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 묵은 해야 가거라.
【종그니칼럼】처음처럼
묵은 맘도 가거라. 요즘 뉴스를 보면, 엽기적 살인이나 보이스 피싱을 능가하는, 온갖 비리나 사기행각들이 난무하고, 사람을 살해하기를 마치 생리작용하듯,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하고 있다. 어느 여인은 전 남편과 그리고 따로 사권 내연 남을, 시차를 두고 살해하여, 그 시신을 큰 고무다라 통에 유기했는데, 그 두 시신이 백골이 되기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전 남편에게서 난 아들을, 시신이 있는 바로 그곳에 가두고는, 며칠에 한번씩 먹거리를 던져 주었다. 그러고도 이 여자는 외국인과 동거하고 있었다. 이게 인간이라 할수 있는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명천지 현대사회에,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이런 기가막힌 독버섯들이, 우후죽순처럼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구나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cctv가 아무리 촘촘히 설치되어 있어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입안에서 기생하는 것처럼, 시야를 벗어난 사각지대는 곳곳에 널려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우리의 시야는, 불안 불안한 정계(政界)에 온통 쏠려 있다. 모두 일방통행이고 정반합이 없다.
요즘 이 나라가 가야 할 길은 먼데, 윤석렬 국힘 정권은, 여당 내 의견을 수렴하여, 쓴소리를 내는 이들과도 하나를 이루어야 하는데, 거리두기를 하고, 직전 정권의 가리워진 비리를 발본 색원하고자, 전방위적으로 수사하고 있는 것같다. 이는 양날의 칼처럼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현 정권의 이러한 강력한 추진력의 원천은, 검찰의 힘에 있지 싶다. 쾌도난마처럼 시원시원한 것도 있지만, 자칫 천려일실의 우를 밞을까 우려스럽다. 우선 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롯, 그동안 영오의 몸이 되어 있던 많은 우익 정치 인사들을 화끈하게 사면시켰다. 사면되어 풀려난 이들의 제 일성은, 나는 무죄하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이러한 초법적 특별사면이, 과연 공의롭고 정당했느냐는 차치하고, 이렇게 너무 우향 우 하다가, 필경 북한은 좌(左)만 있고, 남한은 우(右)만 있는, 혹여 그런 시각 그런 형국으로, 평행선을 달리는 일방 통행식 정치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다. 사회적 존로서의 인간에게는 두 귀와 두 눈이 있는 반면에 입은 하나이다. "수신제가 후 치국평천하" 라 하였다. 바라건대 국민의 우려가 기우에 머물기를 바란다. 나라를 다스리기 전에 언제나 나 자신부터 잘 살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어렸을 때는 연탄도 석유도 없었을 때다. 산에 가서 땔 나무를 해 와야 만, 밥도 짓고 방에 금불도 때곤 했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박정희 군사 정권이 들어서자, 산에서 나무를 하기조차 힘들었다. 혹여 소나무라도 베는 날에는, 산림계에 끌려가 혼쭐이 나곤했었다. 그래서 솔잎이나 풀을베어 말려 땔감으로 사용했다. 이런 온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오늘의 산림녹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자린고비와 보릿고개가 민초들에게만 있었던게 아니고, 그 땐 온 나라가 이 지긋 지긋한 가난에서 벗어 나고자, 온 국민의 맘이 한맘 한뜻이 되어,지도자와 민초의 마음이 하나였었다. 그래서 그 힘의 동력은 실로 대단했다. 진실로 그러하다! 독불장군식으로 자유와 법치, 민주라는 나무가 저절로 자랄수는 없다. 위정자나 국민 모두가 상생의 한 맘으로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민주와 자유 그리고 현대화라는 나무를 성장시킬수 있을 것이다.
