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춤에 대한 단상

객관성의 추구가 만든 한국 불신의 사회

2024-10-15     최미리 기자

한국은 정말로 다이나믹 코리아다. 언론은 국민들을 대놓고 사기질 친지 오래고, 그럼에도 국민들은 언론만 오매불망 쳐다보며 눈과 귀를 내맡기는게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하나하나가 역사에 남길만한 쌩쇼가 날이 갈수록 점입가경이 되었었고, 피크는 단연코 2012년 싸이 열풍을 주도했던 팔만 국민들이 찍어주었다. 잘봐줘야 B급 이상 봐줄수 없던 가수가 빌보드를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와 같은 사건을 간파할줄 모르는 국민들이 지천에 널부러져 있었으니 한국의 상황은 초절정으로 멍청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싸이열풍은 어땠는가? 싸이가 인기 많다고 빌보드가 1위라니 순위에 대한 말들은 많았다. 한가지 웃긴건 1위, 2위는 다 한다면서 그 1위를 하고 있다는 노래는 정작 모르고 있다는 것이 웃긴 점이었다. 보통은 노래를 알고 그 노래를 알다보니 좋아서 1위가 되는 결실이 나오는데, 이건 뭐 알지도 못하는 노래인데 난데없이 1위라고 갑자기 들썩들썩 난리친 것이다. 가사는 그냥 생생하게 들려서 암기 잘되는 '오빤 강남스타일'이라는 도입부분 한소절 외엔 전혀 기억이 안되고 안남는게 오히려 정상이다. 기억해봤자 품격도 없는 노래에 뇌용량을 할당하는 것은 뇌에 대한 모독이고, 고막을 괴롭히는건 고막에 대한 고문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상당수는 이런 비슷한 관점으로 보인다. 음악이 1위라는데 대중은 음악도 모르는 것 같다. 그저 난데없이 1위라니깐 1위라는 숫자를 즐길 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싸이를 즐기는 방식은 무엇이고 이 싸이의 인기 비결과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을까?

첫째는 이들은 싸이 음악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말춤을 즐기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흔히 간과하고 있는 건 춤도 나름 기술이라는 것이다. 로봇 춤도 일견 보기엔 그냥 관절 굳은 자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려해도 안되는 발버둥처럼 보이지만, 그 기술의 뒷받침이 안된 자가 따라하려 들면 잘 안되는건 너무나 당연하다. 춤이라는 건 상당한 기술을 요하기 십상인데, 이 말춤은 다리에 뼈만 있으면 연체동물도 가능할 간단한 동작으로 이뤄져 있다. 그러다 보니 노래와 음악을 즐기는게 아닌 이 말춤을 따라하고자 강남스타일에 열광하는 것 아니었던가. 한가지 의문인건 저런 동작은 퇴화된 듯한 몸놀림인데 단체로 퇴화에 기뻐하니 무슨 정신병 수준으로 보였다.

둘째는 전형적인 집단 발작의 레밍즈 효과다. 저런 몸동작을 혼자만 알아서 해보라면 과연 할수 있을까? 절대로 실행할리 없다. 다만 레밍들의 특징은 자신들과 같은 바보들이 많은지 적은지 항상 주시하며 눈치만 살펴보다 집단으로 뭉쳐 숫자가 많으면 저절로 따라하는 습성을 지녔다. 한국엔 이런 집단에 물든 자들이 널려 있고, 혼자만 선구자처럼 해보라면 절대 못할 짓을 다수가 이미 하고 있으면 너도나도 용감한 투사가 되어 과감히 몸을 맡긴 채 무리의 일원이 되는 안도감을 느낀다. 이런 현상은 언제나 늘 관찰되어 왔고, 싸이 열풍에서 그 정점을 달렸다.

셋째는 자기 파괴 본성이다. 춤이라는 게 보통 멋있거나 세련된 동작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런 춤은 어렵다. 하다못해 2006 월드컵 기간에 꼭지점 댄스 유행시킨다고 난리를 쳐도 난이도 때문에 성사를 이루지 못했다. 허나 말춤은 동작의 임팩트는 확실히 주고 있어서 겨우 춤이라는 간판을 달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평상시 자신을 망가트려서라도 웃기고 싶은데 용기가 없어 실행 못하다가 나름 코믹댄스풍이 짙기에 이때다 싶어 추는 것이다. 고로 춤 간판달고 자신을 망가트릴 수 있으니 춤춘다는 미명하에 자신을 망가트려 개그적 동작을 실천해보기 위한 발로였다.

