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레벨차이와 학습의 지름길
뇌와 세상은 분리되어 있다. 여기에 세상의 정보를 뇌에 우겨넣는 것이 학습이고, 이런 학습의 결과는 기억이라는 형태로 저장된다. 그리고 이런 학습의 기본은 응당 반복되는 수 밖에 없다. 이유인즉 기억은 늘 불완전한 상태로 저장되고, 이 불완전성을 치유하는 방법은 반복이기 때문이며, 반복의 다른 말은 학습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정보를 기억하려 할 때는 종이 위에 볼펜으로 반복해서 써서 외우려 한다. 세퍼트 같이 혈통이 우수한 개들은 5번 반복이하로 훈련내용을 습득할 수 있고 머리 안좋은 개들은 50번, 혹은 불독같은 종자들은 90번, 100번가량의 반복을 통해서만 입력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어차피 개는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인간이라면 한번에 습득할 것을 5번 반복해야 습득가능하고,인간은 개들이 익히지 못할 정보를 5번 이상의 반복을 통해 아는 것이니 '나는 개만도 못하네'이라고 자학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이런 반복을 통해 형성되는 기억과 정보는 '기억','정보' 따위의 단어로 차별없이 표현되나 사실 기억이라고 다 같은 기억도 아니고, 정보라고 다 같은 정보인것은 아니다. 정도에 따라 다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예를 들면 국사시험 주관식에 '빗살무늬토기'라고 답을 써야할 문제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분명 공부한 내용이고 아는 것인데 시험에 써야할 때 답이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기억이 없는 것일까? 답부터 말하자면 이것도 분명 기억의 범주에 속하고 아는 것은 아는 것이다. 다만 문제를 못 풀었을 뿐. 그렇기에 시험끝나고 마지막 답 뭐였냐? 라고 물어봤을시 '빗살무늬토기'라고 똘똘이 스머프같은 애가 말을 해주면 '아 맞다 그거였다'라는 반응이 나오기 쉽다. 즉,이 말은 알긴 아는 것이고 기억하긴 기억하는 것인데 그 기억의 차이와 앎의 차이가 간과되었다.
이렇게 기억이란 것 자체가 대상의 정보를 뇌속에 구겨처넣는 것이 되다 보니 대상을 보고 떠오르는 기억과 대상을 보지 않고서도 떠오르는 기억의 차이가 있다. 그런 이유로 영어단어를 외울시, 영단어를 보고 의미를 아는 정도만 기억하는 것과 아무런 대상에 대한 의지도 없이 스스로 영단어를 떠올려 의미에 맞게 사용하는 것엔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해석보단 영작이 어렵고, 기억되는 정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대상을 빌려야만 떠오르는 기억과 대상을 빌리지 않고도 떠오르는 기억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기억의 차이를 해소하고 변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반복이다. 헌데 반복만 하면 장땡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응당 흥미의 차이에서 나온다. 즉, 자신이 알고 싶어 아는 것과 그닥 알고 싶지 않는데 아는 것엔 습득을 위한 반복횟수의 차이가 현격히 존재한다. 그런 이유로 학습에 있어선 흥미를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유인 즉 흥미를 통해 접하게 된 정보는 쉽게 습득이 가능하고, 흥미를 통해 알게 된 정보는 뇌내 자동반복기능까지 탑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노력했다는 건 반복에 충실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즐기는 자라는 건 흥미를 잃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기억의 정도의 차이와 그 기억의 정도의 차이를 메꾸는 방식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런데 한국의 상황을 보면, 가장 중요한 흥미를 간과한다. 교과서틱하다는 표현 자체가 재미없음의 다른 말이다. 교과서 자체가 재미있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미가 있으면 안된다는 생각까지 갖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학습에서 최우선적인 지름길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중,고딩때의 학창시절은 실제로 써먹기 위한 지식을 배우는 과정이라기보단 쓸데없는 것에 얼마나 잘 인내했는지를 판가름하는 리트머스 용지격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은 대학까지 나와 배운 거 써먹다기보단 회사에 들어가 다시 교육받는다. 얼마나 좋은 대학을 나오고 머릿속에 어떤 지식이 있는지가 중요하다기보단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 인내할 수 있느냐의 판단 척도이다. 이를 위해 교육은 인내심 측정을 위한 도구로 변천되었기에 응당 교육열에 비해 교육효과는 낮을 수밖에 없다. 한국에 교육열이 그렇게 높다 하는데 업적과 성취를 이룬 분야가 도대체 어딘가?
