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칭의】1541년, 레겐스부르크 회의

2023-08-31     고경태 논설위원

1517년 수도사인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예배당 정문에 게시한 95개 반박문(면죄부에 대한 반박문)은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렸다. 루터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해 있었고, 신성로마제국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교황주의와 기존 질서에 항의하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루터파는 항의가 아니라 개혁(Reformed)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루터파는 복음주의(Evangelical)라는 말을 사용했다. 1520년 엑크와 라이프니쯔 논쟁을 통해서, 루터는 “이단적이고 위법적이며 거짓”이라고 정죄를 받았다. 교황 레오 10세(1475-1521)는 1520년 6월 15일 ‘주여 다시 일어나소서’라는 교서를 발표하고, 루터의 논제에 41가지의 오류가 있다고 규정했다. 6월에 작성된 칙령은 루터에게 1520년 10월 10일에 도착했다. 유예기간이 60일이었는데, 마지막 날인 1520년 12월 10일, 루터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엘스터 게이트(Elster Gate of Wittenberg)”에서 교황청의 칙령과 스콜라 신학 서적 등을 공개적으로 소각시키며 교황청과 결별을 선언했다. 1530년 멜랑히톤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Augsburg Confession, 28조항)를 작성하여 루터파를 형성시켰다.

1541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는 1517년 이후에 양립되는 두 세력을 화의하기 위해서 레겐스부르크에서 제국회의(Diet of Regensburg)를 개최했다. 레겐스부르크는 16세기 유대인이 많이 거주했던 대표적인 지역이기도 했다.

레겐스부르크 회의에 루터파의 대표로 스트라스부르크의 마틴 부써(Martin Bucer), 비텐베르크의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eheton 1497-1560), 헤센의 요한 피스토리우스(Johannes Pistorius)였고, 로마 카톨릭 진영에서는 요한 엑크(Johannes Eck), 요한 그로퍼(Johannes Gropper), 율리우스 폰 플루그(Julius von Pflug), 그리고 로마교황청에서 파송된 가스파로 콘그타리니(Gasparo Contarini)가 자문인의 자격으로 참석했다. 회담에서 함께 토의한 문건은 라틴어로 된 보름스 책자(Wormser Buch, Wormser Religionsgespräch) 23개 조항을 작성했다. 이 때 스트라스부르크에 있던 칼빈은 부써의 인도로 동행하여 참석했다.

레겐스부르크에서는 이중칭의(double justification) 구도를 협약했다. 그러나 교황도 루터(M. Luther, 1483-1546)도 만족하지 못해 결국 무산되어 마지막 종교회의가 되었다. 레겐스부르크에서 결의한 이중칭의 구도에 대해서 교황이나 루터가 모두 만족할 수 없었다. 이중칭의는 전가된 외적 의(an imputed external righteousness)와 주어진 내재적 의(an imparted inherent righteousness)을 모두 허용한 것이었다(맥그래스: 2017, 200). 레겐스부르크에서 결의했지만, 그 결의는 하루도 실효되지 못했다. 1541년 레겐스부르크 회의는 역사에서 매우 특이한 사건이다. 회의장에서는 합의가 되었지만, 돌아가서 양쪽 진영 수장들이 거부되었기 때문이다. 그 만큼 칭의 이해에서 다변화된 이해가 있었고, 그 사안을 주도하는 루터나 교황의 생각을 잘 파악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레겐스부르크는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의 견해를 일치시키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정치적 수단이었다. 회의의 결과로서 『레겐스부르크 문서』(Book of Regensburg)에 대한 작성 책임자는 부써와 그로퍼였다. 이 회의는 라이프치히 회의(1539년 1월), 프랑크푸르트 회의(1539년 4월), 하게나우 회의(1540년 6-7월), 보르스 회의(1540년 10월)등과 같은 연속된 회의였다. 칼빈은 “레겐스부르크 문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했다(박경수, 『교회의 신학자』(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152). 박경수는 칼빈이 “레겐스부르크 문서”를 지지했다고 제시했다(박경수, 『교회의 신학자』, 160). 그러나 칼빈은 이중칭의에서 이중은혜를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박해경, 『칼빈의 신학과 복음주의』(서울: 아가페, 1998), 280).

레겐스부르크의 이중칭의적 구도는 첫째 칭의와 둘째 칭의에서 명확한 관계를 세우기가 약하다. 즉 구원의 확실성(성도의 견인,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해서 강하게 제시할 수 없게 된다. 즉 두 칭의에 대한 규정에서 두 칭의의 구도가 되어, 첫째 칭의 후에 구원에서 탈락할 가능성을 개방시킨다. 그러나 한 칭의를 명확하게 세울 수 있는 구도는 이중은혜 구도이다. 칼빈은 이중칭의의 교리를 정립했는데, 구원의 확실성, 이중예정, 견인 교리로 구축했다. 이중칭의 교리는 첫째 죄인의 칭의와 둘째 의로움을 얻은 자의 칭의이다(François Wendel, 『칼빈- 그의 신학사상의 근원과 발전』, 김재성 역(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2), 314: Francis Turretin, 『칭의』, 박문제 역(서울: 솔로몬, 2018), 42).

