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여명(黎明)과 태양.
【종그니칼럼】누가 행복자인가!
조선 초기(初期)에서 세종 때에까지, 맹사성(孟思誠 1359~1431.)이란 청백리 정승이 있었다. 그의 집은 초라한 초가집이었는데, 비만 오면 안방에까지 비가 새곤 했다. 그럴 때면 노 부부는, 방안에서 볏집으로 엮은 비옷으로, 새는 비를 피하면서, 맹정승은 아내에게 민망하여, "임자! 여염 집에도 비새는 집이 많을 텐데, 그래도 우리는 비옷이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요." 이같은 무욕의 삶이 얼마나 당당한가! 나도 이런 삶을 살고 싶지만, 세상 때가 너무 묻어 생각속에 머무를 뿐이다. 내가 어느 시절에 풍잔노숙하던 시절이 있었던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1965년 열아홉 때, 서울로 유학을 와서, 참 어렵게 고학하던 시절이 떠 오른다. 그해 첫 겨울을 은사님이 운영하시던 사설 학원에서 기거하면서, 밤이 되면 벤취의자 둘을 마주 놓고, 모포 한장으로 한 겨울을 견뎌 냈던 젊은 날이 있었다. 그땐 왜 그리도 밤이 길었던가! 국수도 제대로 삶을 줄을 몰라서, 냄비에 찬물을 붓고 바로 국수를 넣고 삶았으니, 언제나 국수는 풀 떼죽이 되어 있었다. "시골에서 엄마가 삶아준 국수는 이게 아니었는데" 하며, 그 해 내내, 이렇게 국수를 먹었지 싶다.
그래서 간혹 남대문 시장엘 들러, 시장거리에서 짜장면을 사 먹곤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중국 식당에서 음식쓰레기로 버린 것을, 재활용한 것인 줄을 알고는 먹지 않았다. 젊은 날 한 겨울에, 캠핑장에 모닥불 피워놓고 하룻 밤정도 지새는 것, 그것은 젊은 날의 낭만이라 그런 고생은 만들어서라도 하겠지만, 그러나 한 겨울을 교실에서 보내기는, 대단한 결기가 없이는 힘들지 싶다. 젊은 날의 고생! 돌이켜 보면 참 아름다운 추억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견딜 만 하다가도 새벽녁이 되면, 온몸이 와들 와들 떨려왔다. 그럴 때면 일어나서 줄넘기하듯 제자리 뛰기를 하면서, 아침 해를 기다리 곤 했다. 그렇게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시간은 어찌 그리 더디 가던지, 이제 젊은 날의 꿈도, 모두 망각에 던지고 살고 있는 지금 이 나이에, 그때를 회상해 보니, 아! 맨 땅에 헤딩하던 그때가, 정작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시편에서 다웟은 어려웠던 시절을 이렇게 노래한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내몸이 당신을 더 기다리나이다." 아마 이 시절 청년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는 길 위의 인생이었겠지만, 그러나 그에겐 그 누구도 범접할수 없는, 하나님이 기름부어 주신 젊은 날의 꿈이 있었다. 그는 칠흙처럼 깜깜한 인생의 밤을 풍잔노숙을 하면서, 태양이 떠오르는 새 인생의 새벽을 얼마나 기다렸을까? 새벽이 가까와 지면, 밤은 더욱 깜깜해진다. 그러다가 어느 경점이 지나는 순간, 동녘 하늘로부터, 캄캄했던 어둠이, 아주 조금씩 흔들리다가, 희망의 여명(黎明)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한다. 날이 추우면 생리현상도 활발해 지는지, 소변은 자주 매럽고, 대변은 처리하기도 어려운데, 밤마다 꼭 이것을 해결해야 했다. 그때는 공중화장실 이용료가 5원이었다. 사설학원엔 화장실이 없어, 모두 공중화장실을 이용 할수밖에 없었다. 그때 전동차 요금이 2원 50전이었으니까, 내겐 공중화장실 이용료 5원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난 소변은 골목에 가서 해결하곤 했다. 대변에 대해서는 여기서 차마 말 못하겠다.
