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C 개혁신학】(5) 유럽에서의 개혁신학 개관(槪觀)

본격적인 17세기 개혁신학의 내용

2022-10-10     리폼드 투데이

김영규 박사 프로필 

▷독일 궤팅켄대학(Th.D.)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eq.)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74회 졸업
▷총신대학교 신학과(B.A.), 74학번.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역임
▷Director, Research Institute for the Bible and Reformed Theolegy(www.ribrt.org)

주요저서 및 논문
■ 『Calvin and the Old Testament:Sola Scriptura and the Trintarian God as an Unique Author of the Old Testament(Germanic), 1993. ISBN 89-950009-1-0 93230』(Seoul 1994.) - 궤팅켄대학 박사학위(Th.D.) 논문
■ 『A Dialogical Document and the Metaplasmic Phases of the Pre-Mosaic Hevrew hehind Gen 23.(Germanic. 1993.) ISBN 89-950009-0-2 93700』(Seoul. 1994.) - 창세기 23장에 관한 논문은 인류 역사 중 20세기에 와서 땅이 그 창세기 기록의  진실을 밝힌 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모두 고인들이 되었지만, 그 당시 고대 애굽어 기록들과 문헌들 편집의 최고 권위자이었던 H.W.Helck 교수와 고대 아카드 언어나 고대 슈메르 언어의 대가였던 D.O.Edzard의 자문을 받아, 독립적으로 주전 2400년 전의 고대 슈메르 문서들의 대화체 기록 방식들과 동일한 시기의 셈족 기록물들인 에불라 토판들에서 발견된  대화체 기록 방식들 및 고대 애굽 중 왕조의 편지들이나 기록물들에서 증거된 대화체 관용 표현들을 연구하여, 지금 현 창세기 23장에 기록된 그대로가 그 당시 "대화체 중재재판 판매 문서"의 직접적인 내용임을 증명한 논문이었다. 그런 대화체의 시대적 제한성 때문에 야곱에 관한 기록을 마지막으로 한 지금 창세기는 완성된 후  많은 세월을 지나 요셉의 죽음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 첨가된 것은 그 기록자를 알리는 간기(Colophon)라는 사실이 가정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화체 기록에 있어서 '그리고 역시 누가 누구 앞에 이르기를'과 같은 직접 화법 인용 관용구는 셈족 에불라 토판에서도 발견이 되나, '그리고 역시' 없이 '이제 내가 너에게 말하여 이른 것에 대해서' 등과 같은 직접화법 관용구는 후대 고대 애굽의 직접화법에서 증명이 되지 않는 창세기 족장시대에 해당된 고대 애굽 왕조들인 12 왕조와 13 왕조의 고유한 표현방식이라는 것이다.
■ 『17세기 개혁신학』(개혁주의성경연구소, 1995.)
■ 『조직신학 편람 I,II-2,III,IV.』(개혁주의성경연구소, 1998.)
■ 『엄밀한 개혁주의와 그 신학』(도서출판 하나, 1998.)
■ 『Biblica Hebraica et Graeca(Archaic Hebrew Texts and Greek Handwriting Texts of the First Century AD.) ISBN 89-89519-02-0 93230, 2002, RIBRT』(개혁주의성경연구소, 2002.)
■ "Paleographical Dating of 46 to the Later First Century, (Biblica-로마교황청 직영 국제학술기관지, Vol. 69, No. 2, 1988.)  P46(최초 바울서신 모음집 사본)의 연대 측정이 주후 1세기 말인 최소한 도미티안 황제시대 이후가 아님을 증명하였다. 또한 필자에 의하면, "P46의 필체는 주후 1세기 안에서는 물론 1세기 전후 수 많은 문헌 파피루스들 중에서도 극히 희귀하게 지금 남아 있는 주전 3세기 전형적인 교육교본 필체를 가진 파피루스 사본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한다.  논문바로가기 https://www.friktech.com/rel/p46.htm

■ "도르트회의 Marburg 대학의 대표자 Rudolphus Goclenius(1547-1628)의 철학과 신학에 대해서"(대한논총, 2009.)
■ "하이델베르그 대학과 바젤대학의 개혁신학자 J.Jacobus Grynaeus(1540-1617)의 신학에 대해서"(대한논총, 2011.)
■ "초기 청교도 신학 안에서 법치사회의 기독교적 이상과 그 개혁정신 및 그 한계에 대해서"토마스 카트라이트의 논쟁자들을 중심으로"(대한논총, 2012.)

