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교육문제

【종그니칼럼】본연의 자리

2023-01-03     김종근 목사

시대의 단면이랄까? 요즘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은, 노인 증가에따라 계속해서 늘어 나고 있는 반면에, 어린이집은 점점 문을 닫고 있단다. 어린이집에 들어 올 아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격세지감 이랄까? 참 믿기 힘든 현실이다.  이제는 요양원에서 케어 할 인력을 구하기도 버겁다.  그뿐 아니다. 주방에서 일할 조리사도 마찬가지다.  옛말에 "버르디기가 효자노릇 한다."는 옛말이 있다. 여기서 버르디기는, 오냐 오냐로 기른 아이가 아니라, 애정없이 키운 이이를 이름이다. 어쨋거나 버르디기로 자랐건, 옥동자로 자랐건, 요즘 젊은이들은, 재벌 가문의 아들처럼 금수저로 태어난 것이 아닌 이상, 현실의 장벽이 너무 높아 세상을 헤쳐나가기가 버겁다. 게다가 어리광이나 부리고, 오냐  오냐로만 키우게 되면, 온실에서는 노지의 어려움을 알 까닭이 없기때문에, 자라서도  자립정신이 낮아서 홀로서기에 어려움이 있다. 

내가 아는 어린이집 원장의 독백을 들어보면, "나이가 7살인데도 점심식사 시간에 음식을 받으면, 스스로 밥을 먹어야 하는데, 떠먹여 주길 마냥 기다리고 가만히 있어요." 집에서는 홀로 서기를 할수 있도록, 자립심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아이가 하나이다 보니, 일곱살이 되어도 일일히 다 챙겨 주니, 일곱살이 되어도 응석받이가 되어 있는 거다.  이처럼 너무 오냐 오냐로 키우게 되면, 충분히 스스로 할수 있는 데도, 해 줄때까지 응석을 부리게 되는 거다. 그래서 지금 애들이 덩치만 컸지, 정신년령은 멈추어 있고, 홀로서겠다는 독립심도 요원한 것이다. 그래서 옛 선인들이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한 것이다. 몸은 다 자랐는데 아직 지 앞가림도 못한다면 어떡게 해야 할까?  

그래서 홀로서기는, 정말 남의 얘기가 아니고 바로 자식의 문제이자,  자식을 기르고 있는 바로 내 문제임과 동시에, 국가 백년대계의 문제다. 더군다나 지하 자원이 없는 우리에게, 인재(人材)야 말로 최상의 자원인 것이다. 그리고 또 오늘의 젊은이들 에게는, 지난 아날로그 시대보다, 오늘의 디지탈 사회가, 옛날처럼 기회가  많지도 않아서 문제가 더 심각하다.  그러니 이제 나라에서는, 경쟁사회의 일등 제일주의를 지양하고, 능력일변도가 아닌 인성을 강조하는 교육으로, 국가 대계인 교육의 틀이 바뀌어 져야겠다.  

내가 아는 육아 보육원장이, 스웨덴에 들어가서 복지학을 공부하다 귀국했는데, 그곳에서는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중에서, 학과 점수가 높은 사람이 뽑힌게 아니라, 환자에게 배려심 있게 교감을 잘 하는 사람이 발탁되어, 장학금으로 계속 공부할수 있도록, 학교에서 배려해 주는 학교의 선발기준을 보고, 아! 바로 이것이 진짜  살아 있는 인성교육임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바로 이게 교육의 본질이요, 지향점이며, 참 교육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스웨덴을 비롯 유럽 여러나라에서도, 시험을 서로 도와주면서 풀고 미처 따라오지 못한 학생들에게 힘을 더 북돋아 주고, 교수를 더 투입하여 종래는 모두 합류시키는걸 보고, 누구를 도태시키고 떨어 뜨리는 경쟁이 아닌, 진정으로 서로 도우면서 함께해 나가는, 호혜와 상생의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진정 살아 있는 교육의 현장을 체험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4지선다형 시험문제처럼, 인생은 넷중에 하나를 고르는게 아니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 지금까지, 우리나라 교육은 구태의연하다. 이러한 교육의 앙상레짐을 타파하고, 미래지향점을 찾아 성적위주가 아닌, 인성을 중시하는 살아 있는 교육으로, 새롭게 전면 쇄신 되어야 한다.

