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知 darkness】싸우는 이유가 뭔데?

2024-06-01     장대선 신학전문기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에베소서 6장 12절) 

지난 2011년에 개봉한 한국영화 ‘고지전’을 보면,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전투의 유일한 두 생존자인 한 국군 장교와 또 다른 한 북한군 장교가 각각 “싸우는 이유가 뭔데?”라는 물음에 대하여, “너무 오래돼서, 잊어버렸어.” 라고 답하는 장면이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물음은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북한군 장교가 영화 초반부에서, 마찬가지로 나중에 유일하게 살아남는 국군 장교가 포로였을 때에 그에게 한 “너희들이 왜 전쟁에서 지는 줄 아네? 너희들이 왜 싸우는지를 모르기 때문이야.” 라고 말한 것 때문에 되물었던 것이다. 아울러서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국군도 북한군도 왜 싸우는지 이유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음을 암시한다.

◆ 불신자들이나 신자들이나 간에, 이 땅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듯 살아가는 이유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인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데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 특별히 신자들이 살아가는 실상은 치열한 전쟁터의 싸움의 양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마 6:25) 하고 염려하는 삶을 살아가는 현세적인 사람들이나, 믿음에 따라 천국의 소망 가운데서 살아가는 내세적인 사람들이나 삶의 모습이 치열하기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치열한 삶 가운데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싸움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로 그저 치열하게 살아갈 뿐인 것을 볼 수가 있다. 한마디로 불신자들이나 신자들이나 간에, 이 땅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듯 살아가는 이유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인 경우가 다반사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싸움과 관련하여, 엡 6: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했다. 그리고 특별히 “혈과 육”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연계되는 것이다.

사실 엡 6:12절에서 우리들이 “혈과 육”에 더하여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어둠”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은 “어둠”, 곧 무지(darkness)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싸움의 대상은 이 세상의 무지에 대한 싸움이며, 그러한 싸움에 필요한 전신갑주(full armor)는 “진리”, “의”, “복음”, “믿음”, “말씀”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와 그로 말미암는 의와 평안, 그리고 믿음이 바로 우리가 수행하는 싸움의 정체를 암시하는 것이다. 만일에 우리가 이러한 갑주들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그 어떤 싸움도 수행할 수가 없다.

이러한 싸움과 무기들에 관한 엡 6:10-20절까지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해 보면, 우리가 싸우는 싸움이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진리를 깨달으며, 고수하고, 확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본질적인 것 이외의 모든 삶의 요소들을 사도 바울은 ‘κοσμοκράτορας’, 곧 ‘세상 주관자’라고 칭한다. 이 땅에서 신자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부와 명예와 행복과 욕망과 기쁨과 성취 등은 모조리 이 어두운 세상에 속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것들 자체는 어쩌면 가치중립적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러한 모든 것들 가운데에는 진리도 의도 없으며, 평안이나 믿음을 찾아볼 수 없는 깊은 어둠이 그 본질로써 채워져 있을 뿐이다.

반면에 에베소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진정한 싸움, 혹은 씨름을 수행하는 자들은 하나님 말씀 가운데 담긴 진리와 의, 그리고 그로인해 얻어지는 평안과 믿음을 자신의 생명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며 확신하는 자들이다. 존 머레이(John Murray)가 ‘영혼의 순례에 있어서의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 in the Pilgrimage of the Soul)라는 글에서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리 싸움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우리 중에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논쟁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와는 반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반대됨이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논의를 회피하려는 것을 정당화하는 꽤나 그럴듯한 명분을 구성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도주를 가로막는 것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확신(conviction)이다. 그리고 우리가 확신이라고 말할 때에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보다도 더욱 소중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있어서 그것은 단순한 확신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옳을 수도 있고 매우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서, 그러한 진리는 항상 하나님의 진리이다. 그것은 우리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우리의 신념에 따른 것이지만, 그러나 그 출처와 저작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러한 싸움의 본질이 신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본질적이며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것인지를 명료하게 시사한다.

결국 우리가 아무리 큰 교회당을 이루고, 아무리 많은 회중들을 확보하며, 아무리 명성 있는 권위를 확보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만일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담긴 진리와 그로 말미암아 깨닫게 되는 의, 그리고 복음의 평안과 믿음이라는 밝은 빛에 거하지 못한다면, ‘κοσμοκράτορας’, 곧 세상 어두움의 권세에 붙잡힌 한낱 어리석은 속물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높은 건물과 수많은 회중들, 그리고 얼핏 그럴싸하지만 사실은 세속적인 행복과 기쁨을 얻기 위해 믿음을 의지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오히려 서서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며, 그 모든 것들에 앞서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함으로 살아가는 자들이어야 마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임을 교훈하시고자 광야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셨으며(신 8:3), 주님께서는 이 세상이 아니라 천국에 대하여서 이르시기를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참으로 천국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백성인 신자들은 높은 직분과 권세, 많은 부귀와 영화, 경이로운 이적과 표적,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생명보다도 더욱 소중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담긴 진리에 대한 확신을 더욱 얻기 위하여서, 공적인 예배를 사모하여 말씀을 들으며 늘 말씀을 읽고 탐구하는 행 8:27절의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와 같은 자들이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갈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이 땅 가운데서 어떤 싸움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성경을 읽고 진리를 깨달으며 기도하는 삶보다는 무리를 지어서 서로에게 기대는 것에 더욱 마음을 두는 여느 삶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지극히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고자 힘쓰는 것이다.