 

             차 례

머리말 ... 5

I. 한국장로교회와 정통개혁신학... 7

II. 역사적 정통개혁신학의 바른 노선의 요점...24

III. 17세기 개혁신학의 역사적 배경...59

IV. 17세기 개혁신학의 개관(槪觀) ...109

V. 도르트회의와 예정론 논쟁... 130

VI.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그 신학... 343

VII. 17세기 언약신학과 정통개혁신학의 몰락..369

맺는 말... 371

참고문헌... 373

IV. 17세기 개혁신학의 개관(槪觀)

1. 유럽대륙에서의 개혁신학

앞 단원에서 칼빈의 직접적인 제자들로서 베자(Theodor Beza)와 다네우스(Lambert Danaeus), 비렐리우스(Matthaeus Virellus) 등이였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의 그늘에 있던 자들은 그들의 신학사상에 있어서 여러 종교개혁 신학자들로부터 동시에 영향받았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종교개혁 2세들은 대개 루터로부터 물론 쯔빙글리, 오에클람파디우스, 불링거, 부쩌, 피터 페어밀리우스, 멜랑히톤 등의 개혁자들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쯔빙글리나 불링거는 조직적인 신학체계를 가진 책을 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칼빈의 영향은 당연히 이런 조직화에 크게 영향을 끼친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좀 더 교의적 소재들에 따라 외적으로 더 잘 정리한 개혁주의 학자는 피터 페어밀리우스라 할 수 있지만, 내용상 칼빈의 영향권아래에 있다. 비록 피터 페어밀리우스가 칼빈보다 조금 어리지만, 거의 동시대 인물로서 항상 가까이 있기를 원하였고 그의 총명과 능력을 크게 인정받았던 친한 친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칼빈 자신이 그의 신학에 대한 평가는 불링거 선에 있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즉 바젤의 오에클람파디우스는 불링거에 의해서 계승되었고 페어밀리우스에 의해서 꽃이 피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론을 포함한 많은 신학적 입장에 있어서 칼빈의 입장에 동의하였다. 페어밀리우스처럼 이런 교의적 소재에 따라 교리를 조직화한 인물로서 베른학자들인 볼프강 무스쿨루스(Wolfgang Musculus)와 아레티우스(Benedictus Aretius)를 들 수 있다. 무스쿨루스의 교의적인 입장은 절충적이었고 언약론에 있어서 두 언약론을 주장하였어도 아브라함과 영원한 언약과 자연보편적인 노아의 언약 사이를 구별하였다.

후대 스콜라적인 신학체계는 케커만(B. Keckermann), 폴라누스(Polanus), 알스테드(H. Alsted) 등이지만, 알스테드는 이미 이런 스콜라적인 신학을 샤델, 쨘끼우스, 단니수스, 유니우스 등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스콜라 신학은 성경으로부터 나온 성령자신의 신탁들로 정의되고 있다. 가르침의 체계에 자신의 독특한 입장을 가진 자는 안드레아스 휘퍼리우스(Andreas Hyperius)이다. 물론 그가 외적으로 교의학소재들에 따라 기술하고 있으나, 그러나 내용상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초판에서 얻은 인상처럼 예정론에 근거한 교회론 위에 그의 신학체계의 골격을 잡고 인간타락 전 교회(Ecclesia ante lapsum), 인간타락 후 교회(Ecclesia post lapsum), 영광의 교회(Ecclesia gloriae)가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취리히신학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역시 칼빈이 취하였던 취리히신학적인 요소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중요한 사상을 이어 체계화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제롬 쨘키우스는 엄밀한 칼빈주의자로서 하이델베르그에서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1560년 동안 마르바흐(Marbach)와의 예정론에 논쟁이 알려지고 있다. 물론 루터주의 안에서의 예정론에 대한 논쟁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영향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적인 것이 드러난 것은 루터주의자들에 의해서 고백된 ‘협화신조’(Konkordienformel)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논쟁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하이델베르그 문답서를 펴낸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의 신학들이 중요한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을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첫째는 루터주의적인 그리스도의 보편편재(Ubiquität)에 반대하는 칼빈주의의 독특성(Extra-Calvinisticum)이라 부르는 기독론 논쟁이 그것이고, 둘째로 이 기독론과 연결된 성례론 논쟁이며, 셋째로 우르시누스와 논쟁이 된 에라스투스주의에 대한 문제이다. 처음 두 가지 논쟁점들은 루터주의로부터 구별된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으로서 고정되었다. 세 번째 문제는 개혁주의 신학 다양성 안에 논쟁되는 문제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 밖에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으로서 루터주의적이고 제세례파주의적인 반율법주의(Antinomianismus)에 대한 반대 입장인 율법의 제 3사용은 이미 종교개혁주의 시대에 형성되었던 특성이다. 문제는 이 우르시누스의 제자들(F. Gomarus, Lubbertus Sibrandus, David Pareus)사이에 예정론에 대한 입장이 도르트회의에서 타락 전 선택설과 타락 후 선택설 논쟁으로 첨예화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 내에 남아 계속된 논쟁점이다.

