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하의 신학덕담『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2 』
황상하의 신학덕담『 여호와의 일기 』
모세가 그의 백성에게 “생명을 택하라”라는 말씀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는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살아 있는 존재는 생명의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존재에게 살기 위해 생명을 택하라는 말씀은 그 생명이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생물학적 생명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 생명의 특징은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힘들게 비즈니스 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이유도 역시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택하라고 한 생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생물학적 생명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숨을 쉬고 먹고 배설하고 무엇을 보고 말하고 생각하고, 그리고 아기 낳고 키우는 모든 일이 생명현상입니다. 문화 활동도 생명현상에 속합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작곡하고 시를 쓰는 것도 생명현상입니다. 생명현상 중에는 부분적으로 육체적인 현상이 있고 정신적인 현상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살아 있기에 경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기에 세상의 온갖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이 모두는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누구나 이렇게 숨 쉬고 살다가 모든 생명현상이 끝장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순간이 갑자기 오기도 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는데 예외는 없습니다.
그런데 생물학적 생명과 우리가 살기 위해 택해야 할 영적 생명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구분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둘은 하나입니다. 생물학적 생명과 영적 생명의 구분은 생명현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지향성에 있습니다. 생명현상이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에 머물 수도 있고 그것이 영적 생명현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문제는 우리가 그 사실을 평소에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끔 잠시 생각하다가도 그 생각을 금방 멈추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에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것보다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폐단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도 스스로 느끼기에 더 절실한 것에 집착합니다. 그 절실한 것이 하나님과 생명에 대한 사람은 참믿음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그 절실한 대상은 여러 가지인데, 가장 대표적인 대상이 돈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누구에게나 돈은 참 절실합니다. 돈은 우리의 삶의 환경을 쾌적하고 편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절실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절실한 것은 돈은 생존 자체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이 있으면 삶의 질이 나아진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분 때문에 그 사실을 숨기고 안 그런 체하지만 우리는 별수 없는 인간입니다.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절실한 것들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바로 생명 자체에 관한 관심을 줄어들게 하는 것입니다. 기본적 의식주 때문에 절실한 것이 아니라 더욱 안락한 삶의 질을 위해 돈의 절실함을 느끼는 동안 욕망은 점점 늘어나고 평화와 안식은 줄어듭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현상이 점점 더 극대화됩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가 다 이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족 중 누구라도 지나치게 돈이나 인기나 인정이나 자격조건 같은 것에 절실함을 느끼고 집착하는 동안 그 가정은 편안한 곳이 못 되고, 교회가 성장해야 한다는 데 지나치게 집중하게 되면 하나님을 놓치게 되고 하나님을 놓치면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인생살이와 신앙생활의 메커니즘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원인은 생명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생명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거나 착각합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거나 착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 숨 쉬고 먹고 걷고 취미활동을 합니다. 우리가 눈을 뜨기만 하면 집값, 일자리, 경제지표, 물가, 정치 이야기를 듣습니다. 교회에서도 하나님 이야기보다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요즘은 누구나 눈만 뜨면 온통 정치 전쟁 경제 선거 코로나 자연재해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에게 절실한 문제들입니다.
모세에게 생명을 택하라는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도 오늘 우리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광야를 지나오면서 생존 자체가 언제나 절실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그렇지 않을 것 같았겠지만 그런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지금 생명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집중하였습니다.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면 그들의 관심이 바알에게 쏠릴 게 분명합니다. 그들이 그토록 가나안에 속히 들어가기를 바랐던 것은 유랑의 삶이 아닌 정착의 삶이고 빈곤의 삶이 아닌 풍족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라던 것들을 이미 누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 신이 그 모든 것을 준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이 모양 이 꼴인데 바알을 섬기는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맞게 될 이러한 상황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판단이고 모세는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불안과 가난한 광야 삶에 진저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러한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생명을 택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을 택하라는 말은 생명에 집중하라는 뜻인데, 생명에 집중하라는 말씀을 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일반적인 생명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너무 엉뚱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숨 쉬고 먹고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일에 집중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을 시시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생명의 실체입니다. 사람이 어떤 일에 종사하건 일단 숨 쉬고 먹고 보는 일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들의 이치와 원리와 가치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야말로 생명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남다른 스펙이나 외모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행복의 조건들이 있을 것입니다. 좀 더 나은 집, 좀 더 성능 좋은 자동차, 좀 더 여유 있는 은행 발란스, 좀 더 나은 보험 등 뭐 그런 것일 것입니다. 그 모든 것 중에 숨 쉬는 것과 보는 것과 듣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먹고 배설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을 택하라고 말한 이유는 그런 삶이 우리의 일상을 새로운 차원으로, 즉 생명 충만한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는 뜻하지 않은 여러 가지 갈등과 충돌로 인한 불편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친구 관계와 가족 관계도 그렇고 교우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이런 갈등과 충돌은 자기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기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자기 기준이 옳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습니다.