물론 어떤 선생의 경우는 학업에 대한 흥미를 중요시 여기는 경우도 있긴 하다. 허나 대부분은 왜 흥미를 갖지 않냐며 구박만 하지, 흥미를 유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하는 교사는 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건 교사뿐만이 아니라 사회 일반에서도 보여지는 현상인데, 흥미와 관심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는 엄청난 착각에 빠진 한국인들을 부지기수로 봤다. 현실에서도 무관심이 약이라며 무관심을 약으로 처방하는 현상이 발생하지 않던가? 관심, 무관심, 흥미등은 스스로 통제하는게 아니라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저절로 일어나서 원인이 되기때문에 동기인 것인데 그걸 컨트롤하라는 것 자체가 동기의 의미도 모른다는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괜히 나온게 아니다. 흥미라는 동기부여는 자신이 무언가를 잘한다고 생각할때 갖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한다는 자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칭찬이다. 허나 한국을 보라. 공부못하는 애들은 못한다고 채찍이고, 공부 잘하는 애는 더 잘하라고 채찍이다. 이렇다보니 공부가 재미없는 건 당연한거다. 자신이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얼마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잃어가는 흥미 속에서 학습이 지향해야 할 첫번째 지름길을 포기하고 수업과 교육이 인내심 측정도구의 리트머시지로 변형되어버렸다. 이러니 효과가 당연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강조되는 덕목은 열심과 인내다. 그런 열심과 인내가 강조되는 이유 자체가 흥미의 중요성을 이미 떼버리고 시작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으로 나온다. 학업에 있어 흥미를 떼버리고 열심과 인내만 강조한다는 건 장기둘 때 차포를 떼버리고 졸만 가지고 장기두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기에 흥미를 중시여기는 외국과의 경쟁에서 당연 밀릴수 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한국이 괜히 게임을 잘하는 게 아니다. 다른 분야에 대해선 흥미가 유도되지 못하고 인내와 열심만 강조하니 자연스레 흥미가 유발되는 게임만 열나게 하다가 게임강국이 된 것이다.
열심과 인내라는 것은 물리에서 저항소자와도 같다. 저항은 전류가 흐르는 걸 방해하는 소자이다. 그렇기에 전류가 저항에 부딪혀 원활히 흐르지 못하면 발열한다. 인내와 열심도 마찬가지다. 흥미 없는 것에 견디다 발생하는 게 열심과 인내다. 이것은 마치 저항에 생성되는 열과 같아 열심과 인내가 중시되는 사회는 순리에서 어긋났다는 것의 방증이다. 흐름을 타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꼬리 몇번 안 튕겨도 자연스레 흐름에 따라 멀리 갈수 있으나, 흐름을 거스르는 물고기는 밀려드는 물살을 이겨내며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물살의 압력은 열심이라는 정신적 에너지로 표현된다. 물 살을 거슬러사는 물고기가 아무리 열심히 산다해도, 흐름에 따라 떠내려가는 물고기보다 고통스러운 것도 당연하고, 움직이는 거리가 짧은 것도 당연하다.
이제 필요한 건 열심과 인내의 강조가 아닌 흥미에 대한 강조다. 그럴려면 응당 형식에 맞춰 어거지로 애들을 끼워넣는 것이 아닌 애들에 맞춘 교육이 있어야 한다. 물론 가장 흥미있어하는 분야에 맞춰 잘하는 부분을 더 잘하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나라는 이런 중요한 점을 놓치고 이미 생성된 길에 애들을 끼워맞춰 그지같은 환경에 얼마나 더 적응 잘하냐를 가르치려다보니, 성과도 없이 고통속에서만 살고 있다. 학습에 있어서 흥미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한 현재의 교육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