넷째는 애국자 코스프레다. 2002 월드컵 때와 비슷한 심리라고 할 수 있는데, 전혀 애국도 아닌걸 행하면서 뽕에 취해볼려고 난리치는 것이 해당된다. 진심으로 애국이라 생각해서 서울 광장에 팔만 명이 모여 난리친게 아니라는 걸 유의해야 한다. 결국 숫자적 측면에서 팔만대장경을 따라잡려는 이들은 하나하나가 주옥같은 집단 발작질에 몸을 흔들고 있었고, 그러다보니 음악이 소외된 아주 기괴한 현상의 주범이 되었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고, 국화빵엔 국화가 없다지만 저런 변태같은 빵조가릴 따라할 필욘 전혀 없지 않았던가. 문제는 이런 음악이 인기라며 집단 발작현상에 정부가 제동이나 교정하려 들기는커녕, 아예 냅다 이들의 바보짓을 더 조장하려는 자세까지 보여주었다. 하기사 시청에 모여 저런 몸짓이나 따라하는 애들이 팔십만 팔백만이 되면 나라 운영하기 얼마나 편리하겠는가.

거기다 더 큰 문제는 싸이 빌보드 2위에 영국차트 1위라고 하는데, 저게 정말 올바른 결과인지 그것도 매우 미심쩍다. 일단 외국에서 큰 호응을 얻어 한국에서 생중계를 한다면, 외국에서도 보려고 난리쳐야 합당할 터인데 그런 모습은 없었다. 또한 인기가 많으면 수입도 그에 따라 비례해야 하는데 국내수입은 3600만원이라 한다. 오죽했으면 싸이의 부족한 수입을 돕기 위해 서울시가 예산으로 4억을 지원했을까.

거기다 빌보드 차트내용도 상당히 미심쩍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민도는 일본이 한국보다 확실히 높다. 전세계적으로 민도 최악인 중국과의 지리와 문화적 거리가 일본보다 한국이 가까워버린 이상, 일본보다 한국의 민도가 떨어지는 건 어찌보면 필연이다. 똥과 가까울수록 똥냄새가 잘 배고, 구더기가 잘 꼬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알다시피 한국의 민도는 상당히 뒤떨어지고, 인류의 똥이자 암 덩어리인 중국과 근접한 한국이 일본보다 민도가 떨어지며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고로 무슨 가수가 인기 높다고 주접스러운 질투를 한국인들도 안할 판국에 일본인이 근거 없는 질투 부린다고 보는 것 자체가 웃긴 것이다. 싸이의 빌보드 차트 순위도 디지털 순위가 많이 개입되서 나온 수치고, 저런 오른 귀로 들어와 왼쪽 귀로 물 흐르듯 자연히 튀어나가는 싸구려 음악이 높은 순위라는 건 조회수 조작이 의심되는 전형적인 상황이다.

외국인들의 안목은 역시 뛰어나다

허나 일본 네티즌들도 한가지 간과했던 건 한국의 온라인은 한국이 아닌 중국이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도 이미 조작된 조회수 결실과 그에 따른 빌보드 차트 순위에 관심가져 후발적으로 관심 갖게 된 케이스지, 애초부터 싸이를 빌보드 차트 2위 만들기 위해 조작을 주도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즉 조회수 조작도 결국 빌보드 차트 2위라는 조회수 조작 결실로 우민화를 하기 위한 한국정부의 이해관계와 더불어 온라인 조작 기술의 태산북두 중국의 합작품으로 이뤄진 결과였던 것이다. 결코 자연스러운 결실도 아니고, 한국이 조작을 주도한 입장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싸이의 이용용도나 뜨게 된 배경, 모든 행태를 보면 자연스러움은 한 점도 없고 철저히 우민화를 위한 작업질로만 보인다. 그런데 어찌된 게 국민들은 이 퇴화되다만 몸짓에 흥겨워 집단으로 8만명 씩이나 모여 발작했고, 이것이 무슨 애국이랍시고 자랑스러워 하는 기미까지 보여주었다. 이런 바보들이 늘어날수록 국가는 편하고, 옆에서 한국에 빨대 꽂아 먹는 중국은 행복할 뿐이다. 그저 국민들은 그 사실조차도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게 현실이다. 

