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황소 개구리
【종그니칼럼】나를 찾아서
참 세월빠르다. 하룻밤사이에 해가 바뀌어 오늘이 새해 1월 7일이고 금년이 '뱀띠 해' 란다. 먹이사슬로 보면 개구리는 뱀 먹잇 감의 제 일순위다. 뱀도 개구리도 모두 같은 변온동물이지만 왠지 더 징그럽기는 뱀이다. 그런데 '뱀의 해'는 있는데 '개구리 해'는 없다. 그래서 나는 '뱀의 해'이지만 뱀과 상극 관계에 있는 개구리이야기를 좀 하고자 한다. 그런데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다."는 일반적 통념과 전혀 다른 먹이사슬의 질서를 완전히 교란시키는 동물이 바로 개구리의 폭군 '황소개구리'다. 이 개구리는 이름 그대로 개구리임에는 틀림없는데 아니 이 개구리가 뱀을 잡아 먹는단다? 황소개구리가 일정한 크기로 자라기만 하면 절대 뱀에게 먹히지 않고 되려 뱀을 잡아먹는단다. 개구리 중에 가장 커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황소 개구리'다. 이 황소 개구리는 황소처럼 노란 황금색이다. 외래 종으로 몸집도 크지만 그 크기에 걸맞게 힘도 쎌뿐아니라 엄청난 포식자다. 여러 동물들이 사는 정글에서는 힘센 놈이 지배한다. 특히 황소개구리는 지금까지 먹이 사슬에서 대이변을 불러일으킨 변종이다. 황소개구리는 인간이 식용으로 만들어 낸 변종으로 가두리 양식장에서 길러지다가 워낙 식욕이 강해서 판매 값보다 사료값 감당이 힘들어 사육을 포기하자 황소개구리가 자연상태로 돌아와 자유의 몸이 되자 식욕이 왕성한 황소개구리가 먹이사슬을 완전히 뭉개버리고 굶주린 야수처럼 온 누리에 무법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토록 먹성이좋으니 그에 걸맞게 또 얼마나 잘 자랐겠는가! 인간이 먹거리 하나만을 보고 창조자의 흉내를 냈지만 창조질서를 무너 뜨린 먹이사슬의 붕괴로 인하여 자연계에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여야 했다.
내가 40대 후반에 일반 목회를 접고 가평군 설악면 에서 거주 하고 있을 때에, 평소 아는 이가 느닷없이 식용 개구리를 잡아와서 이를 요리할 곳이 마땅치 않다며 이 개구리를 좀 솥에 삶아줄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때 나는 식용개구리를 잡아 본 적도 먹어 본 적도 없어 황당하다고 했더니 그가 다짜고짜 잡아 온 개구리를 솥에 넣고 삶아냈다. 이처럼 엉겹결에 개구리를 삶아 본 기억은 있어도 개구리를 먹어본 적은 아직 없다. 나는 시골출신이니까 어린 시절에 논 밭에서 혹은 개울에서 개구리야 흔하게 보았지만 그러나 배고픈 그 시절에도 단 한번도 먹어 본 기억이 없다. 내가 어릴 때 개구리를 잡아서 파는 것도 보았고 건어물 처럼 바짝 말려서 파는 것도 본듯하다. 그러나 그땐 "개구리를 말려서 한약재로 쓰여 지는가 보다" 할 정도로만 알았었다. 근데 황소 개구리는 내 어렸을 때는 없었고 내 나이 중년쯤 되었을 쯤에 본것 같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조물주의 영역을 흉내내 생명체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먹이 사슬의 교란종 '황소개구리'다. 조물주가 창조한 여러 유형의 개구리들을 두고 굳이 또 다른 변종을 만든 이유가 뭘까? 인간의 끝없는 식욕을 채우기 위해서다. 기존 개구리로는 감당이 어려워서 황소 개구리를 만들 생각을 하지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인간의 식욕을 채우기위한 단순한 생각이 엄청난 먹이 사슬의 교란을 가져온 것이다.