중국 춘추 시대때의 이야기다. 주(周)가 처음 호경(鎬京)에서 낙양(洛陽 )으로 천도 할 때까지는, 周가 중국 천하를 호령하였으나, 소위 칠웅(진,초,연,제,한,위,조,) 이라 일컷는, 군웅들에 의해 천하가 사분오열 되어 할거하던 때에, 갑자기 위(魏)가 제(齊)나라를 쳐들어 왔다. 당시는 마치 수탉들이 닭 싸움 하듯, 걸핏하면 쌈박질하는 소위 칠웅(七雄)이 할거하던 시절이었다. 이 갑작스런 전쟁으로, 齊나라 백성들은 갈피를 못 잡고 우왕 좌왕하다가, 허겁지겁 피난길에 올랐다. 그런데 이 피난 길에 한 젊은 여인이,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피난을 가고 있었다. 아낙네의 머리에는 우선 당장 먹을 식량을 담은 보따리를 이고, 등에는 갓난 아이를 업고, 또 한 손으로는 어린아이를 붙잡고, 허둥대며 도망가고 있었다. 한참을 도망치다 보니, 저 멀리 뒤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위나라 군사들이 피나민들을 향해 화살을 쏘아대며 쫓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상황이 다급해진 것을 직감한 이 젊은 여인은, 무슨 생각에선지 업고 가던 갓난아이를 길가에 버려두고, 손을 잡고 가던 아이만을 들쳐 업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때 군사들을 지휘하던 위나라 대장이, 이 장면을 보게 되었다. 이를 기이하게 생각한 대장은, 그 즉시로 부하를 시켜 그 여인을 잡아오게 하였다. 잠시후 그 여인은 말을 타고 쫓아 온 병사에 의해 사로잡혀 오게 되었다. 위나라 대장이 여인을 보고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업고 가던 아이를 버려 두고, 다 큰 아이를 업고 도망쳤는가?" 그러자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장군님! 다 사정이 있기에 그리하였습니다. 실은 업고 가던 아이는 제 아이 이고, 손을 잡고 가던 아이는 제 윗 동서의 아이 입니다. 어젯밤 갑작스런 전쟁이 일어나, 피난 길을 떠나는데, 병들어 누워있던 손윗 동서가, 피난을 가지못하게 되어, 내가 언니의 아이만은 꼭 돌보겠다고 약속했지요. 그래서 두 아이를 데리고 나섰는데, 이 와중에 함께 가다 가는 모두 죽을 것같아서, 제 아이를 버리고 형님 아이를 업고 도망가던 중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위나라 대장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휘하 장수들을 불러 말하였다. "나팔을 불어 군사들을 불러 들여라! 전쟁은 여기서 끝내고 본국으로 회군한다. 이 젊은 여인이 이렇게 의로울 때에야, 이 나라에 의로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느냐! 이처럼 어진 백성들을 죽이고서는 결코 승리라 할수 없다! 어서 돌아가자!" 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위나라 군사들은 서둘러 돌아가기 시작하였고, 피난 길을 떠났던 제나라 백성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잃었던 평화를 되찾았다. 이름 없는 한 여인의 아름다운 선행이 적장에게 큰 울림을 주어, 백척간두에선 전쟁 참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내는, 실로 백만대군에 버금가는 막중한 역할을, 한 무명의 여인이 감당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휴화산과 같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이 칠십여 성상을 대치국면에 있다. 언제 전쟁의 불장난을 저지르게 될지 모르는,기막힌 위기의 순간들을 지내오고 있다. 이것은 한갖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그 누구라 할지라도 자칫 세치 혀 때문에, 지난 육이오 이상의 국난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우를 범치않기를 바란다. 자존심이 아니라 인내심이다. 어느 정도는 자존심이 주어진 상황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면도 혹 있겠지만, 그러나 자신을 다스리는 자율을 벗어나게 되면, 오만의 노예가 되기 십상이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 중에, 우리 스스로 자초하지 않은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허용하는 조건은, 언제나 조심 또 조심하라는 것이다. 주여! 새해에는 더 이상 맘 조리지 않는, 상식이 통하는 가견적 사회가 되게 하소서!
