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노년의 건강.

【종그니칼럼】불효자

2023-01-18     종그니칼럼

한달 전 다리 종아리가 더 부은 것같아, 춘천 성심병원 신장과에서 진단을 받은 결과, 작년엔 "나의 신장 수치가 40%."라 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는데, 1년이 지난 지금  수치가 겨우 25%란다.  이대로 두면 병원에서 한 주간에 두번씩 투석을 해야 된단다. 처방대로 약을 복용하고, 스무날이 지난 엇그제 갔더니, 신장 수치가 35%로 향상되었단다. 수치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쌍곡선에 울고 웃는다. 몇해 전 정맥 혈관에 피떡이 생겨, 의사의 표현을 빌리면, 길 가다 급사할 수도있었단다.  원인을 몰랐던 그 당시엔, 한 걸음 걷기조차 힘들었었다. 일년여가 지난 지금도 혈관 약을 복용하고 있지만, 그 때에 비해 지금은 아주 좋아져서,  요양원 4층 계단을 걸어서 오르내릴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나이 일흔 다섯이 넘게 되니, 이래 저래 많은 제약들이 뒤따르고 있다. 운전면허를 재발급 받아야 되는데, 75세 이상은 운전면허증을 다시 교부 받으려면,  '치매 진단서'가 첨부되어야 되고, 도로 교통에 관한 안전교육과, 신체검사까지 받아야 한단다. 이것이 귀찮으면 운전면허증을 반납하란다. 반납하면 10만원을 지급해 준단다. 그나마 75세가 넘게 되면 면허증 유효기간도 5년에서 3년으로 단축되었단다. 나이가 많아지는 것은, 인생살이의 일선에서의 퇴장이고,  지구의 무대에서도 퇴장할 때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다.  하기사 사람으로 태어나, 인생의 진수를 알 나이까지 살았으니, 이제 순리를 따라 인생의 무대에서 사라진들 무슨 회한이 있겠는가!

나를 지으신이가 오라 부르시는 날까지,두 다리로 걸을수 있음에 감사하고, 내가 이땅에 머물러 있는 동안 정신 줄 놓지 않고, 나를 이땅에 보내신 이의 뜻을 따라 살다가, 그에게로 가는 것, 그게 축복받은 인생인게다. 전남 고흥에 가면, 107세 되신 노인이 농사를 짓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누군가가 찾아갔더니, 마침 밭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할아버지가 일백 일곱되신 어르신 맞으신가요?"
"그렇다네, 이젠 내 나이가 너무 무거워서, 백살은 집에다 두고 다닌다네." 연세가 107세가 되셨는데도 총기가 총총하시고, 유머도 젊은이 뺨친다.  "아이고 그럼 몸이 엄청 가뿐하시겠네요!"
"물론이지"  "그런데 할아버지요! 제가 아는 할머니 중에, 일흔 다섯 된 아주 싹싹한 할머니가 계시는데, 제가 할아버님께 중신해 드리고 싶어서 왔는디, 어떠세요?"
"어이 이사람아! 내가 그 늙은이 데려다 송장 치를 일 있나? 공연한 헛 수고 말게나!"  

그럼 하나만 더 물어 볼게요. 할아버지 지금까지 사시면서, 많은 사람들로 부터, 모함이나 어려운 일 들을 격으시기도 하셨을 텐데, 그런 일들을 어떻게 푸셨나요?"  "그런 모함을 하건 말건 그냥 냅두었더니, 하나님이 아시고 내 앞서서 다 데려가시드라." 이 노인의 장수 비결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긍정의 삶'에 있었던 것이다.  살면서 평상심 즉 본심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내가 몸담고 있는 요양원엔 아흔 한분이 계시는데, 살아 온 삶의 흔적들이 모두 다 십인 십색이고,현재의  모습들도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늙어 삶의 질에 있어 제 일 순위인 건강을 잃은 것은, 말년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것이다. 건강을 잃어버리면 독립생활이 어렵게 될뿐만 아니라, 노후 생활 척도의 제 일순위인 내 몸둥이가 내 상전이 되어 있으니,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남의 손을 빌려야 되니, 그 몸 고생, 맘 고생은 말할수 없이 크다. 총기도 어두워지고 거기에 치매까지 와 있으면, 정말 살아 있다고 할수 없다.

