편의를 위해 돈을 만들었는데, 그런데 돈이 상전이 되고, 사람이 돈의 종이 되어,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고 있다. 이런 현상을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한다. 자신도 모르게 主와 客이 바뀐 것을 일컫는 말이다.

전도(顚倒)는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거꾸로 보이는 것을 말하고, 몽상(夢想)은 `헛된 꿈`을 꾸고 있으면서, 오직 그것만이 만능의 열쇠로 착각하는 것을 말한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 잠시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져 가는 유한한 인생에, `완전한 소유`가 어디 있겠는가? 모래로 지은 아파트가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을 줄 수 있겠는가? 우리 내외는, 요양원 건물 꼭대기 층 방 한 칸에, 아무 불편함 없이 살고 있다.

우리 내외 노후준비는 모두 끝났다. 나는 소유한 것도 자식도 없으니 건강을 잃게 되면, 내가 몸담은 이 요양원에 몸을 맡기면 된다. 나는 말년에 축복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손에 쥐여 주신 모든 것, 나누며 살고 있다.

자연을 완전히 소유하는 생명체는 어디에도 없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자연에서 모든 것을 잠시 빌려 쓰다가, 두고 가는 유한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정 우리가 잃지 않아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니라, 보이는 것에 본질을 잃어버린, 원초적인 `참 나`일 것이다. 잠시 세상이 주는 것들에 마음이 팔렸을지라도, 반드시 `본래의 참 나`를 되찾는 것,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삶이어야 한다.

그런데 많은 것들을 곁에 쌓아 두고서도, 정작 제대로 활용도 못 하고 죽음을 맞는 많은 군상을 보게 된다. 오늘을 저당잡아,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 매여, 오늘을 잃어버린 우둔한 인생들을 본다. 행복을 자기 곁에 두고도, 엉뚱한 곳을 찾아 헤매는 헛 똑똑이들을 본다. 인류 모두가 파멸의 길로 가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금 우리가 사는 단 하나뿐인 지구를 훼손하며, 파국의 무덤을 스스로 파는 우매한 인생들을 본다. 빠르고 편리한 현대문명을 영위하면서도, 여가를 즐길 줄 모르고, 팽이 돌리듯 자신을 혹사하는, 어리석은 문명인들을 본다!

이러한 전도몽상(顚倒夢想)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물질의 노예로 매여 사는 이가 바로 나요 당신이다!.

*혹여 여러분은 `찰라의 비밀`을 아시나요? 

어떤 일에 화가 잔뜩 나서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세요! 개인 일도 나랏일도 모든 인생사는 `관계`에 있다.

*파란 출발 신호등이 켜졌는데도 앞차가 그냥 멈춰 있을 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앞사람이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갈등하고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내 차 앞으로 갑자기 끼어드는 차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혹여 위급한 환자 때문일지도 모르잖아요.

*아내가 화가 나서 윽박 질러도, 듣는 귀를 순히 하고 들어 주세요.

그럼 하루가 평안합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 잠시 눈을 감고, 오늘 하루를 무사히 마쳤음에 감사하세요. 그럼 감사가 넘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