여러분은 대우주를 얼마나 알고 있나요? 단순히 인간들의 식욕을 채우기 위해 없던 변종을 만들어낸 것은 인간들에 의해 대우주의 자연질서를 무너뜨리는 오만이다. 인간들의 이 오만이 인간 사회를 점차 지옥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하늘의 별처럼 이 지구의 자연생태계도 아주 정밀하고 섬세하다. 어찌보면 분수를 모르고 날 뛰는 인간들의 오만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지금 정치판을 아주 흐려 놓고 있는 대한민국의 비상계엄 사태도 인간의 끝없는 과욕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당신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을 향하여 "욕심이 잉태한즉 사망을 낳는다."고한 것은 절대 손이 가서는 안되기에 '금단의 열매'라고 명하셨음에도 인간들은 불을 본 벌나비처럼 분수를 모르고 오만을 드러낸다.
왜 개구리가 '황소 개구리'란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는 굳이 설명이 없어도 지레 짐작할 것이다. 황소개구리는 보통 개구리에 비해 그 크기나 먹성이 엄청난 포식자다. 이 황소 개구리는 외래 종이다. 이 황소개구리는 아마 먹성좋은 우리나라 사람이 식용으로 국내에 들여 왔다가 엄청난 먹성때문에 감당이 어려워 자연에 버린 것이 결국 생태계까지 교란시키는 흉물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이 황소개구리가 서식하는 곳에는 남아 나거나 살아나는게 없을정도로 모조리 다 잡혀 먹힌다고 한다. 천적인 뱀도 황소 개구리에게 잡혀 먹힌다고 한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한때 자연생태계를 교란시키는 변종으로 한 순간에 혐오 동물이 되어버렸었다. 황소개구리는 오로지 자기욕심만 챙긴다. 그 앞에는 자연생태계나 약자에대한 배려도 없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나라 정치풍토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계엄령으로 모든것을 해결하겠다는 발상. 그래선지 요즘 황소 개구리가 오래전에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생태계를 교란시킬 정도의 황소 개구리라도 생태 과정은 일반 개구리와 똑같이 알에서 부화된 올챙이가 물 웅덩이에서 자라다가 다시 개구리로 환골탈태하여 마침내 물과 육지를 넘나 드는 일반 개구리와 똑같은 양서류의 변온 동물이다. 변온동물 중 가장 으뜸은 뱀과 개구리가 아닐까? 개구리는 온 몸둥이가 꽁꽁얼어 움직일수 없게 되어 죽은 듯이 보여도 몸 부위 중 얼어 있던 부위가 녹으면 그 녹은 부위가 차츰 움직이는게 참 신통방통하다. 뱀도 그럴까? 뱀은 너무 징그러워서 경험해 본바가 없다. 우리 인간은 상온 동물인데 어쩌다가 변온 동물들 특히 악어나 뱀을 보면 섬뜩하다.
어느 봄 날 새끼 황소 개구리가 엄마 눈을 피해 들녘 멀리 마실을 나갔다가 난생 처음 어마 무시한 짐승을 보았는데 바로 '황소'를 본 것이다. 그때까지 세상에서 제일 큰 동물은 바로 자기 엄마인 줄 알았던 이 새끼 개구리는 자기 엄마와는 그 크기에 있어서 비교도 안 될만큼 어마무시하게 큰 짐승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새끼 황소 개구리가 한 달음에 엄마에게 달려와 방금 전에 본 황소 얘기를 꺼냈다. "엄마! 나 오늘 들에 나갔다가 어마무시하게 큰 짐승을 봤어!" 엄마개구리가 얼마나 큰 짐승을 봤길래 호들갑이냐? 새끼 개구리는 손과 발을 저어가며 거대한 황소를 엄마에게 얘기하자 엄마 황소개구리가 배에 바람을 넣고서 "이만하든?"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커" 엄마는 배에 힘과 바람을 한껏 불어 넣고 "그럼 이만하던?" "아니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커" 그러자 엄마는 있는 힘을 다하여 바람을 한껏 더 불어넣자 그만 엄마 개구리 배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배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과욕과 허욕은 뭐가 다를까? 초록은 동색이란 말이 있다. 짐승 중 가장 큰게 황소라면 개구리중 가장 크고 색깔도 황색이어서 '황소개구리'라 이름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나 홀로 만들어가는 세상이 아니다. 가정도 사회 공동체도 모두가 다 서로 보다 좋은 사회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모든 생명체가 각자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분명 개구리인데 괴물이 되어버린 황소 개구리는 한 때 우리나라 생태계를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개울가나 호수에 있는 모든 생물들이 어느 순간부터 졸지에 먹성 좋은 황소개구리의 먹잇 감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개구리보다 먹이 사슬의 윗 자리에 있던 뱀도 황소개구리의 먹잇 감이 되었으니 생태계의 교란이 일어날 것은 자명했다.