우르시누스는 언약론에 있어서 Olevianus나 F.Junius의 자연의 언약의 개념을 인정하는 것과 달리 칼빈의 언약의 통일성을 확고히 주장하고 있었고 예정론에 있어서도 칼빈 위에 서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택자를 위한 구원임을 세웠고 유기의 최종원인을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과 하나님의 영광에 찾았다. 이 논쟁점은 아르미니안주의에 대한 논쟁과 언약론에 대한 논쟁과 더불어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한 논쟁점들 하나로 남아 있다. 어떻든 이들 제자들은 그가 루터주의자들(루이 6세 때) 때문에 피신하여 프리데릭 3세의 아들인 Johann Casimir의 보호받아, 신학교가 세워졌던 노이스타트(Neudstadt)나 헤르보른(Herborn)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다. 그러나 도르트회의에 참석한 성직자들 중 특별히 브레멘의 Matthias Martinius와 Ludwig Crocius의 제자 중에 Johannes Cocceius가 그들의 제자이였음을 관심할 필요가 있다. Samuel Rutherford는 Crocius를 루터주의 신학자들과 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에 두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도르트회의의 결정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예정론논쟁이 개혁주의 신학의 이전과 이후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그 중요한 도르트회의는 이미 화란 땅에서 예정론논쟁의 배경에 대해서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트라스부르그와 제네바에까지 칼빈을 따랐다가 1544년 아가서와 그리스도가 지옥까지 비하하신 문제에 대한 견해차이로 바젤로 떠나게 되었던 세바치안 카스텔리오(Sebatian Castellio, 1515-1563)가 칼빈과 베자의 예정론을 비판하였는데, 사후에 출판된 그의 글(De Predestinatione, 1578)이 화란에서 개혁주의적 입장을 비난하기 위해서 번역되었다. 1578년 그 번역자(Dirck Volckertszoon Coornhert)와 델프 구역의 설교자들(Donteclock, van der Linden)사이에 생긴 예정론에 대한 논의가 화란에서 예정론 논쟁의 발단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논의과정에서 델프 지역의 설교자들이 칼빈과 베자의 견해를 포기하고 불링거 입장인 타락 후 선택설을 옹호하는 입장을 택하였다는 점이다. 칼빈과 베자의 입장에 의혹적인 델프의 설교자들은 타핀(Taffin)과 바스팅기우스(Bastingius), 그 당시 레이든 교수였던 단네우스(Danaeus)와 우트레히트 설교자 헬미키우스(Wernerus Helmichius), 그리고 프라네커 교수 리디우스(Lydius)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들이 자문한 개혁주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칼빈의 생각에 만족해도, 정확하게 그를 모범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하여 중간입장이 개혁주의 신학 내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암스테르담에 젊은 설교자 아르미니우스(Arminius)가 있었다. 그는 제네바의 베자 밑에서 공부하였고 그 당시 그의 소문은 좋지 않았으나 신용을 얻고 있었다. 그런데 리디우스로부터 호의를 받은 터라, 자신의 스승인 베자의 개혁주의 입장을 옹호해주기를 기대하여 그에게 그 문제를 맡게 되었던 것이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논쟁의 시작이었다.