이 어린이집 원장은, 자기 딸과 초등학교때부터 교육에 대해서,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해 왔음에도, 고등학생이 되자 밤 늦게 까지 책상에 앉아, 책만 보고 있는 교육 현실이 안타까와서,자기 딸을 과감히 통상적인 교육의 틀을 깨고, 고등교육을 검정고시로 대체케 하여, 지금은 보통보다 한 살빠른 대학생이 되었단다.  대학 2학기때도 250만원 장학금을 받았고, 지금 2학년 회장으로 학교에서 50만원을 받고, 학교 방과후에는 알바 다니고, 학교와 사회현장에서 살아있는 교육을 체험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단다. 알바 열심히 해서 돈 모아지면, 카페를 차려 경제적으로 독립하는게 꿈이란다. 그래서 그동안 바리스타등 필요한 자격증을 10개가 넘도록 취득했단다.

어쨋든 이 나라 어린이들은 장차 이나라를 짊어질,  더할나위 없이 소중한 꿈나무들이다. 이 꿈나무들이 교육의 못자리에서, 한 그루도 낙오되지 않고 다 잘 자랄수 있도록, 할수만 있으면 나라의 동량이 될 묘목으로 여기고, 유치원에서 부터 대학교까지, 나라에서 다 해결해 주는 교육의 틀을 새로 짜면, 젊은 부부들이 저마다 자녀를 두게 되는, 그래서 나라의 인구 감소 문제도 해결할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 무엇은 도와주고, 무엇은 부모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타고난 적성에 맡게 선별해서, 모든 교육비를 나라에서 책임지는 교육정책을 건의해 본다. 

그렇게하면 지나친 낭비도 줄어들고, 각분야에 필요한 재원들, 즉 수요와 공급이 가시적으로 원활하게 될 것이라 여겨진다. 인재풀을 나라에서 총괄적으로 하게 되니, 인재(人材)가 풀가동 되어 적재적소에 투입될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될 것이 요즘 소아과가 전국적으로 사라지고 있고, 의대에서 소아과를 지원하는 학생도 없다고 한다. 이처럼 '인기몰이식 지망', 이것은 개인과 국가의 시각차가 이렇게 심각하다는 반증이다. 이러한 재원의 수요 공급을 원활하게 하기위해서는, 인재 풀을 수요 공급에만 의존하지 말고,  나라에서 거시의 시각을 가지고 운영해야 한다. 물론 자녀 교육을 개인이 하겠다면,  그것을 제한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거시적 바탕위에서 나와,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를 이끌어 가야 하는데,  우리는 곧잘 육신의 소욕을 따라, 아니면 편의를 따라, 속단할 때가 있다. 그럼 그 과실은 부메랑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 올 것이다.
          
          종그니가 

【종그니칼럼】본연의 자리

구약성경 사무엘상 25장 을 보면, '나발'과 그의 아내 '아비가일'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발은 당시에 제일가는 부자였지만, 하나님도, 사람 사는 도리도 모르고 오로지 돈만 아는, 영적으로 아주 무지랭이 같은 자였다. 예나 지금이나, 진실로 사람이 사는 것은, 재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 은혜이다. 왜냐하면 자연도 동물도 사람도, 태생적으로 사랑으로 어우러져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사울의 칼 끝을 피해 풍잔노숙할 때, 나발 소유의 수천마리의 가축들을, 다웟의 부하들이 살뜰하게 보살펴 주었음에도, 은혜를 모르는 교활한 나발은? 이를 모르쇠하고  문전박대 하자, 진노한 다윗이 나발을 응징하러 가던 중, 이 소식을 듣고 먹거리를 준비하여 달려온,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나발을 대신하여 눈물로 남편의 용서를 빈다. 여기서 어진 아내의 진면목을 보게된다. 그후 나발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요절하였다. 이로 보건대 재물은 복이 아니라, 양날의 칼처럼 재앙일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곧잘, 부부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이나 다툼의 원인을, 대개 성격차이에서 찾으려 한다.  형제간에도 인성이나 생각의 폭이 저마다 다를수 있는데, 하물며 가풍이 전혀 다른 부부가, 한 가정을 이루게 되면, 부족한 것은 채우고, 모나거나 지나친 것은 다듬어서, 성 가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는 말처럼, 사리(事理)를 내 중심으로 보게 되면, 우리는 자신의 허물을 보기 보다, 상대의 허물에만 눈이 더 밝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곧잘, "나와 아내, 혹은 여당과 야당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변명을 늘어 놓게 된다. "나와 내 아내, 혹은 상대 당은 생각하는 발상이나 자세가 달라도 너무 달라, 손발이 잘 맞지 않는다."는 변명이다, 그러나 대자연을 보시라! 바람 결을 따라 흔들리는 갈대는 꺽이지 않는다. 대나무도 그러하다 소금은 음식에서 녹아야 맛을 내듯, 내 고집이나 소아적인 나를 버리고, 너와 내가 하나 되는, 더 큰 자아에 마음의 눈을 열자!