아무튼 그때의 새벽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도 그럴 것이 풍잔노숙을 겨우 면한 그때에, 돈 안들이고 떠오르는 숯불덩이 태양이 솟아 오르는 그 순간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날마다 떠 오르는 겨울 아침의 태양이지만, 그땐 내게 눈물이 나올 만큼 가슴벅찬 태양이었다. 당신은 가장 어려울 때, 오동지 새벽 동터오르는 태양을, 온 가슴으로 맞아 보았는가! 돌이켜 보면, 이 기쁨이 어찌 나 뿐이었겠는가! 온 밤을 꼬박 지새운 파수꾼들에게도, 그리고 야영장에서 밤새도록 캠핑 파이어를 지피는 야영객들에게도, 그리고 노숙자들에게도, 여명은 가장 반가운 손님일 꺼다. 그리하여 이윽고 구름바다가 보이고, 구름 사이로 그토록 기다리던 붉은 태양이 떠오를 때면, 아! 그 찬란하고 장엄한 일출 광경은, 매 아침마다 보는 태양이지만, 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인류의 구세사 전면에 등장하신 예수님이, 찬란한 광채를 지닌 태양이라면, 세례 요한은, 태양이 떠 오름을 예고하는 여명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가 선구자로서 위대한 이유는, 평생토록 자신은 태양이 아니라, 새벽을 여는 여명임을 항상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자신은 결코 주인이 아니라 종이라는 신원의식이 분명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땅에 아기 예수로 오실 당시, 그때의 로마 황제는 '옥타비아누스'였는데, 그는 무소불위의 권좌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군림했었다. 이처럼 고금을 막론하고 타락한 인생들은, 코딱지만한 권력만 쥐어줘도 안하무인 군림하려 든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자신이 빛나야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뒤에 오실 그 분이 빛나야 된다는 겸손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현대인 의 참 모습이면 얼마나 좋을까? 별 것도 아닌 자리 하나 차지하면, 갑질하려 드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완장 하나 차면, 세상이 다 자기 것인 양 설쳐댄다. 안하무인도 그런 안하무인이 없다.
영국 근대 경험론의 선구자 프랜시스 베이컨(Bacon Francis.1561-1626.)은, "한 나라의 높은 지위에 있는 자는, 삼중(三重)의 하인이라고 했다. 첫째는, 국민과 나라의 종이요, 둘째는, 명성의 종이요, 셋째는, 근면의 종이다."라 하였다. 호칭이야 어찌됐든 호민관으로 당선 되어, 주어진 시간이라야 고작 4~5년! 이 짧은 시한부 위에 있으면서, 제왕처럼 군림하는게 나를 실소케 한다. 주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과 찬미를, 한낱 피조물인 인간이 다 받으려고 주접을 떠니, 세상에 그런 꼴불견도 없다. 이런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탄생, 그리고 그의 삶과 죽음은, 참으로 큰 울림으로 우리에게 다가 온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지만, 그는 항상 자신을 극도로 낮추며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오실 그이가 아니다. 그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오늘을 살고 있는 내게, 혹은 내 가정에, 더 나아가 나라 공동체에,가장 필요한 덕을 하나 꼽으라면, 두말할 필요없이 바로 자기비하인 ‘겸손'이다. 세례요한은 끝끝내 사람들의 갈채와 환호를 뒤로 하고, 역사의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졌지만, 그가 그토록 온 몸과 맘을 다해 기다렸던 구세주가 이땅에 오셔서, 무릅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공동체인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이, 국민들 앞에 이처럼 섬김의 자세로 임한다면, 그는 '이웃을 섬기는 종의 도'를 아는 자다. 공동체 지도자들의 마음이 가난하다면, 그것은 이 나라의 미래를 여는 여명(黎明)의 표지다. 꾸준한 겸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가난처럼 좋은 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죄인들인 인생들 앞에 더럽혀진 발을 씻어 주시고자, 무릅을 꿇으신 예수님의 모습은, 새벽 여명을 열고 떠오르는 태양처럼 너무나 감동적이다. 잘못한 인생들에게 벌을 주는 강력한 심판자로서의 주님이 아니라, 제자들의 발 앞에 엎드려, 조용히 죄로 더럽혀진 발을 씻어 주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얼마나 큰 위안과 희망을 갖게 되는가! 오늘도 예수님은 겸손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신다.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겉옷을 과감하게 벗어 던지고, 죄의 때로 더렵혀진 자신의 가면을 벗어버리라고 우리를 애타게 찾고 계신다. 칠흙처럼 어둡고 차거운 이 계절! 여명이여 어서 오라! 붉은 태양아! 온누리 환하게 솟아라!
종그니가
【종그니칼럼】누가 행복자인가!
옛부터 우리 국민은 하늘 혹은 절대자를 향한 신심(信心)이 매우 깊었다. 하늘과 땅을 향하여 제를 올리던 민족신앙위에 자리잡은 대승불교는, 삼국시대로 부터 민중들의 생활속에 스며들어, 대승적 호국 불교로 자리매김 되어 왔다. 그런데 오늘의 불교는, 소위 무당신앙인 기복신앙으로 토착화 되면서, 불교 고유의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다. 사찰에 가 보면 칠성당이 있고, 약제사가 있고, 산신령이라는 범이 있다.
서양 선교사들에의해 들어온 한국 신 구 기독교계는, 같은 '창조주'를 두고도 한쪽에선 '하느님', 다른 한쪽에선 '하나님'으로 호칭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도그마적 아집인가? 처음부터 하나됨이 싫어서 인가? 변명할 여지없이 가장 먼저 선결되어야 할, 지존자의 이름조차도 조율을 이루지 못하는, 불일치의 수치를 대외에 드러내고 있다. 물론 옛부터 우리민족은 인간의 생사화복의 주관자가 바로 '하늘님' 혹은 '한얼님'이라고 불렀기에, 카토릭에서는 '하느님'이라 부른다 하고, 개신교에서는 우주만물을 조성하신이는 오로지 만군의 여호와 한분이시니 '하나'라는 서수에다 '님'자를 붙여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다. 물론 명사가 아닌 '서수'에 님자를 붙이는 것은 문법상 어패가 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란 호칭이 그 뜻을 고스란히 함유한채 자리매김 되어 가고 있을지라도, 이제라도 개신교나 카도릭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창조주에 대한 은혜로운 호칭을 풀어낼수는 없을까?