칼빈에게서 이중칭의 구도가 나타나는데, 구원의 확실성이 명료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칼빈은 레겐스부르크 결정과 같은 견해가 아니다. 그럼에도 칼빈은 회의를 통해서 결정된 것을 존중했다. 그러나 양측이 모두 거부하며 결의는 무산되었고, 칼빈은 이중칭의 구도에서 이중은혜 구도를 제언했다.

칼빈의 이중은혜 구도는 1619년 네덜란드 도르트회의에서 결정된 5 point(TULIP)에 연결된다. 그러나 도르트의 결정인 5 point에서 1 point(제한속죄)를 약화시키는 4 point, 낮은 칼빈주의였다. 1643년에 잉글랜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알미니안 체계를 공개적으로 거부하면서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그렇기 때문에 낮은 칼빈주의가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오면서 1 point(구원의 확실성, 성도의 견인)을 더 약화시키고 있다. 이렇게 되면 결국 3 point 구원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개혁파의 칭의 이해에서 명확하게 세울 것을 다음과 같이 제언한다. 레겐스부르크 회의에서는 두 견해를 포용하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한 교회를 이루려 했지만 좌절되었다. 그래서 개혁파는 자기 견해를 좀 더 명확하게 세울 수 있었다.

첫째,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는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이다.

둘째, 구원에서 인간의 노력, 협력, 조력의 구원 진행은 합당하지 않다.

※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주도성과 인간의 역할 관계에서, 인간의 역할을 말하려는 성향이 있다. 이 견해에서는 “은혜 안에서 율법을 지킴”, “믿음으로 율법에 순종함” 등등 문장을 구현한다. 한국 교회는 2017년에 “믿음과 행위 관계”에서 행위의 필요성과 오직 믿음으로 구원얻음이 대립했었고, 이후 2차 칭의 논쟁에서는 “믿음과 순종”의 관계가 드러났다. 오웬, 에드워즈 등은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학자들을 솔라피디언(Solifidians)이라고 규정하며 거부했다. “믿음과 행위” 설정 이전에 “믿음과 순종” 관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셋째, 보편속죄론은 불가하다(소뮈르 학파, 아미랄드니즘, 알미니안은 불가함)

넷째, 구원의 확실성(성도의 견인)을 명확하게 천명해야 한다.

※ 구원의 탈락 가능성은 부당하다.

※ 체계가 명확하면 분열이 증가하고, 포괄적이면 명료한 구원 이해가 약화된다.

※ 17세기 개혁파에서 거부하는 신학 세력은 로마 카톨릭주의(교황주의), 알미니안, 소시니안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재세례파, 오시안더(Andreas Osiander, 1498-1552, 본질적 의의 주입), 아그리콜라((Johannes Agricola; 1494 - 1566, 무율법주의)도 포함시켜야 했다고 생각한다. 당시에 피스카토르(Johannes Piscator, 1546-1625)의 수동순종 견해는 거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이중칭의(二重稱義, double justification), 이중은혜(二重恩惠, double grace, duplex gratia), 이중전가(二重轉嫁, double imputation)는 구원과 성화 이해에서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도이다. 필자는 이신칭의, 이중칭의는 이중은혜로 연결한다.

※ 신성로마제국의 교회는 1517년에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교회’(una sancta catholica Ekklesia)를 이루기 위해서 치열한 논쟁이 발생했다. 루터와 멜랑히톤은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Confessio Augustana)를 작성하여 루터파 진영을 확립했다.

칼빈의 개혁파는 1619년 네덜란드 도르트회의를 기점으로 구체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근간은 1559년 제네바 아카데미에 있다. 1560년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1560년)를 작성하고, 개혁파 신학으로 교회를 개혁했다. 프랑스 개혁교회는 낭트 칙령(Edict of Nantes, 1598년)으로 지위를 확보했지만, 퐁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 1685년)으로 무력화되었다. 프랑스에서 박해를 받은 위그노(Huguenots)는 유럽 각처로 망명하여 영향력을 발휘하였는데, 위그노의 활약은 드러나지 않았다(참고, 성원용, 『위그노처럼-위그노에게 배우는 10가지 교훈』(서울: 국민북스, 2021)).

※ Solifidian: one who holds that faith alone without achievement or personal merit is sufficient to insure salvation(Merriam-Webster) 구원의 확증에서 개인의 공로나 성취이 없이 오직 믿음으로 충분하다고 견지하는 사람.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형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