◆ 목사와 교사는 ‘공인’(public figures)이다

목사와 교사는 사인(individual figure)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기독교는 목사를 함부로 세운 결과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가장 엄중하게 세워야 할 ‘공인’(public figures)인 목사를 함부로 세운 결과로 온갖 편법과 허위를 일삼는 자들이 우위를 점유하므로 말미암아, 정작 규칙과 질서를 따라 합당하게 목회자로서 세워지고자 하는 길이 갈수록 협소해지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이 목사가 되려면 그저 장님이요, 귀머거리요, 또한 벙어리로 사는 세월을 담담히 보낼 줄 아는 희한한 조건이 따르는 실정이다. 

그러나 개별 교회(a particular church)에 있어서 뿐 아니라 공교회(catholic church)로서의 전체 교회에 있어서, 목사는 사적인(individual) 존재가 아니라 공적인(public) 존재로서 가장 엄격하고 신중한 시험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회중(congregation)을 맡겨서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은 비상적인 교회의 직원(Extraordinary Officer)들인 사도들과 통상적인 교회의 직원들인 목사와 교사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다. 사도들은 그 어떤 시험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부르심을 입었으며, 또한 특정한 회중들이 아니라 온 교회들을 세우는 참으로 특별하고도 비상적인 일들을 맡은 자였던 것이다. 그에 반해서 목사와 교사들은 반드시 은사에 관련한 엄중한 시험과 검증을 받아야만 하며, 또한 맡겨진 회중이 부양하여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사(doctor) 즉, 무급(unpaid)인 주일학교 교사가 아니라 유급(Paid)인 신학교수들은 맡겨진 회중이 없으므로 신학교의 초빙을 통해 규정된 월급을 의지하는 사역을 수행한다.

그런데 무분별하고 개인적인 부르심에 의지하여 목사로 세워지며 개인적인 꿈과 희망에 따라 교수를 꿈꾸며 스펙을 갖추는 현재 우리 사회의 기독교 현실은, 목사들뿐 아니라 교사가 될 신학자들의 경우에까지 맡겨진 수입원이 없이 내팽개쳐지는 실정이 되어버렸다. 목사에게는 맡겨진 회중이 없이 알아서 각자 우물을 파게하고, 교사인 신학자들에게도 출강할 기회조차 없어서 보따리를 들고 이리저리 떠돌 듯 강의를 하도록 하는 참으로 비참한 실정인 것이 사랑이라는 말을 가장 남발하는 기독교의 적나라한 현실인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일찍이 신 25:4절에 기록하기를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고 기록했고, 또한 먼 후대에 기록한 딤전 5:18절에서 다시 한 번 그 구절을 떠올려 기록하기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고 하여, 왜 목사들이 반드시 회중을 맡은 자로서 세워져야 하는지를 일관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목사들의 사역은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떡과 물로 힘을 얻어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맡겨진 회중을 통해 당연하고 일관되게 양식과 필요한 모든 것들을 얻으면서 행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던 개혁교회들은, 일찍이 교회의 개척을 목회자 홀로 맨땅에 말뚝이라도 박듯이 행한 것이 아니라 노회를 통해 적당한 회중과 함께 교회로서 조직하여 세우도록 했다.