종그니가
【종그니칼럼】처음처럼
내가 어렸을 때, 박찬원 선생님이 없었다면, 주의 종(奴)으로서의 오늘의 내가 없었을 것이다. 열아홉 더벅머리가 서울로 유학을 올 용기도, 오로지 은사님 덕이다. 선생님이 운영하는 사설학원에 둥지를 튼 나는, 자취를 했는데 국수하나 삶을 줄 몰랐다. 반찬만드는 것은 엄두도 못내, 호떡 하나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대 소변을 보는데 요금 5원을 아끼려고, 소변은 골목에서 한 발 들고 보고, 대변은 한 밤중에 신문을 펴 놓고 일을 본 후, 휴지통에 내다 버렸다. 공부는 종로 2가 EMI학원 원장 안현필 선생을 만나, 근학생으로 공부를 했다. 이렇게 자린고비로 일만 오천원으로 그해를 지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시작한 서울 유학이, 그 이듬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려고, 시골 땅을 팔아 마련한 부모의 유산을 몽땅 사기당하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도 못하고 자살 후유증으로 말기 폐결핵을 얻어, 또 천금같은 젊은 날 만 3년여의 세월을, 투병 생활로 허송하여야 했다. 아! 그 모진 질곡의 세월을 내가 어떻게 살아왔던가! 이제 와 하나 하나 되뇌어 보니, 그 모진 세월들이 모두 다, 나를 나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10여년 동안 내일이 없는 그 암울한 세월을, 오늘에 이르러 돌이켜 보니, 실로 형언할수 없는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1980년 마침내 주의 종이 되는 날, 아! 나같은 무지랭이를, 주님은 당신의 종으로 쓰시려고, 나를 그렇게 다듬으셨구나! 이후 근 20년 동안 빛도 이름도 없이, 서울, 하동, 부산 영도에서 일반목회로 종(奴)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1998년 전혀 노후가 준비되지 못한, 늙은이들를 위한 무의탁 시설을, 청평에 마련하여, 십여년 동안 섬겨오다가, 우리나라에도 요양원 제도가 실시 되자,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춘천에, 아흔 한분의 요양시설을 마련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나보다도 훨씬 더 치열하게 살아 온 노부부가 있다. 그리고 그의 삶의 끝이 석양의 저녘 노을보다 더 아름답다. "노점으로 시작하여 평생 모은 돈 400억원을, 내 나라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기증한," 노부부의 기사를 보았다. 내 새끼보다 이 나라를 이끌 젊은이를 더 크게 본 것이다.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사는 김영석(91)ㆍ양영애 (83)씨 부부는, 30여 년간 서울 종로 5가에서 1960년부터 손수레 노점으로 시작했다. 교통비를 아끼려 매일 새벽 한 시간씩 걸어, 도매시장에서 과일을 떼 왔다. 밥은 노점 근처 식당 일을 도와주고 해장국으로 해결했다. 두 사람 모두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다. 이북 강원도 평강 출신인 김씨는, 광복후 혼자 월남하여,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경북 상주 출신인 아내 양씨도 6·25전란때부터, 피란 다니며 떨어진 사과를 주워다 팔았다. 부부는 과일장사로 번 종자돈에 대출을 보태, 십여년의 자린고비 끝에, 1976년 청량리 상가 건물을 한 채 샀다.
이렇게 주변 건물을 하나씩 사들일 때도, 부부는 남들이 내 놓은 옷을 얻어다 입었다. 두 사람은 이렇게 마련한 청량리일대 땅과 건물 여덟채를, 고려대에 기부하기로 선뜻 마음을 정한 것이다. 고려대는 "시가로 400억원 상당의 가치"라고 했다. 개인 기부자로는 고려대 역사상 최고 액수다. 7월 25일 오전 청량리동 집에서 기자와 만난 노부부는, "후련하고 뿌듯하다"고 했다. 아내 양씨는 "평생 돈을 쓰고 살아본 적이 없어서 어디에다 써야 할지 몰라, 큰 돈이니 큰 데다 써야겠다고 생각해, 대학에다 기부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부부는 지금까지 어디에 기부를 해 본 적이 없다. "장사하고 땅 사고 건물 사느라, 빌린 빚 갚느라, 현금을 쥐고 있을 새가 없었다"고 했다.