객관성의 추구가 만든 한국 불신의 사회

온라인상에서 어떤 주제에 대해 논쟁을 하고 주장을 행할시 흔히 들을수 있는 말은 '근거가 뭐냐?'라는 말이다. 물론 그 근거를 상식적인 것으로 제시하면 대부분은 알기 쉬우나, 귀와 뇌를 끊어놓고 헛소리 늘여놓는걸 자랑삼는 자들은 근거에 대한 근거를 물을 때도 있기에 이 같은 근거의 탈출과정은 끝이 없을 수도 있다.

이런 믿음에 대한 근거를 요청하는 행위는 의심이라 하고, 이 같은 의심이 가져오는 탈출작용때문에 어느 한계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론, 즉 모든 것을 의심한다는 행위로 더 이상 의심할수 없는 한계를 찾으려 했고, 이로 인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멘트가 나왔다. 더이상 의심할 수 없는 의심의 한계인 의심을 근거로 하여 연역적으로 존재, 명정한 이성 등을 도출해냈다.

의심을 무마하기 위한 근거는 믿음의 대상보다 확실함을 필요로 하고, 의심은 이런 제3의 대상으로의 탈출적인 메카니즘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근거는 보다 확고해야 하므로, 법률이 의심스러우면 법률보다 확고한 헌법에 위반되는지 안되는지를 심판해야 한다. 또한 법률은 지울 수 있어도, 헌법은 기준이자 가장 확실한 규범이기에, 헌법이 변할려면 국민투표등의 의사표현을 거치게 된다.

기본적으로 의심은 근거라는 이름으로 탈출을 요구하고, 제3의 작용을 필요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돈을 대출받으려 할 때, 대출자가 의심스러우면 제 3자인 '보증인'이 필요하지 않던가. 보증인은 대출자보다 믿을만해야 하고, 기본적으로 의심이 지닌 제3으로의 탈출이 지닌 기본적인 속성으로 비롯된다.

그렇기에 주관적인 것보디 객관적인게 어느 사이에 우월한 지위를 지니게 된지 오래다. 주관적인 것을 대출에 비유하자면, 내가 보는 대상과 나의 관계는 은행과 대출자에 비유된다. 그리고 객관은 나와 은행의 관계를 보증하는 보증자위치에 자리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주관적인 것보다 객관적인 것에 대한 '우월적 지위'가 수립하게 된다. 초딩 때 논설문과 설명문에 대해 특성을 배울 때, 논설문은 주관적인 것이라 좋지 않은 것, 설명문은 객관적인 것이라 좋은 것이란 착각까지 심어지기 쉽다.

그만큼 한국에선 주관보다 객관이 강조되고 있고, 그로 인해 무슨 스포츠 팬사이트에서 선수들에 대해 팬심을 표출하는 것에도 '객관'이 강조되지 않던가? 선수들에 대한 선호도에 객관이란 잣대를 들이대는것 자체가 정신나간 짓이다. 물론 객관적인 자료로 평가하면 공감대가 커질 수 있다. 지극히 주관적인 자료로 평가를 하면 공감대가 커지기 어렵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 선호도에도 무신 객관의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 자체는 충분히 정신나간 짓이다.

그런데 이런 병적인 객관에 대한 집착은 단지 온라인상에서 볼 수 있는 지엽적인 특성이 아니다. 대학평준화다 뭐다 학벌로 인한 뿌리 깊은 병폐도 결국은 기본적으로 이런 주관보다 객관이 강조되는 정신적 행태가 궁극적으로 치닫다보니 나오게된 현상이다. 면접관은 스스로의 눈으로 면접자를 판별할 수 없어 다른 객관적인 자료인 학점등을 필요로 하게 되고, 이런 학점만 보면 믿을 수 없기에 다른 근거인 학교 이름을 필요로 하게 된다. 결국, 대학의 서열화와 명문대에 대한 선호도로 이어질 수 밖에 없게 된다. 즉 한국사회의 병폐라 할 수 있는 것도 주관보단 객관이 강조되어 의심이 끝없이 탈출하기에 나온 현상이다.