이러한 노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위해 시작된 것이 바로 노인복지제도다. 노년에 건강을 잃은 노인들의 여생을, 주어진 최소한의 여건으로, 가장 합리적인 방법들을 강구하여, 사회와 가족들이 유기적으로 협력을해서, 최적의 여건과 최선의 공통분모를 이끌어 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오늘의 노인 요양제도이다.  그래서 '노인요양제도'에도, 각자에게 맞는 여러 제도가 있다. 가족의 보살핌속에서 가정에서 지내는 '재가 요양'이 있고, 또 써비스를 집에서만 받는 재가 요양 중에도, 방문목욕 써비스와 간호써비스, 그리고 요양보호사 써비스가 있다. 그 밖에, 집과 시설을 시차(時次)를 두고 이용하는, 주간보호 또는 야간보호 시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혜택은 '국민보험공단'에서 시행하는 등급(1~5등급) 을 받아야 한다.

65세 이상이 되어 건강을 잃어, 홀로서기(독립생활)  가 어렵게 되었을 때에, 등급을 받아야 비로소 이 혜택을 받을수 있다. 그럼 등급을 받아두는게 좋을까? 그러나 이 것만은 아니다! 등급이 필요 없을 만큼 건강한 것이 좋다. 세상에서 다른 것들은 등수 안에 드는 것이 좋겠지만, 이 것만은 아니다. 75세가 된 노인이 어느 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모든 검사 가 건강한 것으로 나오자, 의사가 좀 의아해서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나는 매일 만보(萬步)를 걷고, 포도 효소를 마시는게 전부다." 이말을 들은 의사가 "그것은 당신의 유전자가 아주 좋다는 것인데, 그럼 당신의 아버지는 생전에 건강하셨나요?"
"아버님은 지금 살아계시고 97세이십니다. 오늘 아침에 나와 만보를 걷고, 포도주 두 잔을 드셨지요." 
 
"그래요? 당신의 가족은 정말 장수 집안이시네요.  그럼 할아버지가 돌아 가셨을 때 당신은 몇 살이었나요?"
"아니, 할아버지도 지금 살아계는데요?"  이 말에 의사는 당황하여 "당신 아버님이 97세 이신데, 할아버지가 아직도 생존해 계십니까?  "그럼요." "할아버님의 연세는 어떻게 되십니까?"  
"우리 할아버지는 118살 이십니다." 
"그럼 할아버님도 오늘 아침에 당신과 같이 걷고 와인 두 잔을 마셨습니까?"
"그럼요! 하지만 이제 할아버지는 저와 함께 하실 시간이 없답니다. 할아버지는 지금 61세이신 분과 열애중입니다." 
이후 의사는 병원 문을 닫고, 매일 만보를 걷고, 와인 두 잔씩 마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옛말에 청년의 때는 잠깐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젊은 날에 열심히 인생의 씨앗을 뿌리고, 늙어서는 세월을 아껴, 살아 온 삶을 알알이 거두어, 하늘나라 곡간에 들이는 건강한 삶을 살자!

