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준비론】논쟁 포인트 종합 정리
신원균 교수(분당한마음개혁교회, 웨스트민스터 신학회장,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많은 분들이 회심준비론의 논쟁 초점에 대해서 헷갈리는 이유는 이 분들이 알미니안주의와 같은 '준비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라고 하여 혼동을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장로교와 같이 율법의 1용도(정죄)를 언급하지만 장로교처럼 사용하지 않기에 헷갈립니다.
1. 중생 전 회심, 회개 가능 주장
회중파 : 회개 -> 믿음 -> 중생
장로파 : 중생 -> 회개 ->믿음, or 중생 ->믿음 ->회개
회중파의 회심준비론은 구원론의 논리 전개에서 칼빈주의가 전통적으로 다뤘던 방식과 차이가 있다. 은혜로 구원받는 다고 말하면서 중생 전에 회개 가능성을 자꾸 강조한다. 중생 전 어떤 회개 가능성을 다루는 방식은 알미니안,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파, 경건주의 방식이다. 알미니안주의도 형식상 은혜로의 구원과 전적부패를 인정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다만 ‘오직’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고 이 때문에 도르트 총회는 논쟁이 발생한 것이다.
회중파는 알미니안과 동일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매우 비슷한 논리로 혼동스럽게 혼합하여 말하기에 굉장히 헷갈리는 것이다. 즉, 회중파는 알미니안주의는 아니지만 이 회심준비론은 알미니안주의의 논리를 상당히 혼합하여 말하기에 헷갈리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웨슬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알미니안과 동일하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장로교의 구원론 논리와 웨슬레는 분명 다르다.
2. 율법의 1사용
회중파 : 택자와 불택자 모두에게 주는 동일 정죄, 외적 부르심 용도만 강조, 선행적 은혜(은혜로 말미암는 준비)로 각자 회개 결단, 여기서 회개 결단하지 못하면 믿음 없음, 일정 정도 죄 각성해도 신자 아님. 내적 부르심 강조 없이 외적 부르심의 율법의 1사용만 강조함
장로파 : 불택자에게는 정죄, 심판, 그러나 택자에게는 정죄 후 구원으로 이끄심, 외적 부르심(1사용)과 성령의 내적 부르심의 동시 작용 강조, 성경에서 요구하는 정도의 회개를 보이면 신자로 인정
결론 : 장로파는 율법의 1사용이 택자에게 적용되어 성령의 효력 있는 내적 부르심의 은혜로 구원으로 이끄신다고 주장하여 오직 은혜와 전적부패를 조화시킨다.
하지만 회중파는 1사용을 주장하면서도 정죄받은 자가 죄에 대한 각성을 해도 일정한 죄의 각성과 일정한 믿음의 단계에 이르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라고 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죄의 각성 단계와 믿음 단계를 너무 분리해서 강조하기 때문에 죄의 각성 단계에 있는 진실한 신자 조차도 불신자로 취급한다.
이들은 택자라도 이 분명한 단계에서 결단하지 않으면 구원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한다. 이들은 구원은 은혜라고 말하지만 결국 죄 단계에서 믿음 단계로 인간이 결단하지 않으면 신앙이 없다라고 하여 논리적으로 인간 의지의 결단에 구원이 달린 것처럼 말한다.
1사용을 장로교와 다른 의미로 적용하면서도 장로교 신조와 신학자들이 1사용을 언급했으니 장로교도 회심준비론을 주장했다고 억지 논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조엘비키도 이런 논리로 1사용을 주장하면서 하이델베르그도, 웨민도 회심준비론 언급했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런 논리라면 종교개혁 이후 500년 동안 신조와 조직신학 책에 1사용을 '회심준비론'의 뜻으로 설명하는 내용이나 단어가 있어야 하는데 그 어디에도 '회심준비론'이란 단어 없다. 그래서 회심준비론은 장로교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전에 바빙크와 벌콥, 박형룡 박사가 비판한 회심준비로도 소개했으니 참고하세요. 이들은 오히려 이 단어를 잠깐 언급하지만 비판적 논점에서 언급한다.