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이 작동되지 않는 무의식이 있기도 하고, 충동적으로 자기를 합리화하는 본능이 작동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한 가지 사실만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면 이런 갈등과 충돌을 대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선택하고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불편한 일들을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주변에 나를 짜증 나게 하는 사람이 있어도 내가 숨을 쉬고 먹고 소리를 듣는 일에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면 용납할 수 있습니다. 생활비가 줄면 은근히 걱정되겠지만 생명 자체에 집중하는 사람은 그 상황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영적 생명입니다. 영적 생명현상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 사실을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 30:20)라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에 대하여 “그는 네 생명이시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생명현상 모두가 결국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생명이란 하나님과 분리해서 말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는 인간의 행위는 죽은 것과 같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산책해도 한 사람은 그저 건강을 위해서 산책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의식하고 중력을 신기하고 황홀하게 느끼며 산책합니다. 두 다리 보행의 안전성을 생물학적 메카니즘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듣지 못하거나 말하지 못하던 사람이 듣게 되고 말하게 되는 순간의 황홀감을 일상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 안에서 살기 위해 생명을 택하는 노력 없이 우리가 황홀한 경험을 할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생명을 취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무언가에 쫓기면서 삽니다. 생명의 황홀한 경험은 구도 정진의 자세로 생명에 집중하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생명을 화두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이방 종교에서는 세속을 떠나 출가하여 도를 닦으려고 수도승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시장 한가운데서 자기 일에 집중하여 성실하게 일하며 수도승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 생명에 더 집중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파당을 만들고 인기에 영합하고 누가 크고 누가 먼저냐 하는 문제로 싸웁니다. 그런 사람은 생명의 신비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에 집착합니다. 생명의 신비를 황홀하게 경험한 이들은 교회에서 누가 장로고 누가 집사고 누가 권사고 누가 목사냐 하는 문제로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주신 딱 한 번의 선물입니다. 모세가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생명을 택할 것인지 생명 아닌 것을 선택할지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선택해야 합니다. 한 번의 선택으로 평생을 지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선택해야 합니다.
모세는 생명을 선택하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라고 합니다. 여기에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청종하고 의지하라고 합니다. 생명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은 단순한 명상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 말씀을 의지할 때 생명을 감지하고 그 신비하고 놀라운 현상에 감격하게 됩니다. 모세가 한 이 엄청난 의미가 함축된 하나님이 “네 생명이시다.”라는 말씀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평생 묵상의 주제로 삼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그렇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씀을 통해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생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아름답고 선합니다. 그 사실을 실제로 믿는다면 자기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선한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연봉이 적다고 삶이 위축되지 않습니다. 자기 삶이 아름답고 선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다른 사람의 삶도 아름답고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게 보이는 부분이 있다면 나의 영적 시력을 교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최고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고 원수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내 인격의 고결함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과 맥락에서 바울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의 임무는 생명을 생명답게 살아내는 일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생명이라고 선포했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곧 생명이라고 믿습니다. 생명현상은 하나님이 만물 가운데 내재하심을 경험하게 합니다. 땅과 하늘, 불과 바람, 새와 꽃, 그리고 빵과 포도주와 노동과 쉼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나게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은 은폐의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가면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가면을 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위에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을 택하는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하시는 일과 하실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 생명을 택하는, 생명이신 하나님을 택하는 황홀한 생명 경험이 풍성한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 30:19-20)
황상하의 신학덕담『 여호와의 일기 』
성경을 언약의 책이라고 합니다. 구약, 신약 이라는 말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언약의 맥락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고 또한 구속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지만 모든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정확하게 기록한 것은 아니고 또한 사건들의 인과 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나라가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묘사하고 있고 그와 중요한 관련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지나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와 계시의 주체이신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 관해서는 오랜 시간을 할애하여 중요하게 다루고 반복하여 설명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뜻은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는 어려운 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치 일기를 쓰시듯이 누구나 읽어서 깨닫도록 기록하셨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는 그의 책 “하나님의 큰일”(Our Reasonable Faith) 제6장에서 이스라엘의 역사 기록을 “여호와의 일기”라고 부르는 것이 전혀 부당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이 하신 일이 무엇이고 이스라엘을 어떻게 돌보셨는지를 진리대로 일기처럼 기록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당신이 유일한 참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셔서 당신의 백성들이 다른 신을 생각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입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모두가 주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행할 것이라고 다짐하였습니다.
