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이순신의 발견
【종그니칼럼】현대문명과 인류
나는 후배 목사 내외의 초대를 받아 노회장과 함께 제주도로 날아 왔다. 제주앞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명물식당에서 금방 잡아 올린 갈치와 해산물로 배를 채우니 통째로 제주를 먹은 듯 찐한 바다 냄새가 입가에 진동한다. "제주관광도 식후경이라" 배를 든든히 채운 후에 제주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망망대해로 잠기는 붉은 해를 보는 소중한 순간을 가졌다. 내 배는 풍선 배인가?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제주 밀감이 게 눈 감추듯 들어간다.
지금 머리속에는 다시 저 바다 너머 일본에 가 있었다. 조선 선조 때에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섬나라 일본이 수천년을 지들끼리 싸우다가 조선에 칼 끝을 겨누고 발발한 '임진왜란'을 가리켜서 세계사(世界史)는 엉뚱하게도 '제1차 중일전쟁'이라 칭한다. 그리고 조선 말 1894년 8월~1895년 4월까지 있었던 靑-日과의 전쟁을 '제2차 중일 전쟁'이라 부른다.
전쟁의 무대가 한반도가 중심이었음에도 우리나라에 대한 이런 치욕은 당시 우리나라가 약소국의 설움 즉 임진왜란 때도 청일전쟁 때도 우리는 중국에 조공을 바쳐야 하는 약소국이었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는 소위 중국의 제후국으로 일본의 '풍신수길'이 왜란(倭亂)의 명분을 조선 침탈이 아니라 중국 명(明)을 치는 것이라며 조선에 대하여는 '길(道)을 열어 달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지금 이순신을 '성웅(聖雄)'으로 추앙하고 있지만 일제시대 이전까지도 이순신 장군에 대하여는 우리 나라의 역사학자가 아니고는 모르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기껏 국사학자 들도 이순신에 대하여 아는 것이 고작 조선의 총 네명의 충무공(忠武公)중 한사람 정도로만 알았을 뿐이었다. 역사는 그 나라의 발자취임에도 우리는 역사에 대한 인식이 이처럼 천박했다. 우리는 충무공 이순신의 존재는 물론 그가 쓴 난중일기(亂中日記)도 먼지 묻은 역사속에 묻혀 있었던 이순신을 한국인의 대중속으로 민중들에게 살려 낸 사람이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사람이었다는 것이 놀랍다.
지금부터 120여 년전 1904년 2월부터 1905년 10월까지 있었던 '러일 전쟁'으로 1904년 8월 이후의 여순전쟁 (旅順戰爭), 1905년 3월의 봉천대전 (奉天大戰), 이어 다시 그해 5월 일본은 '대마도 해협'에서 세계 최강의 러시아 '발틱함대'를 궤멸시켰다. 이 전쟁에서 일본에게 최후 승리를 안겨준 '대마도 전쟁'은 근세사에 있어서 한 획을 긋는 전쟁으로 동양에서의 최강자가 중국(淸) 에서 일본으로 완전히 넘어가는 분수령이 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주선으로 1905년 9월 Portsmouth에서 휴전조약이 성립되고, 그해 10월 19일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이 결과로 일본은 조선에 있어 정치 군사 경제상의 우월권을 가지게 되고, 러시아는 만주에서 철병하고 여순 대련의 조차지와 장춘 여순간의 철도를 일본에게 할양하고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을 내어 주게 되었다.
이처럼 조선(朝鮮)에서의 이권 문제로 발단된 러시아와의 불꽃 튀는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한 일본은 동경에서 승전파티를 열었다. 여러분은 이 역사의 소용돌이를 통하여 무엇을 느끼시는가? 만약 임진왜란 때 즉 제1차 중일전쟁 때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영락없이 일본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 기울어가는 明을 쳐서 중국을 거머쥐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목 이순신의 철옹성을 넘지 못하고 수세기가 지난 후세야 일본이 청국과 러시아 제국을 넘어서서 마침내 중국 중원을 거머쥐게 되었으니 참 대단한 역사의 이변이었다. 이때 "대마도 해전' 에서 일본에게 아시아 최강의 승전을 안겨준 이는 바로 일본의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였다. 이 승전파티에는 천황도 다녀간 축하연이었으니 얼마나 뻑적지근 했었겠는가! '도고 헤이하치로'는 우리의 이순신처럼 일본 제1의 전쟁의 영웅으로 일인들에게 군신(軍神)으로 추앙받는 장군이다.