이 논쟁은 회중파 분들이 갑자기 조엘비키 책을 한국에 소개하면서 장로교의 구원론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장로교의 전통적인 회개론이 부족하거나 틀렸다라고 비판했기에 장로교는 여기에 대해서 변증할 수밖에 없다.
한국장로교 역사상 조직신학에서 이런 회심준비론 논의 자체가 구원론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갑자기 이 주제를 던져 놓은 것은 회중파 분들이다. 전통적인 장로교 회개론과 중생론이 훨씬 더 성경적이기에 우리는 이 구원론을 지켜가려고 하는 것이다.
회심준비론에 대한 장로교 신학자들의 비판적 논평 소개
조엘비키의 회심준비론 책에 대한 논평 요청이 있어서 몇 가지 정리해 본다. 이 책은 많은 분석과 연구가 필요한 어려운 책이다. 그는 하니님께서 “은혜로 말미암아 준비”시킨다라고 하지만 준비과정에 있는 자는 신자가 아니다라고 하며 더 준비해야 한다라고 말하여 ‘은혜’와 ‘준비’ 개념이 상당히 혼란스럽게 표현된다. 준비론을 읽다보면 반드시 의문이 드는 ‘제3의 신자 상태’(준비과정에 있는 자-신자도 아니고 불신자도 아닌)에 대해서 ‘중간상태’는 없지만 ‘중간과정’은 있다라고 답변하지만 이 답도 굉장히 헷갈리는 설명이다.
회심준비론의 논지는 구원론에서 은혜를 많이 말하면서 인간 의지의 준비와 활동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다보니 은혜를 말하는 것인지 인간 의지를 더 강조하는 것인지 계속 혼동이 오는 것이다.
회심준비론과 같은 형태의 준비과정(10단계, 8단계, 6단계 등등)을 장로교 조직신학의 구원론에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바빙크, 핫지 벌콥, 머레이 등등). 다만 율법의 1사용(죄의 정죄), 인간 회개의 책임, 외적 부르심(성경, 설교) 등은 장로파나 회중파 모두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도 장로교는 불가항력적 은혜의 적용으로 이해하지만 준비론은 단지 불신자에 대한 준비과정으로 이해한다. 이 때문에 비키는 1사용과 외적 부르심을 들어 개혁주의의 많은 자료를 언급하면서 준비론의 정당성을 주장하지만 장로교는 1사용을 다른 의미로 적용한다. 이 때문에 성도들이 이 책을 읽고 준비론을 정통 장로파 회심론으로 쉽게 수용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가장 많은 논점의 혼란을 가져온다.
조엘비키의 “은혜로 말미암은 준비” 책은 회중파와 장로파의 다양한 1차 자료를 많이 소개하고 있기에 준비론이 정통 장로파의 구원론처럼 보이지만 1차 자료자체도 원저자의 문맥에 맞지 않게 갖다 사용하면 얼마든지 곡해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서 개혁주의자들의 율법의 1사용 언급을 지속적으로 소개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때문에 많은 분들이 혼란을 겪는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장로파는 율법의 1사용을 택자를 향한 유효한 부르심 과정으로 적용하는데 비키는 불신자에 대한 준비적 과정으로 적용하여 차이가 있다.