천국도 행복도 멀리 하늘 나라에만 있는게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안에 있어야 한다. 마음의 천국을 누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늘나라를 얘기할수 있겠는가! 흔히 우리는 내가 믿는 신앙이 아니면 지극히 배타적이어서, 한발자욱도 이해의 폭을 넓히려 하지 않는다.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하는 신앙의 도그마(독단)다. 여기에 꼭 맞는 말은 아니지만, 옛말에 '지피지기 백전불태' (知彼知己 百戰不殆)란 말처럼,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전혀 위태롭지 않다."는 孫子의 말이다.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 지를 알면, 대화에 의한 소통은 언제나 열려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술은 물론 담배를 아예 물고 사는 꼴초 청년이, 어느 날 주초(酒草)를 끊었다는 소식에, 친구들은 이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확인한 결과 이 친구가 담배와 술을 완전히 끊은 것을 알수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물었다. "아니 어떻게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술과 담배를 끊었느냐?"고,그 친구 대답은 너무도 간단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술과 담배(酒草)를 싫어해서 끊었다"고. 신앙이나 학문이나 사귐도 이와 다를바 없다. 일생을 함께 할 인생의 동반자가 아니고는 그 누가 건강을 염려하겠는가? 분명 몸에 해로운 담배를 피움으로, 왜 신선한 산소 통로인 몸안의 이목구비 (耳目口鼻)를, 흡연의 통로인 굴뚝으로 만드는가?
이런 episode가 있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아프리카에 선교사를 보내려고 헌금을 하는 중이었다. 이 교회에서는 헌금 접시를 돌리기 때문에, 옆 사람이 얼마를 헌금하는지 를 다 볼 수가 있었다. 헌금접시가 어느 시각장애인 앞에 놓였다. 그는 헌금을 많이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인 것을 교인 모두가 다 안다. 그런데, 270불을 접시에 세어서 놓는 것이었다. 이를지켜 본 옆 사람이 물었다. "아니, 당신 형편을 우리가 다 아는데 어떻게 그 많은 돈을 헌금합니까?" 시각장애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눈이 안 보이잖아요. 그래서 제 친구에게 물어보니, 저녁이면 방 하나에 불을 켜는 비용이, 일 년에 270불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방에 불을켜야 할 필요가 없으니, 일년이면 이 만큼의 돈을 쓰지 않아도 되는 복을 받았구나 생각하고, 그걸 모은거죠. 그래서 예수님을아직도 알지 못하고, 영적인 어두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이 비치도록 하고 싶어서요." 바로 이것이 내어 줌으로 얻는 역설의 복음이다.
'복음의 빛'은, '어둠을 밝히는 빛'처럼 직접 체험해 보지 않으면, 전혀 깨달을수 없다. 문명의 조명인 전기 불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면, 아직도 전기 없이 사는 많은 사람들보다 감사가 넘쳐야 할것이지만 행복지수가 국민소득에 있는 것이 아니듯이, 감사도 행복도 경제 수치에서 오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런 감사와 해복은, 바로 깨달음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 먼저 천지만물과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라!
지금 우리는 신 구 정권의 교체국면에 있다. 신 정권은 의기양양하고, 구정권은 적막에 싸여 있다. "현 정권은 지난 5년동안 국민의 기대에 부끄럽지 않은, 국리민복을 위해 일했다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가?"묻고 싶다. 난 칠십여 성상을 살면서, 그 어느 정권도 이런 자부심을 느낄만한 정권을 아직 보지 못했다. 국가권력을 일시 손아귀에 넣었다고 주잡떨지 마시라! 자칫 그것이 너를 집어 삼키리니 말이다.
내 집에 상수도 건 지하수 건 마실수 있는 물이 흐르고 있다면, 마실 물이 없는 수많은 사람보다 감사할 줄 알아야 인간이다. 하루에 한 끼라도 따끈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그 한 끼의 음식이 없어 영양실조에 걸린, 수억의 사람보다 감사해야 한다. 내가 몸담고 있는 요양원은, 매 끼니마다 어르신들이 드시고 남은 음식물을, 날마다 돈을 들여 수거케 한다. 아프리카 빈민들은, 우리돈으로 천원이면, 온 가족이 배불리 먹을수 있는 하루 양식도 구하지 못해, 굶주린 이들이 있음을 알자! 먹을 음식이 있고, 입을 옷이 있고, 잠을 잘 보금 자리가 있다면, 정녕 당신은, 엄청 축복받은 행복한 사람임을 알자!
종그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