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열 교수】정필도 목사 회고
이만열 교수(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며칠 전에 수영로교회 원로목사이신 정필도 목사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먼저 목사님의 귀천(歸天) 길에 우리 주님께서 안내자가 되어주셨을 줄 믿고 감사한다. 정 목사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아주 오래 전 길지 않은 기간, 학생신앙운동(Student For Christ; SFC)을 같이하면서 교제한 것을 떠올려 본다.
학생신앙운동은 1950년대 초 고신(高神) 교단에서 일어난 학생 중심의 신앙운동 단체다. 6.25 전쟁이 일어나 폐허가 된 이 땅에 젊은 학생들의 영적 각성을 통해 교회와 사회, 민족과 역사를 변혁시키자는 운동이었다. 당시 교회 안의 학생․청소년들의 모임이 보통 ‘학생회’, ‘청년회’, ‘면려회’ 등의 ‘․․․․․회’라는 이름을 가진 데 비해, SFC는 ‘운동’이란 이름을 가졌다. 살아 움직인다는 뜻이요, 모임 자체가 정체된 것이 아니라 항상 꿈틀거린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안다.
SFC의 신학적 기초는 개혁신앙에 있었다. 16세기 종교개혁 특히 칼빈의 사상과 신앙을 이어받는다고 했다. 이는 고신파가 갖고 있는 장로교단의 신앙적 전통과도 연결되었다. 당시 일제말기 신사참배의 상처 때문에 고신파에서는 특히 신앙의 순수성이 강조되고 있었다. 이런 신학 신앙적 바탕 위에서 부산과 경남이 중심이 되어 고신교단이 형성되었고, 6.25 이후의 신앙적 각성운동이 학생들을 중심으로 나타난 것이 SFC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신학적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 SFC강령이다.
SFC가 집회를 할 때마다 거의 맨 먼저 제창하는 것이 SFC강령이다. 지금 되돌아봐도 대견스러운 SFC강령은 이렇다. <1. 우리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을 우리의 신조로 한다. 2.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의 생활을 확립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됨을 우리의 목적으로 한다. 3. 우리의 사명은 다음과 같다. 1) 개혁주의 신앙의 대한교회 건설과 국가와 학원의 복음화. 2)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 4. 우리의 생활원리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 중심 2) 성경중심 3) 교회 중심> 그들은 이런 강령에 바탕하여 무엇보다 영적 각성을 전제로 회개운동을 전개하고 공부하고 전도하면서 사회 속에 스며들려고 노력했다.
필자가 정필도 목사를 만나게 된 것은 바로 학생신앙운동을 통해서다. 1960년 12월에 예장의 승동측과 고신이 합동하게 되었다. 교단이 하나로 되자 그 산하의 학생단체도 일원화하게 되었다. 승동측에서는 당시 ‘학생면려회’(?)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합동 후에 고신측에서 산하단체로 배양하던 SFC로 통일하기로 했다. 승동측과 고신의 합동 기간(1960.12-1963.7)은 3년이 채 안되었지만 이 기간에 필자는 학생신앙운동을 통해 승동측 교회들을 접촉하고 또 SFC를 확산하는 과정에서 정필도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정 목사님과 필자가 처음 만났을 때가 1961년 초로 기억한다. 정 목사님은 당시 경기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가슴에 달고 있는 이름표를 통해 당시 그의 이름이 정융남(鄭隆男)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 언제 개명했는지 알지 못한다. 1990년대 전후하여 그가 홍정길 목사가 시무하는 신반포의 남서울교회에 와서 집회를 하셨는데 우리 집이 그 근처에 있어서 그 집회에 참석하게 되면서 정필도 목사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것을 알게 되었다. 고3 때의 정필도 목사는 창신교회에 출석했고 권연호 목사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고3 때 이미 목회의 길을 걷겠다고 알려져 있었다.
정 목사님을 알게 된 것은 필자가 군생활을 마치고 대학 3학년으로 복교하여 합동된 경기노회 산하의 경기지방SFC가 조직되자 그 위원장을 맡게 되면서다. 그 때 경기지방SFC 산하의 중고등부 SFC 위원장을 정융남이 맡게 되었다. 당시 승동측에서 SFC간부로 활동한 대학생들은 승동교회의 이태영 이병섭과 혜성교회의 박은실 등이 있었다. 1961년 여름에는 SFC가 매년 개최하는 전국대회를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게 되었다. 경기지방SFC에서는 그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승동측 교회에서는 SFC에 대한 이해가 적어 전국 대회를 앞두고 그 준비의 일환으로 각 교회에 SFC를 조직하도록 독려해야만 했다. 그래서 합동된 경기노회의 협조를 얻어 주로 과거 승동측 교회를 다니며 SFC운동을 소개하고 전국대회를 위한 협조를 구했다. 우리는 서울시내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학생헌신예배를 인도했는데 우리가 강사를 모시고 가서 설교를 맡고 광고시간을 이용하여 SFC를 소개했다. 그 때 방문했던 교회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교회는 창신교회(권연호 목사), 청암교회(이환수 목사), 성도교회(김희보 목사), 혜성교회(박찬목 목사), 장충교회 등이다. 그런 서울시내 순회예배 때도 정융남은 중고등부 위원장 자격으로 가끔 대학 SFC간부들과 함께 했다.
그 때 정융남에 대한 인상은 말이 적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회의에서 만나도 별로 말이 없었다. 고3의 공부 때문인지 얼굴에는 가끔 피곤한 기색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기도를 시키면 어디서 그런 힘과 열정이 생겨났는지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어떤 때는 당시 부흥강사들이 기도할 때 허스키한 목소리를 내듯이 마치 영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신실하게 기도했다. 그 때 우리는 정융남의 영적 비범함을 알게 되었고 앞으로 목회자가 되기 위해 기도로 준비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 이듬해 그와 나는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서울대 문리대 종교학과에 진학했고, 필자는 당시 사학과에서 졸업학년을 지내고 있었다.
십수년 전에 필자가 부산에 집회가 있어서 정 목사께 연락하고 수영로 교회를 방문했다. 둘 다 붙임성이 있는 성품이 아닌지라, 아주 성근 대화를 이어나갔다. 덤덤했지만 그래도 SFC 운동을 하던 시절과 대학시절을 회고하면서 우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영로 교회 근처의 어느 아담한 음식점으로 인도하는 등 귀한 시간을 나를 위해 할애해 주었다. 그 때 내가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 뒤 지금까지 계속 연구소를 도와주고 있다. 젊을 때 맺은 신실한 우정의 증표라고 생각한다. 정필도 목사는 오랜 기간 사귀지는 못했지만 젊은 시절 교제를 회상하면 내게는 기도의 영성과 신실함을 보여주신 분이고, 범접할 수 없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남긴 분이다.