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한국의 개혁교회가 추구할 것

김영규 박사,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2023-07-13     리폼드 투데이

“완성된 개혁주의 신학은 신학적 논제에 대한 모든 답변 가지고 있어”

정통개혁신학은 17세기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개혁신학과 관련해서 그 이후 시대로부터 배울 것은 없다. 그 이후 시대에는 다만 그렇게 개혁된 신학과 얼마나 일치하느냐에 달려 있다.

칼빈의 신학은 개혁신학의 출발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칼빈의 신학이 개혁신학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은 그의 신학이 루터의 신학과 같은 종교개혁신학을 받아들이되 ①루터의 신학에 있어서 로마카톨릭 신학에 의해서 타락한 부분들을 제거한 어거스틴의 순수한 신학의 회복에 기여하지 못한 부분이나 ②어거스틴의 신학에 있어서 카톨릭 신학으로부터 타락의 원인이 되었던 부분들을 제거한 신학적 관점들을 계승하면서 ③쯔빙글리나 오클람파디우스 등에 의해서 바르게 비판되는 부분들이 개혁신학의 이름에 의해서 엄밀하게 모아질 수 있는 것들을 개혁신학의 고유한 신학적 특징들로서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만찬 집례에 있어서 목회자들의 흔한 실수는 성령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론에 있다. 성령의 임재는 기독론의 논쟁점을 피하기 위한 합의점에 불과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도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그리고 완전한 인간으로서 믿지 않는 방식으로 피하는 그런 성만찬의 집례는 의미가 없다.

개혁신학은 성만찬의 떡과 음료에 그리스도께서 로마 카톨릭처럼 실체로 임하여 있거나, 루터 신학처럼 몸으로 임재한다고 믿지 않고 편재하시는 전 그리스도(totus Christus)로 임재하는 것으로 믿되 그리스도의 전체(totum Christi)는 편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개혁신학은 어거스틴 신학의 한계점을 동방 교회의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합의점들에 의해서도 극복하였다. 그래서 이미 칼빈에 의해서 삼위일체의 각 위격들에 본체(휘포스타시스, subsistentia)라는 개념이 사용되었고 각 위격들에 공유할 수 없는 고유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그 후 칼빈을 따르는 개혁신학자들은 그런 구별성에 있어서 각 위격들의 공통성이 파괴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속성들을 어거스틴의 입장에 따라 실체적 속성들로 이해하여 각 위격들에 있어서 실체적 속성들을 그 동등성으로서 강조하고 전 위격의 상호 교류에 있어서 실체적 속성들로 교류하는 것을 파괴하는 하나님 밖의 하나님의 외적 역사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들을 무조건 배제하였던 것이다.

그 예로 개혁신학 일반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언약에 있어서 그런 실체적 속성들을 교류하는 근본을 파괴하는 17세기 코케이우스의 구원의 언약이란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성자와 중보자로서 그리스도 사이에 신학적 구별이 이루어졌고 그리스도가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는가하는 제한속죄 문제도 해결을 보았던 것이다.

그렇게 개혁신학은 기독교에 있어서 독생자로서의 그리스도와 먼저 된 자로서의 그리스도 사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2세기로부터 있었던 오래된 이단들의 입장을 배제하였던 것이다.

영원한 작정이나 예정론은 교회의 근원이나 기원 문제 및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에 대한 신구약 통일성 문제이다. 즉 교회의 기원 혹은 개인적 구원의 기원은 로마서 9장의 바울 사도의 가르침처럼 하나님의 다른 속성들이 유효적 속성들로 있을 뿐 하나님의 기뻐하신 의지 외에 다른 원인들이 없는 하나님의 의지를 구원의 마지막 최고의 원인으로 믿는 것이 그 기본 입장이다.

개인의 구원이 인간의 개인적 자유의지에 기원한다든지 그런 자유의지가 관여하는 어떤 신앙이나 타락을 고려하는 결정에 있다든지 하나님의 의지보다 하나님의 지식과 같은 다른 속성들이 앞선다는 신학적 입장들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담의 경우나 아브라함, 야곱인 이스라엘의 경우나 모든 인류의 어떤 구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라는 입장으로서 바로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같은 방식인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구원의 서정에 의해서 인류는 구원을 받고 그런 개인들이 지금 교회로 부름을 받는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교회의 통일성(Catholic Church)이 있지 감독정치나 교황정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개혁신학이나 퓨리탄 신학인 장로교 신학은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일을 하지 않는 지교회가 없는 감독이나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서 그리스도만을 인정한다. 그리고 인간에 의해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이 하나님께만 알려진 교회가 어떻게 이 세상에 있는지를 아는 유일한 표지들인 말씀의 바른 선포와 성례의 바른 집례 등이 바르게 시행되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지교회나 좁고 넓은 지역 교회 안에 장로회들이 있을 뿐, 그것의 수장은 없다.