          종그니가

【종그니칼럼】불효자

오월은 '가족의 달'로, 낼 모레가 '어버이 날'이다. 근자에 들어 매 해 오월이 되면, 돌아가신 부모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잘 해 드린건 기억에 없고, 불효 막급한 일들만 주마등처럼 떠 올라, 다시는 고쳐 못 할 불효라서, 회한의 눈물만 흘러 내린다.
정철의 시(詩)가 가슴에 대 못이 되어 박힌다. "어버이 살았을제 섬기기란 다하여라. 돌아간 후면 아엽다 어이하리. 생전에 고쳐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듬 해에, 나 보다 다섯 살 위인 큰 누나가 시집을 가고, 칠순이 다 되신 아버지는, 아직 어린티를 벗어나지 못한 나를, 이듬 해에 장가를 보내려고 작심을 하셨다. 당시의 나는 결혼이나 이성에 관한 한 전혀 숙맥이었다. 그럼에도 아버님은 내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굳이 나를 장가를 보내려한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혹여라도 돌아가시기 전에 손자라도 안아 보고 싶어서 였을까?  지금은 육십년 전에 비하면, 조상(祖上)과 관혼상제(冠婚喪祭)에 대한 의식이, 가히 상전벽해처럼 변했다.  선친께서는 조상의 대가 끊어질까 노심초사 하시다가, 오십에 아들을 얻었으니, 나에대한 애정이 오죽하셨겠을까 마는, 허나 내 기억으로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본 기억이 전혀 없을 만큼 지엄하셨다. 조상에 대해 선친의 뜻이 그러하니, 오죽하면 가족들은, 내 '잠지'까지 훔쳐 보려고까지 했을까? 

고향 집엔 큰 사랑채가 있었는데, 당시는 살기가 어려운 때라, 선친을 뵈러 찾아온 진객보다, 일 거리를 찾아 떠도는 행려객이나, 각종 봇짐 장사치들, 문전걸식하는 이들로 언제나 붐볐다. 그런데 참 별난 아버님은, 사랑채에서 이런 이들과 평생을 함께하셨다. 왜 그려셨을까? 선친은 이런이들을 위해 침술을 터득하셨고 증상에따라 한약처방을 해주셨다. 당시 어린 내가 선친의 깊은 뜻을 어찌 알리요 마는, 선친은 이러한 약자들과 고락을 함께 하셨던 것 같다. 사랑채에서 숙식을 하다가 숨진 걸인들도 많았다. 사랑채엔 방이 3개였는데, 맨 아랫방엔 아버님과 평생을 함께한 임동규님, 그리고 아버님을 뵈러 찾아온 손님들이 주무시고, 가운데 방엔 마을 노인분들이,  맨 윗방은 행려자나 걸인들이 사용했다.

이 당시에는 사람들의 몸속엔 이와 벼룩들, 그리고 방에는 빈대들이 기승을 부릴 때였다. 그런데 아버님은 이러한 해충들로 고역을 치르시면서도,  이를 마다하지 않고, 이들과 평생을 함께하셨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선친께서는 이렇게 돌아가시기 전 날까지 사랑채에 계시다가, 당신의 임종이 다가 옴을 아시고, 안채로 오신 다음 날 소천하셨다. 중 농가 쯤 된 우리집엔, 집 안팍 일을 하는 머슴 둘이 있었고, 어머니는 집안 살림 일을 다 관여하셨다. 어머니의 손은, 여리고 나약한 여자의 손이 아니라, 여늬 남정네의 손보다 억세고 다부지셨다. 부엌에 있는가 하면 터밭에 가 있고, 터밭에 있는가 싶으면, 어느새 베틀에 앉아 베 옷을 짜셨다. 울 엄마가 베틀에 앉아 시름을 달래려 부른, 가사가 긴 '베틀 노래'가 있다. 어렸을 적 하도 많이 들어 달달 외었 었는데, 이젠 다 잊었다. 어릴 때의 기억을 더듬어 가사를 몇자 적어 보면, ("이 마을에 부녀들아! 뽕을 따러 가자스라. 청태산 높은 봉에 좌우로 뻗은 가지 촘촘히 훑어 담아 거렁망을 채웠구나!거렁망을 걸머지고 왔던 길로 도상하세! ~~~ ~~~, 열 석새 금 보디 ~~~ ~~~, 요내 베를 좋게 내야 한양가신 우리 낭군 청도복이나 짓고 지고!")