아르미니우스에게 있어서 문제되었던 점은 예정의 대상이 누구이었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1604년 이전에는 다만 개혁주의 전통에 있어서 칼빈, 베자, 유니우스의 입장에 대해서 논평하는 선에서 참여하였으나, 1604년에 처음 자신의 정의를 제시하였다. 그 때는 대표적인 창조 전 선택론자들인 유니우스와 트렐카티우스가 흑사병으로 죽게 되어 그 유니우스를 대신하여 아르미니우스가 되었을 때이다. 그에 의하면 선택의 근거는 예지된 신앙(fides praevisa)이요 따라서 예정의 대상은 타락한 인간(homo lapsus), 창조해야할 인간(homo condendus), 창조된 인간(homo conditus, homo creatus)이 아니라, 믿을 사람(homo fidelis)이라는 것이다. 믿음을 조건으로 선택설이란 이런 낱말에서 분명히 드러났던 것이다. 이런 입장에 대해서 진지하게 문제화하였던 사람들이 Helmichius와 Plancius이다. 그들의 비판 앞에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의 입장을 위해 Sohnius와 Polanus에게 호소하였다. 아르미니우스의 동료였던 고마루스는 이 당시에 그렇게 비판적이 아니었다. 아르미니우스의 견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견해는 스콜라신학에서도 추적할 수 있고 이미 영국에서 화이테이커(Whitaker), 퍼킨스(Perkins)와 틴달(Tindall)에 의해서 반박된 바로(Baro)의 주장과 네델란드에서도 레이든의 노장 교수 중 한 사람인 홀만(Holman)의 주장에 그 선례가 있었다.

이런 아르미니안주의는 칼빈, 베자, 피스카토르, 마르티르 페어밀리우스, 쨘키우스, 우르시누스의 선에서 이어지는 주장과 벗어난 주장이었고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앙고백들(Confessdio Gallicana 1559, Art. XII; Confessio fidei et doctrinae per Ecclesiam Reformatam Regni Scotiae professae 1560, Art.XVII; Thirty-Nine Articles 1552,1562, Art. XVII; Lambeth-Articlels 1595, § 1; Irish Articles of Religion 1615, § 12-13)과도 벗어난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르트회의가 열릴 쯤에는 고마루스, 페스투스 홈미우스(Festus Hommius), 트리글란드(Trigland)가 그런 주장을 하였다. 그 외에 고마루스 제자들이라 할 수 있는 Hieron. Vogelius와 Casp. Sibelius가 그런 옛 타락 전 선택설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도르트회의 참석자들은 타락 후 선택설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레이든 학파의 대표적 학자들(Polyander, Walaeus, Thysius, Lubbertus)은 타락후 선택설 입장이었고 도르트회의에서 그의 글이 거의 채택된 Bogerman의 경우우 항변파들이나 영국과 브레멘 대표들에 대해서 반대하였다고 하여 타락 전 선택설 입장에 서 있는 것은 아니었다. 브레멘 대표들은 처음부터 신뢰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온화한 멜랑히톤주의자들이라 평하기도 하였다. 그들 중 Martinius가 Gomarus과의 언쟁이 있었고 아르미니안 주의에 가까운 입장을 가진 Vortius과 교통을 가졌다. 이 Martinius와 일치하였던 자들이 또한 영국에서 온 Joh. Davenant와 Samuel Ward이였다. 주교였던 Balcanqual 만이 타락 전 선택설의 경향을 가졌으나, 다른 원인 때문에 Gomarus의 입장에 반대하였다. 특별히 Gomarus가 과거 개혁주의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타락 전 선택설 입장을 표명하였을 때, 영국 대표자들이 감히 다른 나라의 신앙고백에 대해서 판단한다고 하여 불쾌해 하였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물론 진술의 과정에서 영국의 39조항 17조에 있는 ‘eos quos in Christo elegit ex hominum genere’까지의 구절에 근거하여 영국교회가 예정의 대상에 대해서 결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던 것인데, 바로 이어진 ‘a maledicto et exitio libere’이란 어귀를 놓쳤던 것이었다.