이것의 문제점은 여기서 국한되지 않는다. 주관보다 객관이 강조되기에, 애초부터 주관이 무시되어 객관으로 향해 치닫고 있고, 이는 기본적으로 스스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기 보단 ,객관적인 증표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자신이 어떤 학문에 대해 아는 것보단 컨닝으로 학문에 대한 객관적 증표인 학점을 취득하려 했고, 되려 객관적이고 형식적인 증표의 획득에 노력을 기울일 수 밖에 없는 사회를 만들었다. 그로인해 영어를 잘해 토익점수를 따려하기보단 요령만 배워 토익점수를 따려 하지 않던가? 이것은 주관이 상실되고 객관일변도로 비정상적으로 중시되기에 이룩한 결과다.

정말 중요한 것은 주관과 객관에는 보충성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은 일단 주관이 못미더울 때 객관이라는 제 3의 작용에 의존해야 한다. 은행으로 비유하면 일단 대출자가 못믿어울때 보증인을 필요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일단 자신이 믿을만한 사람이 되려 스스로 노력하고, 거기서 결점이 있을시 제3의 작용인 근거로 가야 한다. 허나 어찌된게 이 나라는 주관이 싸그리 무시되다보니 못 믿어울 때 근거가 필요하다는 원칙이 무너지고 다짜고짜 객관으로 탈출에 탈출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건 의사소통에 있어 뭔말을 해도 싸그리 무시하고 그에 대한 근거를 주장하게 되며, 또 그 근거에도 근거를 요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은행에서 대출받을 시 스스로의 신뢰로 인한 게 아니라 보증인의 신뢰에만 전적으로 의지해 대출을 받으려고 하는 것처럼. 객관에 대한 심각한 의존성으로 주관성에 대한 지나친 포기가 만든 현상이다.

객관과 주관, 믿음과 불신에 있어 우선적으로 노력해야하는 건 믿을 수 있게끔 스스로 노력하고, 또 그 견실한 노력이 그 자체로 인정받아야 믿음이 성립될터. 하지만 이 나라엔 주관이 무시되고 맹목적인 객관일변도로 치우치다보니 감시자와 감시자의 감시자를 필요로 하게 되어 전체적인 사회적 비용도 증가해버리게 되었다. 그 말은 감시자에 대한 의존도가 심하다는 것과 객관에 대한 의존도가 심하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 감시자 없으면 스스로 믿음을 제공하려 하지 않는 문화가 표출되었다.

객관은 감시자와 다른말이 아니다. 고용받아 내 할일을 스스로 열심히 하는 것은 주관이다. 그리고 이런 행위를 감시하는게 객관이고, 일단 주관적이려 하고 객관에 의존하는 보충성의 원칙이 무너지니 늘 감시자에 의존해서 감시자의 눈이 와닿지 않는 빈틈과 헛점으로 도피하려 하며, 또한 감시자도 믿을수 없어 감시자의 감시자도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객관에 대한 심화가 이룩한 불신의 사회다.

객관이 중요시 여겨졌던 이유는 별거 없다. 주관이 지닌 맹점을 '보충'할수 있어서였지, 객관이 주관을 싸그리 대체 가능해서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보충성 때문에 중요시 된 객관이 어느새 주관을 무시하고 객관만 강조되다 보니, 믿음은 안드로메다로 간지 오래다. 일단 주관적이고 그 후에 보충적으로 객관이 거론되는 게 아닌 주관이 무시되고 객관에 대한 맹목적추구로 인해 의심이 탈출에 탈출을 거듭했다. 결국 믿을만한 것은 얼마 없는 사회가 건설되고, 감시자의 빈틈만을 노려 이득을 획득하려는 그런 불신의 사회가 건설되었다.

이런 차이를 염두하고 객관을 주관에 대한 대체가 아닌 보충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 주관의 상태를 회복하지 않는 이상 이 나라엔 믿음이 자리잡을 구석은 없다. 한국의 현모습은 객관이라는 감시자를 보충자로 여기지 않고 감시자에 완벽히 의존해서 스스로 믿을만한 인간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외부의 작용없이도 믿음을 줄수 있도록 믿음의 근거를 자신의 내부로 끌여들이는 주관성의 회복과, 그걸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의 향상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이런 병폐가 사라질 것이다. 알아봐야 하는 자, 믿음을 제공해야하는 자가 모두 손쉽게 주관성을 포기하고 다짜고짜 객관성에만 의존하려드니 지금 사회가 이리 믿을만한 구석도 없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