지금 이 나라가 마치 황소개구리 한마리가 온 호수를 흐려 놓듯이 윤석열이란 황소 개구리 교란 종이 대한민국이라는 호수를 마구잽이로 어지럽히고 있다. 방수(防水)부대 를 투입도 해 보았지만 요지부동이다. 되려 민물 호수에 사는 민초(民草)들이 이 추운 한 겨울 엄동설한 에 도심 길거리로 뛰쳐나와 이 돌연변이 황소개구리를 퇴치하고자 포효를 해도 전혀 씨가 먹히지 않고 있다. 모든 민초들이 되려 이를 두호하는 수구들의 말 장난에 놀아나 계엄령 발포라는 국가문란마저도 미화로 포장되는 이 추한꼴이 세계만방 민주선진 국가에 다 보여주고 있으니 부끄럽기 그지 없다. 자유민주주의의 법치주의 국가로 나아가야 할 이 나라가 점점 더 정글속의 법칙에 맛들인 야수들처럼 약육강식의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면서 법과 권력의 꼭지점에 있는 무소불위의 대통령이란 자가 그 권력도 성이 덜차서 계엄령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파탄 내려 반란의 수괴가 되었으면 그가 있을 자리는 지금 대통령 관저가 아니라 구치소여야 하는데 어찌 그는 지금도 그자리에서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는가? 하는 이이러니다. 윤석열을 구속수감하려고 공수처에서 대통령을 찾았지만 경호처의 벽을 뚫지 못한 것은 정당하게 집행되어야 할 공권력이 아직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권력 앞에 힘없이 무너지고만 현실을 보면서 주권재민이란 말이 허접스럽다. 반란죄를 지었음에도 현실은 마치 호수를 힘으로 지배하며 뱀도 잡아 먹는 황소 개구리처럼 아직도 그 자리는 그 누구도 범접할수 없는 치외법의 무소불위의 자리인가 보다. 지난 해 12월 3일에 불시에 선포된 계엄령으로 한 순간에 온 나라를 얼음나라 설국(雪國)으로 만들어 버린 그 엄혹했던 그 밤을 나는 잊을수가 없다. 지금도 그 암울했던 흑역사가 매일 매일이 도도리처럼 그날이 그날인데 오늘도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지금, 해만 바뀐지도 한주간이 다 지난 오늘, 아!그 엄혹했던 시간은 그대로 멈춘채로 오늘이 1월 7일이란다.
어찌보면 한 순간의 호흡이 쌓여 연륜이 되듯 한 해의 마지막 하루의 한 광음이 지나면 이러틋 '지난 해'가 된다. 똑같은 하루인데 어느 날은 구우일모(九牛一毛) 처럼 하찮은 하루가, 바야흐로 한 생명이 꺼져가는 심지처럼 생명이 타들어가는 이 에게는 한 순간이 영겁처럼 여겨지리라! 2024년 마지막 날 밤까지 덮고 잤던 그 이불 속에서 자고 있던 나는 송구영신 예배때문에 한 밤중에 일어나 보니 아! 밤 열두시를 기점으로 해가 바뀌었단다! 내 느낌으로는 모든 것이 다 어제 그대로 인데 어제 밤은 한해의 마지막 밤이었고 오늘 아침은 새 해 첫 날이란다. 뜨는 해 지는 해가 마냥 똑 같은데도 말이다. 윤석열의 목숨과 내 목숨이 그 무게가 이토록 다른가? 내 보기에 참 찌질한 인간인데도 말이다. 아니 그런데 이재명과 비교하면 어떨까? 나는 둘 다 한마디로 찌질하기는 도찌니 개찌니지 싶다. 대한민국이란 호수에 이재명을 풀어 놓는다고 뭐가 다를까? 황소 개구리가 환골탈태한다고 새 개구리가 되겠는가? 에라 이 인간들아! 헛된 잠에서 그만 깨어나시라!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이미 지난 대선에 썼던 흘러 간 물을 다시 쓰려 하시나? 이제 당신들의 시대는 지나갔으니 당신들 앞가림들이나 잘들하시고 후진들에게 물려주시게나! 이것이 나라를 위해 당신이 할수 있는 마지막 할 일인줄 아시라! 앙상레짐의 틀 속에서 구태의 잠속에 빠져있는 이들이여! 이제 마음을 비우고 정신 차리고 후진을 위해 다수 야당 대표답게 오늘의 이 난국을 지혜롭게 풀어 주시게나!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제 밥 그릇만 챙기다가 두마리 토끼 다 잃어버릴까 싶어서라오.