전 재산을 대학에 주자고 이야기한 것은, 두 사람 모두 아픈 데가 늘면서 부터였다고 한다. 양씨는 "남편 정신도 흐릿해져 가고, 나도 뇌경색진단을 받아 더 망설여선 안 될 것 같아서였다"고 했다. 고려대에 기부하기로 한 데는 아들 영향도 있다. 큰아들 김경덕(58)씨는 고려대 토목공학과 79학번이다. 양씨는 지난 6월 고려대 법인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기부 의사를 밝혔다. 양씨 전화를 받은 정인표 고려대 법인운영팀장은, "전화로는 별말씀 안 하셨는데 열흘 후 직접 학교에 찾아오셔서 설명하실 때 기부 규모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사는 두 아들도 부모 결정에 동의했다고 한다. 아들들은 20대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양씨는 "다들 쉰 살이 넘었고, 집도 한 채씩 장만했으니, 부모 도움 없이도 살만한 수준이 됐다"고 했다. 그 부모에 그 아들이다. "그래도 자녀가 아쉬워하지 않겠느냐" 고 하자, 양씨는 자녀 자랑을 했다. "우리 큰 며느리는 이화여대를 나왔는데, 생활력이 정말 강해요. 마음씨도 무척 곱고, 큰손자는 키가 180㎝가 넘는데 인물도 얼마나 좋은지 …" 부부의 아파트에 있는 소파와 장롱은 색이 바래있었다. 소파는 40년전 양씨가 언니에게서 얻은 것이고, 장롱은 부부가 40년 전 서울 종로 '파고다 가구점'에서 장만한, '생애 첨이자 마지막 옷장' 이라고 했다. 그 전까지는 옷을 종이 상자에 넣어 보관했단다. 여지껏 두 사람은 승용차는 고사하고 화물차도 없다.
6년째 부부의 집안일을 돕는 이옥희(58)씨는, "두 분 모두 쓰고 난 비닐봉지 한 장도 함부로 버리지 못하게 하신다."고 했다. 양씨가 입은 라운드 티셔츠는 30년, 바지는 20년 된 것이라고 했다. 거실에는 옷이 든 종이 상자도 있었다. 나중에 입으려고 다른 사람에게서 얻어 온 것이란다. 노부부 소유 건물에는 카페와 식당 등 점포 20여개가 입주해 있다. 임대료를 크게 올리지 않아, 대부분 20년 이상 장사를 하고 있단다. 1977년부터 노부부의 건물에서 족발가게를 운영해 온 이준희(76)씨는, "40년 넘게 보아왔지만 화려하게 옷을 입거나, 화장한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씨는, "청량리에서 임대료 갈등 없이 상인들이 한자리에서, 이렇게 오래 장사한 건물은 여기밖에 없다. 존경스러운 건물주"라고 했다.
고려대는 노부부 뜻에 따라 기부 받은 건물과 토지를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등으로 쓰겠다고 밝혔다. "어렵게 모은 돈을 한 번의 기부로 내놓는 게 아깝지 않느냐"고 하자, 양씨는 준비라도 한 듯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평생 '노랭이(구두쇠)' 소리 듣던 나 같은 밑바닥 사람도, 내 나라 인재를 기르는데 보탬이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정말 기뻐요." 평생동안 부부는 한 눈팔지 않고, 자린고비로 모은 자기 생애 전부가 응축되어 녹아 있는 전 재산을, 아낌없이 사회에 바친 것은, 그것이 바로 '제2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고려대에 재산을 기부하러 가기 전, 부부는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반찬은 김치와 콩나물무침, 고추장아찌, 세 가지 였다. 평생을 자린고비로 살아 온 검소가 몸에 밴 것이다. 세상이 온통 풍요를 노래하건만, 노 부부는 가난했던 시절의 검소를, 처음처럼 묵묵히 걸어 온 것이다. 과연 이 시대의 멘토다.
종그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