내 조카 주영이는 밤 열두시가 지나, 새벽 한 두시쯤 되어야 잠자리에 든다. 아마 결혼한 지금도 그럴 것이다. 나는 밤 9시가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세시쯤이면 영락없이 잠에서 깬다. 다행스러운 것은, 내 아내와는 잠자는 시간이 거의 똑 같아졌다.  살아가는 습관이나 취미나 기호같은 것은, 서로 맞춰가면서 살아가면 될 것이다. 나와 내 마누라 와는 첨엔 맞는 구석이 없을만큼 서로 다른 것이 많았다. 그래서 젊은 날에는 언쟁도,부딛칠 때도 많았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터득되는 것이, 아내에게 내 성미나 내 욕구에 맞춰 따라 오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아내의 마음에 맞춰가는 것, 그것이 가정화목의 토대요, 남편됨의 그릇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우격다짐으로 매사를 내 고집대로 끌고 가려하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졸렬한 발상이다. 생각의 폭을 넗히면 시야의 폭도 인생의 폭도 넓어지더라.

교회의 목사는 생명의 말씀을 단상에서 설교로만 가르치려 한다. 과연 목사는 단위에서의 설교가, 삶속에서 녹아나고 있는가? 가끔 나는 이런 자책을 할때가 있다. "내 아내는 물 한 컵을 마셔도, 사용한 컵은 즉시 씻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이를 알라!  "제주도엔 유자가 잘 된다.  그러나 강원도에다 심으면 탱자가 된다. 기후와 토양의 차이 때문이다. 유자는 유자대로 탱자는 탱자대로 쓰면 된다. 아내가 됐던, 자식이 됐던! 직장동료가 됐던, 내가 원하는 것을 대접받기 전에 네가 먼저 섬김의 본을 보여 보이시라.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그가  아내를 다그칠 때, 하늘의 음성을 들었단다.  "야, 이 놈아! 네가 그렇게 잘하면 잘하는 네가 해라! 잘 못하니까 네게 붙여 놓은 것 아니냐.” 이처럼 생각의 전환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게 있다.  "나의 은사는 무엇일까?" 하는 물음이다. 하지만 너무 간단하게 은사를 알 수 있다. 내 속에서 내 자신에 대해, 혹은 상대에 대해 일어나는 불평과 불만, 바로 그것이 내 자신의 은사인 것이다.  
 
일테면, 내는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방안에 쓰레기가 나뒹구는 데도, 그것이 눈에 들어 오지 않으므로 전혀 불편할 것이 없다.  그래서 내는 그 것을 밟고 다닌다. 그 반면에 내 아내는 불편할 뿐아니라 화를 낸다. 이러한 까닭은, 내 아내가 내보다 정리정돈에 탁월한 달란트가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은 이 좋은 은사를 내 아내에게 주신 목적이, 내 마음을 박박 긁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은사는 사랑하는 사람, 혹은 동시대 를 사는 모든 이웃을 섬기라고 주신 선물인 게다.  이 사실을 깨달은 이후 나는, 아내를 대할 때, 맘이 안맞으면 다짜고짜 짜증만 내던 태도가, 서서히 바뀌게 되었다. 내 태도가 바뀌니 내 자신에게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 났다. 누구의 변화인가? 나의 변화를 통해, 내 주위 환경도 달라져 가는 것이다. 이 변화!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는 것, 바로 이 '깨달음'은, 내가 이제야 철이 들었다는 증거다. 하나님 자녀됨의 본분으로,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증거다.

내가 젊었을 때는 하나님께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능력을 달라고 기도 했다. 세속적인 웅지였다. 그러다 중년이 되어, 인생이 덧없이 흘러가는 것을 깨달은 후로는, 동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과 함께, 평안히 살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다. 이제 늙어 나의 우둔함을 깨닫게 된 지금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바로 나를 변화 시켜 달라고 기도한다.  만약 내가 첨부터 '이런 기도' 를 드렸더라면?  그러나 바로 이것이 깨달음이요, 본연의 자리로 돌아옴이다. 이제 우리 모두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큰 바다의 물을 모두 쏟아 부어도, 밑이 없는 그릇처럼, 채워지지 않는 그릇과 같다.

           종그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