그 파티에서 '도고 헤이하치로' 에게 헌사가 이어졌는데, 어느 참의원이 “도고 제독은 가히 영국의 '넬슨 제독'이고 조선의 '이순신장군'이다”라며 축하했다. 이에 도고 제독이 “나에게 영국의 넬슨과 비견하는 것은 감당하나 '이순신 장군' 에게 비견되는 것은 어찌 감당 하리요! 나는 이순신 장군의 신발 끈도 매지 못할만큼 미미하다.”라고 아주 자신을 낮추었다. 이 말은 성경에도 나온 말이기도 하지만 성경을 알리없었던 '도고'가 인용한 이 말은 이후 일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숙어가 되었다.
이처럼 "일본의 이순신에 대한 연구"는 그 열정이 아주 대단하였다. 정작 우리는 임진왜란 때의 이순신은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져 있었을 때 일본인들은 임진왜란 때의 이순신의 활약상에 대하여 그들은 우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이순신에 대한 연구는 실로 방대하였다. 이것은 비단 이순신 뿐만이 아니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명재상 류성룡(柳成龍)이 쓴 징비록(懲毖錄)에 대해서도 금과옥조처럼 애독하고 연구하고 있다. 어디 이뿐이랴! 그들은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 에 대한 연구도 우리보다 훨씬 더 깊다. 이처럼 일본은 우리와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이순신에 대한 연구가 아주 대단한 이유가 어디 있을까?
일본은 대륙과 멀리 떨어진 지진이 그칠 날이 없는 섬 나라다. 언젠가 꼭 조선에 대한 야욕 때문에 일본은 이순신 장군의 전술전략을 연구하고 또 연구하였다. 더군다나 일본은 사면이 바다로 쌓여 있는 섬나라로 오랜 세월동안 우리 조선을 마치 방앗간에 생쥐 드나들듯 출몰하여 약탈을 일삼았던 왜구들의 후예들이니 그 당시는 물론이고 서양 모든 나라가 해외 식민정책으로 나아 갈 때 이에 발빠르게 일제의 해군들이 얼마나 용의주도하게 이순신을 연구했었겠는가?
임진왜란 당시 일본 해군들은 지칠줄 모를 정도로 쳐들어 왔었지만, 조선의 이순신은 나라의 재정지원도 전혀 없이, 아니 지원은 커녕 온갖 모함과 음해를 받으면서 고립무원의 여건속에서 오로지 나라를 구하려는 일념 하나로 자신이 취할수 있는 역량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거북선! 당시 얼마나 기발한 군함인가! 일본인들의 이순신에 대한 끈질긴 연구 끝에 이순신 장군의 신묘한 전략전술에 그들은 감탄하고 또 탄복했었다.
'도고 헤이치로' 제독 역시 이순신 연구에 정진하여 이순신을 자신의 마음속의 영웅으로 자리 매김할 정도로 가슴 깊이 존중하고 있었는데, 이때 어느 의원이 러시아와 일본과의 '대마도 대첩' 의 승리를 임진란 때에 일본과의 전투에서 연전 연승한 이순신에 비견해 주니 '도고 제독'은 화들 짝 놀라서 감히 내가 감당 할 수 없는 분이라며 손사래를 쳤던 것이다. 그후 '도고 헤이치로'는 어느 공석(公席) 자리에서 이순신의 위대함을 이렇게 솔직하게 실토한 적이 있었다.