이때 선친께서 장남인 나를 장가보내려 한다 하니까, 사랑채를 들랑거리는 중매쟁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선친 밑에서 약 3년여 동안 한문을 익혔다. 그때 나는 무조건 외우기식의 성리학 교육보다, 새 학문 교육에 목말라 진학하고 싶다고, 아버님께 여러차례 말씀을 드렸지만, 나에 대한 아버님의 생각은 요지부동 이셨다. 그러시다가 칠순이 훌쩍 넘으신 아버님은, 그해 겨울 지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졸지에 선친을 여읜 나는, 내게 안겨진 가장이라는 짐때문에,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어리지만 장남이기에 마땅히 가정  대소사를 짊어져야 할 처지라, 기로에 서서 입술이 부르트도록 번민하던 나는, 향학열에 불타는 맘을 접을 수없어, 큰 아들로서의 본분이나 도리를 저버리고, 이내 집을 떠나기로 작심을 했다. 결단을 내리니, 어머님과 결혼한 누님이 내 뜻에 동의를 해주셨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된 나는,  평소 "등에 뿔난 직업(농사꾼)이 가장 마음 편한 직업이다."라고 가르치신 선친의 그늘에서 어서 벗어나고자, 지게도, 달구지도, 논 밭가는 쟁기도 다 버려두고,  단 한번도 고향 임실을 떠나 본 적이 없던 나는,  송아지와 쌀 한가마를 팔아서 손에 쥔, 달랑 '일만 오천원'을 손에 쥐고, 초등교 은사님이 계시는 서울을 향하여, 완행열차에 무조건 몸을 실었다. 내 아래 남 동생이 있고, 여동생 둘이 있고, 그리고 어머니가 계셨다. 어느 모로 보나 나는 장남이니까, 선친의 빈 자리를 지켜 집안 살림을 이끌어야 했다. 그리고 아버님 살아 생전에 장가도 갔어야 했다. 옛말에 "태산명월이 강동 팔십리."라 했는데,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다. 이때 내가 만약 선친의 유지를 따라 일찍 결혼을 하고, 집안을 이끌어 갔더라면, 아마 육십여평생 객지를 떠돌지 않고, 고향에서 선친이 그랬던 것처럼,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며, 유유자적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내가 이제 칠십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고 보니, 사람이 사는 것은, 자기 능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이땅에 보내신자의 섭리를 따라 사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인고의 세월을 지나 인생의 종점에 서서, 지난 날들을 돌이켜 보면, 사람이 사는 것은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지, 내 수완이나 세상의 안목등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은, 조물주의 섭리를 거스르는  역린의 삶임을 깨닫게 된다. 내가 선친의 슬하에 있을 당시, 내 뇌리속에 각인된 아버지는, 물론 인자하시고 온화한 모습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보다는, 두 눈에서 불덩이가 이글거리는 듯한, 범접하기 어려운 지엄한 분이셨다. 그래서 내 기억으로는, '아빠' 혹은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러 본 기억은 없고, 아주 어렸을때 부터 언제나 '아버님'이셨다. 내가 철들기 전부터 그분 곁에 있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엄혹한 분이, 내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나의 장래문제나 결혼 문제에 이르기까지, 인자한 얼굴로 내 소견을 물어보신 적이 내 기억엔 없다. 그래서 어렸을 때의 나의 아버님에 대한 추억은, 인자한 모습의 아버님, 살가운 모습의 아버지가 아닌, 범접하기 어려운 지엄한 모습이셨다. 

그렇게 아버님은 고인이 되셨지만, 그 이미지는 선친의 굴레로부터의 해방감이, 결국 나를 서울로 유학길에 오르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말하자면 내 삶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선친의 유지를 저버리고, 장남으로서의 나에게 안겨진 책무를 저버리고, 내 욕심 내 청운의 꿈만을 꿈 꾸고, 내 욕심을 따라 간 서울로의 유학 길은, 내 인생의 여정에서 환영받지 못할 실패한 고난의 길이었음을, 고희가 되어서야 삼가 아버님 영전에 고개를 떨군다.

         종그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