이 문구에 따르면 영국에서 유일하게 예정의 대상을 타락한 인간(genus hominum lapsum)이었다고 해석할 있는 고백서가 되었다. 구체적으로 쟁점이 되었던 예정의 대상에 대해서 영국 대표자들, 하이델베르그 대표자들, 제네바, 브레멘. 엠덴, 벨직, 북부 홀란드, 젤란드, 우트레이트, 프리스란드, 흐로링겐에서 온 대표자들이 거의 예정을 대상을 타락한 인간(homo lapsus)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다만 Gomarus만이 전 인류로부터(e genere universo humano) 택하였다고 주장하고 남쪽 홀란드 대표자들은 결정하지 못한 입장에 서 있었다. 결국 Gomarus도 다수의 결정을 인정하는 쪽으로 나아갔었던 것이나, 이런 타락 후 선택설의 입장으로 몰아가게 한 주 인물이 Molinaeus이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문제는 타락 전 선택설에 대해서 도르트회의가 부정적으로 결정하였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첫째로 영국 대표자들과 Gomarus 사이에 생긴 논의는 결정없이 Gomarus의 침묵으로 끝났다는 점이다. 후에도 계속 Gomarus가 타락 전 선택설의 입장에서 공적으로 강의하자, 1640년 흐로링겐의 Joncker Clant가 도르트회의의 결정을 타락 전 선택설에 대한 공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펴는 것에 대해서 금지한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이 점이 중요하다. 이 때 고마루스의 대답은 타락 전 선택설과 타락 후 선택설 사이의 의문은 예정론 자체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에 대해서 항상 교회 안에서 다양하고 자유로운 질서에 관한(de ipsa Praedestinationis doctrina sed de ordine, de quo semper varia fuit et libera in ecclesia Dei) 문제로 대답하였으며 그 당시 도르트회의에서 자기만 그 타락 후 선택설의 반대한 것도 아니었고 역시 예정에 대상에 대해서 그 회의가 결정한 것은 없다고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화란 땅에서는 교회가 갈라져 있을 정도로 미묘한 문제이다.

둘째로 Maccovius와 Lubbertus와의 논쟁이다. 물론 그 사건은 Lubbertus가 고소한 것이 아니고 프라네커 노회에서 소원된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을 도르트회의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라고 보거나 그에 대한 학자들의 차이를 인정하는 식의 발언이였다. 오히려 Lubbertus의 제자인 Hommius조차도 스승과 반대하여 마코비우스의 입장을 세우는 일이 일어났고 자문에 참여한 Amesius도 Parker의 입장과 일치하다 하여 그의 주장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비록의 마코비우스는 예정의 대상이 타락한 인간이라고 한 것이 잘못이라 보인다는 진술까지 확인(quod fatetur se dixisse ad discipilos videri sibi erroneum et falsum docere genus humanum lapsum esse objectum praedestinationis)하였어도, 그 논쟁은 마코비우스와 루베르투스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로 악수하고 끝났다. 결론적으로 도르트회의의 결정은 타락후 선택설 입장의 결정이지만 타락 전 선택설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혼합적 정통주의(syncretismus orthodoxus)라고 결론되고 있다.

후에 1626년 라이덴 대표적 학자들(Polyander, Rivet, Walaeus, Thysius)은 아르미니안주의자인 Episcopius에 반대하여 칼빈과 그를 따르는 자들을 옹호하였다. 그런 노선문제는 다시 1645과 1649년 마레시우스(Maresius)와 보에티우스 사이의 논쟁에서 이어진다. 보에티우스는 고마루스의 입장에 호소하여 우리 교회 안에서 예정에 대해서 분명히 정의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반면 흐로링겐의 고마루스를 계승한 마레시우스는 타락 후 선택설 입장에서 예정의 대상을 창조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 창조되었고 타락한 인간(homo creatus et lapsus)이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작성에 참여한 퓨리탄들은 아르미니안주의를 완전히 배제시키고 확고히 타락 전 선택설에 기초하여 작성하였다. 다만 1645년 10월에 있었던 그 논의 과정에서 일부 성직자들의 발언 배후에 있는 타락 후 선택설을 허용하는 정도에서 머물렀다. 이것은 도르트신조보다 훨씬 엄밀한 칼빈주의 노선을 확인한 셈이다.

한편 개혁주의 신학 안에서 언약론 논쟁은 Johannes Coccejus로부터 시작한다. Johannes Coccejus는 어릴 때부터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언어에 능했지만, 그의 독자적인 성향은 다른 종교에 대한 개방성에서 찾아야 될지 모른다. 그는 신학을 배우기전에 코란에 대한 연구를 하여 글을 쓴 일이 있다(Oratio de religione Turcarum). 브레멘에서 Matthias Martinius와 Ludovicus Crocius로부터 신학을 배운 후에도 1625년 함부르그에 가서 유대 랍비의 글들을 배웠다. 프라네커에서 Georgius Pasor, Johannes Maccovius, Gulielmus Amesius, Sixtinus Amama(근동 언어학자)와 가까이 접촉한 후에도 쓴 책들은 유대 랍비문헌들에 대한 연구들이다. 흐로링겐에서 Gomarus와 레이든에서 Polyander, Rivetus, Heinsius등 다른 유명한 학자들과 접촉하면서 배웠어도 그들과는 다른 독자성이 계속 남아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Johannes Coccejus는 세 가지 논쟁점에서 문제의 신학자로 남게 되었다.