"나와 넬슨은 전 국가적으로 하나가 되어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전투에 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당시 이순신 장군은 조선왕 선조의 끝없는 시기와 질투 그리고 동료 장군들의 끝없는 음해를 일본군이 역이용 하여 이순신을 제거하려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조선 왕 선조 또한 백성들의 신망을 받고 있는 이순신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작정하고 모진 고문을 가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이순신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위한 일념이 고문을 이겨쟀다."
이렇게 하늘이 내린 장수를 사색당파의 진흙뻘 속에서 하마터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한 모진 목숨, 그런 모함속에서 하늘의 도움으로 살아 남아 최 전선에 와서 보니, 수군들은 뿔뿔이 다 흩어지고 남아 있는 배는 겨우 12척이 전부였다.
고려 말의 문인 길재(야은)가 망해 가는 고려를 바라보며 눈물로 지은 詩가 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았더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모든 것을 다 갖추고 밀물처럼 쳐들어 오는 일본 해군에 요즘처럼 중앙정부의 재정 지원도 전혀 없이 모든 전란의 준비를 자력으로 대처해야 하는 악조건을 딛고 백척간두에 있는 나라를 구하려는 구국의 일념으로 온 몸을 던졌다. 그래도 남아 있는 배 겨우 열두척을 가지고 스물 세번째의 대전을 완벽하게 승리로 이끌었다. 선조 30년 곧 1597년 9월, 이순신은 패잔전선(敗殘戰船) 겨우 12척으로 명랑에서 왜의 대군을 격파하여 왜군의 간담이 오그라 들게하였다.
이는 하늘이 내린 구국의 화신이었다. 이처럼 이순신은 일본 해군과의 끝없는 전투에서 단 한번도 승리의 자리를 내어 준 적이 없었다. 그만큼 그는 일본군에 비해서 나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오로지 왜군을 이 조선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일념과 바다의 흐름등 자연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저들의 간담이 녹아 혼비백산케 하였다. 일본에서의 악의 화신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욕망을 꺽을 자로 이 척박한 조선 땅에, 하늘이 내린 이순신에 의해 조선을 발판으로 조선은 물론이고 중국 明을 쳐서 천하에 군림하려했던 야심을 산산히 궤멸시킨 이가 바로 '성웅 이순신' 이다.
이를 두고 일본 제독 '도고 헤이치로'는 이순신 장군에 대하여 "나는 물론이고 넬슨 제독에게 있어서도 이순신 장군의 바다에서의 전술은 그 누구도 감히 흉내는 커녕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전쟁의 신(戰爭의 神)이었다."라고 찬탄했다.
이처럼 이순신은 바다의 흐름과 깊이 그리고 해일 등 주변의 모든 여건을 일체화 하여 전쟁의 무기 또는 보루로 삼았던 것이다. 식민지 때의 '도고 헤이치로'의 이 발언은 당시 조선 땅에서는 이순신에 대하여 역사 학자들이나 겨우 알고 있었을 이순신에 대한 존재가 새롭게 재조명 되기 시작했다 바로 이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불렀던 노래 가사 한토막이 생각난다. "슬기로운 거북선!"이란 가사다 그 외의 가사는 생각이 날듯하면서 떠오르지 않는다.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고사성어에 '타산지석'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 민족은 오랜 역사를 격어 오면서 그 역사의 마디 마디마다 문제의식 을 가지고 바른 답을 찾는데 너무 소홀히 해 왔다는 점이다. 다시말하면 투철한 민족에 대한 역사인식이 결여되어 왔었다 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유성룡이 징비록(懲毖錄. 징(懲)을 기록하여 후세의 교훈으로 삼고자 기록 했다) 역시 조선에서는 묻혀 있었던 것을 일본에서는 이 징비록이 웬만한 일본인이라면 다 읽어 볼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었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일제 때에 이르러서야 그 이전엔 조선의 국사학자들 에게만 읽혀지던 이순신 장군이 쓴 '亂中日記'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같은 임진난 때에 류성룡이 쓴 '징비록'이 참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인들에 의해 먼저 읽혀진 후에야 우리의 눈에 재 조명 되었다. 민족의 얼과 조선 민족 역사의 무대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이순신의 진면목이 겨우 살아나게 된 것이다.
