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칼럼】국회 해산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1903년의 일이다. 네덜란드의 위대한 칼빈주의 신학자요, 저술가요, 대설교가, 대저널리스트, 대정치가인 아브라함 카이퍼가 수상으로 일한 지 꼭 2년째 되던 해였다. 카이퍼가 수상으로 오르기까지 그는 미니 정당인 ARP 정당의 당수였다. 그가 속한 ARP 정당으로는 거대당인 사회민주노동당을 투표로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카이퍼 박사는 몇몇 소수 정당과 서로 연정을 해서 수상의 자리에 올랐다. 카이퍼는 자유 기독교 민주주의자로, 그 나라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꿈이 되었다. 카이퍼 수상의 꿈은 국민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하는 복되고 거룩한 민주주의 국가를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하지만 의회를 주도하는 세력은 카이퍼 수상에 대하여 하는 일 마다 어깃장을 놓고, 문제 제기를 하면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계속했다. 특히 국회의 주도 세력의 리더는 변호사 출신의 뜨롤스트라(Mr. P.J, Troelstra)였다. 그는 25년 동안이나 사회 민주노동당의 지도자로 국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서구 사회를 강타한 공산주의 사상가였다. 맑스주의 사상은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 사회, 문화, 학문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여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서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꾸닌(Michael Bakunin, 1814~1876)이 ⌜신과 국가⌟를 통해 무정부주의 사상, 사회주의 사상을 고무, 찬양했다. 그의 망언은 민주주의의 도전이었고, 서구사회에 공산주의 혁명과 폭동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는 기독교를 가장 악랄한 종교로 비꼬고, 기독교는 신의 유익을 위해 인간성을 빈곤케 한다고 역설하고 진정으로 무정부주의를 예찬했다. 물론 그 시대의 환경은 당시 유럽에서 일어난 <인본주의>와 <계몽주의> 사상과 연결된다. 그는 모든 것에 인간의 판단과 결정만이 절대적이라는 사상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은 폭력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진 자들과 정부를 뒤엎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회의 다수당의 지도자인 뜨롤스트라는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정부를 전복하고 가진 자들을 증오하고 타도하자는 생각이었다. 칼 맑스(Karl Mark)가 1848년에 공산당 선언(Communisto Manifesto)을 한 후에 뜨롤스트로라는 공산당 사상에 심취한데다 법학을 공부한 능변가였음으로 다수당인 노동당은 그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했고 여론을 만들어 갔다. 그래서 그는 항상 노동자들에게 기름을 붓고, 노동자의 데모와 파업을 부추기는 정치가였다. 뜨롤스트라가 지휘하는 사회민주노동당은 경제의 사회화를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노동당의 필요성을 선전 선동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항상 노동조합과 제휴해서 노동자의 총파업과 데모를 독려했다. 뜨롤스트라와 사회민주노동당은 한술 더 떠서 <정규군 폐지>, <산업과 운송의 국유화>, <하루 8시간 노동제>, 사고와 질병, 노인과 실업으로부터 노동자의 전면 보험제를 실시를 주장했다. 특히 다수당의 리더 뜨롤스트라는 국제 노동운동과 연대를 표방했고, 네덜란드의 군주제도를 혐오했다. 바꾸닌과 뜨롤스트라의 지도와 영향으로 네덜란드의 노동자들이 함께 뭉쳤고 카이퍼 수상을 옥죄이고 비판했었다. 그러니 카이퍼 수상과 뜨롤스트라는 사상적 맞수이자 평생 정치적 맞수였다.
카이퍼는 기독교 민주주의자로 네덜란드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과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한 정치 철학을 가졌다. 그러나 뜨롤스트라는 맑스주의, 공산주의 세계관을 가진 자로서 민중봉기의 기수였다. 그러므로 카이퍼가 수상으로 재임하고 있는 동안 그를 가장 많이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괴롭힌 자는 뜨롤스트라였고, 그 자가 이끄는 다 수당이었다. 그런데 뜨롤스트로와 같은 맑스주의자들이 고무로 드디어 <철도 대파업>이 시작되었다. 철도 파업은 경제적인 것보다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는 카이퍼의 내각에 흠집을 내고 협박해서 다시 진보 세력을 규합하는데 있었다. 처음에는 사소한데서 시작되었으나, <수로운수노조>와 <철도노조>가 단합해서 파업을 시도했고, 이것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자 사회주의적이고 맑스주의 사상을 가진 노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합세했다. 그 배후에는 노동당의 뜨롤스트라 같은 지도자가 배후조정을 하면서 무정부 상태로 몰고 가고 있었다.
카이퍼 수상은 즉시 이 사건이 <혁명적인 무정부주의자>들이 소행으로 간파하고 <국민군>을 소집하고 데모자들에게 정부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카이퍼는 임 시철도 운행을 정상화하도록 했고, 마부들이 파업(요즘 우리 식으로 택시 노조)을 하니 육로 교통이 마비됐다. 카이퍼는 법과 질서를 파괴하는 자들을 용납지 않았다. 그는 의회에 나가서 철도 운영을 보호하기 위해 <철도부대를 창설>하고, 정당한 불만은 즉각 조치하되, 위법은 범죄자로 간주하고 노동자가 직무를 버리면 엄벌에 처하고 다른 일터에도 일할 수 없다는 연설을 함으로 박수를 받았다. 이를 가리켜 반(反) 철도파업법(Anti-Railroad Strike law)이라 했다.
그런데 무정부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국회 안에 이른바 저항위원회(A Committee of Resistance) 구성하여 카이퍼 수상이 제안한 교육법에 제동을 걸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른바 반기독교적이고 인본주의적 교육을 주장하는 자들로서 <카이퍼 수상의 교육법>을 반대하고 나섰다. 말하자면, 인권을 앞세우면서도 인간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모든 것을 자유로히 결정한다는 인본주의 세계관을 가진 교육 시스템이었다. 한마디로 교육에 있어서도 사회주의적 이론을 결합시키려는 것이 좌파들의 논거였다. 그래서 카이퍼의 위대한 교육법제청은 좌파 다수당의 저지로 상원에서 부결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카이퍼 수상은 1904년 9월 20일 빌레미나(Willemina) 여왕에게 <의회 해산>을 요청했다. 즉시 여왕은 의회를 해산했고, 상원이 다시 구성된 후에야 카이퍼의 <고등교육법>이 통과되었다. 위대한 칼빈주의 정치가의 리더십이 빛나게 되었다.
오늘 이 이야기는 지금부터 120년 전의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 국회는 50일 동안 놀고 먹다가 하루 회의하고 매월 1285만원을 받아가는 참 염치 없는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생각해본다. 국회의원 선거도 부정이 있었다는 분이 많았는데 그냥 덮고 가는 모양새다. 요한계시록에 있는대로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을 것이다>.
( ※ 이 역사적 사건은 나의 졸저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과 삶> pp113~161을 요약한 것이고, 이 책은 영어, 독어, 불어로 번역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