첫째로 Johannes Coccejus는 그의 동료인 Abraham Heidanus와 더불어 안식일을 도덕법으로 해석하지 않고 단지 예표로만 생각하였다. 그의 히브리서 주석(Explicatio Epistolae ad Hebraeos, L.B. 1659)에서 처음 분명하게 나타났지만, 그의 견해는 더 일찍 알려져 그의 동료인 Abraham Heidanus가 그의 견해를 옹호하는 글을 발표하였다(de Sabbatho et de Die Dominica). 이런 주장들 때문에 Essenius(de perpetua moralitate Decalogi adeo specialiter)와 Hoornbeek(Theses de Sabbato)와의 심한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코케이우스(de indagatione naturae Sabbati et quietis Novi Testamenti, Typus concordiae amicorum circa honorem Dominicae, L.B.1659)와 하이다누스(Consideratien)와 호른벡(Nadere bewering van 's Heeren dagheiliging) 사이에 논쟁이 계속 되었고 결국 코케이우스와 하이다누스는 소씨니안주의자로 낙인이 찍히기도 하였으나 1659년 관원의 명령에 의해서 레이든에서의 논쟁은 중지되었고 구다 공의회에서 끝나게 되었다.

둘째로 신약시대와 구약시대와 관련하여  ἀφεσις ἁμαρτιων(완전한 용서)과 παρεσις ἁμαρτιων (불완전한 용서)  사이를 구별하는 Johnnes Coccejus의 주장에 대해서 1665년 Gijsbert Voetius(onderzoek over den waren aard des Sabbaths)가 반박해 나셨다. 코케이우스의 작품(Moreh Nebochim; utilitas distinctionis duorum vocabulorum scripturae παρεσις et ἀφεσις Amsterd. 1666)이 나왔다. 세째로 Samuel Maresius와 논쟁이 일어났다.

언약론과 관련하여 코케이우스의 신학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바빙크의 일반적인 비판을 참조해야 한다:

“언약론 자체는 처음 올레비아누스, 칼빈 혹은 불링거에게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원리적으로 이미 제세례파와 대립하여 신구약의 근본적 통일성을 주장하였던 쯔빙글리 안에서 만나게 된다. 쯔빙글리로부터 그것은 불링거와 칼빈에게 계승되고 특별히 올레비안누스, 우르시누스, 손니우스(Sohnius), 에글린(Eglin), 보쿠비우스(Boquinus), 휘퍼리우스(Hyperius) 등 독일 개혁주의자들안에서 받아 드려졌음을 발견하게 된다. 영국신학에서는 롤록(Rollock),하우(Howe), 카아트라이트(Cartwright), 프레스톤(Preston), 토마스 블레이크(Thomas Blake), 퍼킨스(Perkins), 아메시우스(Amesius), 죤 볼(John Ball), 제임스 우셔(James Usher),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프란시스 로버스(Francis Roberts), 토마스 보스톤(Thomas Boston)등에 의해서 받아 드려졌다. 네델란드에서는 스네카누스(Snecanus), 유니우스(Junius), 고마루스(Gomarus), 아버지와 아들 트렐카티우스(Trelcatius), 네르데누스(Nerdenus), 라벤스페거(Ravensperger)등에게서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클로펜부르그와 코케이우스보다 오래 전에 언약론은 개혁주의 신학 안에 고유적이다. 그러나 후자 인물들이 언약론을 전 교의학의 출발점과 지배원리로 삼았고 동시에 원리적인 변화를 야기케 하였다.