저 유명한 '트라팔카 해전(Trafalgar 海戰)에서 영국 넬슨 제독이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의 연합군을 이김으로써 나폴레옹을 재기 불능으로 만들고 마침내 영국은 전 세계의 제해권을 거머쥐게 되었을 뿐아니라 이로써 영국은 '태양이 지지않는 대제국' 의 기틀을 미련하였다.
조선 또한 이순신 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을 알아 보는 안목 있는 왕이 당시에 있었더라면 아마 조선의 판도는 대영제국의 발판을 이끌어 낸 넬슨 제독처럼, 일본을 재기불능으로 만든 것을 기회로 일본을 제압하고 중국을 호령하는 대국으로 우뜩서게 되었었으리라!
지금도 역사인식을 바로볼 줄 아는 일본인들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일본의 개화를 이끈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의사의 인간 됨을 보고 설혹 그가 일본에게 패망을 안겨주었다 할지라도 이 순신을 전쟁의 신으로 보듯 그 인격을 보고 존경한다.
내가 존경하는 박정희도 중국 만주의 일본 육사에서 이순신 장군의 전술에 대해 배웠다고 한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아산의 현충사와 통영의 제승당 및 해남 우수영 이순신 사당을 정비하는 등 전쟁의 신 이순신 장군에 대한 대대적인 숭모(崇慕)가 있었다. 그에 의하여 이처럼 대한민국의 역사속에 그리고 우리민족의 가슴속에 '충무공 이순신의 진면목'이 다시 살아 재 조명 되었다.
그에 앞서 이순신의 진면목을 알아 본 '도고 헤이치로'와 같은 일인(日人)을 통하여 칠흙처럼 어둡고 '얼'이 빠져 있던 식민 시절에 민족의 기상인 이순신의 정신을 불어 넣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가르침이고 역사의 아이러니다. 만약 임진란 때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우리 조선의 운명과 중국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그러기에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써 내려 가는 그분의 역사인 것이다.
【종그니칼럼】 현대문명과 인류
바벨탑처럼 인류가 만든 현대문명, 그 산물인 인터넷이란게 참 편리하다. 볼펜으로 쓰는 대신, 손가락으로 글을 써서 저장해 두었다가, 멧세지를 폰으로 보내면 되니, 얼마나 편리한가! 그런데 오늘 오후 지인들에게 보내려고 저장해 둔 글이, 방금 한순간에 몽땅 날아가 버렸다. 이 허탈감을 무슨 말로 표현 할까! 그치지 앓고 줄기차게 내리던 장마비가, 오늘 날이 좀 빼꼼하길래, 그동안 따지 못한 참외와 풋고추를 따다가, 잠시 밭에 앉아 오늘 쓴 글을 점검하던 중, 이런 낭패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문명의 이기가, 인간에게 많은 편의와, 시간의 단축을 가져다 주지만, 이처럼 폰에 저장해 둔 것이, 한순간에 몽땅 날아가 버릴때면, 육필로 종이에 쓰던 그 시절이 새삼 그립기도 하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탈로 옮겨진 현대문명은, 옛날 같으면 수백년 걸릴 것도, 순식간에 이루어 지기도 하고, 또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한마디로 현대문명은 편의주의의 토대위에 있기에 때론 모래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속의 내면의 뜻과 생각을,현대 문명처럼 내 편리대로 뽑아 쓸수 있는게 아니다. 마음속의 인격이야 문명과 함께 진보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격물치지(格物治知)란 말이 있다. 공자의 손자 자사자(자思子 B.C. 492- 432)가 쓴 대학(大學)에, 치지재 격물(致知在 格物) 에서 나온 말로, 大學의 근본인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의 육례(六禮)를 터득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과, 明德, 親民, 至善의 삼강령과, 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 家, 治國 平天下를 말함으로,이는 인간 내면의 바탕을 인본(人本)에 둔 이론이다. 때는 중국천하가 소위 칠웅(七雄)이 할거하던, 춘추전국의 난세였음에도, 인류문명을 조명하는 전분야에 걸친 학문은, '제자백가(諸子百 家)시대'라 할만큼, 미승유의 꽃을 피웠다.