즉 용어는 동일하게 사용하는데 적용점이 다른다. 결국 장로교 입장에서 보면 비키의 1차 자료에 대한 정당하지 않은 사용이 지나치게 억지로 편집된 느낌을 갖게 한다. 예를 들면 주류 개혁주의자들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서 칼빈,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그,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제시하지만 오히려 아래의 헤페의 책에서도 보듯이 준비론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밝힌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회심준비론이 말하는 형태와 순서와 과정을 전혀 소개하지 않는다. 회심준비론자들이 주로 많이 사용하는 ‘준비론’이란 단어와 설명, 준비과정의 단계들 자체도 없다. 비키는 율법의 1사용(정죄)을 가지고 계속 웨민이 준비론을 다루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웨민은 1사용을 예정과 불가항력적 구원, 효력 있는 부르심의 적용으로 설명하는 것이지 준비론처럼 효력이 없는 예비(준비) 과정으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웨민과 비키의 1사용에 대한 이해와 적용이 서로 차이가 있다. 특히 웨민이 “효력 있는 부르심”(10장)이란 소명에서 “효력 있는”이라는 형용사를 첨부한 것은 당시 다양한 분파들이 주장했던 효력이 없는 준비 과정이나 선행적 예비적 준비적 은혜 개념을 거부하기 위한 의도이다.
또한 10장 1항에서 웨민은 ‘죄를 깨닫게 하고’(준비론--신자 아님으로 주장) ‘의를 향하게 하는’ 전 과정을 불가항력적 은혜의 시작, 즉 효력 있는 구원의 부르심으로 본 것이다. 이 외에도 다음의 표현들도 불가항력적 은혜의 본질을 소개하는 것이다. “회개에 이르도록 준비할 수 없다”(9.3), “이 효력 있는 부르심은 오직 하나님의 값없고 특별한 은혜에서만 나오는 것이요, 사람 안에서 미리 보인 어떤 선행으로 된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람은 성령에 의해 살아나고 새롭게 될 때까지 이 부르심에 있어서 전적으로 수동적이다.”(10. 2.)
벌콥 조직신학은 중생 전 논의에서 또는 회개 부분에서 ‘준비’(preparation)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소명에서 외적 부르심을 소개할 때 ‘예비적 성격’(preparatory nature)이라고 언급하는 정도뿐이다. 이처럼 불신자를 다루는 구원론 앞부분에서 준비(preparatory)라는 용어가 거의 나오지 않고 주로 신자의 성화를 다루는 부분에서 나오는 정도이다. 벌콥은 이 외적 부르심조차도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전이되지 않는다면 단지 선행적, 예비적 의미만 지니게 된다고 논평한다. 그리고 개혁주의자들은 대부분 이런 성격을 보통 은혜로 취급한다라고 지적한다. 벌콥은 실제 회개 부분에서는 능동적 수동적 회심으로 구별해서 소개할 뿐 준비라는 회개 개념은 다루지 않는다.
바빙크는 구원론에서 우선 ‘예비적 은혜’(gratia praeparans) 개념으로 접근하는 알미니안주의의 위험성을 거듭 경고한다. 항변파적 의미의 그러한 예비적 은혜는 개혁파에 의해 단호하게 거부되었음을 밝힌다. 다만 좋은 의미, 즉 좁은 의미에서 '예비적 은혜’ 정도는 언급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바빙크는 그런 의미에서 '예비적 은혜'가 존재한다라고 인정한다. 또한 “하나님이 친히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은혜로운 사역을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준비한다. 하나님은 삭개오의 마음에 예수를 보고자 하는 욕구를 일으켰다(눅19:3)”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바빙크는 이런 예비적 성격은 외적 부르심에 해당되는 즉,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제한되고 좁은 의미이지 넓은 의미가 아님을 밝힌다. 결국 부르심은 불가항력적 은혜가 적용되는 효력 있는 내적 부르심을 본질로 구원으로 초대하는 은혜가 중심임을 강조한다. ‘예비적 은혜’ 개념은 이 정도 성격만 소개할 뿐이고 이후로는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바빙크는 결론으로 이 준비 개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성경과 경험은 이 모든 외적 소명'의 활동들이 언제나 그리고 모든 사람을 참된 믿음과 구원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문제는 ‘그러한 다양한 결과에 대한 가장 깊고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기독교회는 주로 삼중적인 답변을 제시했다.”