한편, 우리 시대의 기독교 현실 가운데서 목사들 못지않게 곤란한 형편 가운데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의 교사인 교수들이요 신학자들일 것이다. 총회 신학교가 수도 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총회 신학교들 가운데 어느 한 학교도 교단에서 자체적인 예산으로만 운영하는 경우는 없으며, 오히려 여느 사립학교들과 마찬가지로 학교운영을 위한 갖가지 세속적인 아이디어와 궁여지책에 편승하다보면, 어느새 교수들은 신학자가 아니라 강사에 불과한 수준으로 퇴화된 자신의 신학적 수준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내 현실이 아닌가? 더구나 박사학위를 취득하고서도 강의할 곳이 없어서 보따리 장사꾼마냥 이리저리로 다니는 직업 강사에 머물거나, 심지어 그조차도 확보할 수 없어서 허울 좋은 이중직 교수의 삶을 살아가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니, 그런 형편 가운데서 어떻게 신학적 소양을 더욱 고양시키거나 수준 높은 신학적 연구를 수행할 수가 있겠는가? 임지가 없는 목사들과 마찬가지로, 강의할 곳이 없는 신학자들 또한 그처럼 고생길을 가다보면, 어느새 사사기에 나오는 여느 제사장들처럼 강퍅해진 심령으로 시대를 한탄하는 참람한 지경에 놓일 뿐인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우리 내 현실에 반해, 16세기 중반의 프랑스 개혁교회의 치리서를 보면, 제1장에서 목사에 관하여 다루는 가운데 22조에 명시하기를 “목사가 노회로부터 얻은 허락이 없이, 또한 그에게 주어진 교회가 속한 지방대회의 허락 없이, 그의 무리(Flock[회중])를 버리고 떠나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다.”고 하여, 목사의 소속을 노회로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목사의 해임을 개별 교회의 당회나 회중이 임의로 결의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30조에서는 “목사를 교회에서 해임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들에 대한 권한(Authority)은 지방 대회에 있으며, 그들의 교회는 먼저 들어보고, 그 이유를 충분히 숙고해야 한다. 그러나 불협화음이 일어났을 경우, 모든 일에 대한 결정은 전국 대회(National Synod)에서 내릴 것이며, 그 일이 해결될 때까지는 그 어떤 것도 쇄신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 개혁교회 치리서는 제2장에서 학교에 관하여 다루는 가운데 4조에서 특별히 신학교수들에 대해 명시하기를 “우리의 교회에는 항상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와, 그들[회중들]을 다스리기 위해 앉은 다른 사람들을 비롯한 충분한 수의 [사역자들을] 갖추어야 하고, 그들은 이미 잘 교육을 받은 학자(Scholars)를 선택하여 그들로 하여금 가장 촉망받는 희망적인 부서의 일원이 되게 하고, 대학에서 그러한 일을 계속하도록 하며, 또한 그 곳에서 그들은 사역(the Work of the Ministry)을 위하여 적합하고 잘 준비되어야 하고, 가난한 목사의 자녀들에게 호의를 베풀며, 만일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독보적인 자들이 있다면, 각 지역 치리회(Colloquies)에서는 이들을 특별히 돌봐야 한다.”고 하여, 신학자들의 부양이 결코 학교 자체만의 책임이 아니라 공적인 교회의 책임임을 분명히 한다. 아울러서 “그리고 일부분에 대해, 그리고 예산의 한부분에 있어, 즉 유지비에 관해서는 보다 더 부유한 교회들이 유사한 일을 수행하도록 한다. 노회와 지방 대회에서는 이러한 사안들과 관련한 요청과 통지들을 확인하고, 가장 필요한 부분들이 성공적으로 충족될 수 있도록 최선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단일 교회만으로 그 일을 할 수가 없다면, 이웃한 교회들이 그들과 함께 연합하여 행하도록 하며, 만일에 각 노회 가운데서 한 명의 가난한 학자(poor Scholar)를 담당하는 것이 이러한 역할에 있어서 편리한 조치라고 한다면, 우리의 모든 교회들이 각각 나눠서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한마디로 신학자인 교수를 노회와 대회 차원에서 공교회적으로 부양하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목사와 신학자인 교수들은 일개 사역자로서의 사인(individual figure)이 아니며, 오히려 공교회적인 공인(public figures)이기에, 그 부양을 개별 교회 혹은 학교 자체의 책임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노회와 대회 차원의 전체 교회의 책임으로써 부양하도록 한 것이 일찍이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대로부터 확고한 신학적 맥락과 원리로 정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그저 얼마 정도의 사례금만 얻을 수 있다면 교단이나 교파에 상관이 없이 어디라도 찾아가서 헤픈 강의의 보따리를 풀어놓곤 하는 박사들과, 그조차도 여의치 않아서 온갖 대리적인 일들과 허드렛일꺼리를 전전하는 목사들에 대해 노회와 총회가 급선무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 정말 목회적 소명과 의지가 있는 목회자와 신학적 소양과 건전성을 담보할 수 있는 지식을 갖춘 학자인지를 검증하는 것이 요구(이미 함량미달에 아무런 소명도 없는 자칭 사역자들이 넘쳐나기 때문에)되지만, 그러한 검증 가운데서도 여전히 여의치 않은 목사와 신학자들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부양하는 것이 이 시대의 기독교가 개혁할 가장 실천적이며 직접적인 부분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노회와 총회에서 온갖 허울뿐인 상비부서들과 상비업무들을 과감하게 철폐하고 폐지하는 지략이 필요한 것이니, 그저 예산을 소모하기위해 아무런 도덕적 거리낌도 없이 벌이는 온갖 일회성 행사들이나 선심성 행사들에 들어가는 돈들이 다름 아닌 성도들의 헌금(연보)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며, 그 헌금을 사용함에 있어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는 신 25:4절과 딤전 5:18절의 말씀임을 명심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