세월아! 머무르지 말고 어서 가거라! 세월을 하나 하나 끊어서 보면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또 오늘과 내일이 다르다. 오늘을 못 보고 유명을 달리한 이도 있고 하룻 밤 사이에 태어났지만 어제 태어난 아이는 작년에 태어난 것이고, 오늘 태어난 아이는 새해에 태어난 것이라니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세월의 함정에 빠져 사는가 보다. 어제 뜬 아침 해가 다르고 오늘 새 해에 뜬 아침 해가 다르는가? 마냥 방에 있기도 거시기해서 잠간 뜰 앞에 나왔더니 한 겨울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시리다. 어렸을 때 함박 눈이 내려 고삿 길 살얼음 진 길을 발 썰매를 타고 달렸더랬는데 지금은 눈 길위를 서 있기 조차 두렵다. 불과 몇년전만해도 밤새도록 펑펑내린 마당 가득히 쌓인 눈을 첫 새벽에 일어나 그 많은 눈을 차로 까지 내가 다 치웠더랬는데 지금은 빗자루를 들 힘도 없다. 그래서 늙으면 할 일을 잃으니 조물주가 데려가는 가 보다. 저만치 있는 뚝방 길을 예전엔 한달음에 달려 갔었는데 지금은 그곳을 걷고 싶어도 아스라히 멀어 보여 일찌감치 포기해버린다. 언제 일년 365일을 다 보냈을까 싶은데 벌써 오동지가 다 지나가고 있다. 주머니에 몇푼 들어있는 돈이 스물스물 달아나듯이 인생도 그런가 보다. 하기사 몸이 늙어 일어나는 것도 걷는 것도 힘이 드니 내 몸둥이가 예전에는 분명 내가 하라는 대로 잘 순종하더니 어느 순간 아무 까닭도 없이 몸둥이가 상전이 되어 버렸다. 몸둥이 관리하기가 힘들어지니 내 주변도 변화가 일어나 저들에게 도움이 되기는 고사하고 점점 짐덩이가 되어가는 듯 하여 서글프다. 죽기 전에 자유대한이 바로되는 것을 보고 싶다! 자손만대까지 무궁히 뻗어나가야 할 대한민국이여! 너 없이 내가 어찌 있겠는가! 자유민주주의여! 어서 다시 일어나라!
【종그니칼럼】나를 찾아서
세상은 참 아이러니하다. 이 세상에 상냥하고, 친절하고, 겸손한 사람을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다 이런 사람을 좋아하면서, 왜 정작 우리들은 이 좋은 품성을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하고,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기적인 인간으로 살까?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그 물은 대지를 적신후, 들넠에서 강에서 바다에서 수증기로 증발하여, 다시 비가 되어 내리고, 바다는 그 어디에서든 흘러들어 온 모든 물을 모두 다 '바다' 들인다.그래서 '바다'라 부르는 걸까?