박형룡박사는 조직신학에서 중생 부분에서 준비적 은혜(preparatory grace)를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하는데 부정적으로 소개한다. 그는 “준비적 은혜/prevenient or preparatory grace)라는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은 개혁파 신학자들 사이에 오랫동안 논의되어 온 문제이다.”라고 언급하면 이 주제가 쉽게 장로교 구원론으로 합의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결론은 이 주제는 부정과 긍정 면이 있다고 평가한다.
구원론/회개 부분에서 준비 개념은 알미니안주의 때문에 대부분 부정적이고 다만 외적 부르심과 인간의 회개책임을 강조하는 성격 정도로 다룬다면 그 면에서는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즉 외적 부르심, 일반은총 부분 정도로 취급하면 수용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의 바빙크, 벌콥과 같다. 즉, 아주 제한적으로 외적 부르심 성격에서 다루는 정도고 효력 있는 부르심, 즉 불가항력적 은혜의 성격에서 구원의 서정이 어떻게 진행되는가에 초점을 둔다. 그리고 인간의 회개 책임을 촉구하는 정도이다.
H. 헤페는 17세기의 신학자들을 소개하면서 이 준비론 논의를 요약했다. 그는 개혁주의자들 안에도 일종의 “예비적 행위라고 불리는 모종의 효과”를 언급하는 논의는 있었다고 소개한다. 하지만 이것은 외적 부르심 정도의 수용이고 대체적으로 뉴잉글랜드식의 회심준비론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라고 소개한다.
그는 퍼킨스와 에임스 및 뉴잉글랜드 회심준비론 논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주로 영국 교의학자들에 의해 실제의 회심 준비(praeparatio ad conversionem)가 인간에게 가능하다는 주장이 변호되어왔다.” 이런 회심준비론에 대해서 주류(17세기 칼빈주의) 개혁주의자들은 비판적 입장이었음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비트시우스는 계속하여 말한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이와 같은 것들이 선택된 자에게 있어서 중생의 준비가 아니라 원초적 중생의 열매와 효과이며, 보다 더 풍성한 성령의 후속적이고 더 완전한 역사를 위한 준비단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초기에 사용되던 준비적 행위(actus preparatorius)라는 표현 대신 후에는 선행적 행위(actus praecedaneus)라는 표현이 배타적으로 사용되었다.’”
“같은 문제에 대하여 우르시누스는 이렇게 말한다(Loci, 650): ‘만일 그들이, 말씀을 듣지 않고 양심에 역행하는 죄에 빠져 있는 자에게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며, 따라서 비록 아직 회심하지 않았지만 말씀을 듣고 죄를 버림으로써 회심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전체적으로 용인될 수도 있으나 두 가지 점이 맞지 않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첫째로, 문제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주장인데, 비록 하나님이 중생하지 않은 자의 (죄의 인정, 양심의 두려움, 그들을 경건으로 이끌려는 신자들, 또는 자신을 불경에서 멀리하는 불신자들과의 교제, 또는 자기 범죄에 대한 자기 징계와 같은) 이런저런 행위를 회심과 구원을 예비하는데 사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자신에 관한 한, 이 모든 행위가 회심 전에는 죄일 뿐이다.
둘째로, 그와 같은 도덕적 선행(善行)이 신적 섭리와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는 제시 없이도 중생하지 않은 자에게 요구되며, 그리하여 그들이 결국 선택된 자로서 교회에 회집된다는 주장인데, 결코 중생하지 않은 자는 선행을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역사할 때에만 선행이 가능하다.’”
“하이데거는 말한다(XXI.63): ‘중생에서 동시에 옛 사람이 벗겨지고 새 사람이 입혀진다. 옛 상태를 벗는 것이 새것을 입는데 선행하지 않는다. 옛 사람은 오로지 온정에 의해서, 미움은 오로지 사랑에 의해서 일소된다. 중간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장로교 구원론은 중생 전 부르심이나 중생, 회개 부분에서 회중파 청교도의 준비론과 같은 10단계, 8단계, 크게 나눠서 각성의 1단계, 은혜 수용의 2단계처럼 적극적으로 확대하여 다루지 않는다.