그런 장로회들을 부정하는 일은 범 교회를 부정하는 것이고 회 자체에 있는 하늘과 땅을 푸는 그 열쇠권이 마치 개인이나 다른 소수들에게 이양되는 것은 완전한 세속화일 뿐이다. 교회를 세원으로 착각하는 국가나 세상도 이 점을 명심했으면 한다.

그런 개혁신학을 칼빈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후대의 신학적 논쟁점들에 있어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 칼빈의 신학에 의해서 모두 해결점을 보기 때문이요 이런 신학을 하이델베르그, 레이든, 바젤 등에서 주로 활동하였던 대표적 신학자들인 L.Trelcatius(1542-1602), F. Junius(1545-1602), D.Paraeus(1548-1622), J.J.Grynaeus (1540-1617), D.Tossanus(1569-1602), A.Polanus(1561-1610), F.Gomarus(1563-1641) 등에 의해서 잘 지켜져 왔기 때문에 정통개혁신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그 문답들이 존중이 되는 것은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무너져 가는 신학을 보전하고자 하는 마지막 노력들이 거기에 모두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여기까지만 계승하고 다 버려야 세계교회에 공헌하는 것이다.

【김영규칼럼】 성자 그리스도와 인간 존재 이해

“그리스도인들은 세계를 지탱해 나가는 힘으로 존재하고 있어야”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을 받을 그릇들로 창조되었다. 피조세계 안에 깊게 있는 임의성이나 자유성은 그 그릇의 신비를 상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선물은 구별이 되어야 한다. 곧 사람이 은혜로운 마음을 가지고 은혜로운 행위들을 나타낸다고 해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실체적 속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그런 속성이란 하나님의 실체와 함께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실체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자 하나님이 택자들을 위한 직분으로서 그리스도라는 직책을 얻어 시간상에 인간이 되었을 때조차도 하나님으로서 동시에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실체적인 속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 자체를 나타내신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길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으로서 성령 하나님의 실체가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심으로 인하여 계시되는 경우에서나 그런 거하심에 의해서도 그 실체적 속성으로서 성령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신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나 보이는 세계 및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존재하는 것으로서 기능들이 나타나고 서로 간에 지각이 된다고 해서, 그렇게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가감을 일으킬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선물들 사이는 분명히 구별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창조된 세계란 하나님의 선물들에 불과하되, 하나님의 은혜를 그대로 담을 수 있는 그릇들도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자연스러운 깨달음도 생긴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곳에 그런 실체적 한 속성이 다른 모든 실체적 속성들과 분리되거나 나누어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선물로서 피조물 안에 그런 실체적 속성들이 축약이 되어 충분히 나타날 수도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통하여 인간의 말로 표현하실 때, 어떤 것을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성경에 자주 표현하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완전한 자의 이상이 표현되었을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모든 실체적 속성들도 가감이 없이 표현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처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창조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닮아 가는 역사들이 세계 안에 계속 진행이 된다고 해도, 그런 역사들이 하나님의 명령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마치 없는 것으로부터 창조되는 그런 방식에서 이루어진 역사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극대화된 역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한, 어떤 인간도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동일하게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 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선물들은 분명히 구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완전한 인간이 되시기를 포기하지 않는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인간이 되신 일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적어도 주후 2세기 이후에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서 독생자(unigenitus)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먼저 된 자(primogenitus)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확고히 구별해 왔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하나님의 아들들의 총화나 교회의 충만으로서 그리스도의 충만이 이루어지는 역사 없이도 독생자로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실체적 속성들을 영원히 발휘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셨고 계신다는 점에 그 구별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는 실제적으로 이런 구별점이 없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자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형체들로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자들이 되는 일이 역사로서 성취되는 일이라면, 독생자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하나님의 모든 실체적 속성들을 발휘하시는 먼저 된 자로 계신다는 것 자체와 별개로 하나님의 선물 혹은 하나님의 은택으로서 하나님과 같은 속성들을 발휘하는 그리스도와 하나된 자들은 그것과 구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다르게 신자들은 긍휼의 그릇들,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들을 맺는 자들, 성령의 열매들을 맺는 자들, 혹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옷을 입은 자들 등으로 구별되어 소개되고 있다. 지금 세계 안에 희망이 있다면,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런 자들이 계속 등장하였고 등장할 여지가 남아 있는 세계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같은 선물로서 자연 속에 꽃이 있고 열매가 있으며 거기에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면, 또 다른 선물로서 하나님의 형상의 속성들을 발휘하여 열매들을 맺어 그 향기들을 나타내는 인간들의 삶에 대한 아름다움이 그 비유의 실체로서 있다는 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그렇게 높은 이상이 있는 세계를 그 이상대로 아름답게 꾸미거나 가꾸지 못한 것에서 사회나 세계의 불행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이상을 향해서 세계는 분명히 아름다워야 한다. 역으로 그런 이상적 아름다움이 구현이 되지 못한 곳이나 사회에는 문화와 예술이 있어도 실제적으로 그것들이 지향하는 화려함이나 아름다움이 거기에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구석에서라도 그런 아름다움을 구현하면서 살아가야 할 주체로서 세계를 지탱해 가는 힘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김영규 박사 프로필