이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본질의 자유분방함, 소위 헤겔이 말하는 정반합(正反合)으로, 인간 특유의 사회성을 말함이다. 중국의 종주국이던 주(周)가 중심축에서 밀려나게 되자, 시작된 수백년간의 전란속에서 발아된 유학이, 송대(宋代) 에 이르러 성리학으로, 주희(朱熹)에 의해 꽃이 피고, 비로소 조선의 '이황'이 '이기 이원론(理氣 二源論)'으로, '이이'는 '기 일원론(氣一源論)'으로 발전하였다.
동시에 오늘의 대한민국을 온 세계가 일컫기를,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피었다 할만큼, 경이로운 기적'을 만들었다."말한다. 이처럼 세계가 놀라는 경이로운 기적을 일구어 낸 대한민국이, 이 축복을 누리기도 전에, 지금 너무도 빨리 늙어가고 있다 수년 전 터키를 갔더니, 그곳 상인들이 우리 한국인을, '빨리빨리' 로 불렀다. 이처럼 자타가 공인할만큼 천성이 부지런한 우리 민족이, 눈부시게 급성장했다가, 또 너무도 빨리 퇴행하고 있는 조짐들이 보이는 첫째 요인이, 바로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젊은이가, 일터와 교육의 현장에서, 마치 썰물 빠지듯 사라져, 인구절벽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풍조의 흐름에 나를 맡기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품격과, 대자연의 순리를 따라 산다."는 것과, 세상풍조에 맞추어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과는 같은 동시대를 살아도 삶의 근본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대홍수가 나서 강물이 범람할때, 죽은 것들은 거센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 가지만, 살아 있는 물고기는 그 거센 물결을 거슬려 올라 간다. 편의주의와 이기주의에 흠뻑 오염된 한국 젊은이 들이, 혹여 인생을 순리를 따라 바로 살려는 의지보다, 되려 자연의 순리나 인간의 근본을 거스려, 육신의 소욕이나, 세상적인 안목으로 행복을 찾으려 하는 것은, 마치 수박겉만 핥듯 삶의 진수는 맛도 못보고, 껍데기만 핥는 것과 같다. 이는 인간 내면이 공허할수록, 물질문명의 극치가 되어, 지정의(智情意)의 인간 본연의 모습인 '하나님의 형상'은, 세상풍조에 휩쓸리게 되는 것은, 인간 본래의 모습이어야 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를 향하여 주님이, "너희가 내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마태복음 17장에 변화산의 얘기가 나온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등장하는 모습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이고, 엘리야는 예언서의 대표자 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여, 구원의 새로운 장을 여셨다. 결국 이 세사람은 구약시대의 유산이, 신약 시대로 넘어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변모 사건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서,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바랐기에, 이곳에 초막 셋을 짓자고 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그 자리에 머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수난과 죽음을 거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환하게 드러낼 부활을, 미리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따라서 예전의 자리에 그대로 머물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대는 지금 어느 자리에 있는가?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린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말씀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깨달음의 멧세지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구태의 껍떠기를 깨고 따르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진정한 변화된 모습일 것이다.
중국 진시황은 천하를 거머 쥐긴했지만, 생명의 수한만은 정복할수 없어, 불로 불사약을 구하려 했으나, 그의 나이 49세에 원정(遠征)중에, 환관 조고의 손에 요절하고 말았다. 태산을 뽑을 만한 기개를 가진 항우가, 한낱 댕댕이 넝쿨같은 유방에게 죽었다. 이처럼 육신의 안목을 따라 사는 삶이란, 겉은 화려하고 풍요롭게 보여도,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모든 것이 헛될 뿐이다. 나는 삶의 진수를 밭에서 농작물들과 같이 있을 때에 느낀다. 그러기에 사람에겐 은혜와 사랑,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이 꼭 필요하다. 사랑은 하나님의 품성이요,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