결국 회심준비론은 형식적 신자들에게 회심의 중요성을 촉구하다가 회심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그 기준을 너무 높여서 오히려 회개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 때문에 회중파 청교도의 특징은 회심을 너무 세게 강조하는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이다. 회심은 너무 약하지도 또는 너무 세지도 않게 균형을 이뤄야 한다. 장로교는 균형 잡힌 회개론을 제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논쟁은 아주 세밀한 영역이니 신학자들의 논의를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아무튼 이 준비론 논쟁은 이제 시작됐으니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들어보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 회심준비론은 장로교신학이 아니다.
(회중파 준비론과 윤리론에 대한 바빙크의 비판적 논평!)
바빙크는 이 책에서 개혁파 윤리학의 우수함이 무엇인지, 그리고 루터파, 경건주의, 회중파의 윤리학과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밝힌다.
바빙크는 다양한 준비론을 소개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펠라기우스), 또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항변파, 루터파) 본성의 빛을 사용한다는 의미의 실제적인 준비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퍼킨스가 말했던 것과 같이 다른 방식으로 거듭남의 준비에 대해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바빙크는 퍼킨스가 말하는 준비론이 단지 외적 부르심 정도라면 그의 준비론을 인정할 수 있지만 퍼킨스는 이 선을 넘어선 또 다른 형태의 준비론으로 나아갔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바빙크는 회중파의 준비론이라는 표현 자체도 부적절하고 차라리 하나님의 ‘선행적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이것들은 예비적인 행위가 아니라 선행적인 행위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선행적인 것은 준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적인 삶은 결코 이 준비로부터 점진적으로발전하는 것도 아니고, 이 준비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바빙크는 개혁파 외의 다양한 분파에서 신앙과 삶을 지나치게 세분화하여 등급을 나누려고 시도했던 여러 분파들을 추적하면서 이런 현상은 경건주의와 회중파 청교도에까지 이른다고 비판한다.
“종교개혁은 영적인 삶의 이런 등급을 부정했고, 모든 신자의 보편적인 소명을 강조했다. 하지만 재세례파는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어서, 본성과 은혜를 분리하여, 이 세상을 영적인 왕국으로 개조하려 했다. 재세례파는 개신교 수도사였고, 그들의 이상은 경건주의와 청교도 엄격주의로 이어졌다.”
결국 신앙에서 회개와 신앙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방식과 금욕주의적 윤리의 특징은 경건주의의 주된 특징이며, 회중파 청교도는 이런 경건주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다고 논평한다.
“경건주의라는 용어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긴 하지만, 경건주의는 교회의 교리만이 아니라 삶을 개혁하려는 신앙 운동이다. 신비주의자는 흔히 정적주의자가 되는 반면에, 경건주의자는 행동주의, 선교 사역, 교육, 자선 사업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여 준다. 중요한 경건주의자로는 루터파에 속한 필리프 야코프 슈페너,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 영국의 청교도에 속한 토머스 카트라이트, 윌리엄 퍼킨스, 존 오웬, 리처드 백스터 등이 있다. 네덜란드에는 이른바 후속 종교개혁 기간에 활동한 장 타팽, 빌럼 테일링크, 빌헬름 아 브라켈, 요도쿠스 판 로덴스테인, 히스베르투스 푸치우스 등이 있다. 윌리엄 에임스는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가교' 역할을 했다.”
바빙크의 논평을 따라 분석해 보면 최근 회중파의 준비론이나 엄격한 금욕주의적 생활론은 개혁파보다는 경건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형태로 평가할 수 있다. 장로교 목사님들은 바빙크의 『개혁파 윤리학』을 꼭 강독하시기 바란다. 장로교는 장로교답게 가르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