이처럼 대자연은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은 자에게, 그의 심성이나 그의 행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받아 들인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에 뿌린대로 심은대로 거두게 된다. 그럼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사회는 과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회인가? 하기사 나 또한 자녀가 없다보니, 별의 별 맘 고생을 격기도 한다. 개명(開明)된 현대사회에 살면서도, 자애나 긍휼과 인의예지는 간 곳 없고, 약육강식(弱肉强食)이란 말 그대로, 인성이 아닌 수심(獸心)으로 가득한 야수(野獸)의 사회가 되어 버렸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다 싶으면, 그 인격까지 깔아 뭉개버리는 사람, 자신의 사회적 위세를 내세워,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 익명성이 보장되기에, 인터넷 안에서 악성 댓글 달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 등 등,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절대로 좋아할 수가 없음에도, 우리는 어쩔수 없이, 같이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친절하고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면서, 왜 나는 그러지를 못하는가? 하긴 우리 인간은 이성적이기보다 충동적일 때가 많다. 심성보다 얼굴만 보고 좋아한다든지, 미시적 시야의 단면만 보고, 거시적으로 전체를 보는 안목이 없어, 우리는 어리석은 오류를 범할 때가 많다. 그러나 겸손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사람, 남을 배려하며 밝게 웃을줄 아는 사람 등의 모습을 보라. 그래서 갑질하고, 함부로 대하고, 악성 댓글을 남기고, 그 밖의 부정적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의 사회적 지위를 불문하고 불쌍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땀과 인고의 과정을 무시하고, 쉽게 열매만 얻으려는 안이한 편의주의가, 이 사회를 온통 병들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생적으로 살아도 전혀 양심의 가책이 없다. 너무 자기 합리화가 잘되어 있어, 이게 똑똑하고 야무진 사람들의 진면목이기에, 떳떳하고 당당하다. 야당 당대표가 되겠다는 자도, 집권당의 핵심들도, 모두 얼굴에 철면피를 깔았다. 거짓말을 밥먹듯 하면서도, 국민에 대하여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다. 그들이 인생을 요령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사도 야고보는 "세치 혀를 잘못 쓰면 필경 자기를 태우는 불이 된다."고 했다. 세치 혀가 불러 오는 재앙은 동서 고금이 따로 없다. 말로 천냥 밪을 값기도 하지만, 세치 혀로 명예는 물론이고 생명까지 잃을 수도 있다. 입 발림으로 요령으로 세상을 줄타기 하는 사람들이 득세하고 있다. 땀 안흘리고 사는 적당히 사는 삶, 그러나 어찌 이를 복 받을 인생이라 할수 있겠는가?
‘욕먹으면 오래 산다’라는 말을 따라, 인생의 짐은 남에게 지우고, 나는 땀흘리지 않고, 요령부리며 산다고, 과연 행복한 인생, 귀감이 되는 인생이라 할수 있을까?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가진 자처럼 보인다고해서, 그 가진 것으로 인생이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섭리와 이치에 어긋나는 인생관으로 사는 사람을, 어떻게 복받을 사람이라 할수 있겠는가? 진실로 행복한 사람은, 남과 내가 공존할 수 있는 하나가 되는 삶에 있다.
토요일인 어제, 나는 시골 에서 목회하는, 어느 목사님의 편지 한통을 받았다. 사모님은 암투병중 이고, 자신도 여러 합병증으로 넘 힘들다는 내용이다. 나는 이런 내용의 편지들을 종종 받는다. 20Kg쌀 한포 값만 후원해 달라 해서, 오늘 예배후 쌀 두포값을 송금해 드렸다. 아마 모르긴해도 이런 편지를, 교회 주소록을 통해 전국에 보냈으리라. 때론 눈물이 나기도 한다. 내가 무의탁 양로원 할 때, 정말 쌀 한포 살 돈이 없어 쩔쩔맬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때문에 사려 깊지 못한 사람들의 입방아에, 우리 마음이 흔들릴 이유가 없다. 매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그 사람들이, 오히려 문제있음을 알자! 예수님 당시에 주님을 만남으로 새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온몸으로 따르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첫 여인이 되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제일 먼저 당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셨을까? 그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실 때, 정작 주님의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으나, 그녀는 골고다 십자가 밑에 있었기에, 십자가 사랑의 진리를 깨달았다. 이처럼 십자가의 길을 걷는 단 한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주는 어느 축복보다 더 큰 은혜임을 알기에, 오늘도 나는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참 나를 찾고자 십자가 아래에서 길을 묻는다.
종그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