코케이우스와의 싸움은 직접 모든 이들에게 인정된 언약론에 대한 것이 전혀 아니라, 에센니우스와 호른벡의 경우 안식일에 대한 것이고(1655-1659), 마레시우스의 경우 두 가지 경영에 있어서 교회의 상태에 대한 것이며(1662), 보에티우스의 경우 구약에서의 용서(παρεσις)에 대한 것이다(1665). 코케이우스에서 논쟁되고 있는 것은 언약개념이 아니라, 그의 성경신학과 그의 역사적 방법이다. 철학에서 데카르트와 같이 코케이우스는 신학에 있어서 스콜라주의와 전통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났고 성경연구를 주장하며 그의 교의학 제목이 가리키고 있는대로 성경으로부터 끌어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ex Scripturis repetita)을 원하였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그는 그의 책 ‘언약에 관한 교리대전’(Summa doctrinae de foedere)에서 하나님과 그의 영원한 의논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그의 입장을 역사와 인간과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취하였다.

따라서 그의 교의학은 구원사이고 거기에서 성경은 원리와 규범이 아니라, 대상과 내용이었던 역사학적인 형식을 띤 성경신학이 되고 있다. 그는 그 언약 즉 참된 종교를 역사적으로 그의 첫 시작에서부터 현재까지 추적하였다. 그리고 그는 어디에서나 다양하고 계속적인 경륜들안에서 이 언약의 발전과 진보를 가리켰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이 말하였던 대로 계시의 명료성, 즉 통찰의 선명과 의식의 판명성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다. 은혜언약의 다양한 경륜들 아래에서 객관적 축복들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구약시대에 있어서 구원은 신약에서보다 객관적으로 더 빈약하였다.

구약에서 안식일은 행위의 연기 안에(cessatio operis) 있었고 이스라엘은 아직 참되고 영원한 선(vera et permanentia bona)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되, 소망의 백성이었고 땅에서의 긴 생을 열망하였으며 여전히 죽음의 공포 안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충만한 죄용서(avfesij)를 갖지 못하고 불완전 용서(paresij)만 가지고 있었다. 동물희생은 전혀 화해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칭의는 불완전하였다. 신자들의 위로도 약하였고 그들의 양심은 안식하지 못하였다. 마음의 할례는 참으로 없었고 다만 신약에서 선물로 주신 것이다. 율법은 천사들에 의해서 제공된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구약에는 참으로 모든 것이 현존하였으나 다만 모형과 그림자로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자체의 실재성은 전적으로 부정되지 않았어도 그때 대부분이 부정되었다. 주관적으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우연에 있어서(in accidentia)뿐만 아니라, 실체에 있어서(in substantia)도 구약은 신약과 다른 것이었다. 참으로 코케이우스가 은혜언약을 다만 부정적으로 점진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이며 계속적으로 발전된 행위언약의 폐지로서 파악하였을 때, 친히 언약론 전체를 근절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언약에 대해서 아무 것도 남긴 것이 없었다. 그것은 다만 일시적이고 인간적이며 계속 스스로 변하는 종교의 형태이었다.

그렇게 코케이우스는 의심할 것도 없이 개혁주의 신학의 출발점과 기본선을 잃었다. 이것이 직접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느껴졌기 때문에 역시 다소 논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원리적인 논쟁이었다기보다는 부속적인 점들에 대한 공격이었다. 코케이우스주의는 바로 데카르트주의와 결합되어 계속 점점 더 받아 드려지면서 여러 가지 교의들에 대한 반대로 인도하였고 역시 구약의 붕괴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어디에서나 무의식적으로 구약은 단지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고 교의학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파고들어 갔다. 이런 변경된 교의학적인 직관으로부터 저절로 그의 때가 되어 특별히 스피노자(Spinoza)와 시몬(R. Simon)이래 구약의 역사적 비판이 태어났다.” 이런 바빙크의 판단에 따르면 현대의 역사비판학적 방법의 근원과 관련하여 코케이우스가 한 역할은 개혁주의 신학 안에서의 정통신학 회복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이미 대학의 학문세계에 깊게 파고든 코케이우스주의와 데카르트주의로부터 극복을 위한 노력이란 분파주의를 낳게 되었을 뿐, 정통주의의 완전회복을 불가능하였던 역사가 유럽개혁신학의 역사이다. 회복된 개혁주의는 온건하고 중용적이었다. 그 후 개혁주의 안에서의 보수주의란 정통개혁주의 신학의 재흥이라기보다는 분리하게 된 신학적 노선 위에 머물려 있는 보수주의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유럽개혁신학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노선의 결정은 예정론에 대한 입장과 신구약 통일성에 대한 입장이 결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