후일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유업을 받게 되자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라고 결단을 촉구하자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수 24:15,16)라고 하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 하나님의 책망과 결단하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잠시 흔들렸던 자신들의 마음을 돌이키고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일을 직접 경험하였던 세대는 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가 되었을 때 그들은 조상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시고 인도하셨던 하나님보다 가나안의 신을 더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창조적으로 우상을 만들어 섬긴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들을 수용하였고, 여호와를 섬기되 이방 신으로 섬기는 것처럼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우상을 섬긴 것은 아닙니다. 애굽에서도 우상을 섬겼고, 출애굽 후 광야에서도 우상을 섬겼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이 섬긴 우상은 다양했습니다. 섬기는 우상이 다양했다는 것은 우상이 완전한 신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민족 우상(엘, 못, 얌, 몰렉, 밀곰), 페니키아인의 우상(바알, 아세라, 아스다롯), 앗시리아 우상(불신과 별신)들을 섬겼습니다.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은 온갖 신들을 다 섬기며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하는 제단도 보았다고 하였는데, 이스라엘도 그런 수준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첫째와 둘째 계명을 범한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사사 시대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한 편으로는 배교와 형별로 인한 공포와 두려움의 시대였고, 다른 한 편으로는 용서와 구원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사사 시대는 배교에 따른 형벌과 용서와 구원이 반복되는 혼란의 시기여서 각 사람은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였습니다. 이런 혼돈은 사무엘 말기에 이르러 왕정으로 끝났으나 솔로몬 이후 나라는 남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분열이 아니라 북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의 주도 하에 단에 제단을 만들어 우상 제사를 도입하여 2세기 반 동안 여호와 하나님 배교의 역사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과의 언약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 배교의 역사라고 할 특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으면 벌을 내리고 회개하면 용서하셨는데, 거듭된 범죄와 배교에 뜻을 돌이키기에 지치셨습니다. 개역 성경 예레미야 15:6절에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염증이 났음이로다.”라고 하였는데 개역개정에서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고 번역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한 마디로 하나님을 용서에 지치게 하는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배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용서에 지치게 하는 이스라엘이지만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수 없이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역사 가운데 수세기에 걸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경건하게 살도록 남겨두신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다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신을 섬기며 죄를 지어도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한 자들을 남겨두셨습니다. 온 민족이 다 배교를 하는 가운데 외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엘리야는 배교를 하지 않은 자가 자기 혼자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영적으로 어둡고 혼란했던 엘리야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7 천명의 경건한 자를 남겨두셨습니다. 이들에 대한 구체적 형편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경건한 자들이었고, 의로운 자들이었으며, 믿음의 사람들이었고, 믿음을 지키고 경건한 삶을 위해서 궁핍하고 가난하게 된 자들이었습니다.
시편에는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경건한 자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항상 그들의 신앙을 야곱의 하나님께 두었고 하나님의 언약을 거슬러 행동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하나님을 갈망하였습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 사는 것을 다른 곳에서 천 날 사는 것보다 낫게 여겼고 악인의 좋은 집에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법을 묵상하고 언약의 약속에 굳게 서서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믿음의 승리를 노래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지기 싫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었고 종일 즐거움으로 읊조리고 묵상하는 생명의 양약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되풀이하고 지키는 데서 지혜와 참된 지식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 어두운 배교의 역사를 그들은 신실한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어렵고 곤궁할 때는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를 드렸고 진심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수도 없이 경험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5,6)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처럼 의롭고 인간에게 이로운 법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시대가 어둡고 혼란하고 고통스러울수록 하나님의 약속에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한 언약을 절대로 단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은 당신의 거룩한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깨뜨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세상이 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언약의 백성마저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께서는 그 절망적 환경에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셔서 선지자로, 혹은 성경 기자로, 지혜자로, 전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은 현실적 고통 가운데서도 머리를 들고 성령의 조명하시는 빛으로 종말을 바라보면서, 새날을 예언하고, 다윗의 자손과 주님을 예언하고, 이새의 줄기, 임마누엘, 여호와의 종, 언약의 사자, 언약, 성령의 부어 주심에 대해서 예언하였습니다.
구속의 역사만이 여호와께서 쓰시는 일기가 아니라 일반 역사도 하나님의 일기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인간의 역사입니다. 인류는 하나님을 대항하다가 벌을 받고 경건한 자들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벌을 거두시며 번성하게 하시는 일이 반복되는 역사입니다. 현실이 어둡고 암울할수록 사람들은 낙심하고 좌절하기 쉽지만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경건한 자들이 있습니다. 경건한 자들은 어둡고 고통스러울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합니다. 아마 지금처럼 어둡고 혼란하고 거짓이 만연했던 시대도 많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믿음 없이 바라보면 현실은 낙심할 수밖에 없지만, 악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뜨게 하시니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믿는 이들은 자신의 왜곡된 신앙을 바로 세우게 하시고 하나님께 대항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거짓되고 악한 자들은 그러한 것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고 자신은 물론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로 말미암아 행하신 바를 너희가 눈으로 보았거니와 바알브올을 따른 모든 사람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멸망시키셨으되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