▷독일 궤팅켄대학(Th.D.)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eq.)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74회 졸업
▷총신대학교 신학과(B.A.), 74학번.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역임
▷Director, Research Institute for the Bible and Reformed Theolegy(www.ribrt.org)


주요저서 및 논문
『Calvin and the Old Testament:Sola Scriptura and the Trintarian God as an Unique Author of the Old Testament(Germanic), 1993. ISBN 89-950009-1-0 93230』(Seoul 1994.) - 궤팅켄대학 박사학위(Th.D.) 논문
『A Dialogical Document and the Metaplasmic Phases of the Pre-Mosaic Hevrew hehind Gen 23.(Germanic. 1993.) ISBN 89-950009-0-2 93700』(Seoul. 1994.) - 창세기 23장에 관한 논문은 인류 역사 중 20세기에 와서 땅이 그 창세기 기록의  진실을 밝힌 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모두 고인들이 되었지만, 그 당시 고대 애굽어 기록들과 문헌들 편집의 최고 권위자이었던 H.W.Helck 교수와 고대 아카드 언어나 고대 슈메르 언어의 대가였던 D.O.Edzard의 자문을 받아, 독립적으로 주전 2400년 전의 고대 슈메르 문서들의 대화체 기록 방식들과 동일한 시기의 셈족 기록물들인 에불라 토판들에서 발견된  대화체 기록 방식들 및 고대 애굽 중 왕조의 편지들이나 기록물들에서 증거된 대화체 관용 표현들을 연구하여, 지금 현 창세기 23장에 기록된 그대로가 그 당시 "대화체 중재재판 판매 문서"의 직접적인 내용임을 증명한 논문이었다. 그런 대화체의 시대적 제한성 때문에 야곱에 관한 기록을 마지막으로 한 지금 창세기는 완성된 후  많은 세월을 지나 요셉의 죽음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 첨가된 것은 그 기록자를 알리는 간기(Colophon)라는 사실이 가정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화체 기록에 있어서 '그리고 역시 누가 누구 앞에 이르기를'과 같은 직접 화법 인용 관용구는 셈족 에불라 토판에서도 발견이 되나, '그리고 역시' 없이 '이제 내가 너에게 말하여 이른 것에 대해서' 등과 같은 직접화법 관용구는 후대 고대 애굽의 직접화법에서 증명이 되지 않는 창세기 족장시대에 해당된 고대 애굽 왕조들인 12 왕조와 13 왕조의 고유한 표현방식이라는 것이다.
『17세기 개혁신학』(개혁주의성경연구소, 1995.)
『조직신학 편람 I,II-2,III,IV.』(개혁주의성경연구소, 1998.)
『엄밀한 개혁주의와 그 신학』(도서출판 하나, 1998.)
『Biblica Hebraica et Graeca(Archaic Hebrew Texts and Greek Handwriting Texts of the First Century AD.) ISBN 89-89519-02-0 93230, 2002, RIBRT』(개혁주의성경연구소, 2002.)
"Paleographical Dating of 46 to the Later First Century, (Biblica-로마교황청 직영 국제학술기관지, Vol. 69, No. 2, 1988.)  P46(최초 바울서신 모음집 사본)의 연대 측정이 주후 1세기 말인 최소한 도미티안 황제시대 이후가 아님을 증명하였다. 또한 필자에 의하면, "P46의 필체는 주후 1세기 안에서는 물론 1세기 전후 수 많은 문헌 파피루스들 중에서도 극히 희귀하게 지금 남아 있는 주전 3세기 전형적인 교육교본 필체를 가진 파피루스 사본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한다.  문바로가기 https://www.friktech.com/rel/p46.htm

"도르트회의 Marburg 대학의 대표자 Rudolphus Goclenius(1547-1628)의 철학과 신학에 대해서"(대한논총, 2009.)
"하이델베르그 대학과 바젤대학의 개혁신학자 J.Jacobus Grynaeus(1540-1617)의 신학에 대해서"(대한논총, 2011.)
"초기 청교도 신학 안에서 법치사회의 기독교적 이상과 그 개혁정신 및 그 한계에 대해서" - 토마스 카트라이트의 논쟁자들을 중심으로(대한논총,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